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솔로몬 왕 앞에 두 여인이 아기 한 명을 데리고 찾아와 서로 자기가 진짜 엄마라며 다투기 시작한다. 솔로몬은 아기의 양팔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두 여자를 한동안 지켜보다가 조용히 해결책을 내린다. 아기를 반으로 갈라 여인들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라. 그러자 한 여인이 울면서 저는 아기의 엄마가 아닙니다, 그냥 저 여인에게 아기를 주소서,라고 나선다. 그 모습을 본 솔로몬은 아기의 ‘진정한’ 안위를 걱정하는 그녀야말로 ‘진짜’ 엄마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결국 ‘진짜’ 엄마는 아기를 되찾는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솔로몬 왕의 명판결에 관한 이야기다.

어릴 때는 솔로몬 왕의 지혜에 감탄했다. 그래! 엄마라면 당연히 저런 모습을 보였을 거야. 정말 대단한 판결이로군!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문득 저 판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물론 아기를 먼저 포기했던 여인이 더 심약하거나, 혹은 정말로 아기를 더 사랑한 사람일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기를 더 사랑한 사람이 반드시 아기를 직접 낳은 엄마여야만 하는가? 솔로몬이 ‘진짜’ 엄마라고 판결했던 여인이 아기에게 더 좋은 엄마가 되었을 수는 있으나 그녀가 실제로 아기를 출산한 생물학적 엄마였는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직접 낳지 않았어도, 어쩌면 아기를 더 사랑했을 수도 있으니까.

예전에, 그러니까 임신이나 출산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던 시절에 나 역시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모성애라는 특별한 감정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위기 상황에 처하자 괴력을 발휘해서 차를 들어 올리고, 절벽에서 떨어지기 직전 아기를 안전한 곳으로 던지고, 총과 칼에 맞아가면서도 아기를 감싸 안아 보호하고, 기타 등등. 모성애를 다룬 위대한 신화를 보고 자란 나 역시, 엄마가 되면 그런 천부적인 감정이 자연스레 피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아보며 겪은 일들은 예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묘사되는 것처럼 임신 시절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에게 말을 거는 행복한 임산부는 없었다. 임신 자체가 싫고 불행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출산이 아주 임박하기 전까지는 그만큼 뱃속에 든 어떤 ‘것’이 나의 ‘아기’ 라거나, ‘생명’이라거나 이런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출산을 기다리는 것도 아기를 빨리 만나고 싶은 기대감보다는 신체적 불편함을 빨리 끝장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조리원에서 봤던 몇 가지 광경도 생각난다. 전부 똑같아 보이는 빨간 신생아들이 네모나고 투명한 플라스틱 침대에 눕힌 채 나란히 늘어서 있는 장면. 엄마들은 신생아실의 커다란 유리창에 달라붙어 각자 자신의 아기를 찾아보곤 했다. 정말 특징이 뚜렷한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엇비슷하게 생겨서, 엄마들조차 아기 발목에 붙은 이름표를 보지 않으면 누가 누군지 잘 알아보지 못했다. 남의 애는 물론이고 가끔씩은 자기 애 조차도. 젖을 먹이라는 연락을 받고 수유실에 앉은 엄마들은 아기의 작고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아주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눈길을 하곤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당시 그 무한한 애정의 증거가 오로지 발목에 달린 이름표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그 사랑과 애정은, 그냥 막연한 ‘믿음’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지녔다고 믿어지는 어떤 존재에 대한.

물론 나는 지금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고, 이런 특별한 감정은 다시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이런 감정들이나 특별한 끌림이 임신 단계부터 내재되어 있거나, 처음부터 특별하게 각인되어 있었다기보다는, 기르면서 조금씩 쌓였다고 믿는 쪽이다. 밤을 새워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열이 올라 보채는 아이를 안고 거실을 수십 바퀴 돌고, 목도 가누지 못하는 아기를 조심스레 안고 비누거품으로 씻기고, 30분에 한 번씩 일어나 아이의 체온을 재보고, 하루 종일 기저귀를 갈고 하는 그 매일매일이 누적되어서 만들어진 감정이라고.

한편으로는 ‘천륜’이라거나 혈육의 이끌림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가끔씩 생각해본다. 그러니까 해외에 입양을 갔는데 ‘진짜’ 엄마를 찾고 싶다고 고국을 찾는 2세들의 모습이라든가, 혹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아기를 기를 수 없었거나, 혹은 아예 의도적으로 아기를 포기했던 사람들이 아주 오랜 시간 뒤에 문득 성인이 된 아이를 보고 싶어 한다거나 하는 모습을 보면, 역시나 인간 또한 생물의 한 종류로서 번식의 욕구가 남아있고, 자신의 유전자를 지닌 존재에 대한 어떤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구나 싶은 생각도 하게 된다. 흔히 말하는 ‘모성애’와는 조금 다르겠지만.

실레스트 잉의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는 오래된 솔로몬의 판결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드는 소설이다. 아기를 버렸던 사람이 다시 아기를 되찾겠다고 나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가난한 중국인 노동자 베베는 남자친구를 따라 미국에 왔다가 그의 아이를 임신한다. 하지만 그는 임신한 그녀를 두고 중국으로 돌아가버리고, 혼자서 아이를 낳은 베베는 소방서 앞에 두 달 된 아기를 두고 온다. 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잣집 가정에 입양되었고, 온갖 보살핌을 받으며 편안하고 안락하게 자라는 듯했지만, 어느 날 베베가 다시 아기 앞에 나타난다. 그때는 아기를 기를 수 없었지만, 지금은 직장도 구했고, 먹고 살 수도 있으므로 아기를 돌볼 수 있다고. 그러므로 아기를 돌려달라고.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진다.

