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들의 당나귀 귀 - 페미니스트를 위한 대중문화 실전 가이드
손희정 외 지음, 한국여성노동자회 외 기획 / 후마니타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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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치는 아니었지만 달리기는 유난히 약한 종목이었다. 학창 시절 100미터 기록이 19초인가 그랬고, 오래 달리기 또한 잘 못했다. 1500미터 경주하면 끝까지 뛰는 것도 힘들었다. 아마 체력이 약했던 것이겠지. 그런데 중학생 때, 체육 시간에 이열 종대로 다 같이 오래 달리기 훈련을 하던 시기에, 갑자기 체육교사가 나를 그룹의 가장 선두에 세웠다. 선생님은 말했다. “잘 뛰는 애들이 앞에서 이끌어줘야 해.” 엥??? 나는 무척 당황했다. 나머지 한 명은 평소에도 워낙 잘 뛰던 친구였지만 나는 아닌데? 잘 못 뛰는데?

어쨌든 ‘거부’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선두에 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죽기 살기로 뛰었다. 옆에 있는 잘 뛰는 친구에게 맞추기도 해야 하고, 지치거나 쳐지면 뒤에서 달리는 아이들에게 영향이 가는 데다가, 다 떠나서 앞에서 뛰는데 못 뛰면 ‘쪽팔리기’ 때문에. 자연히 달리기 훈련이 되었고 나중에 기록을 잴 때는 평소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자의에 의한 것도 아니었고, 미치도록 힘들었으며, 여전히 선생님이 왜 나를 선두에 세웠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에게 있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해 준 경험이었다. 앞에 서보는 게 이렇게 중요하구나, 그런 경험들이 사람을 바꿀 수 있구나.

한 번이라도 반장이나 부반장 같은 ‘대표’를 맡아본 경험이 있으면 계속해서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 역시 같은 이치이다. 리더십은 타고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길러진다. 반장이라는 역할은 그룹을 대표하고, 의견을 조율하고, 많은 인원을 통솔하는 경험을 하게 해 주며 이런 과정에서 자신감, 협상능력, 카리스마를 향상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길러진 능력은 조금씩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 훗날 이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한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벌어지는 이유이다. 결국 자리가 자리를 만들고,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셈이다.

몇 년 전 ‘알쓸신잡’이 처음 방영을 시작했을 당시, 왜 출연진이 죄다 남성이냐는 볼멘 목소리가 나왔던 적이 있다. 그러면서 왜 지식인은 죄다 남성인지, 왜 예능프로의 멤버도 모두 다 남성 일색이냐는 비판도 나왔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말했다. 여자들은 재미가 없잖아. 여자들 중에 유재석만큼 진행 잘하는 사람 있어? 정형돈만큼 재치 있는 사람 있어? 강호동만큼 카리스마 있는 사람 있어? 무한걸스 같은 거 만들어줬는데 재미없잖아. 망했잖아. 사람들이 안 보고 안 찾는 걸 어쩌라고. 여자들 중에 재미있게 썰 푸는 똑똑하고 호감 가는 지식인이 있어? 있으면 데려와 봐. 인물이 없는걸 우리더러 어떡하란 말야.

원칙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예능이건, 코미디이건, 연기이건, 지식이건, 기본적으로는 남성들이 더 우세한 경우가 많다. 남성 연예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캐릭터, 웃음에 대한 예민한 감각, 몸을 사리지 않는 투혼을 여성들에게서는 발견하기 어렵다는 말에도 동의한다. 여성들 중에 ‘대중성’을 지닌 지식인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것도 맞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 묻고 싶다. ‘왜’ 여성들이 남성보다 재미가 없는지, ‘왜’ 여성 지식인 중에 남성만큼 눈에 띄는 사람이 없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고 말이다.

