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투성이 연인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0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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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정미경의 단편집이다. 표제작에서 유선은 남편이 남긴 글을 모아 책을 내자는 제의를 받는다. 「호텔 유로, 1203」의 주인공은 라디오 방송 작가다. 과소비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성스러운 봄」은 투병 중인 딸의 장치를 제거한 후 돈을 벌기 위한 일을 계속 하는 아빠의 계절이다. 「비소 여인」의 주인공은 살충약을 뿌린다.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는 성민이 전 여자 친구에게 사진을 돌려 주겠다고 전화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비가 오는 날 읽어서일까, 이 책이 선사하는 축축함에 잔뜩 물들었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살을 가르는 소설이다. 오히려 반전을 일체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충분히 예측 가능한 전개로 실체를 바로 보게 만든다. 그녀가 일군 생생한 문장 사이에서 형형한 눈길이 느껴졌다.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변화를 꾀하지 않고 그대로 살아간다. 그야말로 현실에 가깝다. 특히 「성스러운 봄」은 슬프다 못해 아픈 수록작이었다. 당시에 최선이라고 여겼던 선택이 모든 것을 앗아가는 현실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삶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경험으로도 알고 있고, 요즘에는 많은 콘텐츠가 ‘아프니까 청춘’을 지나 민낯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 예사인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니 오히려 난감해졌다. 잔인하다는 사실을 아로새기며 기대하지 않는 쪽이 나을지, 그래도 포장하며 환상 속에 살아가는 쪽이 나을지 답을 내리는 게 더욱 힘들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마음을 찌르는 소설을 만날 때면 늘 주저 없이 답을 내릴 수 있다. 역시 나는 이쪽이 조금 더 어울린다고.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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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생, 너와 나의 이야기
슛뚜.히조 지음 / 딥앤와이드(Deep&WIde)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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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관계에는 어느 정도 운명이라는 힘이 작용한다.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유일하게 관계에서만큼은 그런 기분이 든다. 얼마 전 “어떤 사람이 좋냐”는 질문을 받고 곰곰이 생각한 결과, 정말로 나에게는 누군가를 사귀는 기준이 없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왠지 더 알고 싶은 경우도 그냥 촉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다. 필연이었던 사람끼리는 언젠가 만나게 되고, 언젠가 이어지게 된다고 해야 하나. 그게 내 인간 관계 운명론이다. 『여생, 너와 나의 이야기』의 저자 슛뚜와 히조는 어쩌면 운명적으로 시작된 관계이다. 그쪽 방면에는 관심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책을 읽고 검색해 보니 두 저자 모두 유명한 브이로그 유튜버라고 한다. 특히 슛뚜라는 이름은 언젠가 들어 본 것처럼 익숙해서 따로 더 찾아보았다. 알고 보니 예전에 테마 리팩 블로그를 운영하던 분이었다.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슛뚜와 히조는 대학에서 처음 만났다. 대학 생활이 갑갑하게만 느껴졌던 두 사람의 우정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다. 함께 술자리부터 여행까지 함께 한 그들의 사이는 아주 각별하다. 『여생, 너와 나의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 놓는다. 책 속에는 크게 세 가지 이야기가 있다. 슛뚜의 이야기, 히조의 이야기,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슛뚜의 글에서는 반려견 베베를 향한 애정이, 히조의 글에서는 독서를 향한 애정이 여실하다. 둘 중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온전히 모두를 담아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특히  「술 네 잔의 염원」 에서는 여생(女生)이라는 제목에 걸맞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나는 무작정 괜찮다고 말하는 글을 선호하지 않는다. 모두 아름다운 것으로 포장하기에 급급한 글은 더욱 그렇다. 그런 글에서는 진심을 읽어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말 드물게 솔직한 이 책이 의외로 신선하게 느껴졌다. 불확실한 미래, 우울에 관한 견해, 페미니즘 등 작가와 비슷한 나이라면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만한 주제들로 꽉꽉 들어차 있다. 초반부의 첫 만남보다도 중후반부의 각자의 라이프 스타일 이야기가 기억에 오래 남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소재는 역시 취향이었다. 책에서도 등장한 <소공녀>는 각박한 삶 에 휩쓸려 잃어버리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고 있는 최소 취향을 이야기한다. 타인을 부러워하는 대신 저마다의 볕을 찾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 휩쓸리지 않는 일은 무척 어렵다. 그렇기에 『여생, 너와 나의 이야기』를 권하고 싶다. 특히 나와 비슷한 상황이거나 새로운 도전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내 삶을 부러워할 필요 없다’고 말하는 슛뚜와 현재의 모습보다 방향성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히조, 그리고 취향이 뚜렷한 두 사람의 목소리가 그 흔들림에 확신을 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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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의 방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4
버지니아 울프 지음, 김정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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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알고 싶으면 즐겨 읽는 책을 주시하라고 한다. 즐겨 듣는 노래를 살피라고도 한다. 책과 노래는 한 사람의 취향이 가장 여실히 드러나는 분야라는 교집합을 가진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취향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공간은 어디일까. 집 전체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방에 가깝다. 방은 넓은 집에서도 오롯이 자기만의 취향에 맞게 꾸밀 수 있는 곳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방에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의 의미를 넘어 그의 내면을 엿본다는 뜻을 내포한다.

