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T - 내가 사랑한 티셔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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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해도 이렇게 다양할 수가 있을까. LP 레코드를 모으는 걸 보고 놀란 게 얼마 전인데, 이제는 티셔츠라니. 하긴, 편한 차림으로 달리는 그를 생각하면 그와 티셔츠는 너무 잘 어울리는 조합이긴 하다. 하지만 티셔츠 수집은 또 다른 얘기라 의외의 느낌도 있다. 구석구석 파고들면, 그는 LP 레코드나 티셔츠만 모으는 건 아닐 거다. 문득 드는 생각이, 그의 집은 참 넓고도 넓어야 하지 않을까?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그가 수집하는 게 한둘이 아닐 것 같고, 그는 물건뿐만 아니라 세월 속 많은 것을 그의 가슴과 공간에 담아두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러니 지금 듣고 있는 티셔츠 이야기가 새삼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앞으로 어떤 수집에 관한 이야기가 다시 들려올까 궁금할 정도가 되었으니. ^^


티셔츠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모인 것이다. 값싸고 재미있는 티셔츠가 눈에 띄면 이내 사게 된다. 여기저기에서 홍보용 티셔츠도 받고, 마라톤 대회에 나가면 완주 기념 티셔츠를 준다. 여행 가면 갈아입을 옷으로 그 지역 티셔츠를 사고……. 이러다 보니 어느새 잔뜩 늘어나서 서랍에 못다 넣고 상자에 담아서 쌓아 놓는다. 절대로 어느 날 좋아, 이제부터 티셔츠 수집을 하자하고 작심한 뒤 모은 게 아니다. (6페이지)


무언가에 꽂히는 것. 처음부터 작정하고 모으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자연스럽게 모인 것이 수집되었을 거라는 데 동의한다.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그렇게 모인 것이 그의 공간을 채웠을 것이고, 그가 관심 두는 대상이 되었겠지. 그에게 티셔츠도 그러하다. 하나둘 눈에 들어오는 것을 집어 들었을 테고, 어딘가에 참석하면서 기념품으로 받았겠지. 여행하다가 기념하려고 챙겨 넣고, 작품 홍보용으로 받은 것도 많단다. 그렇게 모인 티셔츠는 처음에는 그의 옷장에 자리 잡았을 것이고, 그러다가 점점 부피를 키워가면서 보관해야 할 상자 안으로 이사하는 신세가 되었겠지. 어쩜 그렇게 비슷한지 모르겠다. 잘 버려야 정리를 잘하는 거라고 어떤 전문가는 말했는데, 사실 그게 잘 안 된다. 이런 이유로 저런 이유로 버릴 수 없는 게 우리 옆에 참 많으니까. 처음부터 작정하진 않았지만, 그가 모은 티셔츠는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져 연재되었다. 그의 세월에 한 장면을 차지하고 추억의 힘을 발휘한다.




그가 소개하는 티셔츠는 그가 소장하고 있는 티셔츠의 극히 일부분인데도, 이 정도의 양도 어마어마하다. 티셔츠마다 주제와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 희한하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기도 한다. 그냥 생각날 때마다 사기도 하고 받은 것도 많을 테지만, 그는 티셔츠에 주제를 부여해서 구분했다. 맥주, 동물, 히어로, , 서핑, 위스키, 레코드 등 티셔츠의 그림이나 티셔츠를 갖게 된 배경에 관해 말한다. 저렴한 가격에 샀던 티셔츠를 환호하다가 요즘에는 그 저렴함의 의미를 잃어버린 판매에 아쉬워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 표지가 그대로 느껴지는 <노르웨이의 숲> 티셔츠는 딱 봐도 그의 책인지 알 정도로 선명했다. 위스키를 좋아하는 그가 아침부터 위스키가 보이는 티셔츠를 입고 돌아다닐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게 우습기도 하다. 알코올 의존증 아저씨로 보일까 봐 걱정하는 그의 마음과는 다르게 그는 위스키를 좋아하잖아? 아마 저녁에는 입고 다니지 않을까? ^^


대학교 이름이 적힌 티셔츠는 가지고 있는 게 많으면서도 거의 입지 못한다고 한다. 그 학교 관련자가 아니니까 입기가 좀 어려울 것 같다. 어떤 티셔츠를 사고 그 티셔츠에 적힌 이름으로 소설을 쓰기도 하는 그였다. 그러니 티셔츠는 그에게 단순히 수집 대상이 아니라, 창작인으로 사는 그의 작품과 연결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거로 보인다. 작은 시선 하나에서 소설의 등장인물이 나오고, 티셔츠 하나가 작품의 한 장면이 되기도 할 것 같다. 그가 말하는 계속하는 힘이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다양한 경험이 작품 세계를 더 폭넓고 깊게 하는 것처럼, 그에게도 티셔츠는 단순히 옷 이상의 의미가 있다. 더군다나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자주 달리는 그에게 티셔츠는 너무 친근한 대상이고, 익숙하다. 이상하게 그의 소개 사진이나 다른 매체에서 보이는 모습이 편한 차림이어서 그런지, 그가 다른 차림으로 나타난다면 영 적응이 안 될 것 같다.



