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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억 속의 색 -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청소년권장도서
미셸 파스투로 지음, 최정수 옮김 / 안그라픽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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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란 것은 적어도, 아니 정말로 우리 일상과는 때어놓을 수 없는 요소가 아닐까. 불을 끄고 컴컴한 곳에 있다면 오로지 형태만을 감지하겠지만, 자연빛이든 인공빛이든 그 아래에 있는 한, 우리는 늘 매일같이, 아니 어쩌면 항상 색을 만나고, 색과 함께한다. 하다못해 우리의 머릿결, 눈동자, 우리의 살갗에도 '색'이라는 것이 존재하니깐 말이다. 

이렇게 보편적으로 항상 우리와 만나는 것이기 때문인지, 혹은 항상 어떤 일정한 형태 속에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인지, 색은 우리에게 너무 가까워서 그것에 대해 특별하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이 흥미로웠다. 옷을 고르거나, 무언가를 살때도 색은 분명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무지해왔기 때문이다. 색이 갖는 어떤 일정한 상징에 대해 개괄적으로, 어렴풋하게 알고있는 것 이상으로 색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항상 색을 선택하고, 색에 감탄하지만 아무 생각없이 지나쳤던 수많은 색들을 생각하며.. 

기억에서 색의 문제에 대해 편파적이 되는 것은 비교적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 88 

하지만 이런 내 기대와 다르게 이 책은 색에 대한 개괄서는 아니다. 이 책을 고르려는 이들은, 이 책의 제목 <우리 기억 속의 색> 에 조금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색에 관한 개론이나 연구서보다는 기억속의 색을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란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저자인 미셸 파스투로의 기억을 중심으로 색을 더듬어가는 '에세이'다. 다만, 우리네 삶의 요소요소들을 따뜻하게 다뤄보는 여타의 에세이들과는 조금 다른, '색'에 관한 에세이다. 그래서 이 책은 다른 에세이와 같이 쉽게 읽히지만, (저자의 직업과 관련한) 역사적, 과학적으로 접근한 색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러니 어떤 치밀한 분석적 방법으로의 색의 접근을 기대했던 독자라면 조금은 고개를 갸우뚱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색에 관한 연구보다, '기억 속의 색' 그러니깐, 사람과 색의 관계를 다각적으로 다룬다. 

이런 형식 때문일까, 처음에는 예상과 달라 다소 당황했다. 색에 관한 어떤.. 과학적인 접근만을 예상해온 내게, 미셸 파스투로는 너무 쉽게 색에 관해 이야기 했다. 그는 자신의 기억, 혹은 누군가의 기억속의 색을 이야기 하면서도, 그 기억의 불확실성에 대해서 솔직히 고백하고 인정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색에 관련한 자신의 강렬한 경험을 토대로 풀어나가기 시작하는 이야기는, 온화하고, 때로는 세심하다. 또 틈틈히 깊이있고, 무엇보다도 개인적 인식이 만나는 색과 더불어, 충분히 역사적,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개인이 만나게 되는 색에 대한 경험, 기쁨, 두려움, 미신, 그리고 그 개인 주변의 인물들의 색에 대한 선입견이 끼치는 영향, 시대의 변화와 색에 대한 인식의 변화, 나아가 사회가 생산하는 색에 대한 정의, 개념의 변화, 적용, 대륙별 색에 대한 접근 태도.. 그리고 색에 대한 선택에 관한 문제를 다각도로 풀어나간다. 그것도 아주 꽤 잘 읽히게끔 풀어나간다.  

단어는 색에 무한한 힘을 행사한다. 색과 관련된 단어들은 그 색에 특별한 색조를 부여하며, 그 색을 학문이나 산업 분야의 색견본들보다 훨씬 더 몽환적인 색으로 만든다. 우리들 각자도 시인의 상상력과 화가의 감수성을 결합해 새로운 색을 창조할 수 있다. - 294

그래서 오히려 전문적인 지식이나 분석을 기대한 독자라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분명 저자인 미셸 파스투로가 오랫동안 연구해온 색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지만, 정리된 개념이라고 하긴 힘들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녀의 이야기 속에 색에 관한 개인적, 사회적, 과학적, 역사적 담론이 충분히 녹아있다. 에세이 형식속에 녹아든 전문적 지식들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녀의 고백과 연결되어 있어 실제로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넘어가버리는 것이다. 다만, 이런 쉽게 읽히는 내용이기에 전문적 지식도 쉽게 간과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는 것이 조금은 주의할 점이랄까. 

책날개에 적힌 아래 글이 이것들을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기에 적어본다. 

