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커스 주니어 02 : 태양광 전기자동차 메이커스 주니어 2
메이커스 주니어 편집팀 지음 / 동아시아사이언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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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언니가 어떤 글을 보내 주었다. 유노윤호가 직접 만든 코인노래방에 관한 글이었다. 큰 상자와 계란판을 이용해 방음이 가능하게 만든 코인노래방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의 아이디어였다. 심지어 안쪽 벽면에는 실제로 동전을 넣는 것처럼 저금통과 연결된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제목부터 <발명왕>인 그 프로그램에서는 그보다 잘 어울릴 수 없는 연예인인 유노윤호가 나와 물건을 뚝딱뚝딱 만든다고 한다. 언제나 열심히 사는 모습이 대단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런 끊이지 않는 아이디어라니... 분명 저번에도 무슨 특허를 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던 것 같은데... 정말 부러운 열정이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유노윤호는 이과인가?


발명 하면 나는 왠지 이과와 과학이 바로 떠오른다. 모든 이가 그렇겠지만, 나 역시 과학과 발명에 관한 어떤 환상이 있다. 어렸을 때는 사실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칠판을 가득 메운 수학 공식과 삼각 플라스크를 든 채 이리저리 용액을 옮겨 보는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 그리고 그러다가 해리포터의 친구처럼 얼굴에 까만 재가 내려앉는 모습, 로봇이 눈을 떠 말을 거는 모습을 바라보는 감격적인 표정.... 대부분이 현재와는 꽤 거리가 있는 모습이지만 이런 이미지가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어렸을 적부터 어려운 것과 별개로 재미있어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복잡한 사정으로 나는 문과생이 되었지만 여전히 과학이 관련된 만들기 영상이나 키트를 보면 두근거린다. 이번 서포터즈 도서 선택에서는 동아시아사이언스에서 출간하는 《메이커스 주니어》 시리즈가 포함되어 있었다. 마음만은 발명왕이었던 그때로 돌아가 보자는 생각으로 이 잡지를 골랐다.


《메이커스 주니어》는 “주니어”가 직접 만들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키트와 재미난 이야기가 실린 잡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호의 주제는 태양열인 만큼 태양에너지 연구의 필요성과 원리, 그리고 현황 등이 담겨 있었다. 짤막하지만 유익한 이야기들이다. 특히 인공 태양에 관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공 태양을 발명하는 중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태양광 드론도 어느새 이렇게 과학 기술이 발전한 건지,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어려울 만한 이야기가 말을 건네는 방식으로 어렵지 않게 쓰여 있고,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해 상식을 가벼이 툭툭 던져 주는 투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포함된 키트를 이용해 전기자동차를 직접 만들어 보았다.



상자 안에는 굉장히 간단한 준비물이 들어 있다. 조립 방법은 메이커스 잡지 내에 적혀 있으므로 보고 따라 하면 된다. 키트 커버에는 초등학교 3학년 이상 사용 권장이며, 소요 시간 15분이라고 적혀 있지만 나는 머리가 다 큰 성인이므로 조립하는 데에 5분 정도 걸렸다. 직접 만들어 보면서 느낀 가장 큰 장점은 준비물들이 비교적 안전하다는 것이다. 날카롭지 않고 전체적으로 마감 처리가 둥글둥글해 어린이가 쓰기에 딱 좋아 보였고, 완성한 모습도 깔끔하고 예뻤다. 그리고 어렵지 않다. 만드는 과정이 복잡하지 않아 누구든 쉽게 해낼 수 있을 만한 난이도다.



만들면서 생각해 보니 예전 언젠가 이런 비슷한 태양열전기자동차를 만든 적이 있다. 초등학생 때였나... 캠프 비슷한 데에서 완성품을 들고 신나게 내리막길을 뛰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같이 있었던 친구가 누구인지, 그때 만든 자동차는 잘 작동했는지 등은 알 수 없지만 불현듯 떠오른 장면에 잠시 향수에 젖었다. 자동차가 움직이는 모습도 동영상으로 찍어 업로드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빛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인지 움직이지 않아 아쉬웠다. 조만간 어딘가로 짧게 놀러 다녀올 예정인데,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은 게 못내 아쉬워 진심으로 여행에 같이 가져갈까 고민 중이다.


