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살인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0
최제훈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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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단지(斷指) 살인마’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피해자가 늘어남과 함께 잘려 나가는 손가락도 한 개, 두 개, 세 개에서 네 개로 늘어나는 중, 성공한 전업 투자자 장영민은 “탐정 놀이”를 시작한다. 놀이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혹시 십계명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다섯 번째 피해자 황성찬의 장례식장까지 찾아가 친구인 척 정보를 캐내는 그는 탐정 역할에 한껏 심취한 듯 보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범행 도구처럼 보이는 준비물을 백팩에 챙겨 넣는다. 그가 좇는 사람은 사이버 흥신소를 통해 추적한 고교 동창 양승범이다. 이십 년 전 그에게 성추행을 가해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남자. 그가 모는 택시를 타 일산 성석동으로 가 달라고 주문한 후, 장영민은 자꾸만 양승범을 도발한다.






원래대로라면 살인을 은폐하기 위한 알리바이와 그럴싸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일은 상당히 복잡하고 골치 아프다. 그런데 만약 악명을 떨치는 연쇄 살인마인 척 이 일을 단순히 해결할 수 있다면, 마침 “아무 때나 불쑥 나타나서 등짝을 할퀴는” 기억이 있다면. 이런 가정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장영민은 성공한 전업 투자자이지만, 초반의 직접적인 언급을 제외하면 사실상 방구석에서 인터넷을 하는 백수처럼 보인다. 딱히 누군가 친분 있는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열일곱 살의 기억 속에서 “강산이 두 번 변하도록 혼자 허우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해자였던 양승범이 비록 원하던 체육 교사는 못 되었어도 개인 택시 기사로 소소히 밥벌이를 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동안에. 심지어 그때의 기억을 완전히 잊은 듯하다. 장영민은 양승범과 함께 과거를 떨쳐낸 후에야 “불안장애가 있어서 그동안 엄두를 못” 냈던 해외여행도 갈 수 있게 된다.






<신과 함께>를 보고 생각했던 건 내가 별다른 이유 없이 했던 일들이 누군가의 인생을 뒤흔들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잠자리에 누워 하루를 곱씹다가 “아, 그 말은 그냥 하지 말걸 그랬네. 이미 했으니 어쩔 수 없지, 뭐.” 하고 이불을 쑥 덮고 잠들어 버린 뒤 잊었던 말이 상대에게는 큰 파장으로 이어져 정신적 피해나 극단적 선택의 요인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거나, 피둥피둥 놀면서 한가로이 낭비한 시간들이 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영화 전체의 재미와 별개로 충격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이긴 한데 현실처럼 구현해 놓은 걸 직접 지켜보는 거랑은 다르니까. 물론 나는 양승범 같은 악랄한 짓은 하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으나, 자연스레 반추하게 되었다. 더불어 연쇄살인마와 모방범의 관계를 생각했다. 이미지와 밝혀지지 않은 사연은 오히려 미디어에서 시나리오처럼 짜임새 있게 만들어 주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조커>의 주인공이 멸시만 당하는 인생에 염증을 느끼다가 충동적인 살인을 저지른 것뿐인데, 빈곤층의 반란이라며 포장한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들도 ‘손가락을 자르는 데에 희열을 느끼는’ 단지(斷指) 살인마가 아니라 단지 살인마일 뿐일지도 모르는데.






『단지 살인마』에는 적어도 두 편 이상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서평에 쓴 내용은 전체의 반도 안 된다.) 아마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요약해서 친구에게 들려 주면 깜짝 놀라지 않을까. “그걸 다 담았다고?” 같은 반응을 예상한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되짚어 보니 나 역시 그 점이 가장 놀라웠기 때문이다. 이 정도 이야기를 200페이지 안에, 그것도 작은 판형에 다 담아내려면 중구난방 정신없거나 급전개 혹은 급마무리일 텐데, 최제훈은 느릿하면서도 결코 늘어지지 않게 풀어낸다. 정말로 오랜만에 호로록 읽어 넘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소설이었다. 그러나 단지 흥미 소설이라고 소개하기에는 영 시원치 않을 감상이다. 핀 시리즈의 한 편답게 아직 단지 살인마의 이야기는 진행 중이며, “자기 복제”의 또 다른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분명한 경고 메시지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둘러 덧붙인다. 늘여 쓴 내용을 제하고도 『단지 살인마』는 마지막까지 “시작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쉽다”는 말을 구현해냄으로써 누구나 단지 살인마를 넘어 연쇄 살인마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남겨 두고 있다고.

다만 혹시 영화 스포일러를 싫어한다면, 특히 브래드 피트 주연 <세븐>을 아직 보지 못했다면 꼭 영화부터 보고 읽기를 권한다. 본의 아니게 스포당했잖아요.... 🤣 그래도 소설이 재미있었으니 뚝딱 용서합니다.


※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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