만약 소설을 읽지 않고 어떤 사람이 자신이 입양 보낸 아기를 되찾으려 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나는 아마도 몹시 혀를 찼을 것이다. 아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자기가 선택해놓고선 너무 이기적인 것 아냐? 그럼 10개월간 고생 고생한 그 부부는 어쩌라고. 태어나서부터 첫 돌까지의, 가장 귀엽지만 그 이상으로 힘겨운 시기를 이미 두 번이나 겪어보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부모가 느끼는 감정이 어떤지를 잘 알기 때문에, 아마도 저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사람에 어떠한 공감도 동조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게 상식이고, 규칙이고, 세상의 이치이므로. 그러나, 소설을 읽는 것의 묘미는, 상식으로 생각해왔던,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것의 이면을 알게되는 데 있지 않겠는가.

사실 이 베베는 메인 캐릭터도 아닐뿐더러, 베베의 재판이 중요한 분기점이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소설의 메인 플롯이라고 할 수는 없다. 주요 인물들은 별도로 존재하며 그 인물들에 얽힌 중요한 이야기들 또한 따로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추리소설의 트릭에 버금가는 책의 핵심 열쇠이므로 이 글에서는 따로 밝히지 않기로 하고. 다만 이야기하고 싶은 점은, 저 베베의 사건을 비롯하여,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소설이 대부분의 사람이 확고한 결론을 내릴 만한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계속해서 묻고 생각하게 만든다. “결국, 이 질문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어머니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생물학적 요인인가 아니면 사랑인가?”

‘좋은’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굉장히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읽는 이를 얼마나 생각하게 만들고, 고민하게 만드는가 역시 좋은 소설의 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굉장히 다층적인 방향으로, 계급, 성별, 인종, 유전자 등을 끊임없이 대비시키며 독자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처럼 묵직한 주제를 다루는 많은 소설들과 다른 점은, 이야기 자체가 몹시 재미있다는 것이다. 페이지가 매우 빠르게 넘어간다. 이처럼 재미와 작품성을 고루 갖춘 작품은 확실히 드물다.

생물학적 요인과 사랑의 대결 외에 인상 깊은 점은 ‘불씨’의 이미지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씨’라는 일관된 이미지를 끌고 나간다. 사람들은 흔히 “그 사람이 그럴 줄은 상상도 못 했어.” 혹은 “걔는 그럴 애가 아니야.”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실제로 사람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 불씨가 남아 있는 한 불은 언제든 활활 타오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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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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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이나 전쟁이 배경인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소설을 읽을 때면 자연스럽게 상상해보곤 했다. 나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할까. 위협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일수록 상상은 더욱 리얼해졌다. 대부분은 고개를 흔들며 아, 난 못해, 그냥 자살할 거야, 라는 것으로 끝났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살이 최선일 것 같았다. 일단 굶주림 등 육체적 고통을 견딜 수 있을지 자신도 없고, 강간, 살인, 약탈과 같은 인간성의 말살과 함께 따라오기 마련인 폭력을 나의 나약하기 짝이 없는 멘탈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다 상상의 끝은 항상 똑같이 흘러가곤 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죽어버리면, 자살하면, 아이들은 어떡하지? 7살과 3살, 아직 혼자 살 수 없는 아이들.

가끔 신문이나 뉴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가족 동반 자살이 근본적으로는 ‘부모에 의한 자녀 살해’라고 생각하고, 부모가 아이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앞으로 그 아이가 살아갈 모습이 뻔히 보이는데 그냥 두고 떠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전쟁이나 세기말 상황에서는 어떨까. 체계가 완전히 무너져버린 세상에 홀로 남겨진 아이는 너무나도 쉬운 먹잇감이 될 것이다. 강간, 살인, 착취. 그런 상황이라면 부모는 아주 쉽게 같이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옳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다. 다만 인간에게는 상상력이 있기 때문에. 그러나 만약 죽을 수 없다면, 제 손으로 아이를 죽일 수 없다면, 결국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살아남는 것뿐이다. 아무리 죽고 싶더라도 끝까지.

코맥 매카시의 <로드>는 세기말을 배경으로 한 남자가 아들을 데리고 유랑하는 내용이다. 세계는 멸망했고, 사방은 암흑뿐. 모든 것은 다 타버렸거나 사라져 버렸다. 날씨는 춥고, 먹을 것은 없고, 언제 누가 공격해 올지 모른다. 남자는 아이를 데리고 목적지가 없는 유랑을 계속한다. 목표는 오직 살아남는 것. 더 정확하게는 아이를 지켜내는 것이다. 남자는 계속된 위기 속에서 여러 번 죽고 싶은 상황을 맞이하지만 제 손으로 아이를 죽일 수는 없었고, 결국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자만 아이를 위해서 살아있는 것은 아니다. 제가 죽으면 어떡하실 거예요? 네가 죽으면 나도 죽고 싶어. 나하고 함께 있고 싶어서요? 응, 너하고 함께 있고 싶어서. 남자는 아이를 위해 살아있지만, 한편으로는 아이가 남자를 위해 살아있기도 하다.

아주 오래전에, 그러니까 결혼해서 직접 아이를 낳아보기 전에, 사람들은 대체 왜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일까 하는 고민을 해본 적이 있다. 물론 아이는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유전자를 보존해주는 역할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책임이 따르고, 돈도 들고, 귀찮고, 힘들고, 그런데 왜? 이것은 아이를 둘이나 낳은 뒤에도 마찬가지여서, 그냥 ‘낳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을 뿐 왜 그런지 답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번에 매카시의 <로드>를 읽고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람들은 사랑할 대상이 필요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세상은 너무 절망적이고, 희망은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선 어떤 식으로든 이유가 필요하고, 결국 그것은 사랑이라고. 물론 그 대상이 반드시 아이가 될 필요는 없다. 다만 사람에게는 무엇이 되었든 사랑할 대상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자주 죽고 싶어 지니까. 책임감이든, 집착이든, 행복이든, 미안함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조금 더 버틸 수 있으니까.