미셸 파스투로가 60여 년을 사는 동안 보아온 색들에 관해 이야기 한다. 때로는 세심하게, 때로는 몽상적으로, 그러나 언제나 주의 깊게 증언한다. 그는 인간들의 '색에 관한 변덕'을, 색들에 관한 선호를, 시대와 나라, 개인에 따른 색에 관한 미신을, 색들에 관한 기피를 이야기 한다. 어린시절의 느낌들, 소소한 즐거움, 색에 대해 느낀 반감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늘 경쾌하고 정확하게 색의 복잡한 유희들을 해독해내며 결코 싫증을 내지 않는다. 그의 책 덕분에 우리는 지루하지 않고 즐겁게 색을 생각하게 된다. (라 캥젠 리테레르) 

생각해보니 색에 대한 굉장히 종합적인 접근을 꾀한 이야기들을 읽었다. 특히 어째서 우리가 선호하거나 꺼려하는 색이, 시대별, 지역별로 다른지, 색에 관해서 우리의 시각이 우선하는지 혹은 의식과 정의가 우선하는지 등등.. 워낙 종합적이고 다양한 이야기를 했고, 또 그것이 전문적이 지식이라 길게 풀어놓기는 그렇지만, 확실히, 복잡하고 많은 이야기들을 쉽게 접한 기분이 든다. 아마 진짜로 내가 색에 관한 개론서를 접했다면 머리터지게 책을 읽어야만 했을 것이다. 다만 이야기 했듯이, 전문적인 접근(사실 과학적이라고 하기보단 용어적, 언어적으로 전문적이었던 적이 있다)을 너무 가볍게 스치고 지나간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천천히 기억속의, 일상속의 색을 음미하며 읽다보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리라 생각한다. (단, 색에 대한 선호도와 기준또한 개인, 국가마다 차이는 있는지라 우리나라의 실정과는 조금 다른 부분들도 더러 있다. 우리나란 최근까지도 약국에서 여전히 녹색 십자가를 쓴다던가, 하는 것들?)

어쨌든, 부담스럽지 않게, 색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정의하고 생각하는, 그저 심미적, 상징적 색의 의미를 넘어, 몽환적인 동시에 정교한 색의 세계를.  

나에게 색은 살아 움직이는 존재, (......) 우주의 진정한 주민이다. 선은 지나가기만, 화폭을 가로질러 이동하기만 할 뿐이다. 선은 그저 통과만 할 뿐이다. - 177 (이브 클랭의 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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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철학의 풍경들
진동선 글.사진 / 문예중앙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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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가 출현한 이래, 기술의 발달로 점점 그 보급이 확대되어 핸드폰의 카메라도, 카메라의 범주에 넣는다면 거의 1인 1카메라 시대에 도달한 지금, 사진을 찍는 행위는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 분명, 카메라의 보급은 사진이라는 매체가 일반인들도 '예술'의 영역에 다가설 수 있는 가능성을 넓혀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까 싶다. 차곡차곡 쌓이는 터치가 아닌, 프레임 수백만장 쌓이는 영화필름이 아닌, 단 한순간의 손짓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진이라는 매체는, 분명 가장 보편화된, 그리고 큰 파급력과 필요성을 지닌 예술적, 기록적 재료임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DSLR의 보급은 '장비로써의' 전문가와의 차이를 거의 없게 만들었다. 사실상 전문가가 사용하는 물감과 붓을 쥐어준 것이나 다름없고, 35mm (영화용)필름카메라나 RED ONE(추노, 국가대표 등을 촬영한 디지털 영상 카메라) 같은 카메라를 쥐어준 것이나 다름 없다. 게다가 이제 DSLR로도 영화촬영이 가능한 시대다. 렌즈군과 기타 장비가 보편화되진 않았다고 해도, 기본적인 렌즈군으로도 심도를 조절하는 것이 가능한 DSLR 같은 경우는 전문가의 흉내를 내기 딱 좋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전문가로 부르진 않는다. DSLR 의 보급은, 기술적인 사진의 수준이 향상되는 길을 좀더 넓혀놨지만, 그렇다고 기술적 수준의 향상이, 질적, 미적으로 향상된 사진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처럼. 가능성이 조금 향상되었다고 해서 그 길이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이 된 것은 아니다. 솔직히 사진의 미덕중에 '우연'이라는 요소가 다른 매체보다 두드러지긴 하지만, 그것을 무기로 전문가가 될 수는 없듯이 말이다. 

결국, 장비가 다가 아니다..라는 진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놨다. 하지만, 솔직히 좋은 장비들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때로는 그 차이가 클 때도 있고, 미묘할 때도 있다. 사실 장비의 가치에 대한 허상, 허울 같은 얘기는, 필요성과 투자비용을 고려한 차이가 아니겠는가. 만약 동급 수준의 예술가들이 (사실 이런 가정은 터무니없긴 하지만) 큰 차이의 장비를 사용한다면, 결과 또한 다르지 않겠는가? 좀 바보같은 예이지만, 결국 하고싶은 얘기는, 더 좋은 장비는, 그 장비를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그만큼의 가치를 발휘한다는 당연한 얘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고가의 장비를 사용해서 잘찍는 사람과 못찍는 사람은 나뉠 수 있지만, 출중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저가의 장비를 쓰던 고가의 장비를 쓰던 분명 다른이들보다 뛰어난, 제 실력만큼 결과가 나오는 법이니깐. 

