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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에서 1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해냄 / 2020년 11월
평점 :
기시 유스케 작가의 <신세계에서>는 일본 SF소설이에요.
사람을 만날 때는 첫인상이 오래가는 법인데, 소설은 매번 처음을 잊게 되는 것 같아요.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네요. 소설은 시시각각 새로운 이야기로 우리를 끌고 가니까.
특히 SF소설은 작가가 구현해낸 놀라운 세계를 만나야 하니까요.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세계 속으로 모험을 떠나는 기분이에요. 설레는 동시에 두려운 모험.
<신세계에서>의 주인공 와타나베 사키는 210년 12월 10일, 가미스 66초에서 태어났어요.
이 소설은 주인공 사키가 열두 살이었던 그날 밤 이후의 이야기를 23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수기 형태로 작성한 내용이에요.
유독 그때 그날 밤의 일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유가 있어요.
그건 내가 그때까지 믿었던 것이 근본부터 전부 뒤집어버렸기 때문이에요. 그날의 기억은 아픔, 아니 끔찍한 비극이기 때문이에요.
사키는 자신의 기억과 함께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어요.
인간은 아무리 많은 눈물과 함께 삼킨 교훈이라도 목구멍을 통과한 순간 잊어버리는 생물이라는 사실이에요.
사람들의 기억이 비바람에 씻겨 사라진다면 어리석은 인간은 다시 똑같은 전철을 밟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사키는 자신의 기억을 파헤쳐, 되도록 세밀하고 충실하게 묘사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이 수기는 1,000년 후의 동포에게 보내는 기나긴 편지가 될 테니까. 부디 미래에는 진정한 의미의 변화를 이루었기를 바라면서.
사키가 살고 있는 가미스 66초는 사방 약 50킬로미터에 점재하는 일곱 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어요. 외부 세계와 66초를 가로막는 팔정표식이라는 것이 있어요. 외관상으로는 종이를 잔뜩 매단 금줄 형태인데, 밖에서 나쁜 것들이 초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단단히 막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어른들은 아이들만 보면 팔정표식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하곤 했어요. 바깥 세계에는 악령이나 요괴가 어슬렁거리고 있어서 혼자 밖으로 나간 아이는 무서운 꼴을 당한다고 했어요. 아주 어릴 때부터 악귀나 업마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듣고 또 들었어요.
"어쨌든 팔정표식 밖으로 나가면 안 돼. 팔정표식 안에는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어서 안전하지만, 한 발짝 밖으로 나가면 어느 누구의 주력도 널 지켜주지 못하니까." (19p)
여기서 주력이란 아주아주 특별한 초능력을 의미해요.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일정 시기에 주력이 생기면 상급 학교라고 할 수 있는 전인학급으로 진학할 수 있어요. 그러나 언제 어떠한 주력이 생길지는 아무도 몰라요. 주인공 사키는 또래 친구들 중에서 가장 늦게 발현되는 바람에 꼴찌로 전인학급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진학하기 전에 집을 떠나 쇼조지라는 절에서 무신 대사를 만났어요. 가미스 66초에서 최강의 주력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가부라기 시세이 씨라면, 무신대사는 최고의 인격자로 모두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에요. 무신 대사는 사키에게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낄 수 있냐고 물으면서 놀라운 시험을 했어요. 그 시험에 통과하자 사키만의 진언을 가르쳐 주었어요. 자신의 주력을 사용할 수 있는 주문 같은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 당부의 말을 해줬어요.
"... 잊지 마십시오, 지금 느낀 그 고통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떠올리십시오.
그리고 마음에 깊이 새기십시오. 그 고통이야말로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64p)
아하, 이거였어요. 다 읽고 나서야 무신 대사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았어요.
1권에서는 사키가 친구들과 하계 캠프를 갔다가 팔정표식 너머의 세계를 모험하는 내용이에요. 별별 희한하고 흉칙한 생명체들이 등장해서 정신을 쏙 빼놓네요. 그곳에서 만난 리진 스님은 아이들의 주력을 동결시키는 바람에 엄청난 위험에 빠지게 되고...
사키는 다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했어요. 아오누마 슌, 아키즈키 마리아, 아사히나 사토루, 아마노 레이코, 이토 마모루.
그런데 다시 돌아왔을 때는 한 명의 친구가 사라졌어요. 나머지 친구들의 머릿속에서, 아예 존재한 적 없는 것처럼.
과연 사키는 기억을 찾을 수 있을까요.
왜 「집으로 가는 길」일까,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가미스 66초 아이들은 매일 해가 지기 조금 전에 확성기를 통해 똑같은 멜로디를 들어요. 「집으로 가는 길」(Going Home)이라는 제목으로, 멜로디는 드보르자크라는 작곡가의 교향곡 일부라고 해요. 이 멜로디가 흘러나오면 들판에서 놀던 아이들은 일제히 집으로 가는 것이 규칙이에요.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계인 줄 알았던 그곳이 전혀 다른 곳이었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이 작품은 탄생하기까지 3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고 해요.
1986년 제12회 '하야카와 SF 콘테스트'에서 가작으로 입선한 단편 <얼어붙은 입>을 모태로, 대학생 때부터 구상해온 아이디어를 장편으로 개작하여 쓰게 되었대요.
2008년 일본SF 대상을 수상하고 2009년 서점대상 후보에 올랐어요.
"원고를 완성하고 나니 제목은 '신세계에서'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1,000년 후 미래에서 온 메시지라는 설정에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집으로 가는 길」을 포함한 다양한 선율이 어느새 작품 세계와 깊이 연결되어
이미지를 보강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일본 SF대상 당선 소감 중에서
그동안 절판된 상태였는데 10여 년 만에 다시 새롭게 개정판으로 출간되었어요.
책 표지는 고흐의 대표작 「삼나무가 있는 밀밭(A WHEATFIELD, WITH CYPRESSES)」이며, 저자의 친필 인쇄 사인과 함께 한국 독자를 위한 서문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요.
"『신세계에서』의 밑바닥에 있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업(業)'입니다.
태고 시대의 인류는 가냘프고 나약한 존재에 불과했지만, 다른 수많은 생물들이 '악(惡)'으로 여기는 특성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오늘날의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 그 '악'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대답은 이 책에 쓰여 있습니다."
- 한국어판 서문, 기시 유스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