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릴 때의 이야기이지만, 도둑질을 한 적이 있다.

동네 어귀에 문방구와 서점을 겸하는 가게가 있었는데, 일반적인 문방구들보다는 규모가 꽤 큰 편이었다. 1층은 문구, 지하는 서점. 책을 좋아했던 나는 학교가 끝나면 이 곳에 들러 일차적으로는 일층에 있는 동물 샤프 및 각종 스티커를 구경했다. 개당 일만이천원씩 하던 동물 모양 샤프는 아이들 사이에 잇템이었지만, 가격이 가격이니만큼 언감생심이었다. 그래도 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내 것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중에 세뱃돈을 받으면 꼭 하나 살 텐데 그때 무엇을 고를지 한참 동안 망설이지 않으려면 미리 봐 두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서, 오랫동안 진열장에 들러붙어 구경하곤 했다. 그러다 질리면 지하에 있는 서점에 서서 책을 읽었다. 거의 매일같이 그랬다.

어느 날인가는 샤프를 구경하고 지하로 내려가려고 가는 길에, 계단 입구에 주르륵 걸려있는 연예인 스티커를 보았다. <사랑을 그대 품 안에>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던지라, 차인표가 환한 미소를 짓고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한 채 동그라미, 네모, 하트, 별표 모양의 스티커에 인쇄되어 천 원에서 3천 원의 가격표를 달고 주르륵 걸려 있었다. 평소 같으면 지나쳤을 것을, 그날따라 괜히 한 번 꺼내서 만져봤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고, 카운터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스티커를 옷 안으로 집어넣었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사실 나는 그 드라마를 보지도 않았고, 차인표를 전혀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게다가 스티커는 전혀 갖고 싶었던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스티커를 옷 속에 감춘 채로 지하의 서점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렇게 시작된 도둑질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사실 뭐 대단한 것을 훔치는 것도 아니었다. 대개 엽서, 편지지, 스티커 같은 자잘한 것들. 꼭 필요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계속해서 가져갔는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고, 초등학생의 수상쩍은 행동이야 빤한지라,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어느 날인가는 결국 발각되고 말았다. 몇 시간을 구석에 무릎 꿇고 손들고 앉아 벌을 받다가, 집으로 돌려보내 졌는데, 다음날까지 반성문과 벌금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벌금은 물건 값의 10배였다. 3천 원짜리 편지지를 훔치다가 걸린 나는 다음날까지 3만 원을 마련해야 했다. 부모님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결국 고민하다가 몰래 아빠의 지갑에서 3만 원을 꺼냈다. 지갑에는 그날따라 돈이 두둑이 들어 있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발각되지 않았을 것인데, 이게 사실은 더 큰 불행이었다.

다음날 서점에 돈과 반성문을 제출한 뒤, 이번에는 부모님의 지갑에서 야금야금 돈을 꺼내기 시작했다.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진짜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면서. 처음 한두 번이야 어라? 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반복되면 그건 누군가의 소행이 틀림없다. 그러니 이 역시 걸리지 않을 턱이 없다. 결국 부모님에게 발각되고, 정말로 엄청나게 혼이 나고, 매우 많이 맞았다. 너무나도 창피하고, 수치스럽고, 민망하고, 부끄러운데, 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했다. 아, 이젠 정말 멈출 수 있겠구나. 이제 도둑질을 그만둘 수 있겠구나 하고 왠지 모르게 어느 한쪽 구석에 안도하는 마음이 있었다.

<종이달>은 도둑질을 소재로 한다. 주인공 우메자와 리카는 계약직 은행원으로, 부유한 고객의 집을 돌며 수금도 하고, 예금 등의 계약도 따내고, 간혹 고객이 요청하면 현금을 인출해 가져다주는 등의 일을 한다. 본래 알뜰한 성품으로 신용카드조차 없었던 그녀는, 어느 날 고객의 집에서 은행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휴식을 취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 백화점에 들르는데, 거기에서 화장품 가게 직원의 권유에 자기도 모르게 가게에 발을 들이고, 결국 분위기에 휩쓸려 5만 엔어치의 화장품을 사기에 이른다. 문제는 그때 그녀의 지갑에는 3만 엔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왠지 모르게 직원에게 그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던 리카는 그날 수금한 고객의 돈봉투에서 2만 엔을 꺼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가서 자신의 계좌에서 인출해서 돌려놓으면 되지 하는 가벼운 생각이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지만, 그날의 작은 사건은 마치 나비효과처럼 줄줄이 점점 더 큰 사고를 불러온다.