문제는 기회다. 일단 여성들에게는 남성만큼 충분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경험이 없으니 미숙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실수를 하게 된다. 게다가 어렵게 주어진 기회에서 단 한 번이라도 실수를 해선 안 된다. 그러다 보니 긴장을 하고 긴장을 하다 보니 다시 실수 연발. 결국 망하고 만다. 그런 지점은 남성 역시 마찬가지라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둘은 상당히 다르다. 똑같이 바닥부터 시작하더라도 주어지는 기회와 파이가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경험치가 쌓이다 보면 자연스레 익숙해지고, 익숙함은 여유를 주고, 여유는 능력을 올려주며, 올라간 능력은 새로운 경험을 불러오기에 결국 훗날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내게 된다.

유재석이 처음부터 오늘날의 원숙미 넘치는 진행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처음에 찌질하고, 재미없고, 무능한 캐릭터였다. 그러나 무모한 도전이라는 작은 기회가 찾아왔고, 유재석은 성실하게 그 기회를 살렸으며, 결국 오늘날의 국민 엠씨로 성장했다. 만약 당시 유재석과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찌질한 여성 코미디언이 그런 프로그램을 맡았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해당 프로그램의 초반 인기는 무모한 도전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해 보자. 그 프로그램이 끝까지 살아남아 결국 무한도전이 되고, 프로그램의 멤버들이 유재석, 노홍철, 정형돈, 하하, 정준하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아니라고 본다. 기회 줬잖아! 별로잖아! 땡! 이러고 곧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변경되었을 확률이 높다. 비단 대중문화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여성노동자협회에서 펴내고 손희정이 엮은 <을들의 당나귀 귀>는 이처럼 대중문화 곳곳에 퍼진 여성주의 담론을 다루는 책이다. 한국여성노동자협회에서 만드는 ‘을들의 당나귀 귀’라는 팟캐스트 프로그램 중, 다시 의미 있었던 14개의 에피소드를 선별하여 책으로 엮은 것인데,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듣는 것을 싫어해서 팟캐스트도 듣지 않고, 비슷한 이유로 인터뷰집이나 대담집도 잘 보지 않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몹시 재미있게 읽었다.

‘딸바보’ 남성 캐릭터라든지, 개저씨가 되는 것이 싫어 ‘아재’ 임을 내세우는 남성이라든지, 김숙과 송은이가 오늘날 살아남았던 이유에서부터 걸그룹과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의 변화, 성매매, 여성 슈퍼 히어로가 남성들과 얼마나 다른지 등등, 일단 소재 자체가 매우 재미있고, ‘당나귀 귀’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간 한국 예능을 보면서 고구마 먹은 듯 답답했다거나, 대중문화를 접하면서 의문을 품었던 지점, 욕하고 싶었던 것을 누군가 시원하게 해소해주는 느낌을 받았다. 대담집인 만큼 대화문으로 되어 있어서 읽는 것도 굉장히 수월했고.

모든 챕터가 인상 깊지만, 그중에서도 영화 <비밀은 없다>를 다룬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대담자들은 <비밀은 없다>의 주인공 ‘연홍’이 했던 ‘생각하자, 생각하자, 생각하자’라는 대사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고 말한다. 본래 ‘멍청했던’ 연홍은 딸의 죽음을 계기로 각성하지만, 그 각성으로 인해 흥분하고 미쳐 날뛰는 대신, ‘생각’하고, 궁극적으로 ‘승리’한다. 여성들은 성차별 문제에 대해 분노하는 동시에, 그 이상으로 더 많이 ‘생각’ 해야 한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해야 한다.

많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고, 특히나 여성들은 반드시 읽었으면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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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거리는 여인
미시마 유키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서커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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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보고 들었던 여성들의 연애담은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

별로 관심이 없는 남자가 자꾸만 쫓아다닌다. 처음에는 너무 귀찮고 싫었는데 어쩌다 보니 사귀게 된다. 사귀기 시작하고 초반부에 남자는 간이고 쓸개고 빼줄 듯이 잘해주고 애지중지 해준다. 그런 과정에서 나 역시 조금씩 그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남자가 조금씩 시들해지는 것 같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젠 내가 남자를 더 좋아하게 된 상태다. 처음과 달리 관계는 역전되었고, 나는 불안한 약자가 되어 있다. 그러나 한 번 돌아선 남자의 마음은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남자는 떠나버린다.