《메이커스》는 성인을 위한 버전도 있는데, 성인용은 훨씬 스케일이 크다. 무려 직접 만드는 AI 스피커에 카메라다. 나중에 한 번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주니어 시리즈 피라미드 홀로그램도 검색해 보니 너무너무 신기했다. 사서 해 볼까.... 아무튼 어린이를 타깃으로 한 잡지이니 아이들이 놀며 배우기에 좋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또 누가 이 잡지와 키트를 효과적으로 사용해 볼 수 있을까 고민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지금 따라잡기에는 간격이 너무 벌어진 듯해 어디부터 공부해야 할지 아득한 문과생들에게도 꽤 쓸모 있지 않을까, 하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성인용의 난이도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메이커스 주니어》는 어린이 과학잡지가 유치할 것이라는 선입견만 떨쳐낼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되어 줄 수 있는 잡지이다. 실은 잡지를 직접 찾아보지 않는 편이라 《메이커스 주니어》 역시 동아시아 서포터즈를 하기 전에는 그 존재를 몰랐다. 그러나 이번 활동을 통해 잡지의 매력에도 푹 빠지고, 내 안의 발명 욕구가 다시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주시하다가 관심 분야가 출간된다면 구매해서 만들어 보고 싶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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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살인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0
최제훈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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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단지(斷指) 살인마’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피해자가 늘어남과 함께 잘려 나가는 손가락도 한 개, 두 개, 세 개에서 네 개로 늘어나는 중, 성공한 전업 투자자 장영민은 “탐정 놀이”를 시작한다. 놀이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혹시 십계명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다섯 번째 피해자 황성찬의 장례식장까지 찾아가 친구인 척 정보를 캐내는 그는 탐정 역할에 한껏 심취한 듯 보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범행 도구처럼 보이는 준비물을 백팩에 챙겨 넣는다. 그가 좇는 사람은 사이버 흥신소를 통해 추적한 고교 동창 양승범이다. 이십 년 전 그에게 성추행을 가해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남자. 그가 모는 택시를 타 일산 성석동으로 가 달라고 주문한 후, 장영민은 자꾸만 양승범을 도발한다.






원래대로라면 살인을 은폐하기 위한 알리바이와 그럴싸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일은 상당히 복잡하고 골치 아프다. 그런데 만약 악명을 떨치는 연쇄 살인마인 척 이 일을 단순히 해결할 수 있다면, 마침 “아무 때나 불쑥 나타나서 등짝을 할퀴는” 기억이 있다면. 이런 가정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장영민은 성공한 전업 투자자이지만, 초반의 직접적인 언급을 제외하면 사실상 방구석에서 인터넷을 하는 백수처럼 보인다. 딱히 누군가 친분 있는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열일곱 살의 기억 속에서 “강산이 두 번 변하도록 혼자 허우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해자였던 양승범이 비록 원하던 체육 교사는 못 되었어도 개인 택시 기사로 소소히 밥벌이를 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동안에. 심지어 그때의 기억을 완전히 잊은 듯하다. 장영민은 양승범과 함께 과거를 떨쳐낸 후에야 “불안장애가 있어서 그동안 엄두를 못” 냈던 해외여행도 갈 수 있게 된다.






<신과 함께>를 보고 생각했던 건 내가 별다른 이유 없이 했던 일들이 누군가의 인생을 뒤흔들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잠자리에 누워 하루를 곱씹다가 “아, 그 말은 그냥 하지 말걸 그랬네. 이미 했으니 어쩔 수 없지, 뭐.” 하고 이불을 쑥 덮고 잠들어 버린 뒤 잊었던 말이 상대에게는 큰 파장으로 이어져 정신적 피해나 극단적 선택의 요인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거나, 피둥피둥 놀면서 한가로이 낭비한 시간들이 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영화 전체의 재미와 별개로 충격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이긴 한데 현실처럼 구현해 놓은 걸 직접 지켜보는 거랑은 다르니까. 물론 나는 양승범 같은 악랄한 짓은 하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으나, 자연스레 반추하게 되었다. 더불어 연쇄살인마와 모방범의 관계를 생각했다. 이미지와 밝혀지지 않은 사연은 오히려 미디어에서 시나리오처럼 짜임새 있게 만들어 주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조커>의 주인공이 멸시만 당하는 인생에 염증을 느끼다가 충동적인 살인을 저지른 것뿐인데, 빈곤층의 반란이라며 포장한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들도 ‘손가락을 자르는 데에 희열을 느끼는’ 단지(斷指) 살인마가 아니라 단지 살인마일 뿐일지도 모르는데.






