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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 인생의 한 수를 내려놓다 ㅣ 가연 컬처클래식 19
이상민 지음, 조세래 각본 / 가연 / 2014년 6월
평점 :
동명의 영화.
아마 정우성 배우 주연의 '신의 한수'와 비슷한 시점에 나온 바둑을 모티브로 한 영화로 기억한다. 조세래 감독님의 유작이었고, 조세래 감독님의 아들인 조동인 배우(민수 역), 황혼에서 인생을 반추하는 듯 연륜있는 연기를 보여준 김뢰하 배우(남해 역), 군대바둑 3급인 충직한 조직2인자 역할 박원상 배우(인걸 역)의 연기가 인상깊었던 영화.
2014년에는 스크린과 브라운관에 바둑을 모티브로 하는 영화와 드라마가 여러편 나온 해였다(tvn 드라마 미생도 2014년에 방송되었다.).
흥행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이 영화는 나름의 미덕이 있다.
각 장마다 한글 제목 하에 바둑용어 부제가 들어있다.
부득탐승(不得貪勝) - 너무 이기려고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입계의완(入計宜緩) - 적의 세력권에 들어갈 때, 무모하게 서둘거나 깊이 들어가지 말라
공피고아(功彼顧我) - 적을 공격할 때 나의 능력과 결정 유무 등을 먼저 살펴라
기자쟁선(棄子爭先) - 바둑돌 몇 점을 희생하더라도 선수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
“내 바둑선생이 돼 줘. 난 살면서 한 번도 선생이 없었어.”
남해가 자조적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소취대(捨小取大) - 눈앞의 작은 이득을 탐하지 말고 대세를 취하라
민수는 돌을 놓고 남해의 손을 흘끗 쳐다보았다. 저렇게 한 번에 많이 쥐고 있으면 불편하지 않을까. 항상 이유가 궁금했지만 좀처럼 물어볼 틈이 없었다.
둘만 남자, 남해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민수도 조용히 앉았다.
“이건 돌이고 이건 칼인데....”
남해가 칼과 바둑돌을 놓으며 말했다.
“넌 원래 이걸 가지고 놀았잖아. 앞으로도 한 가지만 가지고 놀아.”
그렇게 말하며 남해는 바둑돌을 민수 앞으로 밀었다.
봉위수기(逢危須棄) - 위험에 처할 경우 버리든가 아니면 보류하라
이 남자는 왜 나를 이곳에 데려왔을까.
나에게 바둑을 배우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에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것일까.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지금은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잘은 모르지만 이곳에서만큼은 그도 ‘평범한 사람’으로 남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질문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뜯어봐도 도무지 ‘활로’가 보이지 않았다.
답답하게 꽉 막힌 자기 인생처럼.
숨이 탁 막혔다.
신물경속(愼勿輕速) - 경솔하게 빨리 두지 말고, 한 점 한 점을 신중히 생각하라
“돌을 많이 쥐고 있으면, 손 안이 꽉 차는 게 마음이 편안해져.”
“사장님은 왜 깡패가 됐어요?”
“넌 왜 바둑을 두게 됐냐?”
남해가 질문을 질문으로 받았다.
“엄마가 바둑을 두라고 해서요. 혹시 엄마가 깡패 되라고 그랬습니까?”
민수는 멋쩍게 웃으며 되물었다.
“되라고 한 적은 없었지만 내가 누굴 때리고 들어오면 잘했다고 칭찬한 적은 있었지.”
“그게 그거네요. 엄마가 깡패 되라고 했네요.”
“우리 엄마,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죽었다.”
남해가 말했다.
민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타이틀을 못 따면 프로기사가 아니냐? 이세돌이만 프로기사고 박지성이만 축구선수냐? 다른 축구선수는 선수도 아니냐? 다른 사람 인생은 인생도 아냐?”
민수는 깜짝 놀라 남해를 쳐다봤다.
“바둑이 먼저냐, 사는게 먼저냐?”
남해가 눈을 부릅뜨고 민수를 노려보며 나직이 물었다.
“그걸 알면 고수다. 잊지 마라.”
동수상응(動須相應) - 행마를 할 때는 서로 연관되게, 한 방향으로 행마를 전개하라
“바둑은 서로가 한 수씩 두는 세상에서 제일 공정한 게임입니다. 이건 아니잖아요. 이런 바둑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넌 아직 어려서 사는 걸 몰라.”
“사람들은 그러더군요. 뭐든지 하다가 안 되면 살기 위해서라고.”
“넌 살기 위해서 그런 적 없냐?”
남해가 물었다.
민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겠냐. 세월이 흐르고 살아보면 그것밖에 안 되는데...”
“정말 인생이 바둑이라면 첫 수부터 다시 한 번 두고 싶다.”
피강자보(彼强自保) - 주위의 적이 강한 경우에 우선 내 돌을 먼저 보호하라
“월송정이라고 소나무 밭 앞으로 은빛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데, 내가 내려가면 한번 다녀갈래?”
“예.”
세고취화(勢孤取和) - 상대 세력 속에서 고립되어 있을 때는 신속히 안정하는 길을 찾아라
‘싸움에서 상대에게 기가 눌리면 지거든. 그건 바둑이나 싸움이나 비슷해. 큰 승부일수록 기에서 밀리면 끝이다.’
민수는 남해가 해줬던 충고가 떠올랐다.
살면서 선생이 없었다고 말하는 변두리 조폭 두목 남해.
입단을 포기하고 동네 기원에서 사범으로 지내면서 내기 바둑으로 연명하는 민수.
민수에게 남해는 스쳐가는 사람이 아니라 바둑제자이면서 인생의 멘토가 된다.
이 영화는 조폭을 미화하지 않는다. 남해는 10년 전에 본인의 손으로 ‘형님’을 은퇴시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수하에게 죽임을 당한다. 본인의 업보를 그대로 되받게 된 것이다.
“정말 인생이 바둑이라면 첫 수부터 다시 한 번 두고 싶다.”는 대사는 스스로 물러나고자 하는 본인의 의중과 그동안의 삶에 대한 회한을 그대로 드러낸다.
자신보다 까마득하게 어린 바둑 선생 민수가 바둑기사 입단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인생은 ‘국수’가 되지 않아도 그럼에도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민수에게 입단심사를 보면 자신도 일을 그만 두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키려 하다 뜻하지 않게 생을 마감한다.
마지막 장면은 남해의 죽음 1년 후 자신만의 바둑을 시작하는 민수를 클로즈업하면서 끝이 난다.
나는 바둑을 하지 못한다. 바둑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래도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 것 같다. 그럼에도 인생은 계속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