리카는 자신을 은근히 무시하는 남편에게 주눅 들어 지내다가 우연히 고객의 손자인 연하의 애인을 만나게 되고, 이런 과정에서 애인의 빚을 갚고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애인에게 자신의 사정을 꾸미기 위해서 점점 더 많은 돈을 쓰고, 그 과정에서 고객의 돈까지 손대게 된다. 그렇게 한 번 시작된 횡령은 멈출 줄 모르고 점점 규모가 커진다. 리카는 늘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차근차근 갚으면 된다는 다짐을 하며 성실하게 장부까지 기입하지만, 한 번 물처럼 빠져나가게 된 돈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심지어 한 고객의 요청으로 인출해서 가지고 갔다가 해당 고객이 치매 증상을 보이는 것을 보고 그대로 자신의 가방에 넣고 돌아와 버린 5백만 엔은 특급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흥청망청 하는 사이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다. 한국돈 5천만 원이 불과 일주일 사이에 사라진 것이다. 너무나도 허무하게. 정말 거짓말 같이.

누가 봐도 바보 같고, 어리석고, 멍청하고, 비도덕적인 그런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보고 있자니 어렸을 때의 그 경험이 너무나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처음은 어려웠지만 그다음부터는 습관이 되어버리고, 이후에는 마치 중독처럼 계속해서 빠져들다 보니, 차라리 누군가에게 강제로라도 발각되면 좋겠다 싶은 그런 행위를 하는 마음. 이는 사실 세간에서 말하는 비윤리적인 행위 모두에 일반적으로 해당되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마약, 도박, 성범죄, 애인 몰래 바람을 피우는 행위 등등. 그러한 경험들도 대부분 처음에는 딱 한 번 만이라고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계속 이어지고,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허무한 다짐이 소용없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살면서 종종 ‘나쁜 짓’ 불법은 아니지만 비윤리적인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기회가 없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단호하게 고개를 돌렸다. 무엇보다 스스로가 무언가를 쉽게 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한 번 시작하면 멈추지 못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종이달>은 인간의 나약함, 연약함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었는데, 플롯이며 내용은 거의 동일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영화 쪽이 훨씬 더 많이 공감이 되었다. 주인공 리카의 심리는 책에서 더 많이 드러나긴 하지만 리카의 비도덕적인 행위의 정당성(결혼생활의 공허함과 인정 욕구의 부재 등)을 입증하기 위해 남편 캐릭터가 지나치게 이상하게 그려져 있다. 리카가 선물을 해주면 일부러 더 비싼 선물을 사서 기를 죽이려 든다든지, 어떤 식당에 데려가면 다음날 더 비싼 식당에 데려간 뒤 “어제 간 곳보다는 훨씬 먹을만하지?” 하는 식으로 부인을 기죽이고 마치 경쟁이라도 하는 양 행동하는데, 물론 세상에는 다양한 인물이 있으니 이런 사람이 없다고는 못하겠으나 전반적으로 좀 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에서는 이런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이 설정이 다소 과하다고 느꼈던 이유는, 사실 인간이란 딱히 엄청난 계기가 없더라도 정말 아무렇지 않은 이유로, 무심결에 나쁜 짓을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생이 허무해서, 혹은 뭔가 커다란 결핍이 있는데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 또는 어떤 강렬한 욕구가 있지 않더라도, ‘어쩌다 보니’ 그런 일들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어쩌다 보니 돈을 횡령하고, 어쩌다 보니 바람을 피우고, 어쩌다 보니 도박을 하고, 어쩌다 보니 살인을 하고, 어쩌다 보니 도둑질을 하고 등등. 혹시나 오해할까 봐 적어두지만, 저런 행위가 모두 동급이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정당하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인생이란 어떤 순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무심결에 한 선택으로 완전히 망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언덕에서 굴러 떨어지기 시작한 돌멩이처럼 그렇게 상황에 떠밀리고, 그러다가 파멸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인간이란, 그리고 인생이란 그렇게 나약하고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그런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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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시작됐던 소설 수업이 여름이 시작할 무렵 끝이 났다. 한 달가량 쉬었다가 지금은 또 다른 수업을 듣고 있다. 봄의 수업은 아주 짧은 초단편소설 쓰기반, 새로 시작한 것은 일반적인 분량의 단편소설 쓰기반.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듣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이야기의 구조를 파악하고 행간을 읽는 것까지 배우면서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마침 지난주에는 정이현 작가의 단편소설을 읽고 비평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정이현 작가는 중산층의 위선을 고발하는 작품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수업시간에 듣자 하니 데뷔했을 당시 문단이며 평론계에서 아주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모름지기 문학이라면 가난하고, 비참하고, 없이 사는 사람들만 하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소설을 쓰다니!! 문학은 마음이 비참하고 결핍된 자들만 다룰 수 있는 것으로 알았건만 강남에서 출생하고, 내내 강남에서 성장하고, 여전히 강남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그런 사람들의 가슴속에도 결핍이 있었다니!!!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그녀의 작품을 ‘강남 문학’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그런데 읽어본 사람들은 아마도 알겠지만, 정이현의 이야기 속 인물들, 남들이 보기에는 부족한 것 하나 없이 보이는 그들의 삶도 사실 여타의 문학작품 주인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네처럼 어딘가 결핍되어있고 불안하다. 현재의 행복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과, 그것이 깨지려 할 때의 번민, 그러면서 마음속의 윤리적 잣대를 아무렇지 않게 져버리고 스스로를 기만할 수 있는 위선, 그 이후에 찾아오는 고통, 겉으로는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지만 안으로 파고들면 속에서부터 썩어가고 있는 그런 삶이 너무나 잘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이야기했다. 사실 인간은 다 비슷한 것 같다고. 누가 봐도 행복해 보이면서 고민 따위는 하지 않고 살 법한 사람의 이면에도 불안과 결핍은 있다고.

