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걸 비포
JP 덜레이니 지음, 이경아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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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덜레이니의 <더 걸 비포>, 올해 읽은 최악의 책이다. 휴가 때 들고 간 게 이것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더 스크랩>이었는데, 둘 다 가볍게 읽기 좋을 듯해 골랐지만 완전 대실패. 하지만 들고 간 게 저 두 권뿐이었던 덕분에 어쨌든 끝까지 읽긴 읽었다는 것.

<더 걸 비포>의 경우 제목과 표지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전형적인 칙스릴러이다. 본격적으로 책 이야기를 하기 전에 칙스릴러에 대해 먼저 말하자면,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장르의 일종으로, 할리퀸에 살인이나 사이코패스 등의 위험 요소를 끼얹은 스릴러라고 할 수 있다. 매우 뻔하지만 그 뻔한 느낌이 의외로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준다. 적당히 자극적이기도 하고. 그야말로 문방구에서 쫀드기 같은 불량식품 사 먹는 기분으로 가끔씩 본다. <걸 온 더 트레인>처럼 아주 훌륭한 오락소설들이 간간이 있다.

장르소설들이 다 그렇지만 한 번 이런 소설을 쓰기 시작한 작가들은 계속 비슷한 작품을 쓴다. 더글러스 케네디가 쓰는 소설들도 크게 보면 이런 장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작가의 성별에 따라 소설 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남성 작가:
순수하고 착한 소시민적인, 아마도 작가 본인을 투영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남자가 주인공. 그림, 글, 사진 등 소소한 취미이자 남몰래 갖는 꿈이 있음. 큰 거 안 바라고 행복하게 사는 게 목표인데 남자의 아내는 그런 주인공을 야망이 없고 찌질하다는 이유로 바가지를 긁어대며 비웃고 무시함. 남자는 아내에게 맞서 대항할 용기가 없어서 암실에서 사진 현상하거나 서재에 숨어서 책 읽음. 그런 와중에 열이면 열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데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남자가 집에서 쫓겨남. 게다가 억울하게 살인사건 등에까지 휘말림. 주인공은 “빼어난 미남은 아니지만 매력적인 미소를 지녔다”, “배가 약간 나오긴 했지만 아직 몸이 탄탄했다”, 등으로 종종 묘사되곤 함. 대머리는 단 한 명도 없음.

여성 작가:
순진하고 착한 평범한 여자가 주인공. 우연히 만난 미남과 사랑에 빠졌는데 알고 보니 엄청난 부자!! 로또 맞은 줄 알고 내 인생에 이런 행운이! 하고 감격하며 주변 여자들의 질투와 시기에 우쭐하는데 좀 더 지나고 보니 그놈이 사이코패스!!!! 사람들 앞에서는 세상 좋은 척 선량한 척 행동하는데 알고 보면 미친 사이코. 한결같이 엄청 잘생겼다는 특징이 있음. 금발에 파란 눈이며 모든 여자가 보기만 하면 기절해 버릴 정도의 눈부신 미소를 지님. 머리도 평판도 뛰어난 그 남자를 주인공 여자가 어떻게 해치우느냐가 관건임.

<더 걸 비포> 역시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칙스릴러의 규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지만 허영심이 심한 제인은 돈이 없지만 넓고 세련된 최신식 집에서 살고 싶은 욕구를 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부동산 중개인이 엄청 특이한 집이 있기는 있다면서 매우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한 유명한 건축가가 세웠다는 특이한 저택은 집주인에게 이력서를 작성해서 제출하고 면접까지 합격해야 입주가 가능하다. 집세가 저렴한 대신 지켜야 하는 규칙이 엄청나게 많다. 집안에 미리 비치된 가구 이외에 별도의 인테리어를 할 수 없고, 책장을 둘 수 없으며, 매주 1회 하우스 키퍼의 점검을 받아야 한다. 그 외에도 규칙이 뭐 몇 백가지 있고. 게다가 적절한 체중과 몸매를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까지 있다.

아무리 싼 월세로 좋은 집에 살 수 있더라도 이런 정신 나간 조건을 지키면서 들어가겠다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우리의 주인공들은 정신이 나갔기 때문에 기꺼이 그런 집에 들어가겠다고 한다. 그리고 집주인과 면접을 보고, 당연한 수순이지만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그에게 반한다!!!!

아니 뭐 백번 양보해서 집주인이 잘생긴 남자라는 것, 여주인공이 그에게 반한다는 설정까지도 이해할만하다. 문제는 여주인공이 그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우리가 왠지 같이 자게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야!!!!!!!!!