카메라 매커니즘의 이해는 사실 좋은 실력이 아니라, 일반적인 실력을 쌓기위한 코스일 뿐이다. 결국 좋은 실력, 좋은 사진을 위해서는 매커니즘을 뛰어넘는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사진철학의 풍경들>의 저자 진동선이 전하는 이야기다. 

"사진은 인접 시각매체들과 달리 이중의 모습으로 태어났다. 이성적이면서도 감각적이고, 사실적이면서도 추상적이고,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이다. 영원히 변함없을 양면성이다. (35p)  

저자인 진동선이 전하는 이야기는 사실 사진의 매커니즘, 혹은 기술적 스킬의 향상과는 직접적인 큰 관계가 없다고 보기에 무방할 정도다. 없다고 말하진 않지만, 그만큼 언급을 삼가한다. 아니, 그런 기술적 설명이 끼어들 틈이 없다. 기껏해야 빛, 어둠, 프레임, 구도 정도? 하지만 사진작가인 그에게 사진의 매커니즘, 스킬에 대한 지식을 의심할 정도로 심심한 독자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이야기는 살짝 뒤로 감쳐놨을 지라도 일련의 사유들 사이에서의 카메라 및 사진과 관련한 역사, 일화 등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많진 않다. 배경설명에 필요할때 언급하는 경우니깐). 분명한 것은, 이미 그것을 뛰어넘은 사진가가 하는, '결과물로서의 우수한 사진' 이 아닌, 피사체에 대한 인지부터, 찍는다는 행위에 대한 사유, 그리고 다시 또 인화된 사진을 바라보는 법에 이르기까지의 긴 호흡이 담겨있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는 매커니즘이 가진 규칙과 틀을 넘어서는, '정말로' 좋은 사진을 만들기위한 방법들을 '철학'을 통해서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사진은 만연한 사회적 실천이고 유희다. 철학이 없어도, 미학이 없어도, 진리를 구하지 않아도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 무언가를 찾고 간구하고 묻는다면 진리의 문 앞에 선 것이다." (234p) 

개인적으로는 사실, 저자의 사유에  푹 빠져서 페이지를 넘기느라 (실은 그냥 내 실력이 이정도이기에) 크게 인지하거나 신경쓰고 읽지는 않았지만, 순서를 보면, /인식의 풍경/ 사유의 풍경/ 표현의 풍경/ 감상의 풍경/ 마음의 풍경 에 이르른다. 크게 보자면, 어떤 사물을, 어떻게 인지할 것이지에 대한 판단에서 부터, 결과물이 된 사진을 넘어, 가장 이상적인 사진을 꿈꾸기 위한 사유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으로 보여진다. 분명 저자 또한 어느 행위의 단계에서 기본적으로 어떤 사유가 필요함을 구분하기 위해서 이런 순서를 정해놨을 테지만, 사실 그 순서라는 것이 '전원을 켜려면 / 전원 스위치를 돌려라' 처럼 A를 하기 위해 B라는 사유를 해야한다는 것이 '반드시'는 아니기에, 사진이라는 것의 시작과 끝에 전반적으로 모두 닿아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그의 철학적 지식을 보면, 그동안 그가 스스로에게, 또 사진을 향해 던졌을 질문들의 질량이 어마어마 했었을 것이란게 자명해보인다. 일반적으로 유명한 철학자부터, 사진작가부터, 조금은 알려지지 않은, 철학자까지, 현재의 그를 존재케하는 사진에 관한 온갖 철학들이, 그저 허투루 나온것이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온갖 철학자와 사진작가의 말과 행동이 인용되고, 그에 따른 그의 생각들이 합쳐지며 사진에 관한 철학이 하나씩 만들어질때마다 저자의 통찰력에 놀랄 따름이다. 게다가 물론 아주 어려운 개념들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타의 철학자, 사진작가들의 이론이나 사유들, 그리고 저자 자신의 사유들을 심플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본다고 하는 것은 감각의 작용이다. 모든 사진가들이 항상 어떻게 보는 것이 좋은지 갈등한다. 그러면서 이 갈등은 궁극적으로 사진이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알게된다. 갈등을 해결해줄 구세주가 사진이 아니라 철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130p) 

실제로 공간에 존재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진이기에 필수적인 '인식'에서부터 저자는 미술과 미학, 철학, 문학, 인문에 이르기까지 사진에 관한 사유가 과연 거기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까 싶은 부분까지 사진을 위한 철학으로 차용한다. 오히려 사진을 위한 말들 보다는, 존재에 대한, 인식에 대한, 시간에 대한 사유처럼 으레 사람들에게 사진과는 바로 연결되지 않았을법한 철학적 개념들도 모두 이곳에서 사진철학으로 탄생한다. 사진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셔터를 누르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인식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사유하는 것이라고 말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지배해온 그림의 영역을 벗어나, 가장 닮은 '재현' 의 영역의 탄생은 어쩌면 회화보다 더 복잡한 사유를 필요로 했던 것일까?  