매카시는 70살 때 늦둥이인 10살짜리 아들이 자는 모습을 보며 이 작품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이미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음에도 강연이나 기고 요청 등을 거절하고 세상과 단절된 채로 평생을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는데, 거의 굶어 죽기 직전인 때마다 뜻하지 않은 도움의 손길로 간신히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작품 속에서 너무 자주 절망스럽고 죽고 싶지만, 아이 때문에 결국 죽을 수 없는, 혹은 아이로 인해 계속 살게 되는 그 마음이 읽혀서, 읽는 내내 마음이 무겁고 또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이 작품이 무조건 힘겹고 암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물론 작품 속 인물들은 엄청나게 고생을 하기는 하지만.

작품 속에서 아빠가 거의 절망한 상황에서도 소년은 인간에 대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존엄성을 잃지 않는다. 어려운 사람이 보이면 도와주고 싶어 하고, 남의 것을 빼앗을 때 미안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의 메시지를 인류에게 마지막 남은 희망과 극적인 상황 속의 선량함으로 받아들이는 해석도 많다. 실제로 남자는 아이에게 좋은 사람들이 어딘가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비록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를 몰라 숨어서 지켜보고 있지만, 어딘가에 반드시 있기는 있다고. 재미있는 사실은 그 말을 한 남자 자신은 스스로는 그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희망적으로 이야기한 것뿐이다. 그럼에도 아이는 그 이야기를 믿는다. 정말로 믿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믿으려고 한다.

나는 세상이 악으로 가득한 상황에서 악해지지 않으려고 있는 힘껏 버티는 인물들을 좋아한다. 왜 이런 이야기들에 유독 끌리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것은 결국 나 스스로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세상은 아주 나쁘고, 세상에는 선한 사람보다 악한 사람이 더 많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비관적인 세상이지만 어쨌든 악해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 용기를 얻게 된다. 더 악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그래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세상에는 아직 좋은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을,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있긴 있다는 것을 믿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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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 명작동화 속에 숨어 있는 반전의 세계사
박신영 지음 / 바틀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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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가 7살이 되면서 명작동화나 전래동화도 읽어주기 시작했는데, 지금 보면 어이없는 내용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엊그제 읽어준 방귀대장 며느리 이야기는 이랬다.

옛날 옛날 한 마을에 어떤 근면 성실하고 착한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유일한 흠이 방귀를 너무 격하게 뀌는 것이었다. 그랬던 처녀는 시집 못 가면 어쩌나 하는 부모님의 걱정에도 불구, 어찌어찌 연이 닿아 시집을 가게 되었고, 시부모를 잘 모시고 남편을 잘 보필하고 집안일을 열심히 하며 잘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며느리는 식구들이 모두 집을 비운 틈을 타서 시원하게 방귀를 뀌었는데 마침 외출에서 돌아오던 시부모와 남편이 그 광경을 보았다. 남편은 놀라서 그대로 줄행랑치고 시부모는 친정으로 돌아가라며 며느리를 소박 맞혔다. 그렇게 소박 맞고 훌쩍훌쩍 우는 며느리를 친정으로 데려다주던 시아버지는 어떤 높은 나무에 달린 열매를 보며 맛있겠다 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을 들은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위해 나무에 가서 방귀를 뀌어서 열매를 떨어뜨렸다. 열매를 맛있게 먹은 시아버지는 그 마음에 감동하여 며느리를 다시 집으로 데리고 돌아갔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내용이다. 방귀 좀 시끄럽게 뀐다고(물론 나무에 달린 열매를 방귀로 떨어뜨릴 정도면 무슨 손오공의 에네르기파 수준인 것 같긴 하지만) ‘소박’ 맞히는 것도 어이없지만 그랬다가 자기 먹고 싶은 거 갖다 줬다고 다시 집으로 데려가는 것은 더 황당하다. 물론 부인이 고작 방귀 한 번 뀌었다고 놀라서 내뺀 다음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란 작자가 가장 어처구니없지만. 다 읽고 난 다음 대체 무슨 이 따위 이야기가 있어? 하고 바로 치워버렸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를 오늘날의 기준으로 PC하니 아니니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전래’ 동화이므로. 이런 이상한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사실 이 방귀 뀌다 소박맞은 며느리의 이야기는, 그만큼 처지가 불안정했던 과거 여성의 지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며느리라는 지위는 아무리 근면 성실하게 시부모와 남편을 모신다고 한들, ‘가족’의 일원으로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시부모의 한마디에 언제든 ‘반품’될 수 있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소박’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부터가 그렇다. 또한 말 한마디 없이 그대로 내빼는 남편의 모습은 부모의 의견에 어떠한 반박도 비판도 할 수 없었던 당대의 부모 자식 관계를 유추하게 만든다. 직업이나 배우자 선택 등의 인생의 진로에 있어서 자유의사가 별로 없었으니 책임감 있는 인생을 살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이처럼 전래동화나 명작동화 등 오랜 세월 구전되어 내려온 이야기들에는 알게 모르게 당대의 사회상이 담겨 있다. 물론 이야기가 전하고자 했던, 소박맞아도 끝까지 시부모에게 효심을 다하면 복이 온다 or 아무리 하찮고 쓸모없어 보이는 재주라도 다 쓸데가 있다, 등의 교훈은 오늘날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므로 이야기 속에 담긴 주제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동화 자체를 오늘날의 시각으로 재해석해서 비판하고 사고하는 것은 매우 유의미한 과정이 될 수 있다.

