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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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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 감상평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책장을 끝까지 넘기고 나면 제목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나'의 예감은 맞지 않았다.

"나"는 40년의 시간을 거슬러 20대 초반에 생을 마감한 친구의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처음에는 타인의 의사(유언)에 의해, 이후에는 자의로.

역사에 대한 '나'의 관점이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에서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로 변할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마주하는 '에이드리언'의 죽음의 진실에는 나의 치기 어린 저주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존재하는 듯 하다.
내가 만약 편지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평범하게 살았던 일생의 한 장면. 잊고 있었던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적은 편지가 하나의 계기가 되어 동경했고, 라이벌로 생각했고, 하지만 여전히 친구로 남고 싶었던 '에이드리언'이 자살을 택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40여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알게 되는 순간.

'나'는 잘못을 빌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대상이 틀렸다.

명징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은 무지였고, 완전무결하다고 믿었던 친구의 스스로 선택한 죽음은 일종의 죄책감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들었다. 전 여자친구(베로니카)의 어머니. "그래도 마지막 몇 달 간은 행복했다고 믿는다"는 구절의 의미.

나는 지금 60대이고, 이혼한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대머리이고, 딸의 무심함에 가끔 서운함을 느끼는.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나름 평균적인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적당히 철학적이고 배려심이 있다고 느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에이드리언'이 너무 똑똑해서 죽은 것 같지?

세월에 묻고 살았던 진실은 어떻게든 전달되게 마련인 것 같다. '나'를 탓하면서, 그래도 '나'가 위안을 얻었으면 한다. 얼마간의 돈을 남긴 것도 그래서 일까. 상반된 듯 보이는 감정.

네 탓이다. 네 탓만은 아니다. 그래도 알아주기 바란다.

'나'는 둔한 사람이었다. '베로니카'가 나에게 왜 화가 나 있는지를 마지막이 되어서야 겨우 알았다.
'어머니'가 '아닌 '누나'라는 의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아니 맞지 않는다.

알지 못 했고, 알 수도 없었던 사실을 시간이 지난 후에 몇 가지 단서(일기장, 증언)를 통해서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깨닫게 되었을 뿐이다.
 
'나'를 포함한 3총사에 '에이드리언'이라는 일종의 천재가 들어온 어린 시절. 그리고 학우의 죽음.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가 사귀게 되면서 내가 인정한 존재이면서 인정받고 싶어했던 존재인 에이드리언과 멀어지게 된 과정을 그린 1부
 
베로니카의 어머니의 죽음. 유언장에 적힌 '나'의 이름과 얼마간의 돈, 일기장.
다시 만난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의 죽음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2부
 
마지막의 반전이 가슴을 때린다.

2. 인상깊인 구절, 첨언

잘은 모릅니다, 선생님. 하지만 하나의 사유 방식은 있는데, 그에 따르면 모든 역사적 사건 - 예를 들어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까지도-에 대해 우리가 진실되게 할 수 있는 말은 '뭔가 일어났다'는 것 뿐입니다.
경우를 막론하고, 죽음의 원칙과 충돌하는 에로스의 원칙이죠. 그리고 그 충돌의 결과로 뒤이어 나타나는 것들까지도요.


'에이드리언'의 위 말들은 본인의 죽음에 대한 간접적인 예언인 듯 하다.

사실, 책임을 전가한다는 건 완전한 회피가 아닐가요? 우린 한 개인을 탓하고 싶어하죠,그래야 모두 사면을 받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개인을 사면하기 위해 역사의 전개를 탓하거나, 그도 아니면 죄다 무정부적인 카오스 상태 탓이라고 해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제 생각엔 지금이나 그때나 개인의 책임이라는 연쇄사슬이 이어져 있는 걸로 보입니다.

