순서의 문제 진구 시리즈 1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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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운전기사를 하던 진구는 어느 날 손님으로부터 휴대폰을 줄 테니

원주에 가서 자신한테 전화를 해주면 50만 원을 주겠다는 이상한 제안을 받는다.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라 진구는 일단 제안에 응하지만

왠지 모를 찝찝한 마음에 손님을 뒷조사하기 시작하는데..

 

영미권이나 일본, 북유럽의 추리소설들을 즐겨 읽으면서 늘 느끼는 아쉬움은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한국 문학계에서 미스터리 작품은 완전히 찬밥신세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다 보니 늘 낯선 외국의 작품들만 읽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는데

현직 판사이면서 추리소설을 내놓은 도진기 작가의 등장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라 할 수 있었다.

이번에 이 책으로 그의 작품을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이 책만으로도 충분히 그가 한국 미스터리계를 짊어재목임을 알 수 있었다.

 

총 7편의 중단편이 실린 이 책에선 대학을 중퇴하고 빈둥거리지만

날카로운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청년 진구와 그의 여자친구 해미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셜록 홈즈 이후 추리소설의 기본 형식인 명탐정과 조력자 구조라 할 수 있는데 이 책에선 주로

해미가 자기 주변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물어오면 진구가 마지못해 해결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먼저 '순서의 문제'에선 교묘한 알리바이 트릭이 구사되는데 이 트릭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도

들었지만 상속문제와 얽히면서 역시 법조인다운 트릭을 선보인 것 같다.

'대모산은 너무 멀다'에선 진구의 여친 해미가 지하철에서 본 남자의 정체를

알아맞추는 얘기가 펼쳐지는데 드러난 정체는 정말 충격적이라 할 수 있었다.

'막간 마추피추의 꿈'은 앞 사건에서 받은 상금으로 해미와 페루 여행을 떠나기로 했던 진구가

비행기를 놓쳤음에도 해미보다 먼저 페루에 도착한 비법(?)을 공개하는데

우리의 경직된 사고를 통쾌하게 박살내주었다.

 

'티켓다방의 죽음'에선 해미의 먼 친척 아저씨의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으로 인해

보험금을 받지 못할 위기에 처한 외숙모를 도와주기 위한 진구의 집요한 노력이 펼쳐지는데

사건의 진실은 몇 번이나 엎치락뒤치락 하지만 무엇보다 돈을 받게 되자 안면몰수하는

씁쓸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그나마 산전수전 다 겪은 진구가 이런 꼴을 당할 걸

미리 예상하고 조치를 취해놓았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신 노란 방의 비밀'은 제목만 보면 가스통 르루의 명작을 떠오르게 했는데

시를 배울 때 나왔던 공감각의 새로운 사용법을 알게 되었다.

'뮤즈의 계시'에서도 알리바이 트릭과 작가의 전문인 법정 장면까지 등장해 더욱 흥미진진한

얘기가 펼쳐지는데 예상 못한 변호인측 증인의 대활약이 펼쳐졌다.

마지막 작품인 '환기통'에선 환기통에서의 불가능 범죄를 다루고 있는데

알고 보면 정말 허무한 트릭이라 할 수 있었다.

 

대학중퇴생이면서 각종 사건사고를 해결해 받은 포상금으로 유유자적 살아가는 진구와

그의 생활태도는 맘에 안 들지만 번득이는 추리력에 그를 떠나지 못하는 해미 커플이 등장하는

도진기 작가의 한국형 추리소설은 그동안 내가 읽었던 외국의 추리소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다.

물론 사용된 트릭이나 사건의 전개 등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등장인물이나 장소 등 모든 것이 익숙한 국산이어서 훨씬 더 편안하고 와닿았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다'는 신토불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 것 같다.

현직 판사인 도진기 작가는 내가 꿈꾸던 그런 능력을 보여줘 너무 부러웠다.

나도 미스터리 작가가 되고 싶은 희망은 있지만 그럴 만한 재능이 없기에 그냥 포기하고 사는데

주중에는 법원 업무를, 주말에는 미스터리를 쓴다는 도진기 작가의 능력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미스터리팬으로선 도진기 작가가 판사를 그만두고 작가에 전업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그건 너무 무리한 부탁일 것 같고 지금처럼 꾸준히 활동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의 또 다른 분신 변호사 고진이 활약하는 '어둠의 변호사' 등도 빨리 만나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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