박신영 작가의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는 이와 같은 의문에서 출발한 책이다. 명작 동화의 이면에 숨어 있는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고, 그런 이야기가 구전되어 올 수 있었던 사회적 맥락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재해석한다. 표제가 된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챕터는 말 그대로 왜 그렇게 옛날 동화에는 백마 탄 왕자들이 넘쳐났는지에 대한 역사적 설명이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백설공주에서 독사과를 먹고 잠들었던 공주를 발견한 왕자라든가,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 물레 바늘에 찔려 길고 긴 잠에 빠진 공주를 발견한 왕자들, 지금 생각해보니 다 어디서 갑툭튀했나 싶다.

알고 보니 중세시대에는 장자에게 왕위며 재산이며 모든 것을 몰빵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둘째 왕자나 셋째 왕자는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게 되고, 그럴 때 살아남을 수 있는 방안은 보통 세 가지였다고 한다. 성직자가 되거나, 혹은 전쟁에서 공을 세워 영주가 되거나, 마지막으로 이웃 나라의 공주와 결혼을 하여 그 나라의 왕이 되거나. 아들이 없는 국가의 경우 보통 공주의 남편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므로 자기 나라에서 먹고살 길이 없었던 둘째 셋째 왕자들은 말을 타고 여기저기 떠돌며 신부감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동화에 나오는 왕자들, “그들은 정의감이 넘쳐서 용과 마법사를 무찌르러 다니는 낭만적인 모험가들이 아니었다. 편력기사 생활을 하며 일거리와 부자 처갓집을 찾고 있는 떠돌이들이었”(19쪽) 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알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을 구원해줄 멋지고 부유한 남성을 기다리는 여성에게 “백마 탄 왕자님 기다리느냐”며 조롱조로 시전되곤 하던 물음은 유효하지 않게 된다. 실상 백마 탄 왕자는 구원자가 아니었으며 여성이야말로 왕자에게 있어 구원자가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젯밤 아이와 함께 읽었던 백설공주에 나온 왕자는 죽어서 누워있는 백설공주를 보며 시체라도 상관없다며 데려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 진의를 매우 의심하게 된다. 공주의 시체를 공주 아빠한테 가지고 가서 무슨 보상이라도 바란 것이 아니었는지 하면서. 사실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 아닌가. 죽어도 상관없으니 데려가겠다니.

책은 이 외에도 <빨간 모자>, <피리 부는 사나이>, <빨간 머리 앤>, <빨간 구두> 등 우리에게 친숙한 동화부터 <로빈 후드>, <베니스의 상인>, <노트르담의 꼽추>, <돈 키호테>, <드라큘라> 등 동화를 넘어 고전 명작의 반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유명한 이야기들을 통해 역사적 사건들을 의미 있게 풀어낸다. 개인적으로 역사책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 편이지만, 어린 시절 열심히 읽었던 동화들을 다시 만나는 기쁨에 유머감각과 스토리텔링 능력이 탁월한 문장들이 더해져 아주 즐겁고 유쾌하게 읽었다.

주제별로 나뉘는 에피소드 형식이라 역사서임에도 부담스럽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다음의 독자에게는 더욱 흥미롭게 다가올 듯하다.

1.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 : 역사적 배경과 동화가 연결되는 것을 보며 감탄하게 됨.
2. 어린 시절 명작동화를 재미있게 읽었던 사람 : 명작동화를 오늘날의 시선으로 다시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3. 중학생 이하의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들 : 아이에게 유명한 동화를 읽어주며 알쓸신잡의 지식을 뽐낼 수 있음.
4. (중,고,대)학생들 : 권장도서인 동화와 명작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비판적 시각을 배울 수 있음. 역사공부는 덤.

딱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는 책 제목이다. 물론 흥미로운 물음이지만, 이 책이 다루는 진지한 주제의식과 역사와 문학에 대한 깊은 내공을 제목이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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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기에 읽었던 책 중에 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가 있었다. 나름 재미있게 읽었지만(심지어 추천까지 했고), 본래 장기간에 걸쳐 인물과 시대의 변화를 서술하는, 말하자면 대서사시 류의 방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라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볼 정도로 팬이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페친 한 분께서 전작을 워낙 극찬하시는 것이다.

사실 전작이래 봤자 딱 하나밖에 없다. <우아한 연인>. 이는 에이모 토울스가 40대 후반에 쓴 데뷔작으로, 데뷔작임에도 마치 10번째 작품 같다는 호평을 들었던 작품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 뒤에는 <모스크바의 신사>가 나왔다. 그러니까, 대기만성형인데다가 작품 하나 쓰는데 굉장히 오래 걸려서 팬들 복장 터지게 만드는 스타일의 작가 되시겠다.

워낙 재미있다 말씀하시니 호기심이 생겨서 책을 구하려는데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국내에 2013년에 출간되었던 <우아한 연인>은 이미 절판된 지 오래였다. 중고 서점을 샅샅이 뒤져봐도 매물이 없었다. 그나마 3만 원짜리 프리미엄을 붙여 팔고 있던 한 권마저 누가 채갔다. 그대로 남아있었어도 너무 비싸서 아마 안 샀을 테지만.

참고로 외서의 경우 대부분의 작품들이 절판된다. 로맹 가리나 체호프 등 대가도 마찬가지다. 안 유명한 작가야 안 팔리니 그렇다 치고, 꾸준히 수요가 나오는 작가들의 작품까지 절판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여 알아봤더니, 외서의 경우 5년 단위로 출판 계약을 맺는데, 계약을 갱신하는 것이 여러모로 상당히 번거로운 작업이라고 한다. 따라서 무라카미 하루키나 베르나르 베르베르 급으로 어지간히 많이 팔리는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절판을 시킨다고. 그러므로 관심 있는 작가의 작품이 나오면 재깍재깍 삽시다(?).

하는 수 없이 도서관에 있는 오래된 책을 빌려다 봤다. 다행히 아주 인기가 넘쳤던 작품은 아니라 청결이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세월감과 자연스러운 손때 정도. 그것도 찜찜하지만..... 아으...