여기서부터 슬슬 수상한 조짐이 보이지만 아직 이 정도를 보고 놀라긴 이르다. 집주인은 어느 날 갑자기 대뜸 집에 전화하더니 밑도 끝도 없이 찾아오겠다고 한다. “지금 당장 당신을 갖고 싶어요. 우리 같은 생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대사를 날리면서. 현실이었으면 뭐 이런 미친놈이? 하고 경찰 신고 각이지만 여주인공의 경우 앞서 말했듯이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집주인을 기다리고 둘은 격렬한 섹스를 한 뒤 어김없이 연인으로 발전한다.

그런데 이 집주인이란 놈이 알아볼수록 보통 사이코가 아니다. 통제광에 소시오패스이며 조금이라도 자신의 규칙에 어긋나면 참지 못한다. 심지어 폭력도 쓴다. 주인공은 그가 점점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이 집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는데, 알고 봤더니 이 집에 자기보다 더 전에 살았던 여자가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얼굴마저 자신과 몹시 닮아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오래전 죽었다는 집주인의 와이프 역시 자기와 똑같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런 우연이!!!!!

알고 봤더니 전 세입자였던 엠마는 남자 친구인 사이먼과 이 집에 같이 입주했었다. 그러다가 집주인과 사귀게 되면서 사이먼과는 헤어졌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정신이 이상해져 자살했다고 한다. 사이먼은 제인에게 접근하여 아무래도 집주인이 엠마를 살해한 것 같다고 호소한다. 제인의 의심은 점점 커지고 집주인과의 관계는 위태로워진다. 집주인과의 관계가 위태로워질수록 집의 시스템도 점차 이상해진다. 자꾸 집안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결국 불안한 제인은 어느 날 저녁 사이먼을 초대해 집에 같이 있어달라고 했다가 실은 사이먼이야말로 이 모든 사건의 범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이먼은 엠마에게 차인 뒤 그녀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 집안의 시스템을 해킹하고 결국은 살인까지 했던 것이다. 그 뒤는 엠마를 닮은 제인에게 또다시 집착하는 중이고. 제인은 모든 정황을 파악한 뒤 사이먼을 해치운다.

정말 스토리가 허접하기 그지없는 것은 둘째 치고, 인물들이 하나같이 맛이 간 사람들이라 읽어주기가 힘들었다. 사실 스릴러에서 사이코패스가 나오는 것이야 당연하다. 문제는 아무리 사이코라도 어느 정도 납득 가능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무슨....

“아마 더러운 접시 같은 것들이었겠지. 나는 그것들을 곧장 치우는 대신,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며 그를 침대로 이끌려했다. 그러자...... 퍽. 그는 분노했다. 그리고 나는 최고의 섹스를 했다. 나는 그의 팔과 가슴 사이의 온기가 깃든 곳으로 기어들어가 좀 전에 그에게 소리쳤던 말을 반복한다. 좋아요, 대디. 좋아요.” (269쪽)

아니 아무리 통제광에 사이코패스라도 폭력까지 쓰다니요? 고작 설거지 안 했다고? 게다가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한테 전화해서 “오늘 밤 당신과 잘 거야”라고 다짜고짜 선언하는 미친 자신감과 맨날 똑같이 생긴 여자한테 집착하는 그로테스크함은 또 어떻고? 더욱 황당한 것은 여성 인물들이다. 때리는데 그날 최고의 섹스를 했다니요???? 좋아요 대디????

여성 인물들이 애인에게 맞고 오히려 섹스하면서 흥분을 했다는 설정을 비롯하여 남성에 대한 집착으로 성폭행을 안 당했는데 거짓 신고를 하는 식의 대목에서는 그야말로 작가가 돌아버린 거 아닌가 싶었는데, 나중에 이 사람이 남자라는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납득했다.

흥미를 위해 어느 정도 자극이나 무리수적인 설정을 넣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장르소설들이 대개 그런 식이고. 그러나 칙스릴러에도 등급이 있는 법이다. 이런 소설에 비하면 <걸 온 더 트레인> 같은 책들은 아주 고전 명작 급이라는. 알라딘 MD 추천인가 어디서 보고 주문해서 읽게 되었는데, 그 리스트 만든 MD를 신고하고 싶을 정도의 끔찍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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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과 출산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 보지만, 군대와 (신생아의) 육아가 여러모로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군대를 안 갔다 왔으므로 단언할 수는 없고, 어디까지나 들은 바를 종합해보면 그렇다.

폐쇄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 자유에 극히 제한이 생긴다는 것, 그럼에도 일정한 기간이 지나기 전까지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것, 어쨌거나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수월해진다는 것(소위 ‘짬밥’이 있다는 것), 같은 상황을 겪는 내부인끼리의 유대감과 동질감이 생긴다는 것, 등등. 그리고 당사자들에게는 엄청나게 대단한 문제들이 밖에서 보기에는 전혀 흥미도 관심도 유발하지 않는다는 것까지도.