'나'에게 '에이드리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우리 대부분에게 첫사랑의 경험은, 비록 좋게 끝나지 않는다 해도 - 어쩌면 그럴 때 더더욱 - 삶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삶의 권리를 지지하는 실체가 이곳에 있다는 희망을 준다.
우리는 충동적으로 결정한 다음, 그 결정을 정당화할 논거의 하부구조를 만든다. 그런 후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를 상식이라고 말한다.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상식이라는 잣대로 판단이 가능할까

어쩌면 나는 대략 합의하에 결정된 역사가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나'의 기억은 어느 정도 대략 합의하에 결정된 역사였던 것 같다. 내가 보낸 편지를 40여년이 흐른 뒤에 보기 전까지는...

그 일기장은 증거였다. 확실한 -아마도-증거물. 진부하게 반복되는 기억을 구제해주고 물꼬를 터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시간이란....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시간이 흘러 어떤 사건을 떠올릴 때. 회한없이 떠올릴 수 있었으면 한다.

장담컨대, 회한의 주된 특징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데 있다. 이미 까마득한 시간이 흐른 마당에 사과를 하거나 보상해봤자 부질없는 짓이다.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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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아는 와이프 1~2 세트 - 전2권 - 양희승 대본집
양희승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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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상평

우리는 모두 그 누군가의 아는 '그 사람'입니다.
작가님의 한마디.

종영된 드라마 극본을 찬찬히 읽고 있는데, 지성 배우님과 한지민 배우님, 가현동 지점 근무 직원들 등 인물과 배경이 영상처럼 떠올라서 즐거웠습니다.

사실 본방사수 못 하고, 대본집 발간 소식에 반가워서 조금씩 찾아보고 있는데 대본집 읽다보니 드라마 보고 있는 듯 하네요. 2권까지 전부 읽었더니 영상으로 접하지 않았어도 배부른 느낌입니다.

배경이 된 2006년과 2018년. 극중 주혁보다 저는 2살 정도 많네요. 연령대가 비슷하다보니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아 옛생각도 해가면서 읽었습니다.

한 아이의 아빠이고 육아를 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못난 남편이기에, 초반에 벌어지는 일들이 남 이야기 같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그래도 해 볼만 한데, 까칠한 우리 아이 보고 집안 일 하고 하루종일 파김치가 되어 있는 와이프를 보면 언뜻 우진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어요 ㅎ

드라마 초반에 남편인 주혁의 모습에 대해 비판하는 기사도 나왔던 것 같은데, 초반의 모습이 있었기에 극 후반부의 주혁의 심정이 더 절절하게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돌고 돌아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면, 결국 지금 이 자리에서 지금 이 사람에게 집중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소중한 아이를 다른 누군가의 남편 혹은 아내가 될 기회하고 바꿀 수는 없으니까요.

Go백부부를 보고 판타지를 느꼈다면, 아는 와이프를 보고서는 뭔가 더 현실적인 부부의 모습을 본 것 같아요. 전체적으로 3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은데 - 과거 회귀 전, 과거 회귀 후 다른 선택, 우진과 주혁의 동시 회귀 - 두 사람 중 어느 한 쪽이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본인의 선택을 하는 것이 그려져서 좋았습니다.

행복을 찾아 과거로 갖다가 자신으로 인해 우진과 혜진, 은행동료들에게 불행을 안겨준다고 자책하고 좌절하고 우진과 단절하려고 하는 주혁의 선택,
뭔가 모르게 끌리는 마음에 대해 고민하다가 결국 주혁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고 직진하는 우진의 선택.

현실이라는 장벽은 그냥 넘을 순 없는 거니까요. 조건이 달라진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닌 거 같아요. 지금 이순간에도 서로 부딪히면서, 모난 부분 깎여가면서 혹은 깎아가면서 살아가는 모든 부부를 응원합니다.

인생의 동반자인 부부는 '서로 같은 곳을 보는 사람'이지만, 같은 곳을 보면서 정작 마주 보는 것을 잊어버리는 건 아닌지. 가끔 아니 자주 서로 마주 보는 사람이길 바랍니다.