그렇게 읽고 난 감상은.... 음.....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스포일러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만, 싫으신 분은 여기서 살포시 뒤로 가기를.

이 책은 크게 4부 정도로 나누어 이야기할 수 있는데, 책 속에서는 겨울, 봄, 여름, 가을의 계절의 흐름에 따라가는 것처럼 그리고 있으나 실제로는 한 여성이 4명의 남자를 만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계절 별로 새로운 남자가 한 명씩 등장하고 주인공은 그들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승자는 당연히....... 가장 부자고 잘생긴 남자지 누구겠어요. 말하자면 ‘똑똑하고 예쁜 시골뜨기의 뉴욕 신랑감 찾기 프로젝트’, 즉 1930년대 버전 <섹스 앤 더 시티> 되시겠습니다. 보다 상세한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프롤로그 : 나는 남편과 사진전을 감상하러 갔다가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그 주인공은 바로 팅커 그레이. 팅커는 총 두 장의 사진이 찍혔는데, 한 장은 굉장히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빈곤해 보이는 모습이고, 다른 한 장은 세련되고 부유한 옷차림을 한 모습이다. 남편은 두 장의 사진을 보며 그래도 이 사람 성공했나 보군, 다행이네,라고 이야기했지만 실은 부유한 사진이 더 이전, 남루한 사진이 나중이다. 그러면서 나는 팅커와의 추억에 젖어든다.

챕터 1 : 세련된 뉴욕 청년 팅커 그레이와의 만남
시골에서 상경하여 여학생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나는 우연히 기숙사에서 이브 로스라는 부잣집 아가씨를 만난다. 누구나 돌아볼 만큼 아름다운 미모와 호탕한 성격을 지닌 이브는 나와 죽이 잘 맞아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우리는 일이 끝난 후 밤마다 뉴욕 시내를 쏘다니며 남자들의 시선을 즐기고 놀다가 우연히 재즈 바에서 팅커 그레이라는 청년을 만난다. 한눈에 봐도 부티가 좔좔 흐르는 팅커에게 나와 이브 둘 다 호감을 느끼지만 왠지 팅커는 나를 더 좋아하는 것 같고, 그 모습에 이브는 매우 질투심을 보인다. 하루는 팅커가 운전하는 차에 우리 셋이 함께 타고 가다 매우 큰 충돌 사고를 당한다. 별 부상이 없던 팅커와 나와 다르게 이브는 아주 크게 다치고 다리를 절게 되었으며 아름다웠던 얼굴은 마구 뭉개졌다. 팅커는 이브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그녀를 자기의 아파트에 데려와서 손수 간병하고자 한다. 어느 날 팅커는 이브를 간병하러 들른 나에게 키스하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만, 나는 이브에게 미안해서 그대로 도망치고 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브가 팅커와 함께 휴가를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챕터 2 : 귀공자 월러스 월코트와의 만남
이브의 연락을 받고 팅커의 아파트로 향한 나는 팅커와 이브의 관계가 휴가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챈다. 본래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 같았던 두 사람은 이제 자연스러운 연인처럼 보인다. 애정표현도 서슴지 않을뿐더러 침실을 살짝 엿본 바에 의하면 동침도 하는 듯하다. 팅커는 나에게 그냥 그렇게 되었다며 미안하다고 말한다. 나는 괜찮다며 둘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준다. 그리고 그날의 파티에는 월러스 월코트라는 팅커의 지인도 와 있었는데, 그는 팅커와 사립학교 동창으로 매우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뉴욕 사교계에서 모든 사람이 노리는 특등급 신랑감인 그가 나에게 왠지 연락처를 물어본다. 이후 6개월간 연락이 없었던 월러스는 어느 날 갑자기 나를 가족의 사냥터로 초대한다. 월러스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처럼 지냈던 친구의 여동생을 짝사랑했지만 그녀가 이미 유부녀이므로 마음속으로만 연정을 품고 있는 상황이고, 나 역시 팅커에 대한 마음을 접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둘은 이런 서로의 마음을 보듬으며 괜찮은 연인관계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월러스가 전쟁에 참전한다고 밝힌다. 월러스는 전쟁에 참전하기 전 나에게 가족 파티의 초대장을 보낸다. 사교계의 여인들이라면 이곳에 오고 싶어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중요한 파티였다.

챕터 3 : 뉴욕 최고의 재벌 가문 자제 밸런타인과의 만남
파티에 참석한 나는 이브와 팅커도 참석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한다! 심지어 주변 사람들에 의해 팅커가 이브에게 청혼할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차마 그 광경만은 보지 못할 것 같아 서둘러 자리를 피한다. 그런데 그렇게 허둥대는 와중에 파티의 가장 주요한 책임자이자 최고 권력자인 어르신께서 아들에게 나를 역까지 데려다주라고 명한다. 그 아들인 밸런타인은 나를 기차역이 아닌 숙소까지 데려다준다. 이러실 필요 없다는 말에 자기도 파티에 있기 힘들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이브와 팅커에 대해 잊어버리려 애쓰던 와중에 이브가 팅커의 청혼을 거절하고 그를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 팅커의 ‘진심’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이브도 참 힘들었을 것이다. 어느 날 밤 팅커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있는 별장으로 와줄 수 없느냐고 묻고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팅커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우리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근사한 하룻밤을 보내지만 다음날 아침 팅커는 조금 마음의 준비를 한 뒤에 연락하겠다고 한다. 중학생 소녀가 아닌 쿨한 나는 알았다고 말한 뒤 뉴욕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중식당에서 우연히 팅커가 어떤 여성과 수상한 모습으로 있는 것을 발견한다. 앤 그레딘이라고 하는 그 여성은 오래전 팅커가 자신의 대모라고 밝혔던 재계의 거물이었는데, 알고 보니 대모가 아닌 스폰서였다. 나는 충격을 받고 뛰쳐나온 뒤 따라 나온 팅커의 뺨을 갈겨버린다. 그 이후 사과하러 찾아온 팅커에게 심한 말을 퍼붓는다.