『제이콥의 방』은 제이콥이 케임브리지로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후로 시간은 멈춰 있는 듯 더디게 흘러간다. 그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사람을 만나고, 모임에도 간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몇 번 배경이 바뀌지만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제이콥의 방』은 제이콥의 여행기가 아니라, 제이콥을 둘러싼 여성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읽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이 모두 그렇긴 했지만, 특히 이 소설은 인물의 감정에 주목해 읽을 필요가 있다. 초점을 맞출 만한 사람은 제이콥의 어머니인 플랜더스 부인을 제외한 네 명이다. 클라라, 플로린다, 페니, 산드라는 모두 제이콥을 원한다. 욕망하는 여성이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 우선 읽을 가치가 있다.

읽으면서 의문이 들었던 점은 네 여성이 모두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진다는 점이었다. 소설 속 대부분의 등장인물은 제이콥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과묵하고 고전을 즐기는 그에게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는 등 호평을 내린다. 네 사람 역시 처음부터 그에게 끌리기 시작해 금방 사랑에 빠진다. 그의 용모가 출중해서라거나 그에게 사람을 이끄는 묘한 매력이 있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제이콥을 만나기 전부터 그와 비슷한 형태의 “환상”을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제이콥을 환상으로 가정한다면 네 사람의 접근 방식을 이해하기가 조금 더 쉽다. 첨언하자면 플랜더스 부인은 청혼 편지나 바풋 대령의 호의에 움트는 욕망을 억누르므로 사회적 관습에 중심을 두고 있어 결이 다르다.







네 사람은 둘씩 대비되는 특성을 가졌다. 클라라와 플로린다는 정신적 교감과 육체적 교감, 둘 중 어느 하나를 충족하지 못한다. 클라라는 정신적 교감에는 성공한 경우이다. 그녀는 제이콥에게 품은 감정을 일기로 쓴다. 일기에 적힌 제이콥은 철저히 사랑에 빠진 여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모습이다. 소설은 클라라가 일기를 쓰고 있는 장면과 제이콥이 농담을 하는 장면을 오버랩시키며, 그녀의 글이 이미지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육체적 교감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이는 그녀가 “좋은 것”을 간직하기 위해 제이콥의 고백을 거부한 반면, 플로린다는 제이콥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다. 두 사람은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지만, “연애 편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플로린다는 나아가 정신적 교감을 갈구한다. 영영 이룰 수 없을 것이라 판단 내린 그녀는 먼저 제이콥을 떠난다.