차주혁, 서우진 부부. 차은주, 오상식 부부, 윤종후 부부,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 앞에 선 혜원과 현수. 그들에게 행복이 있기를

 

2. 인상깊은 구절

0은 곱셉에선 뭐가 붙든 다 0으로 만드는 절대 권력이잖아요. 근데 덧셈에선 아무 힘도 없잖아요. 0이 더하기를 사랑해서 그런 거거든요.
그래,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우진이 때문에 비루한 세상이 빛나 보이고, 우진이를 웃게 만들기 위해 기운 내 또 하루를 살아가던 시절...
그때 너는 울고 싶었구나 ..., 그때 너는 위로받고 싶었구나..., 그때 너는 ..., 사무치게 외로웠구나...
니가 괴물이 된 게 아니라 내가 널 괴물로 만든 거였어...
하나만 물어볼게요, 아저씨.
저 다시 그날로 돌아갈 수 있어요? 예?
어떻게 하면 그날로 가요?
어떻게 하면 갈 수 있어요? 네? 네?!

 

아닌 줄도 알고 안 되는 것도 아는데, 처음부터 내 마음대로 안 됐어요, 고장 난 것처럼.

 

진짜 이제... 그날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없어? 다른 어떤 날로도?
어, 없어. 지나간 시간 돌아보는 거 이제 안 해. 앞만 보고 갈 거야...너랑.
(보며) 응, 그게 맞아. 우리 미래는 우리 힘으로 만들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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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제국 2
이주현 소설, 박경수 극본 / 소네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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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글

박경수 작가의 전작 '추적자'를 워낙 재밌게 본 터라 차기작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기대감을 안고 봤다.

전작보다 8부작이 늘어난 24부작. 매 회마다 하나의 완결된 구조를 가진 작품을 쓰고 싶다는 작가의 말대로 매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작품의 호흡도 상당히 길어서 한 회의 마지막과 다음 회의 처음 사이에 간격이 몇년이 훨쩍 지나있기도 하다. 그래서 몰아보는 것보다는 긴 호흡을 가지고 시간을 들여 보는 것을 추천한다.

드라마가 종영된지 몇 년 지났지만, 촌철살인의 대사가 생각이 나서 전자책을 구입했다. 종이책은 출간 즉시 구입했지만 고향 집 책장에 있는고로.

2. 인상깊은 구절

"잘못하긴요...하지만, 아버지가 판단하는 게 아니구. 이긴 놈이 판단하는 게 세상이에요."
"그래. 그라믄 태주야. 요번에는 아버지가 함 이기볼란다."

최민재는 최원재가 싫었다. 늘 한심했다. 하긴 그래서 최민재가 더 큰 꿈을 꾸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만약에 최원재가 자기만큼 열정적이었다면, 아니 최서윤 만큼이라도 똑똑했다면 애당초 자신의 꿈은 지금보다 작았으리라. 꿈이라는 건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목표들을 나는 할 수 있다고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으로 포장하는 것이니까.

"사람을 만나면 어디 사는지 물어보지? 그게 동네가 궁금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강남 사는 애들은 대답할 때 눈빛이 달라. 근데 얄궂은 동네 사는 애들은 지 주소 말하는데 목소리가 기어들어가요. 주소가 계급이거든."


"미사일 단추 신드롬이란 말이 있습니다. 화려한 미사일 발사실에 앉아서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단추를 누르는 군인한텐, 사람을 죽인다는 의식이 없죠. 그 미사일로 사람들이 죽고, 다쳐도, 자기는 단추만 눌렀을 뿐이라고. 당신도 그랬겠지. 상가를 철거하라는 전화만 했을 뿐이라고."

"당신하고 나, 같은 도박판에 앉아 있습니다. 이기고 싶으면 레이스를 하세요. 난요. 뻥카에는 한성제철 인수! 다이 안 합니다. 최서윤씨. 당신한테 있는 건, 나한테도 있습니다. 돈도 있고, 꿈도 있습니다. 당신이 나보다 판돈 좀 많은 거. 아, 그건 좀 부럽네요."