챕터 4 : 철부지 도련님 디키와의 만남
나는 팅커로 인해 상처 받은 마음을 전부터 줄곧 나를 따라다니던 디키를 통해 풀고자 한다. 나는 그렇게 팅커를 때리고 돌아오는 길에 디키의 아파트에 들른다. 거기서 고급진 욕조를 가리키며 이거 한 번 써볼까?라고 유혹한다. 나와 디키는 순식간에 옷을 벗어던지고 나는 두 다리로 디키의 허리를 감는다.... 이후 우리는 연인 사이가 되는데, 알고 봤더니 디키 역시 엄청난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어느 날 디키는 내 마음에 깊은 심연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무슨 일이 있는지 묻고 나는 팅커와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는다. 디키는 조용히 위로를 건네며 팅커와 잘해보라고 말한다. 나는 문득 깨달음을 얻고 팅커를 찾아 나선다. 팅커는 예전의 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가난하지만 싱그러운 정신으로 살고 있었다. 나를 만난 팅커는 매우 반가워하고 우리는 오래된 회포를 풀고 묵은 앙금을 청산하며 그날 밤 뜨겁고 격렬한 섹스를 한다. 다음날 아침 팅커는 쪽지를 남기고 떠났다. “당신에게 정말 고마워요. 이제 진정한 나 자신을 찾아볼게요.” 그 뒤로 나는 종종 팅커 생각을 했고, 부유한 청년들 여럿과 데이트를 했으며, 그러던 와중에 예전 월러스의 초대로 갔던 파티에서 만났던 밸런타인과 재회한다. 그가 나의 남편이 되었다.

정말이지 섹스 앤 더 시티 1930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와 마찬가지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정말이지 ‘모든’ 인물들이 주인공과 사랑에 빠진다. 심지어는 죄다 부자다! (물론 팅커 그레이의 경우 거짓된 부로 밝혀졌지만.) 부자일 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잘생겼다. 팅커 그레이의 경우 세련미가 좔좔 넘치는 개츠비와 같은 인물이고, 월러스 월코트의 경우 차분하고 내성적인, 다소 숙맥 같지만 내면에 진지한 열정을 품은 미남이고, 밸런타인의 경우 차갑고 도시적이며 냉정한, 그러나 ‘내 여자에게는 따뜻한’ 그런 냉미남이고, 디키는 귀엽고 철부지 같은 부잣집 막내 도련님 스타일의 미남이다.

심지어 이들은 부잣집 남자들이 그러하듯이 ‘방탕’하다거나, ‘오만 방자’ 하지도 않고 성격마저 좋다. 그런 남자들이 주인공을 보고 모두 한눈에 반해 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소설 속에서 이 여자는 아주 눈에 띄는 미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물론 키가 크고 다리가 예쁘다고 나옴), 모든 남자들이 누구나 돌아볼 만큼 아름답고 매혹적인 주변 인물들 대신 그녀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자들이 그녀를 선택하는 이유는 바로 바로 바로 그녀의 ‘지성’ 때문이다. 남자들은 모두 보자마자 그녀의 ‘내면의 차분함’을 눈치채 버린다. 오오오오!

“처음 봤을 때부터 나한테는 당신 안의 차분함이 보였어요. 사람들이 책에 써놓았지만 실제로 갖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은. 내면의 고요함 같은 것. 그래서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죠. 저 여자는 어떻게 저럴 수 있지? 그러다가 저건 후회가 없는 사람만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뭔가 결정을 내릴 때..... 아주 차분한 마음으로 단호하게 결정을 내리는 사람만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 그게 나를 멈칫하게 했죠. 그래서 그걸 다시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처음 만나자마자 내면의 차분함을 눈치채다니 대단한 걸. 하긴 이 주인공의 경우 변호사 사무실에서 비서로 일할 때도 엄청난 능력을 보이는 것으로 나오고, 불현듯 변호사 사무실을 그만두고 출판계로 전업하기로 결심한 뒤 출판사 사장을 말로 구워삶기도 하며, 온갖 일에서 지성을 뽐낸다. 물론 어떻게 뽐내는지 구체적으로는 그려지지 않고 주변인들이 그녀에게 감탄하는 장면만 나오지만. 심지어 그녀와 처음 만난 어떤 남자는 이 짧은 대화를 통해 그녀의 지성을 깨달아버리기도 한다!

“이름이 뭐예요?”
“캐서린이요.”
“캐시라고 불러도 되나요?”
“아뇨, 절대 아뇨.”
“당신은 참 똑똑한 여자군요.”

????????????? 대체 저 대화의 어디에서 지성을 느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주인공의 매력에 굴복하는 것은 남자들 뿐만이 아니다. 책 속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이 주인공에게 사로잡힌다. 부잣집 가문의 여신 같은 외모의 하숙집 룸메이트 이브, 월러스의 소꿉친구이자 짝사랑 대상이었던 패기 넘치고 영리하며 당당한 여성 빗시, 팅커 그레이의 스폰서였던 앤 그레딘까지 모두 주인공의 매력에 사로잡힌다.