자기 책 홍보용으로 받은 티셔츠도 많지만, 입고 다닐 수 없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을 상상한다. ‘내 작품이 이렇게 티셔츠로 태어나다니 정말 뿌듯하군. 하지만 이걸 입고 다닌다면 자기 책 홍보하는 작가로 비칠까? 이것 참 쑥스럽군. 정말 입고 싶기는 한데.’ 뭐 이런 생각 하면서 아쉬워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 도로에서 다니는 홍보용 큰 차량을 보는 느낌적인 느낌? 그런데 말이다. 그는 대학교 티셔츠나 자기 작품 티셔츠나 뭐 여러 가지 이유로 선뜻 입고 다니기 어렵다고 말하는 티셔츠가 참 많더라만. 나한테 몇 개 주면 안 되나? 그의 말처럼 티셔츠가 이렇게 많으니 여름이 와도 뭘 입어야 할지 걱정할 게 없다는데, 밖에서 입기 좀 그러면 집에서라도 열심히 입으면 되지 않을까? 우리 엄마가 맨날 그랬는데, 아끼면 똥 된다고. 어느 날 세월이 더 흘러서 옷의 연식이 더 쌓이면, 그때는 입고 싶어도 옷감이 상해서 입을 수 없는 지경이 오면 후회할 것 같다. ‘티셔츠만 넣은 상자가 넘칠 지경이 되었다면서요. 그러니까 저한테 티셔츠 몇 장만 넘겨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열정적으로, 매일매일, 아주 많이 아끼고 사랑하면서 입어볼게요!’


얼마 전에 읽은 그의 에세이를 떠올려도 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이제 하루키를 향한 내 취향을 좀 알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그의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맞는 듯하다. 읽다 보면 한 사람의 일상과 지나온 시간을 보는 것 같아서 집중하게 되고, 또 혼자 웃으면서 읽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그는 어쩌다가 이런 이야기까지 쓰게 된 걸까 궁금하면서도, 다 읽고 나면 쓸 수밖에 없었겠구나 싶기도 하다. 어디서든 이야기가 될 준비를 하는 듯한 그의 인생 틈새가 더 기대되는 건 당연하다. 책의 뒷부분에 실린 그의 티셔츠 인터뷰와 백여 장의 티셔츠 사진까지 보면 그가 대단한 티셔츠 수집가였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비록 어쩌다 보니 모인 티셔츠였지만 말이다. ^^ 그의 티셔츠 사랑과 그가 관심 두는 것이 무엇인지 덩달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전히 그는 재즈, 야구, 위스키, 여행, 달리기를 사랑한다. 그의 사랑은 티셔츠에까지 연결되어, 이제는 그의 삶의 많은 것이 담긴 티셔츠로 남았다. 어떤 주제도, 의미도, 디자인도, 색깔도 제약하지 않는다. 그의 시선과 손이 닿는 대로 가까워진 티셔츠는 평범하고 단순하면서도 개성 있고 독특하다. 마치 그의 일상처럼.



나는 옷이 많은 편도 아니지만, 한 번씩 정리하면서 거의 버리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하루키의 티셔츠 사랑과는 거리가 먼 일상이다. 하지만 즐겨 입는 옷이 티셔츠이고 편한 차림을 선호하다 보니 저절로 티셔츠에 손이 가는 것도 당연하다. ‘자연스럽게 모였다라는 그의 티셔츠 수집이 어느 날 나에게도 찾아올지 모르겠다. 그때가 되면 나도 하루키처럼 티셔츠 한 장 한 장 사진으로 찍어두고 사진으로나마 남겨둘까? 옷으로 남겨두기에는 내 공간이 너무 협소하므로, 보관해두고 관리하기에는 내가 너무 게으르니까. 하지만 내 추억 속 한 자락이 티셔츠로 차지해도 될 것 같아서, 실물이 아닌 사진으로 기록해두어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그 사진 꺼내 보면서 웃고 싶다. (, 나이 먹으니까 이래. 소소한 것 하나에도 자꾸 의미를 두게 되고, 혼자 배시시 웃는 일 만들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이 자꾸 생긴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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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6-04 20: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옹 에세이만큼
구단님의 이 리뷰 참 좋았는데
제예감 적중함요 ㅎㅎ
이달의 당선작 추카~*추카~*

구단씨 2021-06-08 22:4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하루키 책을 더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어요.
아무래도 저는 소설보다는 그의 에세이로 만족해야 할까 싶기도 하고요. ^^

초딩 2021-06-05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루끼옹이네요 ^^ ㅎㅎㅎ 점점 굉장히는 아니지만 창의적으로 책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ㅎㅎㅎ
그리고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구단씨 2021-06-08 22:48   좋아요 0 | URL
다양하지 않나요? ㅎㅎㅎ
저는 이 책 보고, 그가 또 어떤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놓을지 궁금해지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