"사진은 피사체를 발견하면서부터 시작하는 '발견된' 오브제 미학이다. 창조된 오브제 미학이 아니다."(62p)

작가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상투적으로 칭찬하진 않는다. 겸허히 돌아본다. 얕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애정과 확신, 의지는 어디에서건 느껴진다. 기록의 도구로써, 진실의 대변자이기도 한 반면에, 오히려 더 큰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처지로 전락하기도 했던 사진,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해 '빚진' 사진 등 이런저런 사진의 한계성을 스스로 인정하지만, 더불어 그 한계의 극복 가능성과, 또 그 한계의 이면이 지닌 다른 매체와 차별화된 가능성을 이야기 한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사진, 혹은 사진을 찍는 행위에 대한 깊은 반성과 성찰, 그리고 꺾이지 않는 의지가 서로 한데 뒤엉켜 각 순서의 말미엔 결국 한가지씩 사유를 내놓는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사진을 통해서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법, 사진을 통해서 세상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법, 사진을 통해서 세상을 사랑하는 법."(328p) 

이책은 마치 에세이를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사진을 중심으로한 철학적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곧 삶과 연관되어 있기도 일쑤고, 문체 또한 부담없이 읽기 좋게 되어있다. 사진을 바라보는 전방위 적인 태도는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어떤 태도와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정교하고 끈질기다. 어쩌면, 너무 단(맛이 나는) 약이다. 그래서 오히려 에세이 같은 분야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나에게) 가장 큰 문제(?)는, 두가지였다. 첫번째는, '앞으로,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에는 전과 다른 어떤 중압감이 실릴 것이고' 두번째는 '더이상 사진에 대한 어떤 사유를 하더라도 이 책에서 읽고 느낀것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과 같은 걱정 아닌 걱정 이랄까. 물론 나는 이 책의 내용 또한 결국 망각속으로 던져버릴테지만, 작가가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 부딪혔던,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넓고 깊은 사유의 느낌은 쉬이 지울 수 없을 것 같다. 

사진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예술과, 삶과 많은 부분이 닮아 있었다. 어쩌면 실재와 가장 '닮은' 매체의 특징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갖가지 사유들은, 서로 떨어져 있지만 맞닿는 지점이 많았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그만큼 (표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모호한 문제들도 있었고, 그만큼 계속해서 밀고나간 사유이기도 할 것이다.  

사진을 찍는 행위가, 자신의 일이 되지 않는 이상, 한장의 사진을 찍는데 이와 같은 사유들을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읽은 한가지만 곰곰히 생각해봐도 다행일거다. 취미로 하는 사진찍는 행위가 이와 같은 사유를 하는 것은 여전히 쉬운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조금이라도 달라지지 않을까. 앞으로 또다시,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움직이기 전 그러니깐,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는, 그 "찰나의 순간"이 지닌 가치가. 

"보고 새기고 마주하고 돌아보는 모든 것들은 전적으로 사진가의 몫이다. 때문에 한 장의 사진은 사진가의 모든 것이다. 지나온 삶의 시선이면서 그 순간 세상과 호흡했던 생의 감정, 세상을 바라본 거울과 창이다. (3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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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아방가르드 시대의 예술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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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세기에 들어와 우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유파와 양식과 언어를 갖게 됐다. 예전에는 하나의 양식이 종종 수세기 동안 유지되곤 했지만, '모던'시대에 들어와서는 예술의 양식들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공장의 기계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17)

 
'들어가기'에 적힌 이 말처럼, 몇일 밤이 지나면 우리를 유혹하는 새 상품들이 즐비하게 출시되듯, 20세기에 이르러서 실로 다양하고 복잡한 유파와 운동이 일어났다. 제 각각의 운동과 유파, 양식들은 각각 고유의 언어를 가졌지만, 서로 영향을 주며 이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충돌하기도 하면서 지금의 현대미술에 이르렀다. 특히, 그동안의 실제적인 표현과 원근법을 사용하던, 오래된 고전주의와 결별을 선언하다시피 하며, '재현'의 틀에서 벗어나 '순수예술'을 지향하게 된다. 그 재현의 디테일함으로 인해, '재현도'를 제일로 치던 시대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방가르드 운동의 흐름에 대해서, 여기서는 대략적으로만 이야기 하는것이 좋을 것 같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한번 읽은것으론 이것들을 완전히 습득했다고는 하기 어렵고, 또 그것들을 표현할 깜냥이 없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흐름의 경계나 평가가 엇갈리기도 하는데 하물며 이런 일반인이 설명해봤자 혼란만 부추길 뿐이니깐.