사실 이 불안과 결핍,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은 내 마음속에도 늘 있는 것이기에 그 말이야 새삼스럽지 않았는데, 선생님이 이어서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반면에 남들 눈에는 아주 비참하고 불행해 보이는 삶이라도, 그 안으로 들어가면 아주 아주 실낱같은 기쁨과 즐거움이 있을 수 있다고. 그 말이 왠지 오래도록 가슴에 머물렀다. 사실 대부분의 위대한 문학작품은 결국 두 가지로 나뉘는지도 모르겠다.
기쁨 속의 슬픔, 혹은 슬픔 속의 기쁨.

애니 프루의 <시핑 뉴스>는 아마도 두 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일 것이다. 애니 프루는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원작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이 <시핑 뉴스>가 대표작이라고 한다. 한국에는 1994년 처음 소개되었던 이 작품은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가 14년 만인 2008년에 개정판이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올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에서도 새롭게 출간되었고. 특이한 점은 그렇게 총 3차례나 출간되는 과정에서의 번역자가 모두 동일인이라는 것. 역자인 민승남 번역가는 초판의 번역이 엉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심혈을 기울여 처음부터 다시 번역을 했다고 한다.

하여간 이 <시핑 뉴스>의 초반부를 읽다 보면, 주인공 쿼일만큼 세상에 불쌍한 사람도 없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못생긴 외모와 우둔한 머리로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외면받고, 학창 시절에는 친구 한 명 없이 따돌림을 당한 데다가, 어렵사리 구한 직장에서는 개무시를 당하고, 먼 훗날 인생의 사랑인 줄 알고 만났던 아내는 허구한 날 바람을 피운다. 그렇게 가뜩이나 되는 일 하나 없는 처지에, 바람피우러 나간 아내가 한술 더 떠 차 사고를 당해 죽어버리기까지 했으니 이 이상 불행할 수가 없다. 바람피운 아내가 죽은 게 뭐가 불행하냐고 의문이 들 수 있겠으나, 이 쿼일이란 작자는 매일 대놓고 다른 남자를 집안으로 끌어들여 눈앞에서 섹스를 하는 아내에 대해서, 결코 사랑하는 마음을 단념하지 못하는 바보이자, 그만큼 달리 마음 둘 곳 없이 외로운 인물이었던 것이다.

아내가 죽은 이후 슬픔과 상실감으로 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쿼일은 고모의 권유로 두 딸을 데리고 아버지의 고향땅으로 이주한다. 메마르고 척박하여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아 나가는 사람은 많아도 새로 들어오는 사람은 거의 없는 그런 곳. 농사도 짓기 어렵고 배가 없으면 생활조차 힘든 고난의 땅. 그런 곳에서 쿼일은 고모와 두 딸과 함께 무너져가는 집을 애써 고치고, 코딱지만한 지역 신문사에 취직을 하고, 배 타는 법을 배우고, 사람들과 친해지며 조금씩 적응해 나간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점차 글쓰기 능력을 인정받고, 다운 증후군 아들을 홀로 키우며 살아가는 마음씨 착한 여인을 만나기도 하고, 아주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찾아나간다.

그와 같이 소소한 에피소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실은 엄청 스펙터클하다거나 뭔가 장엄한 서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중간에 뭔가 긴장이 고조될 법한 순간이 있긴 했지만, 그 역시 조금 지나고 나면 그냥 사소한 떡밥일 뿐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하고. 아마 영화로 만들게 되면 말 그대로 ‘드라마’ 장르가 될 것이다. 그렇게 큰 굴곡 없는 플롯이었다. 그럼에도 나락에 떨어졌던 한 명의 인간이 어떻게든 묵묵하게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던 점이 참으로 좋았다. 근래에는 드물게 읽은 해피엔딩이었기도 하고.