내가 말이야, 초소에서 근무했을 때, 밤에 보초를 서고 있는데 말이야, 양말에 구멍이 나서 말이야, 그 밤에 무진장 추웠거든, 그래서 그때 내가 어떻게 했냐면... 어쩌고 저쩌고 중얼중얼. 이러면 듣는 사람은 진짜 미친다.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하지 말라는 게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힘들었다는 것 알고, 고생한 거 당연히 알지만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니다. 대놓고 말은 못 해도 제발 그만! 이렇게 되는 것.

그런데 실은 육아 문제 역시 똑같다. 조리원에서 아이를 데리고 집에 왔는데요, 밤에 한 숨도 안 자고 내내 울어서요, 계속 안고 달래다가 기저귀를 갈아주려고 눕혔는데요, 아 글쎄 이 녀석이 제 얼굴에 오줌을 싼 거 있죠, 아빠 얼굴에요. 제가 그때 입을 다물고 있었기 망정이지 푸하하하하. 이런 경우도 잘 보면 말하는 사람 혼자만 열심히 떠들고 있다.

군대생활을 안 해봐서 그렇다거나 아이를 키워보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원래 모든 힘든 일이 그렇지만 그 안에 있을 때는 정말 죽을 것 같고 미칠 노릇인데, 일단 그 상태를 벗어나면 그저 남의 일 같기만 하다. 그런 면에서는 다녀온 사람이나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겪지 않았기 때문에 지루하고, 겪은 사람들은 겪어 보았기 때문에 지루하다. 결국 그 안에 있는, 즉 같은 상황을 현재 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사람들만 절박한 동시에 흥미로운 것이 바로 군대나 육아 이야기다.

실은 나 역시 마찬가지인데, 비슷한 이유로 육아서적이나 다른 사람들의 육아 일기(신생아 한정이지만)를 잘 읽지 않는다. 물론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고, 두렵고, 힘들고, 외로운 그 상황,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일일이 털어놓고 싶은 그 마음 자체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냥 너무 힘들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 한편으로는 지루하기도 하고, 그 이상으로 버겁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일단 재미가 없다. 그래서 네이버에 있는 육아 웹툰 등도 사실 잘 보지 않는다. 아기 낳는 만화인가도 안 봤고.

그럼에도 쿠도 칸쿠로의 <나도 애라니까>는 정말 오랜만에 아주 즐겁게, 그리고 흐뭇하게 읽은 육아 에세이였다. 쿠도 칸쿠로는 일전에 적은 바 있지만 일본의 유명한 극작가이다. 드라마나 연극 대본을 쓰는 것이 본업이지만 이외에도 배우, 소설가, 영화감독, 밴드 기타리스트 등으로 엄청나게 활발한 활동을 하는 인물이다. 특유의 코드가 있어 호불호는 많이 갈리지만 어쨌든 누구나 인정하는 그야말로 천재형. 10여 년도 더 전에 일본 드라마 I.W.G.P를 시작으로 쿠도 칸쿠로에게 빠지게 되었는데, 그 덕에 한창 때는 하루에 10시간도 넘게 일본 드라마를 보곤 했었다. 그게 계기가 되어 나중에 일본에 가서 살아보기도 하고, 일본 문학도 공부하고 했으니 아무튼 나에게 있어서는 인생에 꽤나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 중 한 명인 셈이다.

그런데 그렇게 좋아했지만 어디까지나 작품을 좋아했던 것이라서 인간 쿠도 칸쿠로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었다가, 일전에 도서관에서 우연히 쿠도 칸쿠로의 에세이를 발견하고 읽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1970년생이라는 것, 30살에 I.W.G.P를 썼다는 것, 24살이라는 아주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는 것, 결혼한 지 10년 만에야 아이를 낳았다는 것 등을 알게 되었고, 국내에 <나도 애라니까>라는 다른 에세이가 이미 나와있다는 것도 알고 읽게 되었다.