『단지 살인마』에는 적어도 두 편 이상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서평에 쓴 내용은 전체의 반도 안 된다.) 아마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요약해서 친구에게 들려 주면 깜짝 놀라지 않을까. “그걸 다 담았다고?” 같은 반응을 예상한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되짚어 보니 나 역시 그 점이 가장 놀라웠기 때문이다. 이 정도 이야기를 200페이지 안에, 그것도 작은 판형에 다 담아내려면 중구난방 정신없거나 급전개 혹은 급마무리일 텐데, 최제훈은 느릿하면서도 결코 늘어지지 않게 풀어낸다. 정말로 오랜만에 호로록 읽어 넘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소설이었다. 그러나 단지 흥미 소설이라고 소개하기에는 영 시원치 않을 감상이다. 핀 시리즈의 한 편답게 아직 단지 살인마의 이야기는 진행 중이며, “자기 복제”의 또 다른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분명한 경고 메시지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둘러 덧붙인다. 늘여 쓴 내용을 제하고도 『단지 살인마』는 마지막까지 “시작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쉽다”는 말을 구현해냄으로써 누구나 단지 살인마를 넘어 연쇄 살인마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남겨 두고 있다고.

다만 혹시 영화 스포일러를 싫어한다면, 특히 브래드 피트 주연 <세븐>을 아직 보지 못했다면 꼭 영화부터 보고 읽기를 권한다. 본의 아니게 스포당했잖아요.... 🤣 그래도 소설이 재미있었으니 뚝딱 용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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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별이 만날 때
글렌디 벤더라 지음, 한원희 옮김 / 걷는나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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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류생태학 전공 대학원생 조애나 틸은 유리멧새의 부화 성공률을 연구하기 위해 키니 교수의 집에서 지낸다. 그곳에서 연구를 하던 도중 숲 속에서 아홉 살 여자아이 이어푸드(얼사 메이저)를 만난다. 그 아이는 스스로 헤트라예에서 온 외계인이며, 죽은 여자아이의 몸을 빌렸다고 소개한다. 조는 납득할 수는 없지만 일단 밥을 먹이기 위해 달걀을 사러 갔다가 달걀장수 개브리엘 내시와 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조는 얼사를 집으로 돌려보내려 하지만,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다섯 개의 기적”만 보고 돌아가겠다는 얼사의 태도에 유보한다. 결국 묘한 달걀장수까지 합세해 얼사 메이저를 돌본다.

초반부에는 묘한 분위기의 미스터리인 줄 알았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의심할 여지 없는 힐링 치유 서사였다. 책 중간부터는 사실 얼사가 꼭 보겠다고 고집 부리는 다섯 개의 기적이 무엇인지, 얼사의 정체는 무엇인지 희미해진다. 이 부분에 관해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다가 실패한 게 아닐까 잠깐 의심했는데, 끝까지 읽고 보니 처음부터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작가가 의도적으로 제쳐 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소 급하게 진행되는 조와 게이브의 러브라인 역시 결국 얼사가 엮어 준 두 사람의 관계이고, 스킨십이나 흥미를 돋우기 위한 소재보다는 두 사람이 서로를 어떻게 보듬어 가는지를 그려내기 위한 장치였기에 큰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조는 어머니의 암 투병 중 우연히 자신 역시 유방암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인물이다. 어머니의 투병 ‘덕분에’ 자신의 병을 알게 된 경험은 그녀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고, 치료 후 남성에게 이성으로 비추어지지 않는 몸은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지만 단순한 신체적 이유만으로 자신과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꺼리는 타인의 태도와 시선도 그녀에게 큰 상처다. 문학을 좋아하는 달걀장수인 줄 알았던 게이브에게도 나름의 아픔이 있다. 그는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데에 실패한 누나 레이시의 질타와 가스라이팅으로 위축된 상태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각자 상처를 지닌 두 사람이 만나 공감과 애정을 나누며 로맨스가 전개되고, (반전이라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얼사까지 더해져 서로가 서로를 치유하는 삼각형으로 발전한다. 얼사의 서사가 정말 너무너무 중요한데... 반전의 중심 요소이기도 해서 마음껏 언급할 수 없는 게 안타깝다.