대학교 익명 게시판이나 여초 커뮤니티에서 이런 글 과장 안 하고 오조오억 번 보았다. 에이, 인터넷 글이 다 그렇지 뭐, 싶겠지만 실제 주변에서 목격한 사례도 꽤 많았다. 친구들 중에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자와 억지로 사귀었는데 나중에 본인이 더 좋아하게 되어 전전긍긍하고 마음고생하다가 안 좋게 끝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2000년대에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온갖 연애 지침서가 유행하기도 했었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부터 시작해서 <현명하게 사랑하라> 같은 책들. 너는 대체 뭔데 그런 걸 다 알고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인터넷 죽순이였기 때문입니다(눈물). 한때 익명 게시판에 올라오는 모든 글을 읽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연애 문제로 괴롭다는 글에 저 책들을 추천하는 댓글이 자주 달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섹스 앤 더 시티라는 드라마는 이런 고민을 하는 여성들을 위한 교과서와도 같은 존재였고.

당시에 그런 글을 보며 내가 했던 생각은 이렇다. 왜 애초에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억지로’ 사귀는가에 대한 의문.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연애 과정에서 마음이 떠난 애인에 대하여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연애를 하는 것은 더 행복하고 즐겁기 위해서인데 애초에 ‘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억지로’ 사귀는 것인가. 왜 굳이 즐겁지도 않은 상태에서 사귀고, 억지로 만나고, 불균형한 감정을 주고받다가, 관계가 역전된 뒤 거기에 질질 끌려가는지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어렴풋이 이런 현상의 원인을 이해할 것도 같다.

일단 사회적으로 ‘여자친구’, ‘남자친구’, 그리고 ‘연애’라는 것에 대한 인식과 역할이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당시는 연애를 하지 않으면 마치 이상한 사람처럼 생각하는 분위기가 ‘지금보다도 더’ 강했다. 지금은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굳이 연애를 할 필요 있나?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점점 조성되는 상황이고, 연애인과 비연애인 사이의 우열관계 또한 점차 없어지는 추세이지만, 과거에는 분명 그런 것이 있었다.

애인이 없다고 하면 뭔가 가엾게 바라보고, 어딘가 결격사유가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덜 떨어진 사람이 된 것 같은 분위기.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성들 또한 전혀 좋아하지 않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에 휩쓸려’ ‘억지로’ 사귀게 되는 경우가 분명 없지 않았다. 아니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사귀게 된 뒤에는 ‘여성은 안정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는 사회적 믿음에 따라 관계에 충실하려 노력하고, 그러다 보니 남성보다 관계 자체에 대한 애착이 생기고, 그 관계를 지키려 애쓰게 되고, 반면에 남성은 점차 거기에 시큰둥한 모습을 보이고, 그러면서 점점 더 불안 초조해지고 했던 것이 아닐는지?

진화심리학적으로 여자는 어쩌고 남자는 어쩌고 웅앵웅앵은 참으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 생각하지만, 분명 사회적으로 여성에게, 남성에게 기대하는 성역할이 존재했고, 동의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잠재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기는 아마도 어려웠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또는 ‘잡은 고기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와 같은 속담만 하더라도 그렇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이야기는 남성들에게는 헛된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여성들에게는 마치 마지막에 가서는 넘어가 줘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을 불러일으킨다. 원래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다 시작되는 것 아닌가 하는 체념을 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잡은 고기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다는 속담 역시 여성에게는 관계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하고 남성에게는 일단 고기는 잡기만 하면 된다는 쓸데없는 근자감을 준다. 뿐만 아니라 이 두 속담은 공통적으로 여성을 사냥감, 혹은 쫓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체계를 공고히 한다.