사실 해피엔딩이라고 해도, 여전히 이 책을 읽게 될 대다수의 사람들보다는 훨씬 힘겹고 버거운 삶일 것이다. 가족의 비밀, 그것도 아주 환멸나는 비밀을 알아버렸고, 두 딸은 여전히 말을 더럽게 듣지 않고, 새롭게 가족이 된 다운 증후군 아들을 키우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쉽지 않은 일일 것이며, 지역은 쇠락하고 있고, 간신히 가까워졌다 생각한 친구들은 하나둘씩 다른 세상을 향해 떠나가고 있고, 신문사 역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희망적인 마음으로 책장을 덮을 수 있는 까닭은 이후로도 쿼일이 그렇게 계속 성실하게 매일을 버텨낼 것이고, 그런 가운데 소소한 기쁨을 찾는 날들이 있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행복은 결국 견디어내는 힘에 달려있는 것 같다. 굳이 이겨내거나 극복하려고 애쓰는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만히, 묵묵히 견디는 힘.

직접 읽어보니 번역이 아주 까다로웠다는 역자의 후기가 이해가 됐다. 문체가 마치 노랫말이나 시처럼 리듬감이 풍부해서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추천받아 알게 된 책이었는데 아주 재미있고 흥미롭게 잘 읽었다. 나이가 들수록 용기와 희망에 대해 말하는 책들이 점점 더 좋아진다. 인생이 짧고 허무하다는 것을 점점 더 실감하고 있는 것과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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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는지는 가물가물한데 아마 대학생 때였지 싶다. 실연 당해 질질 짜고 있던 나를 향해 아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여자들은 왜 그렇게 사랑에 목을 매는지 모르겠다고. 사랑 따위 별거 아니라고.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런데 여자들은 사랑을 너무 큰 것으로 생각한다고. 실연당해 우는 딸을 위로하겠다는 마음에서 한 이야기치고는 표현이 지나치게 직설적이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그때까지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주변의 많은 여자친구들이 사랑에 굉장한 중점을 두고 있었다. 대화의 화제는 주로 애인과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수렴하기 일쑤였으며,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성애적) 사랑이었다. 행복의 절대 조건은 ‘진정한 사랑’을 만나는 것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남성들 역시 연애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어떤 면에 있어서는 훨씬 더 강한 집착을 보이고는 했지만, 여성들과는 바라보는 관점이랄까, 삶의 철학 자체가 꽤나 차이가 났다. 그러니까 남성들에게 있어 연애는 삶에서 20% 정도의 비중에 불과한 반면에, 여성들에게는 70% 이상 차지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째서일까? 왜 여자들과 남자들이 사랑을 대하는 태도나 철학이 차이가 날까? 아빠의 말을 들으면 마치 여자들에게 타고난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로 그럴까? 정말로 유전자의 차원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사랑에 더 집착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진화심리학적으로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거쳐 정착에 적합하게 설계되어 있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죄다 헛소리라 생각한다.

성별이 다른 두 아이를 키우면서 깨닫게 된 점이 있다. 여성과 남성을 위해 만들어진 콘텐츠가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것이다. 남자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콘텐츠를 살펴보면 대부분 모험, 대결, 성장에 관한 이야기로 수렴한다. 헬로카봇의 주인공 차탄은 가족들과 주변인들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영웅처럼 기지를 발휘해 온갖 일을 해결한다. 차를 타고 하늘을 날며 악당을 물리치고 시공간을 이동한다. 팽이로 대결하는 베이블레이드의 주인공들은 오로지 적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반면에 여자아이들이 가장 많이 보는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콩순이, 콩순이의 세계는 좋은 말로 하면 아기자기하고 나쁜 말로 하면 협소하다. 콩순이는 엄마가 외출한 동안 동생을 돌보아주고 동생과 엄마의 화장품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도 하며 놀이터에서 친구를 만나 새 옷을 입은 장면을 보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철없고 서툰 아빠를 놀리며 웃기도 한다.

한 때 아이를 키우는 모든 가정의 구원자라고 여겨졌던 뽀로로 역시 마찬가지이다. 뽀로로에서도 남자 캐릭터로 비치는 뽀로로와 크롱은 늘 모험을 하거나 말썽을 부린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여자 캐릭터인 루피는 케이크와 빵을 굽고 주변 친구들을 돌보고 때로는 잔소리하는 엄마처럼 야단을 친다. 패티라는 새로운 친구가 왔을 때는 질투하는 모습도 보인다.