19세기 초부터 그리 길지않은 주기로 등장한 복잡하고 다양한, 일련의 아방가르드 운동은 어느 한 운동이 전의 운동을 대체하거나, 계승하거나 혹은 공존해왔다. 이 운동들을 기록한 순서를 보면 기본적으로는 연대기 순으로 배열되어 있지만, 몇가지는 시대적 순서에서 벗어난 것들도 있다. 한번 읽은 것만 으로는 이런 일련의 운동들의 개념과 특성에 대해서 습득하는 것만으로도 능력을 다 소진해 버렸으므로, 뚜렷하게 그 이유에 대해서 열거할 순 없지만, 아마 한 운동이 다른 운동을 계승하는 미학적 흐름을 고려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되는데 정확히는 설명하기 어렵다. 다만, 한두가지 운동의 배열이 그렇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큰 틀이 연대기적으로 이어져있고 각 운동과 유파를 설명하면서 전/후 운동 혹은 동시대의 운동의 흐름과 영향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기 때문에 특별히 난해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런 일련의 운동과 유파의 경계가 칼로 베듯 갈라지는게 아니기에, 큰 눈으로 숲을 바라보는 안목 또한 중요할 듯 보인다. 차례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소개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1장에서 4장까지는 '순수성의 추구', 즉 추상으로 향하는 운동을 살펴보게 된다. 5장과 6장은 '근원을 향한 열망', 즉 현대미술에 나타난 표현주의적 경향을 다루고, 7장과 8장에서는 현대미술에 나타난 표현주의적 경향을 다루고, 7장과 8장에서는 현대예술의 비합리주의적 흐름, 특히 광기와 부조리에 대한 현대예술의 관심을 다루게 된다. (후략 / 지은이의 말)"

"야수주의와 더불어 최초로 20세기의 예술운동이 시작된다 (...) 야수주의가 일으킨 이 색채의 해방이야말로 20세기 회화가 르네상스 이후 400년 동안 예술의 공리로 군림해왔던 재현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었다." (35p)

 
실로 의미심장하고, 위대한 발걸음의 시작이었던 야수주의의 도입부분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어느정도 용어적으로 친숙한, 보편적인 운동들이 있는 반면, 중간에 '신즉물주의' 처럼 조금은 생소한 일반인에게 보편적이지 않은 운동 또한 존재한다. 각 운동은 기본적으로 탄생의 배경과 멤버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더불어, 그 운동이 지향하는 점, 한계, 전/후 혹은 동시대의 다른 운동에 준 영향과 대표적인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용어의 의미를 어렴풋하게 알고있는 운동들은 그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계기로, 생소한 운동은 또 발견의 계기로 각각의 흥미를 준다. 사실 이런 여타의 예술저서들은 (인문학에는 못 미치얼지언정) 일상적이지 않은 단어나, 평소 애매하게 알고있는 단어들이 많이 등장하는게 특징(이라면 특징) 인데 어느정도 일반을 넘어선 단어들이 없진 않았지만 크게 어렵지는 않았던 것 같다. 특히 각 운동들의 특징과 더불어 그 한계와, 서로간의 영향들이 상세하고 잘 기술되어 있어서 흐름과 흥미를 쉽게 잃지 않았던 것 같다.


각 운동의 시작이나 전성기 때에 주요 멤버들의 포부나 선언문을 보면 으레 진취적으로 보이기 쉽다. 헌데, 내가 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모더니즘> 편에서 느껴진 시선은, 그들의 운동들을 어떻게든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바라보려 하는 시선이었다.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의 차례는 결과적으로 제들마이어의 분류와 대략 일치하게 됐다. (지은이의 말)


제들마이어를 여러차례 인용하고, 순서 또한 제들마이어와 일치하는 것으로 미루어본다면, 진중권의 견해는 어느정도 그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운동이나 유파자체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 창시자들의 선언과 실제 흐름과 성과들을 분석하며 중립적인 시선을 취한다고 보여진다. "여기에서는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대 중 하나였던 20세기 초반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의 역사를 다룬다."(지은이의 말) 고 시작부분에서 말하며 일련의 시대의 가치를 지은이도 인정하고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눈은 한계와 가능성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는 셈이다. 제들마이어 뿐만 아니라 많은 예술가들의 말이 언급되고, 또 특정운동이나 사상, 시대를 비판하는 예술가들의 대화가 진중권의 날카로운 해석과 맞물려서 말이다. 이런 시선들은, 항상 미술전시장 벽에 적힌 작가와 시대에 대한 칭찬일색인 글이 주는 좁은시선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시선으로 작품과 작가,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아마 그렇게 된다면, 지식의 부족함을 꽁꽁 숨기며 칭찬에 급급했던 나날들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거기엔 그만큼의 공부가 '훨씬' 더 필요하겠지만)