"성진그룹. 대단하네요. 하지만 이건 알아둡시다. 최서윤. 당신은 이 집 안방에서 태어나서 거실을 지나서 여기 서재까지 왔지만, 나 장태주는 신림동 판잣집에서 태어나서 여기 서재에서 당신하고 마주앉았습니다. 쉽지 않을 겁니다. 조심하세요."


3. 더 이상 없을 것 같은 신화

가진 것이 없어 잃을 것이 두렵지 않은 장태주는 끝을 모르는 높이로 올라간다. 찰라의 순간이 지나면 황금의 제국의 주인이 될 것만 같았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던 이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본 순간. 거짓말 처럼 날개가 꺾이고 만다. 날개를 잃은 그에게 남은 것은 예정된 추락 뿐.

마냥 정의롭지만은 않았던 장태주를 응원할 수 있었던 건 그가 가졌던 절박함과 판에 뛰어들때 그가 잃었던 것을 연민의 감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처음부터 가졌던 사람들과는 다르다. 아버지를 죽인 자들과는 다르다'는 신념이 절박한 순간 자신이 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다행스럽게도 그는 내려놓을 줄 알았다.

남이 아닌 자신이 결정한다는 신념대로 마지막도 그 답게 끝을 낸다.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신화는 그렇게 미완으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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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 인생의 한 수를 내려놓다 가연 컬처클래식 19
이상민 지음, 조세래 각본 / 가연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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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의 영화.
아마 정우성 배우 주연의 '신의 한수'와 비슷한 시점에 나온 바둑을 모티브로 한 영화로 기억한다. 조세래 감독님의 유작이었고, 조세래 감독님의 아들인 조동인 배우(민수 역), 황혼에서 인생을 반추하는 듯 연륜있는 연기를 보여준 김뢰하 배우(남해 역), 군대바둑 3급인 충직한 조직2인자 역할 박원상 배우(인걸 역)의 연기가 인상깊었던 영화.

2014년에는 스크린과 브라운관에 바둑을 모티브로 하는 영화와 드라마가 여러편 나온 해였다(tvn 드라마 미생도 2014년에 방송되었다.).

흥행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이 영화는 나름의 미덕이 있다.

각 장마다 한글 제목 하에 바둑용어 부제가 들어있다.

부득탐승(不得貪勝) - 너무 이기려고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입계의완(入計宜緩) - 적의 세력권에 들어갈 때, 무모하게 서둘거나 깊이 들어가지 말라

공피고아(功彼顧我) - 적을 공격할 때 나의 능력과 결정 유무 등을 먼저 살펴라

기자쟁선(棄子爭先) - 바둑돌 몇 점을 희생하더라도 선수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

“내 바둑선생이 돼 줘. 난 살면서 한 번도 선생이 없었어.”
남해가 자조적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소취대(捨小取大) - 눈앞의 작은 이득을 탐하지 말고 대세를 취하라

민수는 돌을 놓고 남해의 손을 흘끗 쳐다보았다. 저렇게 한 번에 많이 쥐고 있으면 불편하지 않을까. 항상 이유가 궁금했지만 좀처럼 물어볼 틈이 없었다.
둘만 남자, 남해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민수도 조용히 앉았다.
“이건 돌이고 이건 칼인데....”
남해가 칼과 바둑돌을 놓으며 말했다.
“넌 원래 이걸 가지고 놀았잖아. 앞으로도 한 가지만 가지고 놀아.”
그렇게 말하며 남해는 바둑돌을 민수 앞으로 밀었다.



봉위수기(逢危須棄) - 위험에 처할 경우 버리든가 아니면 보류하라

이 남자는 왜 나를 이곳에 데려왔을까.
나에게 바둑을 배우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에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것일까.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지금은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잘은 모르지만 이곳에서만큼은 그도 ‘평범한 사람’으로 남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질문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뜯어봐도 도무지 ‘활로’가 보이지 않았다.
답답하게 꽉 막힌 자기 인생처럼.
숨이 탁 막혔다.