<나도 애라니까>는 본래 딩크족이었던 그가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을 적은 육아 일기인데, 주 1회씩 만 3년 넘게 연재한 분량을 담았다. 어떻게 신문에 주 1회씩 칼럼을 연재하지.... 아무튼. 그렇게 빈도가 잦은 만큼 임신 단계에서부터 출산, 신생아에서 어엿한 어린이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아주 상세히 적혀 있다. 언제 이유식을 하고 언제 뒤집기를 하고 언제 말을 하기 시작하고 등등. 기존에 육아 일기들과 매우 동일한 형식이지만 마치 강아지나 고양이 기르기, 혹은 식물 재배기처럼 아주 섬세한 관찰을 유머와 섞어 적어 놓았기 때문에 아 맞다, 우리 아이도 이맘때 이랬지, 맞아 이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 하는 감각을 되살리면서 아주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이가 나지 않은 아기 간식으로 한국에서는 떡뻥(떡국떡을 튀긴 하얗고 부드러운 과자)을 먹일 때 일본에서는 전병을 준다는 소소하고 깨알 같은 정보를 비롯하여 아이들이 어릴 때 가는 곳은 주로 백화점이나 마트라든지, 놀이터에서 모르는 엄마들과 말을 섞게 된다든지, 아이를 데리고 식당에 가는 것이 눈치가 보인다든지 등등 한국이나 일본이나 (아마도 세계 어딜 가나) 아이 기르는 것은 다 똑같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육아 일기이지만 어쨌든 에세이의 한 형태이므로 쿠도 칸쿠로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역시 굉장히 잘 드러나는데, 아이를 거의 신생아 단계에서부터 대등하게 대우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 적이었다. 역시 무슨 일이든 어떤 직종이든, 결국은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갖추는 것이 기본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고.

간간이 등장하는 부인과의 에피소드 또한 굉장히 재미있었다. 쿠도 칸쿠로 자체가 엄청 내향적이고 예민한, 한편으로는 유머를 좋아하고 긍정 지향적인 예술가여서 이런 사람의 부인은 어떨까 싶었는데 아내 역시 굉장한 사람인 것 같았다. 20대 초반에 아무것도 이룬 것도 없고 돈도 없고 샤워는 코인 샤워(찜질방처럼 돈 내고 가는 곳)에서 며칠에 한 번씩 겨우 하고 심지어 이가 좋지 않아 앞니가 빠진, 그러나 그것을 해 넣을 돈조차 없을 만큼 가난하고 바빴던 연하의 예술가(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백수 혹은 룸펜)를 거두어 거의 키우다시피 했으니. 물론 쿠도 칸쿠로 자체가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떡잎이 있었겠지만, 그런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갖추었다는 점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일전에 읽었던 쿠도 칸쿠로의 다른 에세이 <지금 뭐라고 했지?>는 아무래도 일본의 예능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 일본 드라마나 영화배우 이름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전혀 재미를 느끼기 어려울 듯해서 추천을 하지 않았는데, 이 육아 에세이는 쿠도 칸쿠로의 팬은 물론 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아주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물론 아이에게 전혀 흥미가 없는 사람이라면 여전히 큰 재미를 느끼기는 어렵겠지만 출산을 준비하는 분들이나 어린 아기를 키우는 분들에게는 웬만한 육아서적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될 듯한 느낌이었다. 재미도 있고, 실제로 아이를 기르는 과정에 대한 마음의 대비도 되고. 키워본 사람들 입장에서는 문득 그 맘 때의 아이를 떠올리게 되고 말이다. 나도 우리 아이들의 성장기를 좀 더 성실하고 자세하게 기록해둘 것을 그랬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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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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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넷드링킹 사건 (자세한 내용은 인터넷 검색, 특히 조선일보에 상세한 기사가 나옵니다)’이 화제가 되었을 때, 홍보용으로 작성된 가짜 서평을 두고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많았다. 개중에는 남이 쓴 서평을 왜 읽는지 모르겠다면서, 책을 살 때 ‘서평집’은 절대 고르지 않는다는 글도 있었다. 서평을 자주 올리는 사람으로서 다소 서운한 이야기이긴 하나 한편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가기도 했다. 나 역시 과거에는 남이 쓴 서평을 절대 읽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서평뿐만이 아니라 영화를 비롯해서 ‘평론’이라는 장르 전반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평론을 읽거나 보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첫째, 어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기 전이라면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을 읽어봤자 아무것도 공감하거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둘째, 이미 경험한 이후라면 굳이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내용을 보아도 별반 재미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 자체가 나쁘다거나 가치가 없다기보다는 남의 평가를 읽을 시간에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읽는 것이 낫겠단 생각이었다고 할까.

그런 와중에 평론을 읽는 재미를 깨우치게 된 것은 의외로 작법서를 읽으면서였다. 작법서 중에서도 특히 소설가들이 쓴 책은, 자신이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를 주로 다루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특정한 책에 대한 언급이 들어간다. 그 책이 무슨 내용이었는지, 어떤 대목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왜 자신에게 있어서 중요한지.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책 전체가 의도치 않게 서평 비스무레한 것이 되는 것이고. 남이 어떤 책을 읽고 무엇을 느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등등 별로 흥미롭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굉장히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같은 것을 보면서도 사람들이 이렇게나 다른 시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참 놀라웠다.