앞선 두 사람과 달리 페니와 산드라에게는 제이콥이 아닌 다른 사람이 또 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그 사이에서 갈등한다. 현재의 연인과 새롭게 가지고 싶은 대상이다. 하지만 적극성에서 차이를 보인다. 페니는 표현하지 못하고 닉과 제이콥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다. 마음속으로는 클라라를 질투하고 비통해하나, 말 그대로 내면에서만 소용돌이친다. 산드라는 남편이 있으면서도 제이콥과의 감정을 즐긴다. 제이콥을 만난 뒤로 행복한지 자문하고 삶에 회의를 느끼는 듯하다. 하지만 안정적인 현재를 포기하지는 못한다. 나에게는 그들이 제이콥과 가까워지려 애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전력을 다해 멀어지려 안간힘을 쓰는 듯 느껴졌다. 만약 이들 중 한 명이라도 다른 선택을 했다면, 연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제이콥은 “정신없이 사랑에 빠”질 인물이니까. 어떤 사람은 사랑할 때 상대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다고 한다. 이렇듯 사랑은 은연중에 착각되고 이용될 수 있다. 네 사람의 방식에 차이가 있었던 데에는 각자가 원하는 사랑의 모양이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즉 모두 제이콥을 향한 감정을 통해 다른 것을 갈망한 것이다.







쓰는 나도 이제는 조금 머쓱하지만, 이 책에서도 인생과 글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하고 빙빙 에둘러 일상적인 이야기만 늘어 놓는 플랜더스 부인의 모습이 낯익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을 때 상대의 반응이 두려워서? 낯간지러워서? 이유는 잘 모르겠다. 오늘날 ‘오글거리다’나 ‘감성충’과 같은 단어들이 생겨나며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면 조금은 덜 숨겨도 좋지 않을까. 욕망한다면 보여 주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제이콥의 방은 비어 있다. 대신 그의 방에는 편지가 남아 있다. 활자로 옮김으로써, 시간이 흘러 기억이 퇴색될지언정 순간의 감정은 종이 위에서 영원히 숨을 내쉴 것이다.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살아가는 동시에 모두 죽어간다. 무엇이든 상대에게 직접 전달하는 편이 최선이겠지만, 전하지 못할 편지도 좋다. 상대가 뜯어 보지 않아도 좋다. 의미는 글을 자으며 감정을 묶는 행위 자체에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되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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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라이팅 훈련 : 에세이 라이팅 - 2nd Edition 영어 라이팅 훈련
한일 지음 / 사람in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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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배울 때 문법이 가장 어려웠다. 알고 보니 졸업 후에는 영어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언제나처럼 배신감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결국 회화 실력과 작문 실력으로 평가받을 거라면 왜 문법을 열심히 배운 건지 의문이 들지만, 징징거린다고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니 어쨌든 해야 한다. 주관적인 생각으로 나는 영어를 아주 못하는 편은 아니다. 목전에 시험이 있는 게 아니라 잊어버릴까 봐 간간히 연습하려는 목적, 그리고 기본기부터 다져야 할 수준은 아니라 학원이 필요 없는 상태였다.

『영어 라이팅 훈련』은 61일차부터 시작하는 40일 일정이다. 이전 책을 사용해 본 적 없지만, 아마 에세이 편이 아닌 다른 시리즈가 1일부터 60일로 구성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빈 칸을 채우는 데에서 한 문장을 통째로 작문해 볼 수 있게 하는 데까지 단계가 나뉘어 있다. 반복 학습으로 하루에 한 가지씩만 확실히 익히는 게 목표라고 생각하면 좋다.






  예상보다 난이도가 굉장히 낮다. 따라서 새로운 내용을 배우기보다는 아는 내용을 점검하고 연습하는 용도로 적합하다. 사실 초반부터 너무 어려우면 40일 간의 여정을 시작하고 싶은 기분도 안 들겠지만.... 아무튼 글쓰기라는 게 한국어처럼 이미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경지라면 순우리말을 더 외운다든지, 조금 더 이목을 끌 수 있는 첫 문장을 찾는다든지 하는 등 노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외국어이기 때문에, 굳이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아는 내용을 최대한 활용하는 게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에세이는 무역이나 회사 등 비즈니스에서 사용하는 단어와 종류 자체가 거의 달라서, 만약 그런 공부가 목적이라면 다른 책을 권한다. 하지만 나처럼 영어를 잊기 전에 야금야금 공부하고 싶은 사람, 영어 글쓰기의 기초를 다지고 싶은 사람이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책이다.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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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였을 때
민카 켄트 지음, 공보경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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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도둑>이라는 프랑스 영화가 있다. 제목처럼 주인공 세바스티앙은 타인의 얼굴을 훔치고, 그 사람의 삶을 모방하는 데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느낀다. 그는 어느 순간 그런 삶을 끝내고자 다짐한다. 하지만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부유한 바이올리니스트 앙리로 다시 한 번 살게 된다. 영화의 말미에 세바스티앙은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이 영화는 타인으로 사는 와중에 등한시하던 자기 삶의 귀중함을 깨닫고, 자신은 알지 못했던 삶의 단면을 타인이 알아보는 역설을 이야기한다. 여기에서의 ‘가짜 나’는 도플갱어 개념과 다르다. 처음부터 같은 두 사람이 아니라, 단어만 들어도 섬찟한 도용과 사칭이다. 『내가 너였을 때』는 그와 결을 같이하는 소설이다.