잘 살펴보면 당시 유행하던 드라마, 영화 속 사랑 이야기 대부분이 저것과 유사한 구조를 띤다. 남자는 쫓고, 여자는 잡히고, 그러다가 남자는 떠나고. 물론 여성이 불안해하는 사이 다시 남성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혹은 또 다른 남성을 등장시킴으로써 70~80년대에 유행하던 드라마처럼 남성과 여성이 불타는 하룻밤을 보내고, 여성이 ‘순결’을 상실하고, 혹은 임신까지 하고, 남성이 떠나고, 여성은 그런 남성을 지고지순하게 기다리는 차원보다는 다소 진화한 것이 사실이지만, 여전히 많은 드라마에서 쿨하고 싶었으나 쿨하지 못한 여성을 그려냈었고, 그런 모든 것들은 전형성을 강화하는 기재로 작용했던 것이다.

물론 문화가 사회를 반영하기도 하고, 사회가 문화를 따라가기도 하므로, 뭐가 더 옳다 그르다 하는 이야기는 할 수 없다. 그런 모든 작품이 ‘빻았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시절에는 분명 남성과 여성의 연애담을 둘러싼 어떤 전형성이 존재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여성들의 연애담이 죄다 유사했던 것 또한 알게 모르게 저런 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것일 테고. 실제로 여성들의 행동이나 인식 체계 또한 그러한 전형성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고.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비틀거리는 여인> 또한 근본적으로는 앞서 언급한 여성의 흔한 연애담과 동일한 구조를 따라간다.

정숙하고 우아한 유부녀인 세쓰코는 남편을 만나기 전 이렇다 할 연애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젊은 시절 첫사랑과 가볍게 입맞춤을 했던 경험이 있기는 하나, 그것뿐, 제대로 된 정열을 불태웠다고 할만한 기억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세쓰코는 입맞춤을 했던 첫사랑의 대상인 쓰치야가 자꾸만 자기 주변을 맴도는 것을 느끼고 그와 ‘순결한 연애’를 해 보기로 결심한다.

처음에는 순전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차원, 말하자면 그냥 재미로, 또는 역할놀이하듯이 가볍게 시작된 관계였다. 육체적 관계는 갖지 않는 친구처럼 순수한 만남만을 갖기로 결심했으나, 그런 결심이 무색하게 세쓰코는 점차 쓰치야에게 빠져든다. 당연히 육체관계도 맺게 된다. 심지어 나중 가서는 쓰치야보다 세쓰코 쪽이 훨씬 더 좋아하게 된다. 세쓰코는 그런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져서 몇 번이고 헤어져야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결심은 번번이 무너지고,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쓰치야에 의해서야 그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억지로 끝내게 된다.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상대를 점차 좋아하게 되는 과정, 그러다가 관계가 불균형해지는 것, 그로 인한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쉽게 이별을 고하지 못하는 부분, 부당한 대우에 분노하려다가도 상대의 아주 사소한 행동에 헛된 희망을 품으며 정신승리하는 듯한 모습이 굉장히 리얼하고도 상세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에, 앞서 언급했던 다소 전형적이었던 여성들의 연애담 속 인물들의 심리를 굉장히 상세하게 알게 된다.

읽다 보면 세쓰코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과 동시에 고구마 백 개 먹은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면서, 하아... 쓰치야.... 이 짜증 나는 XX... 이딴 XX랑 빨리 헤어져.... 뭐 이런 말이 나오게 되기도 하고. 그런 면에서 과거 익명 게시판 열심히 하던 시절로 돌아간다는 것을 가정해본다면, 남친의 마음이 식은 것 같아서 고민이라는 여성에게는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보다 이 <비틀거리는 여인> 쪽이 훨씬 더 유용한 조언서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소설가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다자이 오사무나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로 그들만이 온전히 여성의 입장이 될 수 있었던 남성 작가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여성적인’ 면에 있어서는 미시마 유키오가 그 둘 보다 더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들었으면 사뭇 반발할 이야기로서, 아마도 그러한 내면의 여성성을 없애고 싶었는지 아침마다 기계체조도 열심히 하고 냉수마찰하고 헬스 해서 몸짱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역시 이런 작품들을 읽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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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역의효능 작가가 그린 <아 지갑놓고 나왔다> 웹툰에는 철이 없는 엄마와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원숙한 어린 딸이 등장한다. 9살 노루는 교통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은 뒤에도 바보 같을 정도로 순진무구한 엄마가 걱정되어 저승으로 떠나지 못한다. 귀신이 된 노루가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곤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라고 놀이터 모래를 뒤져 동전을 찾아낸 다음 몰래 저금통에 넣어놓거나, 음식이 떨어지면 식료품을 사다 채워놓는 등, 오로지 엄마를 위한 것들 뿐이다. (귀신이 어떻게 쇼핑을 하냐는 질문은 패스하자. 만화다.)