"현대미술에 비판적인 이들이 그것에 우호적인 이들보다 외려 그것을 더 잘 이해한다는 역설.(중략) 역사상 가장 급진적이었던 예술운동의 본질은 외려 그것을 불편하게 느끼는 문화보수주의자의 눈에 더 뚜렷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17)
 

진취적으로, 위대하게 탄생했든 아니든, 모든 운동과 유파는 대부분 그 모순 혹은 한계를 지니거나, 한계에 다다랐다. 어떤 미학적 판단에 있어 절대불변의 법칙이란 없기때문아닐까. 대중의 인식과 수용은 느리면서 오래가지만, 신념이 곧 삶 자체가 되기도 하는 여타의 예술가들에게는 짧은 시간에도 많은 소용돌이가 일며 그들의 의식을 뒤집고 또 뒤집기도 한다. 그로인해 타인을, 다른 정신을 부정하면서 때로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과 관념도 부정하기도 해왔으니깐. 

 
책을 덮었을 당시엔, 유파와 양식의 흐름을 좇다보니, 정작 미학으로서의 본질에 대해 소홀히 읽은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미학은 결국 이 아방가르드 시대를 바라보는 창일 뿐이며, 우리가 미학에 대해 인지했든 아니든, 우리는 그 창을 통해서 이 혼돈의 시대를 '잘' 짚어보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안일함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 한 유파나 양식 혹은 운동의 기원을 살피고 들어가면 곧, 그것에 대한 특성을 끈질기게 분석함과 동시에 자료사진들을 보고, 가능성과 한계를 통해 그 유파, 양식, 운동의 가치를 살폈으니, 그 끈질긴 집중의 통로가, (비록 언어로 이해하진 못했을지라도) 아름다움에 대한 갖가지 시각과 진행, 충돌들이 바로 미학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며.... 


"미학은 어떤 사안이나 문제를 다른 시각으로 보는 법을 배울 수 있는 학문이에요. (후략) "


다만, 한때 거금을 들여샀던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가 온데간데 사라진 지금 비교할 대상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 아쉽다. 그것이라도 있었다면 이 책이 다른 서양미술사와의 차별성, 혹은 공통성을 더 깊게 설명할 수 있을텐데. 아마, 미학에 대해 더 나은 개념의식을 갖추고, '고전예술' 편부터 순서대로 다시 읽어보며, 다른 서양예술사 책까지 몇권 더 읽어본다면, 혹은 그랬었다면 좀 더 분명한 시각을 가질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솔직하게 말하면, 아직까진 완벽하게 '그래 이래서 진중권의 서양미술사야!' 라는 생각까지 드는것은 아니니깐.


어쨌든, 소설만큼 술술 읽혔다고 할순 없지만, 유별나게 어렵게 표현되지도 않은 책이었다. 많은 서양미술사 들의 책이 있겠지만, 이후에 출간될 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3권과 이전에 출시된 1권에 대한 기대가 생긴것도 사실이다. 마냥 어렵게만 느껴졌던, 혹은 항상 헷갈리던 아방가르드 시대의 양식에 관련한 용어들이 이제 (나름) 조금은 가까워진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적절히, 흥미를 잃지 않으며 읽어올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미학에 대한 좀 더 깊은 안목을 갖고 언젠가 한번 다시 읽어보고 싶기도 하다. (물론 그런날이 쉽게 오진, 그런책이 한두권도 아니긴 하지만..)


"현대예술은 사회와 소통을 거부하기 위해 끝없는 혁신 속에서 한없이 난해해진다. 하지만 이는 사회를 버리기 위함이 아니다. 외려 더 높은 차원에서 사회와 다시 화해하기 위한 제스처다. "역설적이지만 예술은 비화해적인 것을 증언해야 하며 동시에 그것을 화해시키려는 경향을 가져야 한다." (36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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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7
제러미 시프먼 지음, 김형수 옮김 / 포노(PHONO)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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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소형트럭이 후진할 때 들리는, 겨우 최소한의 음 구분만 가능했던 그 '음악' 이 아니더라도 지금껏 얼마나 많은 클래식을 접해왔을까. 사람들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클래식을 들을까. 하지만 으레 일반인이라면 이번주에 나온 신곡과 가수의 동향, 가십거리는 꿰고 있어도, 한 세기를 훌쩍 넘기는 시간을 살아낸 음악과 음악가에 대한 관심은 너무 소홀했던 것은 아닌지. 