앤 그레딘은 자신에 대한 주인공의 적의를 알면서도 그녀에게 찾아와 아파트 열쇠를 건네기까지 한다. 팅커가 떠나고 난 빈 집에 들어와서 살라며. 그러면서 주인공에게 깊고 진한 키스를 한다. 정말이지 엄청난 매력의 소유자인가 보다. 걸어 다니면 온갖 사람들, 그것도 부자들만 다가와서 달라붙으니. 걸어 다니는 부자 자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녀를 향한 이 모든 부자들의 사랑이 굉장히 맹목적이고 관대하다는 데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앤 그레딘은 아파트를 제시하며, 나중에 알고 보니 몰래 직장까지 주선하고, 전쟁 때 죽은 주인공의 짧고 가벼운 연인 월러스는 유언장을 작성하여 신탁기금까지 남겨준다. 게다가 월러스와 디키는 주인공이 이전 연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질투나 불쾌한 감정은커녕 너무도 관대하게 그녀의 과거를 포용해준다.

“우리가 자신과 완벽히 맞는 사람하고만 사랑에 빠진다면, 애당초 사랑을 둘러싸고 그런 소동이 벌어지지도 않을 거야.” 와우!!

소설의 챕터 1에 해당하는 팅커와의 만남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서로 마음이 있지만 불가피한 이유로 다가서지 못하는 두 사람의 아련한 운명에 나 역시 애틋한 감정을 느낄 뻔하였으나, 읽다 보니 이 무슨..... 팅커 – 월러스 – 밸런타인 – 디키 모두 아는 사이인데, 연인의 친구와 연인이 된다는 고리타분한 지적은 당연히 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것은 좀...... 가십걸이나 디오씨 같은 막장 드라마가 생각보다는 막장이 아닐지도 모르는 것이다.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주인공이다. 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겉으로는 시치미를 뚝 떼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뒤로는 누구보다 속물적이고 계산적인 인물이다. 어떠한 욕망에도 초연한 것처럼 행동하고, 남자에도 관심 없는 것처럼 굴지만 알고 보면 할 것 다 하고 있다. 작가인 에이모 토울스 역시 이런 주인공을 매우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심으로 그녀가 쿨하고, 현명하고, 차분하고, 선량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니었다. 할 것 다 하는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겉으로는 그런 가치에 초연한 척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부자만 골라 만나는 이유를 가정교육을 통해 ‘깊이 있게 몸에 밴 배려’가 마음에 든다고 말하질 않나 돈은 주변인들이 다 대주기에 별로 생활이 궁핍하지도 않으면서 변호사 비서 대신 출판 편집자가 된 것을 두고 돈 대신 진정성을 택했다고 셀프 위로를 하질 않나. 그렇게 부와 명예와 인기와 욕망 등에 초연한 것처럼 행동하는데도 그런 것들이 계속 그녀를 줄줄이 따라다닌다. 거기에 착한 척까지 잃을 수 없어서 이브와 팅커를 두고서는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이브를 위해 진심으로 기뻤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이 주인공의 가장 좋아하는 인생 소설이 <월든>인 것을 보면 알 법도 하다. 월든은 참고로 숲에서 혼자 속세를 등지고 수도승처럼 생활하는 수기인데, 끊임없이 이 <월든>을 찬양하면서 실제로 하는 행태는.... 아오.... 아오..... 아오.....

말하자면 이 소설은,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사이토 미나코 님의 말을 빌면 ‘코발트 문고’ (소녀 만화의 활자판)에 해당하는 작품이었다. 이 성인판 코발트 문고에 해당하는 작품들의 특징은, 플롯은 할리퀸이나 순정만화의 그것을 그대로 따라가지만 유려한 문체와 엄청난 분량을 통해 책 한 권을 읽었다는 뿌듯함을 준다는 것이다. 이 <우아한 연인>도 마찬가지고.

물론 이런 플롯 자체가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주 재미있다. 심지어 에이모 토울스의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문체를 읽다 보면 매우 고급스럽고 아련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받게 된다. 비록 그 내용은 부잣집 자제들이 모여 재즈 음악 듣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사냥하고 요트 타는 게 전부라고 할 지라도.

신기한 것은 이 작품의 작가가 남성이라는 점이다. 에이모 토울스의 작품은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굉장히 여성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문체도 그렇고, 섬세한 심리묘사도 그렇고, 뭐랄까 전반적으로 코발트 문고 풍이라는 점이 그렇다.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일반화가 아니라 하나의 특징으로서 ‘masculine’ 또는 ‘feminine’으로 구분하자면, 작가 자체가 아마도 확연하게 feminine 한 인물이 아닐까 싶었다. 물어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분명 섹스 앤 더 시티 광팬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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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가 위험하거나 불안정한 상황을 굉장히 기피하는 유형의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실제로 도박, 도전, 모험 등의 단어와 거의 생리적으로 맞지 않고, 인간관계에서도 이 사람 조금 위험하다 싶으면 곧장 백스텝으로 멀어진다. 그야말로 안전지향.

그런데 또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상할 만큼 허술하게 행동한 경험 역시 적지 않다. 예전에 유럽 여행할 때는 돈을 아낀다는 핑계로 히치하이킹도 많이 하고, 모르는 사람 집에서 즉흥적으로 잔 적(에어비앤비나 카우치서핑 아님)도 여러 번인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랬는지 아찔해진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다행히 별로 위험했던 적은 없었지만.

다만 이런 일들은 있었다. 한 번은 독일 시골마을에서 포츠담까지 나를 선뜻 자기 차에 태워주겠다던 사람(남자)이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잘 곳이 없으면 자기네 집에서 자라고 하길래 결국 그날 밤은 그 집 거실 소파에서 묵게 되었다. 문제는 그날 새벽 곤히 자는 나를 누군가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어나, 일어나, 귀에 속삭이면서.

잠결임에도 눈을 뜨기 전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뭐지!!! 이 남자!!! 강간범인가!! 어떡하지? 내가 왜 그랬을까! 왜 모르는 사람 집에서 잔다고 했을까! 아씨, 모르는 척 일어나서 가방에 들어있는 주머니칼 꺼내와야 하나? 그 짧은 순간에 온갖 망상을 하다가 일단 일어나기는 해야겠어서 눈을 살짝 떠봤더니, 앞에 남자가 아주 태평한 얼굴을 하고 앉아있었다. 남자는 나에게 물었다. 너 대마초 피울래?