나를 포함하여 내 또래의 여성들은 대개 어린 시절 공주 이야기를 보며 성장했다. 사악한 계모의 괴롭힘에 시달리면서도 어느 날 반드시 나만의 왕자님이 나타날 것이라 노래를 부르며 황홀한 표정을 짓는 공주를 보면서, 괴물에게 끌려간 공주를 언젠가 반드시 왕자가 나타나 구원한 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그 수많은 이야기를 보면서 성장했던 것이다. 그 이야기는 우리의 무의식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생각해본다. 사랑을 지상 최고의 가치로 믿게끔 하는데 정말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성인이 된 뒤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성들이 <대부> 같은 영화를 보며 마피아 수장의 카리스마에 감탄하고, 순진한 청년이 냉혹한 마피아로 탈바꿈하여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에 전율을 느끼고, 그러면서 적에게 복수를 하는 장면에서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삶과 죽음에 고뇌하는 사이, 여성들은 <귀여운 여인>을 보면서 나한테도 저런 ‘왕자님’이 등장하기를 꿈꾸었던 것 같다.

누가 남성들은 <대부> 보고 여성들은 <귀여운 여인> 보라고 정해둔 적 있나? 각자 취향에 맞추어 자기가 좋아하는 것 보았을 뿐인데, 사용자들이 그런 컨텐츠를 원하니 만들었을 뿐인데 어쩔 것이야! 하고 되묻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과연 그 컨텐츠에 암묵적인 사회의 압력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두 가지 영화를 보면서 시청자가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캐릭터의 성별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지금에 와서 나는 그런 점이 궁금해진다.

김진아의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는 이와 같이 각종 컨텐츠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주입된 성역할을 극복하려 애쓰고, 그런 과정에서 여성으로서 자기 자신 안에도 여성 혐오가 있음을 인지하고 극복하는 과정에 대한 에세이다.

‘울프소셜클럽’이라는 카페를 운영하는 저자는 본래 잘 나가던 고액 연봉의 카피라이터로 직업적으로도 잘 나가면서 아름다운 외모를 가꾸고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들처럼 화려한 연애를 하는 문자 그대로의 ‘골드미스’였다. 그러나 그랬던 그녀 역시 위로 올라갈수록 여성이라는 성별로 넘어설 수 없는 단단한 벽과 성별에 따른 엄청난 격차를 인지하고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하게 된다.

그녀는 한때 ‘바이블’처럼 숭배했던 섹스 앤 더 시티가 사실상 여성들에게 얼마나 해로운 컨텐츠였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미드 섹스 앤 더 시티는 얼핏 여성들 역시 섹스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고 전문직으로 잘 나갈 수 있으며 자신이 번 돈을 자신을 위해 거침없이 투자하는 듯 그려두었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남성에게 목메고 잠시도 남성 없이 생활하지 못하는 컨텐츠에 다름 아니라고. 시청자들은 그런 그들을 지켜보며 그들을 동경하는 동시에 그들의 캐릭터를 내면화하며 실상 각자의 야망과 재능이 무엇이건 간에 연애와 결혼이 여성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이슈라 여기게 된다고.

한 때의 열렬한 애청자로서 동감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 외에도 여성들 간의 연대, 탈코르셋 등 페미니즘 관련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데 굉장히 힘 있고도 명쾌한 시각이 인상적이었고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다.

한편으로 평소 나의 생각보다는 조금 더 급진적인 측면도 있어 모든 면을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예를 들어 외모 권력은 여성에게만 적용되고 남성에게는 예외라는 주장이라든가 (남성에게 더욱 관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남성이라고 모두가 자유롭지는 않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는 부분들. 전반적으로 ‘고학력’, ‘고연봉’ 출신의 엘리트 여성이 하는 이야기이다 보니, 주제가 페미니즘이라 하더라도 담론 자체가 중산층 엘리트 여성을 위한 것으로 치우쳐 있는 것도 다소 아쉬웠고, 그러나 이는 책의 볼륨이나 저자의 배경을 생각할 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도 든다.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따로 있으므로 부족한 부분은 또 다른 목소리를 통해 들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며칠 전 본 기사에서, 최근의 여성들은 명품 가방과 꾸밈비용에 지출을 대폭 줄이고 자동차와 부동산 같은 실질적 재산에 돈을 투자하기 시작했다고 나오던데, 이 책을 읽었던 것이 떠오르며 여러모로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라는 환상과 남성에게 욕망당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난 여성들이 이후 어디로 도달할지 많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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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부커 수상작인 리처드 플래너건의 소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태국-미얀마 사이를 잇는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노역하던 전쟁포로들의 삶을 다룬다. 소설 속에서 지배자는 동양인인 일본인, 피지배자는 서양인이라는 점이 기존의 많은 전쟁 서사들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특이점은 소설 속에 한국인 캐릭터도 등장한다는 것인데, 우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에 한국인이 등장한다니! 하고 국뽕에 심취하기는 아직 이르다.