어떤 예술이든, 판단하고 느끼는 것은 개개인의 몫이고 권한이지만, 그에 관련된 배경을 접했을 때 또, 새로이 느끼는 감흥은 분명 적지 않다. 특히나 자신이 제멋대로 이해하고 있던 것에 대해서, 그 예술가의 생애를 알고 그 시대적 배경을 알게되면 더 넓은 것이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것들을 싫어하던 아니던 말이다) 이 차이콥스키의 전기를 읽기전의 느낌은 딱 그런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백조의 호수>나 <호두까기 인형>같은 너무 유명한 곡만 알고있다가, 가끔, 어딘가에서 듣게되고, 작곡가의 이름을 들었을때야 비로소 '오-' 하게 되는 현상이 조금이나마 타파되리라 기대하며. (물론 그 이상의 낯설음과 두려움은 말할 것도 없었겠지만, 생략하겠다)  

대중적이고, 위대한 음악가의 생애를 토막식으로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느 음악가는 '신이 불러주는 대로 썼다'라고 하거나, 장애를 가진 아이가 바로 누구 였다던가 하는. 한 음악가에 대해서 깊게 알기란 분명 음악에 대한 깊은 애착이 필요한데, 지금껏 그런 것은 어디있었던 것일까. 

어쨌든, 이 책은 차이콥스키의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꽤 일목요연하게 다루고 있다. 부유하게 자란 가정환경에서 부터, 그런 가정의 위기, 법학을 공부하게 됨으로써 어머니와 떨어지는 것에 대한 극도의 공포가 있던 유년기부터, 그가 동성애적 성향을 갖게 되고, 법무부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다소 늦은나이에 본격적인 음악을 시작하고,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받으며 많은 곡들을 써내고, 때로는 찬사에 대한 기쁨을, 때로는 비판에 대한 좌절을 느끼기도 했던 그의 생에 말이다. 

무엇보다 그는, (그의) 음악이 필요로했던 절대적인 감성의 변화를 갖고 있지는 않았나 생각된다. 유년기부터 극도로 예민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했던 그의 기질은, 나이가 듦에 따라 조금 나아지는 듯 싶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변화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천성에서 나오는 친절함과 상냥함은 또 그가 사람들을 끌어당기기도 하는 하나의 본능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도 때로는 다른 음악가나 그 당시 관심을 갖던 악기의 분야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기도 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 자신이 자만심에 똘똘뭉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여느 비평가나, 하나의 관객처럼 평가했을 뿐이다. 이 책에서 차이콥스키의 생애를 복원하는데에 그의 편지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것들을 통해 (그 자신도 썼듯이 편지가 완벽히 진실될수는 없을지라도,) 그가 충분히 자신에 대해서 겸손하고 반성적인 자세를 취했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전기에서 특히 두드리지게 느껴지는 점은, 주변인들의 영향이 적지 않았단 것이다. 사실 내가 깊게 기억하는 부분은, 그의 감정이 늘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일반사람들에 비해선 매우 불안정하게 기복이 심했고, 거기에는 (매번은 아니지만) 그 주변인들의 영향이 컸다는 점이다. 여러 우정들을 통해서 그가 일어서기도 했고 좌절하기도 했지만, 특히 흥미로웠던 점은, 아내 안토니나 와의 불화와 폰 메크 부인과의 후원관계이다. 그 조차도 원치않게 시작했던 결혼생활은 결국 서로가 끔찍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고, 폰 메크 부인과는 우정과 사랑의 미묘한 줄다기를 하며 끝끝내 편지로만 왕래하며(실제로 두번인가 마주쳤음에도 말을 나눴다고 하지 않는다) 후원을 받기도 하다가, 불현듯 끊어지게 되는 점 이었다. 실제적으로 그의 아내가 그에게 도대체 어떻게 했는지는 이해할만큼 언급되진 않아서 다 알순 없지만, 그때의 차이콥스키의 아내가 주는 정신적 고통과 폰 메크 부인과의 정신적 교감(전적인 사랑이라고 보긴 힘들었다.)은 매우 상반되고 지점임은 확실하다. 