신물경속(愼勿輕速) - 경솔하게 빨리 두지 말고, 한 점 한 점을 신중히 생각하라

“돌을 많이 쥐고 있으면, 손 안이 꽉 차는 게 마음이 편안해져.”
“사장님은 왜 깡패가 됐어요?”
“넌 왜 바둑을 두게 됐냐?”
남해가 질문을 질문으로 받았다.
“엄마가 바둑을 두라고 해서요. 혹시 엄마가 깡패 되라고 그랬습니까?”
민수는 멋쩍게 웃으며 되물었다.
“되라고 한 적은 없었지만 내가 누굴 때리고 들어오면 잘했다고 칭찬한 적은 있었지.”
“그게 그거네요. 엄마가 깡패 되라고 했네요.”
“우리 엄마,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죽었다.”
남해가 말했다.
민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타이틀을 못 따면 프로기사가 아니냐? 이세돌이만 프로기사고 박지성이만 축구선수냐? 다른 축구선수는 선수도 아니냐? 다른 사람 인생은 인생도 아냐?”
민수는 깜짝 놀라 남해를 쳐다봤다.
“바둑이 먼저냐, 사는게 먼저냐?”
남해가 눈을 부릅뜨고 민수를 노려보며 나직이 물었다.
“그걸 알면 고수다. 잊지 마라.”

동수상응(動須相應) - 행마를 할 때는 서로 연관되게, 한 방향으로 행마를 전개하라

“바둑은 서로가 한 수씩 두는 세상에서 제일 공정한 게임입니다. 이건 아니잖아요. 이런 바둑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넌 아직 어려서 사는 걸 몰라.”
“사람들은 그러더군요. 뭐든지 하다가 안 되면 살기 위해서라고.”
“넌 살기 위해서 그런 적 없냐?”
남해가 물었다.
민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겠냐. 세월이 흐르고 살아보면 그것밖에 안 되는데...”
“정말 인생이 바둑이라면 첫 수부터 다시 한 번 두고 싶다.”

피강자보(彼强自保) - 주위의 적이 강한 경우에 우선 내 돌을 먼저 보호하라

“약속을 지켰네.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월송정이라고 소나무 밭 앞으로 은빛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데, 내가 내려가면 한번 다녀갈래?”
“예.”

세고취화(勢孤取和) - 상대 세력 속에서 고립되어 있을 때는 신속히 안정하는 길을 찾아라

‘싸움에서 상대에게 기가 눌리면 지거든. 그건 바둑이나 싸움이나 비슷해. 큰 승부일수록 기에서 밀리면 끝이다.’
민수는 남해가 해줬던 충고가 떠올랐다.
내 바둑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살면서 선생이 없었다고 말하는 변두리 조폭 두목 남해.
입단을 포기하고 동네 기원에서 사범으로 지내면서 내기 바둑으로 연명하는 민수.
민수에게 남해는 스쳐가는 사람이 아니라 바둑제자이면서 인생의 멘토가 된다.
이 영화는 조폭을 미화하지 않는다. 남해는 10년 전에 본인의 손으로 ‘형님’을 은퇴시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수하에게 죽임을 당한다. 본인의 업보를 그대로 되받게 된 것이다.
“정말 인생이 바둑이라면 첫 수부터 다시 한 번 두고 싶다.”는 대사는 스스로 물러나고자 하는 본인의 의중과 그동안의 삶에 대한 회한을 그대로 드러낸다.
자신보다 까마득하게 어린 바둑 선생 민수가 바둑기사 입단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인생은 ‘국수’가 되지 않아도 그럼에도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민수에게 입단심사를 보면 자신도 일을 그만 두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키려 하다 뜻하지 않게 생을 마감한다.
마지막 장면은 남해의 죽음 1년 후 자신만의 바둑을 시작하는 민수를 클로즈업하면서 끝이 난다.