그러니까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이 세상이 얼마나 흥미로운지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면, 서평을 읽는 것은 사람들의 관점이 얼마나 다채로운지를 배우는 것에 가까웠다. 책의 내용에 동의하면 동의하는 대로, 동의하지 않으면 동의하지 않는 대로 그 사고가 전개되는 방식을 지켜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마치 책과 독자가 토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글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서평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좋은 ‘글’ 을 가려내는 시각을 길러주기도 한다. 물론 재미있는 책, 몰랐던 책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은 기본이고. 그 뒤부터는 서평이나 평론 등도 자주 읽고 있다.

<정희진처럼 읽기>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학자 정희진의 서평집이다. 한겨레에 연재했던 79편의 독서 칼럼을 모았다. 한때는 정희진 선생님의 글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좋은 글도 많았지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종잡을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올 초 <혼자서 본 영화>라는 그녀의 영화평 에세이집을 읽고서 그간 그렇게 느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는 보통 사람들과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아주 다르다. 날카롭다거나, 명료하다거나 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냥 아예 차원이 다른 경우가 많다. 그런 한편으로는 그렇게 남들과는 다른 생소한 생각의 결을 구구절절 세세하게 풀어내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대체 뭔 소리야?’ 하는 말을 내뱉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당연히 친절한 글쓰기 방식(이를테면 황현산 선생님의 글처럼)과는 거리가 있고, 호불호가 많이 갈리게 되는 스타일이다. 글쓰기의 방식 자체가 우선 그렇다. 의견이나 관점 역시 보통 사람들과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다르므로 여러모로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 아마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있어서는 동의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란 것을 알려준다는 점에서는 가히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진부하지 않은, 뻔하지 않은, 기존의 체계와 관습과 사고를 뛰어넘는 또 다른 눈. 오직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아주 귀한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두고두고 회자되는 갠지스강 칼럼은 나도 굉장히 별로라고 생각하지만, 그로 인해 그의 다른 좋은 글들마저 도매급으로 매도되는 것은 안타깝다.)

책에 실린 79편의 서평, 그 안에 실려있는 모든 관점이나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책을 읽는 방법과, 생각하는 방법에 대해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물론 배웠다고 체득되는 것은 아니므로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또 오랜 시간을 들여 생각해야 한다. 이 책의 강점, 유익할 뿐만 아니라 엄청 웃기기도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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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들의 당나귀 귀 - 페미니스트를 위한 대중문화 실전 가이드
손희정 외 지음, 한국여성노동자회 외 기획 / 후마니타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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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치는 아니었지만 달리기는 유난히 약한 종목이었다. 학창 시절 100미터 기록이 19초인가 그랬고, 오래 달리기 또한 잘 못했다. 1500미터 경주하면 끝까지 뛰는 것도 힘들었다. 아마 체력이 약했던 것이겠지. 그런데 중학생 때, 체육 시간에 이열 종대로 다 같이 오래 달리기 훈련을 하던 시기에, 갑자기 체육교사가 나를 그룹의 가장 선두에 세웠다. 선생님은 말했다. “잘 뛰는 애들이 앞에서 이끌어줘야 해.” 엥??? 나는 무척 당황했다. 나머지 한 명은 평소에도 워낙 잘 뛰던 친구였지만 나는 아닌데? 잘 못 뛰는데?

어쨌든 ‘거부’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선두에 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죽기 살기로 뛰었다. 옆에 있는 잘 뛰는 친구에게 맞추기도 해야 하고, 지치거나 쳐지면 뒤에서 달리는 아이들에게 영향이 가는 데다가, 다 떠나서 앞에서 뛰는데 못 뛰면 ‘쪽팔리기’ 때문에. 자연히 달리기 훈련이 되었고 나중에 기록을 잴 때는 평소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자의에 의한 것도 아니었고, 미치도록 힘들었으며, 여전히 선생님이 왜 나를 선두에 세웠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에게 있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해 준 경험이었다. 앞에 서보는 게 이렇게 중요하구나, 그런 경험들이 사람을 바꿀 수 있구나.

한 번이라도 반장이나 부반장 같은 ‘대표’를 맡아본 경험이 있으면 계속해서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 역시 같은 이치이다. 리더십은 타고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길러진다. 반장이라는 역할은 그룹을 대표하고, 의견을 조율하고, 많은 인원을 통솔하는 경험을 하게 해 주며 이런 과정에서 자신감, 협상능력, 카리스마를 향상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길러진 능력은 조금씩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 훗날 이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한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벌어지는 이유이다. 결국 자리가 자리를 만들고,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셈이다.