그러나 그렇게 어른스럽고, 성숙하고, 침착했던 노루는 후반부로 갈수록 분열한다. 특히나 엄마가 새로운 사랑을 만나 임신을 하고 아기를 낳게 되는 상황에 이르자 모든 것을 파괴하고자 할 정도로 폭발한다. 자신이 그토록 갈구했던 사랑을, 그러나 단 한 번도 충분히 받아보지 못했던 사랑을, 엄마가 다른 아이에게 주는 모습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루는 자의로 어른스러워진 것이 아니었다. 엄마가 너무나도 철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을 돌봐주기는커녕 자신이 되려 돌봐주어야 할 정도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찍 어른이 되었던 것이다.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금 부끄러운 말이지만 만화를 보던 초반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어머, 저 엄마는 너무 편하겠다. 나도 나중에 이런 딸 낳고 싶다. 혹은 우리 애들도 이렇게 키워야지. 알아서 할 일 척척 다 하고, 이것 저것 걱정시키지 않고, 오히려 보호자처럼 엄마를 돌봐주는 모습이 정말이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노루의 속마음을 알고서 참으로 미안했다. 너무나 외로웠던, 너무나 두려웠던, 너무나 위태로웠던 그 마음을 알게 되니, 성숙한 모습에 감탄하고, 어른스러움을 치켜세우고, 어느 순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우리 애들에게 내심 그런 것을 기대했었다는 것도 다시금 미안해지고.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주변에 한 두 명씩 유난히 철이 일찍 든 친구들이 있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쟤는 나랑 같은 나이이면서도 어떻게 저렇게 어른스러울까? 하고 신기한 마음 반, 존경하는 마음 반으로 바라보곤 했는데, 어른이 된 지금 다시금 그 애들에 대해 생각해보니 꽤나 복잡한 마음이 든다. 물론 모두가 다 노루 같지는 않았을 것이고, 각자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일찍 철이 든 아이들, 아이인 상태로 남아있을 수 없었던 그 마음은 분명 평온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서희 작가의 에세이 <구체적 사랑>을 읽으면서 어린 나이에 유난히 성숙했던 친구들과, 엄마를 위해 고사리 손으로 살림을 하고 놀이터 모래를 뒤져 돈을 모으는 9살 노루가 떠올랐다. 2016년 경, 페이스북의 여러 글을 타고 타고 우연히 그의 계정에 도달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때 정말 놀랐다. 예쁜 사람은 많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느낌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사람은 참으로 드물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렇게나 아름다운 글을 써내는 사람이라니. 물 흐르듯 유려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정말로 아름다운 문장들이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글을 읽으면서 간혹 갸우뚱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글 속에 숨어있는 외로움, 두려움, 고통, 고독감, 자기혐오 등등, 이렇게나 아름다운 사람이, 이렇게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자기를 미워하는지 잘 와 닿지 않았다. 고통스러워하거나 괴로워하는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숨겨둔 어두운 공간이 있고, 각자가 진 십자가가 있으므로. 다만, 내가 볼 때 당연히 행복해야 할 것 같은 사람에게,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저렇게나 아름다운 사람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추위와 우울의 근원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의 이전 책들 모두 잘 읽었지만, <구체적 사랑>에 와서야 그 마음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다. 자유분방한, 발랄한, 멋있는, 아름다워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엄마와, 그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어린 딸. 그러나 아름답고 자유분방한 만큼 옆에서 온전한 사랑을 줄 만큼 성숙하지는 못했던 엄마, 그리고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일찌감치 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어린 딸의 마음.