전쟁 포로의 삶이 참혹한 것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그런 그들 사이에서도 하사 고아나는 유난히 악명이 높다.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수행하는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고아나는 포로들을 거침없이 구타하고 고문한다. 그런 고아나는 훗날 전쟁이 끝나자 상관들의 죄까지 모두 뒤집어쓴 채 전범재판의 법정에 서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 그의 본명이 밝혀진다. 그의 진짜 이름은 최상민, 즉 악독하기 그지없었던 일본인 하사의 정체가 다름 아닌 식민지 조선에서 차출된 조선인이었던 것이다. 정작 위에서 명령을 내렸던 상급 장교들이 죄다 일본으로 돌아가 멀쩡하게 살아가는 동안, 최상민은 그렇게 교수형에 처해진다.

최상민에 관한 대목을 읽으면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을 떠올렸다. 영화 박하사탕은 주인공 영호가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시간을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온갖 폭력과 기행을 일삼는 영호의 행동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던 관객은, 그가 젊은 시절 군생활을 하던 당시 80년 5월 광주에 투입되고, 그곳에서 명령을 수행하던 중에 사람을 죽이게 되었고, 그때부터 정신이 점차 망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순수했던 청년이 트라우마로 인해 악독한 고문을 일삼는 형사가 되고, 결국은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삶.

여기에서 질문. 플래너건의 소설 속 최상민은 피해자인가, 아니면 가해자인가. 참고로 소설 속에서 최상민에 관한 에피소드는 아주 일부일 뿐이다. 그가 일본 군대에 강제로 차출되었는지, 자발적으로 지원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자발과 강제의 차이가 그들이 구조적으로 피해자였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최상민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는지, 명령을 거부할 방안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있었다고 한들 최상민이 홀로 교수형에 처해진 것은 사실이다. 동시에 그가 무조건 구조의 피해자라고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실제로 포로들을 대상으로 폭력과 고문을 행한 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으므로.

박하사탕의 영호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호는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영호 또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5월의 광주로 투입되어 부당한 명령을 받고 사람을 죽이게 되었으나, 그렇다고 그가 사람을 죽인 사실이 사라지지 않는다. 형사로 일하던 당시 피의자들을 고문한 사실과 망나니처럼 살았던 세월 또한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호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과 <박하사탕>을 보는 괴로움이 여기에서 나온다.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가 뚜렷하게 구분된 세상에서는 불편함이 없다. 선을 칭송하고 악을 처단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러나 최상민과 영호의 사례만 보더라도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러므로 독자와 관객은 단순하게 분열되지 않은 세계를 바라보는 과정에서 심리적인 갈등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임지현의 <기억 전쟁>은 이와 같이 피해와 가해의 경험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관한 책이다. 각자가 처한 위치와 상황에 따라 같은 사건을 두고도 얼마나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인류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존재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류의 트라우마가 되다시피 한 주요한 비극을 둘러싼 담론들을 보면서, 역사란 참으로 반복을 거듭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집단이란 얼마나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존재인지를 실감했다.

일례로 홀로코스트의 참담함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아주 무자비할 수도 있다는 것, 수많은 베트남 시민들을 죽이고 여성들을 강간한 이력이 있는 한국인들이 오로지 일본에 대해서만 핏대를 세우고 비판하고 있다는 것, 한국을 비롯하여 동아시아를 압제했던 일본이 그런 기억은 부정한 채로 원폭의 피해자성만 호소하는 현상 등등을 보다 보면, 저러한 모습이 비단 한 국가의 특징이라든가, 개개인의 인성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집단의 대단히 보편적인 특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계는 늘 민족과 집단을 강조한다. 히틀러와 나치가 유난히 사악했던 것이라고, 스탈린이 나쁜 놈이었다고, 일본은 상종 못할 악랄한 민족이라고 말이다. 사실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선악이 불분명한 세계는 두렵고, 무섭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엄청난 악을 저지른 사람이 나와 내 가족과 내 친구와 같은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인간의 인지 시스템은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믿기 위해 시선을 외부로 돌릴 수 있도록, 외부의 ‘악’이 우리를 망쳤다고 믿도록, 끊임없이 공공의 적을 만들고 집단을 단속하는 것이다.