몇 년 전 ‘알쓸신잡’이 처음 방영을 시작했을 당시, 왜 출연진이 죄다 남성이냐는 볼멘 목소리가 나왔던 적이 있다. 그러면서 왜 지식인은 죄다 남성인지, 왜 예능프로의 멤버도 모두 다 남성 일색이냐는 비판도 나왔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말했다. 여자들은 재미가 없잖아. 여자들 중에 유재석만큼 진행 잘하는 사람 있어? 정형돈만큼 재치 있는 사람 있어? 강호동만큼 카리스마 있는 사람 있어? 무한걸스 같은 거 만들어줬는데 재미없잖아. 망했잖아. 사람들이 안 보고 안 찾는 걸 어쩌라고. 여자들 중에 재미있게 썰 푸는 똑똑하고 호감 가는 지식인이 있어? 있으면 데려와 봐. 인물이 없는걸 우리더러 어떡하란 말야.

원칙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예능이건, 코미디이건, 연기이건, 지식이건, 기본적으로는 남성들이 더 우세한 경우가 많다. 남성 연예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캐릭터, 웃음에 대한 예민한 감각, 몸을 사리지 않는 투혼을 여성들에게서는 발견하기 어렵다는 말에도 동의한다. 여성들 중에 ‘대중성’을 지닌 지식인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것도 맞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 묻고 싶다. ‘왜’ 여성들이 남성보다 재미가 없는지, ‘왜’ 여성 지식인 중에 남성만큼 눈에 띄는 사람이 없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고 말이다.

문제는 기회다. 일단 여성들에게는 남성만큼 충분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경험이 없으니 미숙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실수를 하게 된다. 게다가 어렵게 주어진 기회에서 단 한 번이라도 실수를 해선 안 된다. 그러다 보니 긴장을 하고 긴장을 하다 보니 다시 실수 연발. 결국 망하고 만다. 그런 지점은 남성 역시 마찬가지라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둘은 상당히 다르다. 똑같이 바닥부터 시작하더라도 주어지는 기회와 파이가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경험치가 쌓이다 보면 자연스레 익숙해지고, 익숙함은 여유를 주고, 여유는 능력을 올려주며, 올라간 능력은 새로운 경험을 불러오기에 결국 훗날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내게 된다.

유재석이 처음부터 오늘날의 원숙미 넘치는 진행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처음에 찌질하고, 재미없고, 무능한 캐릭터였다. 그러나 무모한 도전이라는 작은 기회가 찾아왔고, 유재석은 성실하게 그 기회를 살렸으며, 결국 오늘날의 국민 엠씨로 성장했다. 만약 당시 유재석과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찌질한 여성 코미디언이 그런 프로그램을 맡았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해당 프로그램의 초반 인기는 무모한 도전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해 보자. 그 프로그램이 끝까지 살아남아 결국 무한도전이 되고, 프로그램의 멤버들이 유재석, 노홍철, 정형돈, 하하, 정준하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아니라고 본다. 기회 줬잖아! 별로잖아! 땡! 이러고 곧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변경되었을 확률이 높다. 비단 대중문화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여성노동자협회에서 펴내고 손희정이 엮은 <을들의 당나귀 귀>는 이처럼 대중문화 곳곳에 퍼진 여성주의 담론을 다루는 책이다. 한국여성노동자협회에서 만드는 ‘을들의 당나귀 귀’라는 팟캐스트 프로그램 중, 다시 의미 있었던 14개의 에피소드를 선별하여 책으로 엮은 것인데,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듣는 것을 싫어해서 팟캐스트도 듣지 않고, 비슷한 이유로 인터뷰집이나 대담집도 잘 보지 않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몹시 재미있게 읽었다.

‘딸바보’ 남성 캐릭터라든지, 개저씨가 되는 것이 싫어 ‘아재’ 임을 내세우는 남성이라든지, 김숙과 송은이가 오늘날 살아남았던 이유에서부터 걸그룹과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의 변화, 성매매, 여성 슈퍼 히어로가 남성들과 얼마나 다른지 등등, 일단 소재 자체가 매우 재미있고, ‘당나귀 귀’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간 한국 예능을 보면서 고구마 먹은 듯 답답했다거나, 대중문화를 접하면서 의문을 품었던 지점, 욕하고 싶었던 것을 누군가 시원하게 해소해주는 느낌을 받았다. 대담집인 만큼 대화문으로 되어 있어서 읽는 것도 굉장히 수월했고.