엄마가 자다 말고 등을 돌리면 가슴이 무너질 듯 슬펐지만, 그런 엄마를 깨울 수 없어 밤새 여러 번 자리를 바꿔가며 끝내 엄마 얼굴을 바라보려고 했던 그 마음. 누구에게도 어리광을 부릴 수 없고 스스로 온전히 감당해야 했던 어린 시절, 그런 시절을 겪은 사람이 가질 수밖에 없는 고독과 불안함. 자라서도 계속해서 사고를 치는 엄마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너무나 밉지만 동시에 너무나 사랑해서 끊어내기 어려웠던 그 마음을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 한쪽이 저릿해왔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철이 없는’ 엄마와 어려운 시절을 보냈던 그 역시도 아이들에게 종종 비난을 듣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딸은 대놓고 “엄마는 나쁜 엄마야!” 라고 말하기도 했다던가. 그러나 사실 그런 것이 생의 본질인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고통을 받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기도 하고, 절대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행동을 하게 되기도 하고, 오랜 세월이 흘러 뒤늦은 깨달음을 얻게 되기도 하고.

그의 전작들처럼, 이 책 역시 근본적으로는 ‘관계’에 대한 글들이다. 엄마와의 관계, 아빠와의 관계, 언니와의 관계, 부부 사이의 관계, 딸들과의 관계, 친구 관계. 타인과의 관계는 결국 내면을 성찰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귀결된다. 예전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 훨씬 긍정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와 같이 다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서희 작가는 누구보다 용감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사랑에 있어서건, 관계에 있어서건, 자신을 있는 힘껏 내던지고, 그런 와중에 부서지고, 무너지고, 쓰러져도, 또 한 번 일어나 매번 새롭게 도전한다.

누군가의 딸인 동시에 누군가의 엄마이기도 하며, 스스로와의 관계에 있어서 번민과 고통을 자주 겪는 내 입장에서는 마음에 와 닿고 공감이 가는 글이 참으로 많았다. 삶에 대해, 사랑에 대해,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아름다운 책. 매리언 울프는 <다시, 책으로>에서 단말기를 통해 텍스트를 읽는 것과 종이를 통해 습득하는 정보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처럼 아름답게 만들어진 책을 보면 그 말을 실감하게 된다. 내용도 물론 좋았지만, 작가를 닮아 너무나 아름다운 책을 읽으면서 책의 물성이 주는 기쁨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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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책은 많지만 실제로 다시 읽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읽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아 마음이 바쁘기 때문이다. 소장한다는 것은 언젠가는 다시 읽겠다는 의미이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그런 와중에 오랜만에 두 번 연달아 읽은 책.

1900년대 초 런던으로 이주한 서인도제도 소수자 출신 가난한 어린 여성이 우연히 부유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의 정부가 되고, 그러다 버림을 받고, 그러면서 또 다른 유사한 관계 - 연애라고 하기도, 매춘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그런 관계 - 들을 맺고, 그러면서 망가져 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

왜 두 번 읽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엄청나게 감명을 받았다거나, 마음을 울렸다거나, 고통스러웠다거나, 감정이입을 했다거나 한 것도 아니었는데.

어쩌면 동서고금 막론하고 어디서고 한 두 번쯤 들어봤을 법한 흔해빠진 서사를 이렇게 생생하고 훌륭하게 써낼 수 있었던 것과 작가의 인물에 대한 객관화가 감탄스러웠던 것 같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임에도, 있는 그대로. 심리적인 압박감을 풀어낸 표현들 역시 굉장히 독특하면서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어 매우 수동적이고 남성의 시선을 엄청나게 의식하는 주인공의 내면은 이런 방식으로 그려진다.