사실 한국만 하더라도 그렇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는 엄청난 분노를 보이지만, 정확히 같은 시스템으로 전개되었다는 국내의 ‘기지촌 성매매 여성’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는 놀랍도록 드물다. 일본군 위안부의 경우 ‘꽃과 같은 우리의 소녀들이 사악한 일본놈들에게 겁탈당한 사건’이라면, 기지촌 성매매 여성 사건은 그저 ‘성매매 여성들이 우리의 우방인 미국인에게 몸을 팔다가 조금 고생한’ 정도의 사건이 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기지촌 성매매 여성의 피해 사실을 옹호할 경우 일본군 위안부를 둘러싼 담론이 흐려진다며 격렬히 항의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 약자들 간에 서로의 피해자성을 둘러싸고 경쟁하다시피 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 아니다. 동유럽에서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가 스탈린의 압제의 기억을 분산시킨다고 항의하는 목소리도 높았다고 한다. 하다못해 현대에 와서, 아주 가깝게는 페이스북 등지에서 노동운동에는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여성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러나 아픈 기억과 역사는 책에서도 등장하다시피 어느 한쪽을 강조한다고 해서 다른 한쪽의 기억이 지워지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며, 서로 연대가 필요한 부분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아픔에 주목하고 강조하기 위해 타자의 아픔을 무시하지 않고, 자신의 아픔을 바탕으로 타자의 아픔까지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연대가 이루어지고, 아픈 과거가 반복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야말로 이 책을 꿰뚫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고.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살면서 늘 느끼는 것은, 세상에는 생각보다 분명한 것이 상당히 드물다는 것이다. 선과 악, 흑과 백, 명과 암, 뚜렷하게 나뉘는 것이 거의 없다. 사람은 단순하면서 복잡하다. 한 가지 사건에 때로 수백 가지의 맥락이 얽혀있기도 하고, 한 줄로 축약되는 역사는 사람에 따라 수천수만 가지의 서사를 갖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책을 읽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이 복잡하고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 정말 훌륭한 책이었다. 올해의 책 중 한 권으로 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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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데이비드 실즈 지음, 김명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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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친정에서 며칠밤을 묵을 때의 일이다. 밤에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헉헉대는 짧은 호흡과 무언가 둔탁한 것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 뭐지 하면서 봤더니 깜깜한 거실 한복판에서 할머니가 이상한 동작을 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앉았다 일어섰다, 팔을 공중으로 뻗었다 오므렸다, 다리를 벌렸다가 모았다, 전후 좌우로 허리를 돌리면서.

다음날 엄마에게 이야기하자 엄마가 별거 아니라며 말했다. 운동하시는 거라고. 오래 살기 위해서 그렇게 매일 밤 30분도 넘게 운동을 하신다고. 당시에 그 이야기를 듣고 약간 벙쪘는데, 그렇게 나이 든 노인에게도 생에 대한 집착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그때 할머니의 연세가 94살이었던가 그랬다. 할머니는 그때부터 2년쯤 후에 돌아가셨는데, 이후로도 할머니를 생각하면 늘 그때의 모습이 떠오른다.

20대의 나는 젊음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전에 한창 유행하던 섹스앤더시티라는 드라마에는 주인공 사만사가 음모에 하얀 털이 난 것을 보고 경악한 뒤 성형외과에 가서 얼굴에 이런저런 강력한 시술을 받았다가 부작용에 시달리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아마도 급격히 진행된 노화를 보고 위기의식을 느껴 외면을 더욱 가꾸려는 시도였을텐데, 당시에 그걸 보면서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지금 그대로도 멋지고 아름답고 예쁜데 왜 저러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오히려 추접스럽다는 걸 모르나?

그렇다. 그때 당시에는 젊은이든 늙은이든 각자 자신의 나이에 맞춰 거기 어울리게 살아가면 되는 것을 왜 그렇게 집착하는가 이해하지 못했다. 젊음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고, 늙는 것을 두려워하고, 세월의 흐름에 전전긍긍하는 이들의 마음을 다소 추접스럽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이 들어서 저러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 모든 ‘이해할 수 없음’은 나 자신이 ‘노화’가 어떤 상태인지를 정확하게 몰랐고, 또 알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30대 중반이 되면서, 흰머리가 늘어나고, 조금만 방심하면 허리의 선이 둔탁해지고, 간혹 길을 걷다 마주치는 말 그대로 ‘싱싱한’ 젊음들과 나 자신이 점차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마다 그때의 나를 떠올린다. 물론 20대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좋고, 더 안정적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뭐랄까 나 자신이 어떤 ‘기준점’과 ‘주류’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체력은 서서히 떨어지고, 기억력도 감퇴하고, 주름살은 늘어나고, 더 이상 ‘인생에서 주인공이 아닌 듯한’ 그런 기분. 고작 30대에 불과한 내가 이러니, 40대, 50대, 60대들은 아마도 더할 것이다. 인정받지 못하는 느낌, 배제되는 느낌, 낙오되는 느낌.