나는 바둑을 하지 못한다. 바둑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래도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 것 같다. 그럼에도 인생은 계속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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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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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소설은 영상화되는 경우가 많아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있다.
영화 보는 걸 중간에 멈춘 경우에도 소설을 읽을 경우에 영화의 색감이나 분위기, 주인공이 대입되어 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종이달은 뭔가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 책이다.
가끔 신문 사회면으로 접하는 '간 큰 경리직원'의 속사정을 알게 되는 듯한 기분으로 읽었다(혹은 보았다).

인간관계는 필연적으로 얽혀있게 마련이고, 학교나 직장처럼 한 곳에서 매일 마주쳐야 하는 구성원들이 있어 각자 일정기간 동안 지내다 보면 각인되는 이미지가 있다.

처음부터 고객들의 돈을 횡령한 것이 아니다. 처음 직장에 들어갈 때부터 범죄를 저지를 생각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악인의 얼굴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도 처음과 계기가 있다.
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선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관심이란 어떤 것일까? 어릴 적엔 세상의 중심이 '나'인 줄 알았으나 점차 세상은 '나'없이도 돌아가고 '나'는 그저 대체할 수 있는 부속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그럴 때, 내가 살아있고 주목받을 수 있는 계기와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주인공에게 연민의 감정이 느껴진 대목은 범죄를 저지르면서까지 돈을 주었던 남자로부터 '자신은 강요한 적이 없다', '네가 알아서 한 일지 않냐'는 회피성 발언을 들었을 때였다.

멀리 타국에서 잠적하다 마지막에 검거되는 장면에서 클로즈업되는 그 얼굴. 종이달은 어떤 의미였을까? 가짜? 빛나보이지만 빛을 내지 못하는 달?

인상깊은 구절

리카는 얼마 전에 이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무서운 것도 두려운 것도 무엇 하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기분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리카는 신기했다. 나는 무언가를 얻어서 이런 기분이 된 걸까. 아니면 무언가를 잃어서 이런 기분이 된 걸까.

화려하게 아름다운 것은 아니고, 갓 쓰기 시작한 비누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아이라고, 유코는 중학생 때부터 리카를 보며 생각했다.

리카에게는 이 숙소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하나같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매춘부도 여행자도, 몸에 걸친 것뿐만이 아니라 분위기까지 포함해 모든 것이 지저분하고, 얇은 코트 같은 피로를 걸치고 있고, 화사한 색의 옷을 입고 있어도 칙칙해 보였다.

다 얘기해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리카는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생각했다. 있지, 당신들이 일본에 있을 수 없게 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말이야, 정말로 돌아갈 수 없는 짓을 저질렀어.

리카가 자기 가족이 세상 사람들보다 혜택 받은 환경을 누리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였다. 리카가 다녔던 학교는 종교 학교로 국내외 후원을 아주 열심히 했다. 예배 시간에도 후진국 사람들의 빈곤에 관해, 전쟁과 분쟁의 희생에 관해 날마다 기도했다. 리카는 그제야 자신을 포함한 주위 학생들이 유복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자각과 함께 부끄럽게 생각했다. 뭔가의 희생 위에 자신들의 생활이 있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두 사람이 건넨 것은 50만 엔으로 그 금액을 볼 때까지 리카는 그걸 착복할 생각은 없었다. 50만 엔.

"주간지에는 지금까지 여자의 횡령 사건은 모두 남자가 관련되었다고 쓰여 있었어요. 그래서 우메자와 리카도 그럴 것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어요. 남자가 돈을 달라고 해서 줬을까요. 아니면 그녀가 본인 내겠다고 말하다 보니 점점 커졌을까요."

"리카 씨하고 있으면서 엄청나게 많은 걸 할 수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아직도 놀라요. 이 사람 도라에몽인가 생각할 때도 있어요."
고타는 거기서 웃었다. 밤하늘이 환하게 밝아지고, 한여름의 아름드리나무터럼 노란 빛이 동그랗게 퍼졌다. 셀 수 없을 정도의 빛이 밤하늘을 긁듯이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나는 무엇을 사달라든가 해달라는 말 한 번도 한 적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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