“머리를 제대로 말리고 나올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괜찮게 보일지 아닐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보일지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나의 4분의 3은 감옥에 갇혀 그 안을 맴돌고 있었다. 만약 그가 내게 괜찮아 보인다든가 예쁘다는 말을 했더라면 나는 자유롭게 풀려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냥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미소 지었을 뿐이다.”(94쪽)

작가 진 리스는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진 리스 역시 서인도제도에서 소수자로 태어나 런던으로 이주한 뒤 부유한 남자를 만나 경제적으로 원조를 받으며 그의 정부가 되고, 버림받고, 그의 아이를 낙태한 경험이 있는데, 그것을 이 소설 속에 그대로 녹여냈다.

소수자라고 하니 대체 뭔 소수자냐 싶지만, 진 리스는 겉모습이 백인임에도 할머니가 흑인(흑백 쿼터 혼혈)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따돌림과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디테일을 통해 당대의 인종 차별이 얼마나 공고했는지를 느끼게 되는 동시에, 빈부격차가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던 당대의 시대상, 당시나 지금이나 가난한 여성들에게는 많은 선택지가 없었다는 것,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관계는 결국 대등할 수 없다는 것, 남자들 대다수가 여성을-심지어 사랑하는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거의 인형이나 애완견처럼 생각했다는 것을, 소설을 읽으며 알게 된다.

주로 코러스걸이 직업인 극 중 대부분의 여성 인물들은 부유한 남자 한 명 잡아 한 밑천 뜯어내는 것이 목표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꽃뱀’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주인공의 선배인 로리는 대놓고 “남자랑은 말이지, 네가 얻어낼 수 있는 걸 다 얻어내고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라는 충고를 하기도 한다. 제대로 아는 여자들이라면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라면서.

‘꽃뱀’이라는 단어만 봐도 경기를 일으킬 법한 어떤 사람들은 여자들이 그렇게 남자를 ‘벗겨 먹으려고’ 드니 성적으로 쓸모가 없어지면 버림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실은 닭과 달걀의 관계 같은 것이다. 당시 가난한 여성들 대부분은 부유한 애인에게 돈을 뜯어내는 것 외에는 생계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물론 결국은 그런 과정에서 대부분은 중간에 버림받거나, 그의 아이를 낳고 미혼모가 되거나, 불법 낙태 시술을 받다가 목숨을 잃었지만.

이제는 없어진 옛 기록일 수도 있고, 여전히 누군가들에게는 현실일 수도 있는 그런 이야기. 그럼에도 ‘변명’이나 ‘한탄’처럼 느껴지지는 않는.

진 리스의 다른 책들도 전부 읽어보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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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이었나, 올 초였나, 인터넷에서 매우 흥미로운 기사를 읽었더랬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떤 여성이 11개월 간 이태원에 있는 한 식당에서 30차례 넘게 난동을 부리고, 결국 참다못한 식당 주인의 신고로 경찰에 연행되었는데, 경찰서에서도 계속 난리를 피우다가 차고 있던 생리대를 벗어서 경찰의 책상 위에 던졌다는 내용이었다. 대단히 엽기적이거나, 충격적인 그런 범죄까지는 아닌데, 뭐랄까 좀 이해가 안 가는 특이한 사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치지 않고서야 특정 식당에 30번이나 찾아가서 난동을 부린 이유는 무엇이며, 하필이면 생리대를 던졌던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식당 주인은 왜 그전까지는 가만히 있다가, 그러니까 30번이나 될 때까지 꾹 참고 있다가 그제야 신고를 했단 말인가. 이 사건이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궁금한데, 아마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대부분의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어떤 상황에 있어서건 반드시 스스로가 납득 가능한 이유를 찾아내려고 애쓴다. 헤어지자는 연인의 통보 앞에서 쿨하게 알았다고 돌아서는 대신, ‘왜 그런지 이유만이라도 알자’며 매달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들은 언제부터 그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인지, 그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기 전까지 이별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인생에서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자신이 왜 그런 상황에 처했는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한다. 하다못해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범죄의 피해자가 되거나, 자연재해를 당하거나 하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원인이 명확하지 않을수록 오래도록 상황을 곱씹으며 이유를 찾아내려고 애쓴다.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은 ‘밝혀지지 않은 이유’에 관한 책이다. 워낙 유명해서 장편인 줄 알았는데, 막상 읽어보니 4편의 짤막한 단편으로 이루어진 단편집이었다. 4편의 이야기 모두 떠난 사람들과 남겨진 사람들을 다룬다. 각각의 이야기에서는 누군가 자살, 병, 사고 등으로 인해 죽고, 남은 사람들은 그들이 ‘왜’ 떠났는지, 그때 그들이 ‘왜’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한다. 왜 죽을 이유가 없는 남편이 자살했는지, 여자아이를 꼬시러 갔던 학창 시절 친구는 왜 그다음 날부터 학교에 돌아오지 않았는지, 왜 남편은 바람을 피웠고 자신은 그런 남편을 잊지 못했는지, 어린 시절 자기 때문에 죽을 뻔했던 친구가 살아난 이후에도 왜 결국 죽고 말았는지.