물론 오늘날의 20대들은 너무나 힘든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이 말을 잘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인간의 삶에 있어서 암묵적인 주인공은 20~30대라고 늘 생각해왔다. 소설, 드라마, 영화 속 주인공들이 그렇고, 어떤 소비층, 주류 문화의 주역은 늘 그 나이 때의 사람들이었다. 이때 실제 해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20대라는 것은 인류 전체에게 있어 ‘젊음’과 ‘절정’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그 자리에 있을 때는 왜 그것에 그토록 집착하고 매달리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그 자리에서 서서히 벗어나면서부터, 체력이 떨어지고, 외형이 바뀌고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서서히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죽음에 관한 에세이다. 저자인 데이비드 실즈의 아버지는 97세로, 에세이를 집필하는 당시는 물론 마지막 에필로그 단계까지도 살아있었다. 이 에세이가 나온 것도 벌써 몇 년 전이니 지금은 어떨는지 모르지만. 그는 태생부터 굉장히 정력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인물이었다. 심지어는 90대가 되어서도 하루에 몇 시간씩 운동을 하고 여자 친구를 사귈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어떤 ‘활기’가 장수의 굉장히 중요한 요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실제로도 이러한 ‘활기’는 어떤 강인한 정신이라든가, 육체활동으로 이어지기 마련인데, 장수에는 이와 같은 요소들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책은 아버지와의 에피소드 외에도 여러 가지 과학적 통계와 자료를 통해 생물의 노화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나는지, 인간의 육체가 시간이 흐르며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이야기한다. 호르몬과 유전자에 관한 내용이 많이 등장하면서 진화심리학자들이 기뻐할 만한 내용도 꽤 되고, 그러면서 읽으면서 불편하다고 생각되는 대목도 있었는데, 이는 인간 역시 동물의 일종이란 측면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도 같다. 사회화의 과정은 배제하고 철저하게 생물의 본능적인 부분에 집중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며 발생하는 여러 가지 노화의 과정, 다른 생물들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는지, 우리는 왜 태어났고 왜 죽는지에 관한,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매우 철학적이고 우아한 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반적으로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김명남 번역가의 훌륭한 문장을 통해 저자의 유머감각이 돋보이는지라 소소한 웃음 포인트도 꽤 된다. 곤충이나 동물 등은 자신이 죽을 것을 뻔히 아는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죽지 않으려고 저항을 하는데, 그와 같이 생을 이어가는 것, 그리고 유전자를 남기고자 하는 것은 생물로서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같은 선상에서 인간의 젊음에 대한 집착 또한 계속 살겠다는 생에 대한 의지이기에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노화는 곧 죽음이므로.

저자의 아버지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면, 저자의 아버지 역시 몸이 무너지고, 정신도 흐려지는 와중에도 매일 30분씩은 발을 질질 끌면서라도 운동을 했다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나이가 들고 더 오래 살수록 생에 대한 집착은 강해지기 마련인데, 시간이 흐르고 신체와 정신의 기능이 쇠퇴함에 따라 성욕도, 창작욕도, 사회적인 인정 욕구나 명예욕도 사그라들고, 그러면서 자연히 모든 욕구가 신체를 편안하게 만들고, 계속해서 생존해나가는 그 자체에 집중되기 때문인 것도 같다. 저자는 아버지의 사례를 들며, 97세가 된 아버지의 세계는 몸 안에 갇혀 버린 것 같다고 말한다. 신체의 기능이 너무 떨어져서 육체가 곧 감옥처럼 작용하므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자체가 투쟁인 것이다.

인상깊었던 대목 하나.

한때 자위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정액을 분출하지 않음으로써) 매우 오래 살았다는 스님들의 이야기가 도시전설처럼 돌아다니곤 했는데, 책을 읽고 나니 그게 영 터무니없는 말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는 거세를 한 수컷 생물들이 하지 않은 생물보다 오래 살았다는 내용, 번식을 하지 않은 곤충들이 그렇지 않은 곤충보다 오래 살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번식을 하고, 성적 에너지를 분출하는 것은 그런 면에서 생명을 조금씩 갉아서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장수의 조건 중 하나가 규칙적인 성생활이라는 데서 다소 모순되기도 하지만)

엊그제 우연히 ‘비동의 간음죄’ 관련해서 어떤 남성분이 저 법안이 통과되면 어디 여성들이랑 성관계 무서워서 하겠느냐고, 그냥 불알을 잘라내고 고자로 사는 게 낫겠다고 일갈하는 댓글을 보았는데, 그분에게 장수의 욕망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농담이 아니라 장수를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서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지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자르세요, 그냥. 자르면 오래 살 수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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