알고 봤더니 그냥 흔한(?) 히피 한 명이었을 뿐, 전혀 해롭지 않은 사람이었다. 대마초는 어디서 났냐니까 마당에서 재배했다고(...). 오랜만에 집에 손님이 와서 ‘대접’하는 차원에서 꺼냈다고 한다. 그러니까 교통편도 제공하고, 숙소도 제공하고, 대마초까지 제공할 뻔(!) 했던 매우 친절하고 관대한 세계인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잠깐이지만 강간범으로 오인하고. 미안합니다.

이와 비슷하진 않지만 2000년대 초, 도쿄에 처음 놀러 갔을 때도 위험할 ‘뻔’ 했던 일이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뭐 핸드폰 어플이 있기를 하나, 안내판이 상세하길 하나 말 그대로 여행 중에는 지도만 주구장창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기에 나 같은 길치들은 무척 고생하던 시절이었다. 결국 주변에 있는 사람 붙들고 길을 물어보는 결말로 끝나곤 했다.

한 번은 그렇게 길을 물어봤던 사람 중 한 명이 친절하게도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여 가는 도중에 이런저런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 사람은 한국인이 처음이라 신기했는지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대로 헤어지기 아쉽다며 괜찮으면 그날 밤 다시 만나자고 청했다. 내가 묵는 호텔 이름과 방 호수를 물어본 뒤, 저녁에 자기가 연락하겠다고 했다.

외국인 친구를 사귈지도 모른다는 흥분에 더해 뭔가 전반적으로 어리바리했던 스무 살의 나는 별생각 없이 숙소를 알려줬고 밤에 전화가 걸려온 뒤 근처에 있던 이자까야에서 다시 만났다. 여기까지는 사실 누구나 한 번쯤 여행 가면 있을 수 있는 흔한 일화이고, 위험할 뻔했던 그 사건 자체는 아니다. 그날은 재밌게 잘 놀고 잘 들어갔다.

문제는 숙소가 이케부쿠로 공원 바로 옆에 있었는데, 그 사람을 만나러 왔다 갔다 하면서 오밤중에 그 공원을 혼자서 가로질러 통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공원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마음에 들어서 일정 마치고 숙소 들어가기 전에도 공연히 공원에 들러 밤에 혼자 벤치에 앉아있고.

나중에 I.W.G.P(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이케부쿠로 공원)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알고 봤더니 이 이케부쿠로 공원이 매우 오싹한 곳이었다. 폭력배와 불량 청소년이 자주 출몰하는 우범지대. 왜 그런 곳들 있지 않나. 청소년들이 모여서 본드 불고, 막 집단 폭력 저지르고, 아무튼 온갖 비행을 일삼는 곳. 그런 곳을 아무도 없는 새벽에 룰루랄라 하면서 태평하게 걸어 다녔던 것이다.

훗날 일본인 친구들도 이 이야기를 듣더니 엄청 깜짝 놀라면서 너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어떻게 그렇게 무서운 지역을 막 다녔어! 하고 다들 혀를 끌끌 찼다. 나 또한 이 일화를 생각할 때마다 헐,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싶으면서 무슨 지뢰밭을 아무 생각 없이 걸어서 통과한 사람같이 느껴져서 오싹해지고.

뜬금없이 이 이야기들이 생각난 까닭은 쿠도 칸쿠로의 에세이 <지금 뭐라고 했지?>를 읽으면서이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각본을 집필하고 배우, 감독으로도 활동할 뿐만 아니라 밴드까지 하는, 일본에서는 천재로 통하는 작가인데, 특유의 개그코드로 인해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편이지만 일단 나는 아주 좋아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이케부쿠로 공원이 범죄의 주 무대로 등장하는 드라마 I.W.G.P가 바로 쿠도 칸쿠로의 작품이다.

<지금 뭐라고 했지?>는 어딘가에 등장했던 ‘대사’를 테마로 쓴 짧은 에세이 모음집으로, 쿠도칸 특유의 입담이 어우러져, 아주 사소하지만 깨알같이 공감 가면서 읽다가 쿡쿡 웃게 되는 무척 재미있는 책이다. 짬날 때마다 틈틈이 부담 없이 읽기 좋다. 다만 대사라는 테마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일본 드라마, 영화, 배우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나오므로, 이런 배경 지식이 전무한 사람이라면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싶어 다소 어안이 벙벙할 수 있다. 쿠도칸의 팬 및 ‘시시하지만 웃기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척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책이지만.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갑자기 생각난 사실 하나. 예전에 나에게 이케부쿠로 공원같이 위험한 곳에 왜 갔냐며 혀를 내두르던 일본 친구들이 지금 생각해보니 모두 토야마 지역 토박이로 도쿄에 가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강원도 원주쯤 살면서 서울에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당시에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이케부쿠로 공원은 정말 무서운 곳이구나 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 아이들도 그곳을 실제로 알았던 것이 아니라 그냥 I.W.G.P 드라마 보고 그랬구나 싶다. 나처럼.

그러니까 마치 대림에 가서 양꼬치 먹고 왔다는 외국인에게 영화 <무방비도시> 보고 감명받았던, 그러나 정작 대림에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중요) 사람들이 헉!! 장첸 같은 무서운 사람들이 있는 지역에 가다니!!! 하고 덜덜 떠는 것과 비슷한 뭐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 고로, 당시 이케부쿠로 지역이 ‘실제로’ 어땠는지는 여전히 모른다는 것. 그때랑 지금은 또 다를지 모르고. 본래는 서평을 쓰려고 했는데 뭔가 옛 추억의 회고담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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