브리엔 두그레이는 이 년 전 괴한에게 습격당한 뒤 후유증에 시달린다. 그녀의 집에는 의사 나이얼 엠벌린이 세들어 살고 있다. 사고 뒤로 친구들과 모두 연락이 끊긴 브리엔에게 나이얼은 유일한 친구이다. 그러던 어느 날 HPG 부동산그룹에서 브리엔 앞으로 열쇠가 동봉된 우편을 보낸다. 전화를 건 브리엔은 ‘당신이 원룸을 임대했다’는 답변을 받는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으로 살고 있다고 직감한 브리엔은 주변에 도움을 청하려 한다. 하지만 경찰은 금전적 피해가 없어 받아 주지 않고, 사립탐정은 브리엔이 미쳤다고 말한다. 결국 브리엔은 혼자 해결하기 위해 직접 원룸을 찾아간다. 원룸으로 들어온 여자는 브리엔과 차, 머리 모양, 가방 등 외관뿐만 아니라 음악 취향까지 똑같다.






저자는 과거의 폭행이라는 아직 풀리지 않은 사건을 언급하는 동시에 새로운 사건을 발생시킨다. <메멘토>처럼 주인공의 기억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는 전제를 깔아 둔 상태에서, 온통 수상해 보이는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녀의 기억과 주변인의 악의, 둘 중 어느 것이 정답일지 간파하고픈 마음에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소설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크게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과연 우리는 겉모습만으로 상대의 어디까지 알 수 있을까?”와 “타인의 것으로 이룩한 행복은 얼마나 가치 있는가?”이다. 사실 전자는 스릴러 장르에서 주로 대두되는 질문이기에 그다지 특별할 것 없다. 그보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후자이다. 『내가 너였을 때』는 두 번째 질문에 가스라이팅 개념을 보다 직접적으로 결합시켰다. 더불어 후반부로 들어서면서는 주체적 여성 서사를 넘어 여성 캐릭터 간의 연개로까지 이쓸고 나가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소설이었다. 다만 후반부의 여러 부분에서 개연성이 떨어지는 등 치밀하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스릴러는 현실과 가까울수록 빛을 발하는 대신, 현실성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몰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분명 변하는 몇 가지는 있다. 나 역시 스스로 변했다는 생각에 놀랄 때가 있다. 그중 하나는 과정과 결과에 관한 입장이다. 과정을 중시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의 나는 결과를 중시한다. 결과 중심 사회에 살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라고 탓할 수는 있어도, 변화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타인의 것으로 행복을 이룩하고자 했던 이의 모습에서 결과 중심적 사고에 다시 한 번 경계심을 품었다. 그와 더불어 아무리 노력해도 줄어들지 않는 사회 격차와 불합리한 구조에 관해서도 생각해 본다. 자신이 당했던 것처럼 상대에게 다시 가스라이팅의 화살을 돌리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타인의 인생을 망가뜨리고자 했던 이에게 동정심이 든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출발점이 다른 이들은 그들뿐만이 아니기에 쓰다. 두 여성의 행보 덕에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나의 인생에 더욱 큰 애틋함이 느껴진다. 킬링 타임용으로 딱 좋을 줄 알았던 『내가 너였을 때』는 생각보다 많은 생각거리를 남기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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