모든 챕터가 인상 깊지만, 그중에서도 영화 <비밀은 없다>를 다룬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대담자들은 <비밀은 없다>의 주인공 ‘연홍’이 했던 ‘생각하자, 생각하자, 생각하자’라는 대사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고 말한다. 본래 ‘멍청했던’ 연홍은 딸의 죽음을 계기로 각성하지만, 그 각성으로 인해 흥분하고 미쳐 날뛰는 대신, ‘생각’하고, 궁극적으로 ‘승리’한다. 여성들은 성차별 문제에 대해 분노하는 동시에, 그 이상으로 더 많이 ‘생각’ 해야 한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해야 한다.

많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고, 특히나 여성들은 반드시 읽었으면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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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거리는 여인
미시마 유키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서커스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어린 시절 보고 들었던 여성들의 연애담은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

별로 관심이 없는 남자가 자꾸만 쫓아다닌다. 처음에는 너무 귀찮고 싫었는데 어쩌다 보니 사귀게 된다. 사귀기 시작하고 초반부에 남자는 간이고 쓸개고 빼줄 듯이 잘해주고 애지중지 해준다. 그런 과정에서 나 역시 조금씩 그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남자가 조금씩 시들해지는 것 같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젠 내가 남자를 더 좋아하게 된 상태다. 처음과 달리 관계는 역전되었고, 나는 불안한 약자가 되어 있다. 그러나 한 번 돌아선 남자의 마음은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남자는 떠나버린다.

대학교 익명 게시판이나 여초 커뮤니티에서 이런 글 과장 안 하고 오조오억 번 보았다. 에이, 인터넷 글이 다 그렇지 뭐, 싶겠지만 실제 주변에서 목격한 사례도 꽤 많았다. 친구들 중에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자와 억지로 사귀었는데 나중에 본인이 더 좋아하게 되어 전전긍긍하고 마음고생하다가 안 좋게 끝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2000년대에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온갖 연애 지침서가 유행하기도 했었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부터 시작해서 <현명하게 사랑하라> 같은 책들. 너는 대체 뭔데 그런 걸 다 알고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인터넷 죽순이였기 때문입니다(눈물). 한때 익명 게시판에 올라오는 모든 글을 읽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연애 문제로 괴롭다는 글에 저 책들을 추천하는 댓글이 자주 달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섹스 앤 더 시티라는 드라마는 이런 고민을 하는 여성들을 위한 교과서와도 같은 존재였고.

당시에 그런 글을 보며 내가 했던 생각은 이렇다. 왜 애초에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억지로’ 사귀는가에 대한 의문.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연애 과정에서 마음이 떠난 애인에 대하여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연애를 하는 것은 더 행복하고 즐겁기 위해서인데 애초에 ‘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억지로’ 사귀는 것인가. 왜 굳이 즐겁지도 않은 상태에서 사귀고, 억지로 만나고, 불균형한 감정을 주고받다가, 관계가 역전된 뒤 거기에 질질 끌려가는지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어렴풋이 이런 현상의 원인을 이해할 것도 같다.

일단 사회적으로 ‘여자친구’, ‘남자친구’, 그리고 ‘연애’라는 것에 대한 인식과 역할이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당시는 연애를 하지 않으면 마치 이상한 사람처럼 생각하는 분위기가 ‘지금보다도 더’ 강했다. 지금은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굳이 연애를 할 필요 있나?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점점 조성되는 상황이고, 연애인과 비연애인 사이의 우열관계 또한 점차 없어지는 추세이지만, 과거에는 분명 그런 것이 있었다.

애인이 없다고 하면 뭔가 가엾게 바라보고, 어딘가 결격사유가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덜 떨어진 사람이 된 것 같은 분위기.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성들 또한 전혀 좋아하지 않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에 휩쓸려’ ‘억지로’ 사귀게 되는 경우가 분명 없지 않았다. 아니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사귀게 된 뒤에는 ‘여성은 안정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다’는 사회적 믿음에 따라 관계에 충실하려 노력하고, 그러다 보니 남성보다 관계 자체에 대한 애착이 생기고, 그 관계를 지키려 애쓰게 되고, 반면에 남성은 점차 거기에 시큰둥한 모습을 보이고, 그러면서 점점 더 불안 초조해지고 했던 것이 아닐는지?

