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 감상평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책장을 끝까지 넘기고 나면 제목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나'의 예감은 맞지 않았다.

"나"는 40년의 시간을 거슬러 20대 초반에 생을 마감한 친구의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처음에는 타인의 의사(유언)에 의해, 이후에는 자의로.

역사에 대한 '나'의 관점이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에서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로 변할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마주하는 '에이드리언'의 죽음의 진실에는 나의 치기 어린 저주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존재하는 듯 하다.
내가 만약 편지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평범하게 살았던 일생의 한 장면. 잊고 있었던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적은 편지가 하나의 계기가 되어 동경했고, 라이벌로 생각했고, 하지만 여전히 친구로 남고 싶었던 '에이드리언'이 자살을 택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40여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알게 되는 순간.

'나'는 잘못을 빌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대상이 틀렸다.

명징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은 무지였고, 완전무결하다고 믿었던 친구의 스스로 선택한 죽음은 일종의 죄책감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들었다. 전 여자친구(베로니카)의 어머니. "그래도 마지막 몇 달 간은 행복했다고 믿는다"는 구절의 의미.

나는 지금 60대이고, 이혼한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대머리이고, 딸의 무심함에 가끔 서운함을 느끼는.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나름 평균적인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적당히 철학적이고 배려심이 있다고 느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에이드리언'이 너무 똑똑해서 죽은 것 같지?

세월에 묻고 살았던 진실은 어떻게든 전달되게 마련인 것 같다. '나'를 탓하면서, 그래도 '나'가 위안을 얻었으면 한다. 얼마간의 돈을 남긴 것도 그래서 일까. 상반된 듯 보이는 감정.

네 탓이다. 네 탓만은 아니다. 그래도 알아주기 바란다.

'나'는 둔한 사람이었다. '베로니카'가 나에게 왜 화가 나 있는지를 마지막이 되어서야 겨우 알았다.
'어머니'가 '아닌 '누나'라는 의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아니 맞지 않는다.

알지 못 했고, 알 수도 없었던 사실을 시간이 지난 후에 몇 가지 단서(일기장, 증언)를 통해서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깨닫게 되었을 뿐이다.
 
'나'를 포함한 3총사에 '에이드리언'이라는 일종의 천재가 들어온 어린 시절. 그리고 학우의 죽음.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가 사귀게 되면서 내가 인정한 존재이면서 인정받고 싶어했던 존재인 에이드리언과 멀어지게 된 과정을 그린 1부
 
베로니카의 어머니의 죽음. 유언장에 적힌 '나'의 이름과 얼마간의 돈, 일기장.
다시 만난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의 죽음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2부
 
마지막의 반전이 가슴을 때린다.

2. 인상깊인 구절, 첨언

잘은 모릅니다, 선생님. 하지만 하나의 사유 방식은 있는데, 그에 따르면 모든 역사적 사건 - 예를 들어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까지도-에 대해 우리가 진실되게 할 수 있는 말은 '뭔가 일어났다'는 것 뿐입니다.
경우를 막론하고, 죽음의 원칙과 충돌하는 에로스의 원칙이죠. 그리고 그 충돌의 결과로 뒤이어 나타나는 것들까지도요.


'에이드리언'의 위 말들은 본인의 죽음에 대한 간접적인 예언인 듯 하다.

사실, 책임을 전가한다는 건 완전한 회피가 아닐가요? 우린 한 개인을 탓하고 싶어하죠,그래야 모두 사면을 받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개인을 사면하기 위해 역사의 전개를 탓하거나, 그도 아니면 죄다 무정부적인 카오스 상태 탓이라고 해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제 생각엔 지금이나 그때나 개인의 책임이라는 연쇄사슬이 이어져 있는 걸로 보입니다.

'나'에게 '에이드리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우리 대부분에게 첫사랑의 경험은, 비록 좋게 끝나지 않는다 해도 - 어쩌면 그럴 때 더더욱 - 삶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삶의 권리를 지지하는 실체가 이곳에 있다는 희망을 준다.
우리는 충동적으로 결정한 다음, 그 결정을 정당화할 논거의 하부구조를 만든다. 그런 후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를 상식이라고 말한다.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상식이라는 잣대로 판단이 가능할까

어쩌면 나는 대략 합의하에 결정된 역사가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나'의 기억은 어느 정도 대략 합의하에 결정된 역사였던 것 같다. 내가 보낸 편지를 40여년이 흐른 뒤에 보기 전까지는...

그 일기장은 증거였다. 확실한 -아마도-증거물. 진부하게 반복되는 기억을 구제해주고 물꼬를 터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시간이란....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시간이 흘러 어떤 사건을 떠올릴 때. 회한없이 떠올릴 수 있었으면 한다.

장담컨대, 회한의 주된 특징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데 있다. 이미 까마득한 시간이 흐른 마당에 사과를 하거나 보상해봤자 부질없는 짓이다.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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