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화씨 451 ㅣ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평점 :
스토리보다는 하나하나의 인물이 만들어내는 아우라가 더 강렬해서 등장인물 별로 정리해본다.
1. 클라리세
살구나무와 딸기 넝쿨의 숨소리를 내뿜는(20p), 이 세상의 움직임들을 한 발자국 앞서 눈치채는(27p) 클라리세를 꿈꾼다.
2. 비티
책에 나오는 세상은(오늘날 내가 살고 있는 세상도) 비티가 말하는 것처럼 세상의 근심은 묻어두고 쾌락과 자극을 제공하는 문화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다들 행복해지길 원하기 때문에(100-101p). 그럼 비티는 정말 행복한걸까? 저자의 인터뷰를 보면 원작을 각색해 만든 연극에서 비티의 과거가 나온다. 비티가 사랑해 마지않던 책들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상실을 전혀 설명해주지 못했다. 아니 그렇다고 비티는 느꼈다. 어쩌면 비티는 세상이 숨기는 세상의 근심을 피하고 싶었던, 잊어버리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몬태그에게 광적일 정도로 책에 대한 혐오를 분출하던 비티의 말을 찬찬히 살펴보면 오히려 책에 대한 그의 사랑이 너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그런 모순 속에서 비티는 평생 괴로워하다 결국 몬태그를 이용하여 자살을 한 것이다. 이러한 비티의 모습을 통해 (물론 밀드레드의 아무것도 모르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모습을 통해서도) 인생에서 행복은 무엇인지, 우리가 살아가며 흔히 말하는 행복에 대한 갈망이 과연 옳은 것인지, 행복이 또 하나의 강박이 되어버린 건 아닌지 고민하게 되었다.
3. 몬태그
클라리세와의 만남으로 세상에서 없어진 무언가(책으로 대표되는)를 찾아 떠돌아 다니는 주인공 방화수다. 클라리세의 뒤를 잇는 그 시대의 희망이라고 볼 수 있다. 정말 하는 행동이 멍청해 보였지만 지혜와 사고력이 없는 시대에 살아가는 인물로서 당연한 행동들이라고 수긍하게 되었다. 오히려 번뇌하고 실패하는 평범한 인물이 주인공이라는 점이 이 책을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 바로 너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4. 밀드레드
북벅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관계성]이라는 관점에서 이 책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밀드레드에게 가장 중요한 관계는 자극을 줄 수 있는 것 뿐이다. 남편도, 아이도(즉 가정도), 이웃도 그녀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네 면으로 자신을 감싸는 티비 드라마의 주인공들과(같이 티비를 시청하는 부인들은 티비를 즐겁게 보는데 동조만 해준다면 그 누구라도 괜찮을 것이다) 밤새 끼고 있는 골무모양 라디오만이 밀드레드가 선택한 -아니 어쩌면 사회로부터 주어진- 관계의 전부다. 능동적이고 상호보완적인 관계는 전무하고 오직 자극과 쾌락만 제공하는 것들과 수동적인 관계를 맺는다.
(공교롭게도 에어팟이 나온 이 시대에서) 우리도 점점 주변 사람들과 능동적인 관계를 맺는데 소홀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책 속의 세상은 능동적으로 관계를 맺어가는 것들을 어떤 불편과 힘듦을 준다는 점에서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 좋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요즘 고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많이들, 특히 나도,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고 힘들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우리는 ‘마이웨이’, ‘인생은 혼자’라고 외치며 관계를 끊는데 점점 쉬워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나 또한 그런 가치관이 나쁘지 않다고 살아온 사람으로서 밀드레드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또한 밀드레드의 사랑은 어쩌면 관계 속의 감정이 아닌 쾌락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또한 육체적 관계에 치중되어 있는 오늘날의 ‘사랑’의 이미지가 생각나게 했다. ‘너를 사랑해’라는, 사람이 목적어가 되는 것이 아닌 쾌락으로서의 사랑이 목적어가 되는 이 시대가 겹쳐보였다.
5. 파버, 그레인저
클라리세는 몬태그에게 영감과 동기가 되어주었다면, 파버와 그레인저는 몬태그가 행동하는데 옆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책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선배로서 몬태그를 각자의 방식으로 이끌어 준다.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책이란 무엇일까? 파버는 책들이 있는 그대로의 삶의 모습을, 숨구멍을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지는 삶의 이야기들을 전해 주기 때문에 오늘날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고 말한다. 책 자체가 아닌 책이 말하는 그 내용이 중요하며 책은 그저 그릇의 한 종류일 뿐이라고 말한다(136p). 그레인저와 그의 무리들은 자기 스스로를 책으로 만들었다. 이 둘이 말하는, 저자가 말하는 책이란 결국 지혜가 아닐까, 진실을 바라보는 눈이 아닐까, 철학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나 자신을, 타인을, 세상을 복잡하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는 능력. 당장 눈 앞의 것이 아닌 한 뼘 멀리 있는 것을 응시할 수 있는 능력. 몬태그의 세상은 모두가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획일화되고 경직된 사회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용납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타인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책이라는 걸 그들 스스로도 알아서 책을 멀리하는게 아닐까.
6. 불
‘불’에 대한 몬태그의 생각이 달라지는 부분도 인상깊었다. 모든 걸 태워 깨끗하게 만드는 만병통치약(189p), ‘타오르는 불’만 알았던 몬태그는 그레인저와 그 무리들의 일렁거리는, 냄새조차 다른 ‘따뜻한 불’을 자각하게 된다(224p). 불을 낼 줄만 알았던 몬태그가 손수 재를 덮어 불을 끄는 장면은(225p) 그가 이제는 클라리세를 만나기 전의 몬태그로 돌아갈 수 없음을 나타냄과 동시에 몬태그가 하나의 특별하고 타인과 구별되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걸 나타내는 것 같아 감동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