진화심리학적으로 여자는 어쩌고 남자는 어쩌고 웅앵웅앵은 참으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 생각하지만, 분명 사회적으로 여성에게, 남성에게 기대하는 성역할이 존재했고, 동의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잠재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기는 아마도 어려웠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또는 ‘잡은 고기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와 같은 속담만 하더라도 그렇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이야기는 남성들에게는 헛된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여성들에게는 마치 마지막에 가서는 넘어가 줘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을 불러일으킨다. 원래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다 시작되는 것 아닌가 하는 체념을 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잡은 고기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다는 속담 역시 여성에게는 관계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하고 남성에게는 일단 고기는 잡기만 하면 된다는 쓸데없는 근자감을 준다. 뿐만 아니라 이 두 속담은 공통적으로 여성을 사냥감, 혹은 쫓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체계를 공고히 한다.

잘 살펴보면 당시 유행하던 드라마, 영화 속 사랑 이야기 대부분이 저것과 유사한 구조를 띤다. 남자는 쫓고, 여자는 잡히고, 그러다가 남자는 떠나고. 물론 여성이 불안해하는 사이 다시 남성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혹은 또 다른 남성을 등장시킴으로써 70~80년대에 유행하던 드라마처럼 남성과 여성이 불타는 하룻밤을 보내고, 여성이 ‘순결’을 상실하고, 혹은 임신까지 하고, 남성이 떠나고, 여성은 그런 남성을 지고지순하게 기다리는 차원보다는 다소 진화한 것이 사실이지만, 여전히 많은 드라마에서 쿨하고 싶었으나 쿨하지 못한 여성을 그려냈었고, 그런 모든 것들은 전형성을 강화하는 기재로 작용했던 것이다.

물론 문화가 사회를 반영하기도 하고, 사회가 문화를 따라가기도 하므로, 뭐가 더 옳다 그르다 하는 이야기는 할 수 없다. 그런 모든 작품이 ‘빻았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시절에는 분명 남성과 여성의 연애담을 둘러싼 어떤 전형성이 존재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여성들의 연애담이 죄다 유사했던 것 또한 알게 모르게 저런 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것일 테고. 실제로 여성들의 행동이나 인식 체계 또한 그러한 전형성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고.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비틀거리는 여인> 또한 근본적으로는 앞서 언급한 여성의 흔한 연애담과 동일한 구조를 따라간다.

정숙하고 우아한 유부녀인 세쓰코는 남편을 만나기 전 이렇다 할 연애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젊은 시절 첫사랑과 가볍게 입맞춤을 했던 경험이 있기는 하나, 그것뿐, 제대로 된 정열을 불태웠다고 할만한 기억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세쓰코는 입맞춤을 했던 첫사랑의 대상인 쓰치야가 자꾸만 자기 주변을 맴도는 것을 느끼고 그와 ‘순결한 연애’를 해 보기로 결심한다.

처음에는 순전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차원, 말하자면 그냥 재미로, 또는 역할놀이하듯이 가볍게 시작된 관계였다. 육체적 관계는 갖지 않는 친구처럼 순수한 만남만을 갖기로 결심했으나, 그런 결심이 무색하게 세쓰코는 점차 쓰치야에게 빠져든다. 당연히 육체관계도 맺게 된다. 심지어 나중 가서는 쓰치야보다 세쓰코 쪽이 훨씬 더 좋아하게 된다. 세쓰코는 그런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져서 몇 번이고 헤어져야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결심은 번번이 무너지고,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쓰치야에 의해서야 그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억지로 끝내게 된다.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상대를 점차 좋아하게 되는 과정, 그러다가 관계가 불균형해지는 것, 그로 인한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쉽게 이별을 고하지 못하는 부분, 부당한 대우에 분노하려다가도 상대의 아주 사소한 행동에 헛된 희망을 품으며 정신승리하는 듯한 모습이 굉장히 리얼하고도 상세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에, 앞서 언급했던 다소 전형적이었던 여성들의 연애담 속 인물들의 심리를 굉장히 상세하게 알게 된다.

읽다 보면 세쓰코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과 동시에 고구마 백 개 먹은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면서, 하아... 쓰치야.... 이 짜증 나는 XX... 이딴 XX랑 빨리 헤어져.... 뭐 이런 말이 나오게 되기도 하고. 그런 면에서 과거 익명 게시판 열심히 하던 시절로 돌아간다는 것을 가정해본다면, 남친의 마음이 식은 것 같아서 고민이라는 여성에게는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보다 이 <비틀거리는 여인> 쪽이 훨씬 더 유용한 조언서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소설가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다자이 오사무나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로 그들만이 온전히 여성의 입장이 될 수 있었던 남성 작가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여성적인’ 면에 있어서는 미시마 유키오가 그 둘 보다 더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들었으면 사뭇 반발할 이야기로서, 아마도 그러한 내면의 여성성을 없애고 싶었는지 아침마다 기계체조도 열심히 하고 냉수마찰하고 헬스 해서 몸짱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역시 이런 작품들을 읽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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