가까울수록 아이러니하게 상처를 주는 관계가 적지 않다. 너무 좋은 관계는 삶의 유한성으로 씻을 수 없는 흉터를 남기고, 너무 아픈 관계는 다른 관계보다 더 깊게 찔러 평생 봉합되지 않는 출혈을 만든다. 어쩌면 서로 완벽히 모르는, 혹은 일시적인 사이에서만 완전한 위로가 시작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러고 보면 언제부터 “타인”은 불신의 심벌이 되었는가. 최근 『관계에도 연습이 필요합니다』에서 “타인은 지옥이다”는 사실 그런 의미가 아닌데, 현대인들이 원하는 대로 해석하며 왜곡되어 현재처럼 사용된다는 이야기를 읽고 놀란 기억이 있다. 『숲과 별이 만날 때』는 의심으로 얼어붙은 세상에 살랑 불어 온 책이다. 글렌디 벤더라는 이 책으로 따뜻한 기운을 선사함으로써 어느덧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 저녁을 덥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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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고, 친애하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1
백수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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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의 한국 현대 문학에 입문하자마자 백수린의 소설 『참담한 빛』을 읽었다. 그때가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으니... 삼 년? 사 년 만에 다시 그녀의 소설을 읽는 셈이다. 선택 도서는 주어진 세 권 중에 골라 받을 수 있었고, 공교롭게도 모두 아직 읽지 않은 책이었다. 나에게는 진부해도 실패하지 않는 류인 가족 서사(그것도 여성 서사!)와 입문의 추억이 담긴 작가. 어렵지 않게 선택할 수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과거를 되짚는다. 과거는 스물둘 인아가 엄마의 권유(라고는 하지만 사실 “유배”와도 같다)로 할머니 댁에 가서 살기 시작하는 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편찮으시다는 사실을 모른 채 보냈던 나날을 곱씹는 것이다. 그런 인아의 마음속에는 여섯 살이 된 후에야 불쑥 자신을 엄마라고 소개하며 나타났던 현옥에 대한 원망이 있다. 어머니의 삶과 할머니의 삶이 밀려들며 그 감정은 가장자리로 쓸려 나간다.



언제쯤 엄마를 완전히 알 수 있을까? 이제는 조금 엄마의 삶을 이해하는 듯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엄마를 잘 모른다. 들은 이야기의 도막 도막을 모아 묶어도 비어 있는 틈새는 내 추측으로 메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성된 엄마의 ‘서사’는 결국 일정 수준 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느 정도는 넘겨 짚어진 것이라 완결성을 포기하고 듬성듬성한 상태로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함부로 동정하거나 함부로 넘어가고 싶지 않은 영역,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 치부하면서도 놓치고 싶지 않은 영역. 아마 세상 대부분의 딸에게 엄마의 삶은 이런 게 아닐까.


작중에 등장하는 엄마와 딸은 모두 어색하고 서먹한 관계이다. 할머니와 엄마의 관계, 엄마와 인아의 관계보다 가까운 것은 오히려 할머니와 인아의 관계다. 어쩌면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지 못하는 거리라서 가능했을 일이다. 엄마와 딸은 시소에 앉은 듯 한 가지를 책임지면 그 대가로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하는 사이 아닌가. 『친애하고, 친애하는』의 인아도 자꾸만 엄마에게 묻고 싶다. “갓 낳은 아이를 두고 갈 만큼 미국이 좋았느냐”고, “엄마 인생에는 엄마의 공부가 가장 중요했던 거”냐고. 일에 밀렸던 경험이 인아로 하여금 엄마에게 한껏 다가가지 못하게 만든다. 할머니는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해 “남성적인 머리”를 타고난 딸을 최고의 자랑으로 삼아 열심히 키웠으나, 결코 가부장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소설의 모녀는 직접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제삼자를 통해 겨우 짐작하거나 속죄하며, 그 입장에 서서 이해한다. 만족스럽지 못한 결혼 생활로 상처받아도 딸을 꿋꿋이 키웠던 두 엄마의 울퉁불퉁한 이야기가 마음을 긁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떠나 보냈던 시간의 복기도 외면할 수 없는 포인트다.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반려견이 주인에게 말하는 상황극을 만들어 엮은 사진을 보았다. 금이야 옥이야 키워 놨더니 어느 날 대뜸 웬 수컷 강아지(심지어 연상)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는 내용이었다. 너무 갑작스럽다고 하자 “내가 언제 키워 달라고 했냐”, “다른 집 언니들은 유치원도 보내 주는데 나만 못 갔다” 등... 따발총처럼 쏟아내는 내용을 읽다 보니 실제 상황도 아닌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고, 억장이 무너졌다. 우리 아라가 나에게 그런 못된 말을 한다면... 하는 생각과 함께 여태까지 엄마에게 상처 주었을 많은 발언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쳤다. 최근 『걸어도 걸어도』를 읽고 너무 많이 울어서 이 책을 읽기도 전에 겁부터 났는데, 예상과 달리 담백한 구성에 잔잔한 물결이 인다. 백수린의 묘사는 첨언할 바가 없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너무 좋아서 여전히 그곳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잊히지 않는 그 ‘참담한 빛’이 드는 복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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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 타인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단호하고 건강한 관계의 기술
박상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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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 답이 없는 문제라는 생각을 넘어, 이제는 언젠가 내가 관계의 달인이 되는 날이 오긴 올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돌이켜보면 예전의 나는 집착적인 데에 가까웠다. '넌 나만 바라봐'처럼 나는 다른 친구를 사귀더라도 내 친구들에게는 내가 유일한 친구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태도였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태도가 나 자신에게 독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연스럽게 변화가 일어났다. 지금은 적어도 관계라는 분야에서만큼은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는다. 상대에게 기대하는 게 크다 보니 혼자 상처받고 혼자 서먹해졌던 과거도 안녕.... 누가 내 험담을 하더라도 내 귀에만 안 들리면 상관없다. 조금 더 일찍 깨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는 부모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이해를 못 했다. 물론 이게 현재의 나에게 문제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의 나는 너무 냉담해져서 문제인 것 같다.  나 자신이 1순위가 된 탓에 귀찮고 바쁘다는 이유로 관계를 종종 소홀히 해서다. 사실은 어제도 어차피 늦게 잘 거면 연락 좀 해 달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아, 왜 이렇게 어려운 거지.