표제작인 <환상의 빛>의 주인공 유미코는 끊임없이 죽은 전남편을 떠올린다. 중학교 동창이었던 남편과 결혼해 행복한 신혼을 보내던 유미코의 삶은 어느 날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진다.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와 100일짜리 아기를 남겨두고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주변의 모든 이가 의아해하는 죽음이었다.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딱히 우울해할 만한 문제도 없었고. 빚도 없었고, 더구나 그날 아침 집을 나설 때만 해도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던 남편이 왜 갑자기 기차에 뛰어들고 싶어 졌을까. 재혼을 하고, 새로운 가정에 적응하여 살아가면서도 유미코는 이러한 의문 때문에 남편에 대한 생각을 잊지 못한다.

그러나 책이 끝날 때까지 이유는 밝혀지지 않는다. 유미코는 계속해서 생각하지만, 그런 유미코에게는 놀라운 깨달음이나 통찰 대신, 현 남편의 “사람은 혼이 빠져나가는 병에 걸리면 죽고 싶어 지기도 하는 거야”라는 무심한 대답이 돌아올 뿐이다. 4편의 이야기 모두 마찬가지인데, 명확한 답이 없다. 이 소설에 대한 평이 사람마다 굉장히 갈린다고들 하던데, 아무래도 책이 끝날 때까지 무엇하나 뾰족하게 밝혀지는 게 없기 때문인 듯하다. 무언가 해답을 알고 싶어서 읽었는데 뭐야 이게? 싶을 수도 있었을 것.

참고로 나의 경우를 말하자면, 굉장히 잘 읽었다. 어린 시절 나는 뭐든지 애매한 것을 참지 못했다. 좋은 것, 나쁜 것, 옳은 것, 그른 것, 재미있는 것, 재미없는 것. 그러나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 세상에는 명확한 것보다 불명확한 것이 더 많다고 느낀다. 어렸을 때는 스스로가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파악하는데 능한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살면 살수록 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실은 그 편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니까. 돌이켜보면 나 자신이 했던 행동 중,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 훗날 어떤 식으로든 이유를 갖다 붙이고 결론을 내어보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것은 먼 훗날의 생각일 뿐인 것이다. 그때 그 당시가 아니라.

소설은 매우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인생에 있어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 한 켠이 서늘해지기도 했다. 딱히 이 소설 때문만은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생각해보면 인류의 삶도 지역별로 편차가 심하고, 한국의 상황이 이렇게 안정된 것 또한 얼마 되지 않았다. 내가 어려서와 성인이 된 지금이 이렇게나 다른데, 노인이 된 세상은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들고, 내 아이들이나,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자랄 때까지 지금의 세상이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든다. 그런 생각들이 이어지다 보면 조금 무서워진다.

책을 읽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도 보았는데, 영화 역시 책만큼 좋았다. 불안하고, 아련한 느낌이 책 보다 더 강조되어 있었다. 고레에다 감독의 최근 작품들과는 인물이며 화면을 다루는 방식이 많이 달랐지만, 다른 의미에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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