『관계에도 연습이 필요합니다』는 관계 상담 클리닉을 지면에 옮겨 놓은 듯한 책이다. 1장 「자유로운 삶을 위한 인간관계 연습」은 성현들의 말에서 찾을 수 있는 인간관계의 기술을 소개한다. 『논어』처럼 저명하지만 아직 읽어 보지 못한 책의 일부가 인용되어 있어 유익했다. 2장 「관계를 살리는 공감대화법」에서는 실제 경험과 일상의 흔한 충돌 사례를 곁들여 부정적인 어두를 사용하지 않고도 부드럽게 말하는 법을 알리고, 실제 감정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3장  「단호하게 나를 지키는 마음 연습」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면서 틈틈이 들여다보고 돌봐 주어야 할 내면에 관해 적었다. 1장과 2장 사이의 「관계 상담소」는 특정 상황 대처법에 관해 조언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간중간 책에서 가르쳐 준 내용을 적으며 연습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단순 친구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상사와의 관계에서도 난처한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구체적 상황이 적혀 있어 실용적이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관계의 범위가 넓은 만큼 단순히 잘 맺고 끊는 법이 아니라 상세한 문제점을 진단해 보고, 스스로 처방을 마련해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아르바이트 경험 이후로 전혀 죄송할 일이 아니고, 죄송하지 않은데도 습관적으로 '죄송하지만'을 붙이는 버릇이 생겼는데, 불필요한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입사하자마자 일부러 배운 어투인 만큼 고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주입식 쿠션어를 사용하지 않고 말하는 법을 익혀 보려 한다.

혼자가 편한 사람이라면 애당초 관계에 관한 도서를 집으려고 하지도 않겠지만, 만약 내게 묻는다면 이 책을 굳이 권하고 싶지는 않다. 관계는 아무리 편히 마음 먹으려고 해도 시작되는 순간부터 끊기는 순간까지 신경을 써 주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각자에게 걸맞은 삶의 방식이 있는 법이기에 긍정적 측면을 피력해 가며 관계에 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강요라고 생각한다. 같은 이유로 '인싸'와 '아싸' 중 어느 쪽인지 가늠하는 경향은 사라져야 한다고 본다. 『관계에도 연습이 필요합니다』는 말 그대로 관계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영향을 발휘한다. 사실 여기에 관계를 잘 다루는 법에 관한 새로운 지식이 넘쳐난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모두 관계의 정답은 찾아 읽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하면 그 이론을 인생에서 습관으로 만들 수 있을지 쉬운 방법을 익히고 싶어서, 그리고 약간의 위로와 격려를 받고 싶어서 읽을 뿐.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추천할 만하다. 저자의 조곤조곤한 말씨를 읽다 보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샘솟고, 머릿속에서 노발대발한 상대에게도 당황하지 않고 대응하는 나의 온화한 모습이 자동 재생된다. 특히 관계의 정체기에서 약간의 엔진과 부스터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그 등을 가뿐히 밀어 줄 수 있을 것이다.



※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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