그의 인생이 굉장히 파란만장했다고 까지는 못하겠지만, 그의 감정이 매우 파란만장 했던것만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혹은 그래서인지) 그는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고, 좌절하지도 않았다. 자신에 대해서 겸손했지만, 또 타인에 대해서는 냉정한 평가를 했다. (사교와는 별개의 문제) 그에게 벌어진 여러 관계와 사건들은 차곡차곡 그의 음악을 만들었을 것이고, 그가 감명받은 문학작품과 자연에서도 많은 것을 얻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변덕스럽지만) 풍부한 감성이 만든 음악은 오래도록 우리에게 남아있고, 또 남아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가 남긴 위대하고 황홀한 음악이 아니라 그 이면에 존재했던, 감정이 (지나치게) 풍부했지만, 열정적이었던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는 일은 매우 인상적이었고 유익한 일 이었다. 완성된 음악만을 듣게되기 일쑤인 일상에서, 세기를 넘어 들려지는 음악에, 음악가에 관한 이야기는 (역설적이게도) 위대한 음악가 이상의, 한 인간이 희노애락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종국엔 다시 음악가로서의 그를 떠올렸다. 곁에 있었음에도, 조금은 어려웠던 그의 음악을 조금 더 가깝게 느끼면서...

"그가 늘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실패했을 때도 작품에 대한 열정이 부족했던 적은 없다. 그는 자신이 쓴 최고의 음악을 통해서 계속 살아있을 것이다." (219) 

물론 이 책 한권으로 차이콥스키의 생애에 대해 완벽히 알았다고 할 순 없을것이다. 이 책은 전기로 치자면 매우 얇고, 그의 작품들을 모두 설명하기에도 짧은 분량이니깐. 하지만 책에 언급되는 주요 음악들에 대해서 시디를 포함, 웹사이트를 활용할 수 있게 했고, 일대기 와는 별개의 페이지를 파트마다 배치해서 그의 생애와 음악을 따로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주고, 여타의 음악용어나 시대적 배경의 설명들은, 그의 삶과 작품, 그리고 시대와 음악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기에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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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다다오의 도시방황]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안도 다다오의 도시방황
안도 다다오 지음, 이기웅 옮김 / 오픈하우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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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진전, 미술전, 영화제, 만화축제 등은 사실 숱하게 많다. 시대를 거듭할수록 그런 예술들은 대중들 곁으로 다가오려고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그런 반면에 왜 평소에는 건축을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너무 가까이 있어서일까. '어디에 가면 볼 수 있는'이 아니라 어디에도 존재하는 것이 건축 아닌가. 매일 집에서 밥을 먹으면서 푸드스타일리스트처럼 밥을 장식하지 않듯, 그저 거주의 목적으로 매일 우리가 만나고 또 보는 건축들을 보노라면, 역시 건축은 실용이라는 가치가 우선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철근과 콘크리트로 표방되는 현대의 건축에서, 거주의 목적으로 지어지는 건축들에서 뚜렷한 개성을 찾는 것은 힘들다. 각 나라마다 조금씩 그 디자인과 분위기의 미묘한 차이는 있을지라도, 이전의 건축들의 차이점 들과 비교해서 본다면 그것은 차이의 축에도 끼지 못한다. 안도 다다오 또한, 이런 면에서 이런 획일적인 건축술에 대해서 언급하고 넘어가기도 하는데, 그가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엄연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인지하든 아니든, 어디에서, 누군가는, 건축을 자신의 열정을 다바칠 예술로써 만나고 있다.  

안도 다다오는 그런 사람이었다. 푸드스타일리스트에게 음식의 표현이 곧 예술이 되 듯, 건축가인 그에게 건축의 구상과 설계는, 실용과 맞닿은 하나의 예술이었다. 건축가의 책이라 해서 나는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모른다. 건축가가 하는 얘기니 분명 공간을 떠올리게끔 하는 이야기가 많을 테고, 그런 부분에서 다소 취약한 내게 그것은 또 한번 난감한 문제였다. 더욱이 이 책은 중간과 끝에 일정부분을 할애해서 그의 작품사진들을 포함시켰기에, 29가지로 나뉜 이야기들을 명확히 따라가기에는 조금 난해한 감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말한, 그가 상상하게끔 하는 건축의 이미지를 멋대로 상상하며 책을 읽어보려 했더니, 곧 다른 이야기가 보였다.  

이 책은 그의 여행에세이 이자, 예술에 관한 담론, 건축에 대한 상념들로 이루어져 있다. 스무살 무렵, 이곳저곳을 때로는 어느 예술가를, 어느 작품을, 혹은 그저 그 지역을 만나기 위한 그의 여행은 차곡차곡 그의 내면에 쌓여, 그를 건축가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그가 본격적으로 건축가가 되기 전의 짧게 언급되는 그의 이력들도 흥미롭다)  

(여행에세이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보통의 여행 에세이가 그 지역의 사람들과 여러 상념들과 감정에 주목한다면, 안도 다다오의 도시방황은 확실히 건축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여행이야기가 있다. 그렇다고 표현적인 부분에서 특별히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 부분을 통해서, 건축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느낌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열정과 도전정신은 그의 건축에 충실하게 반영되고 있었다.  

그의 건축중에 오사카에 세운 교회의 설명을 읽으며, 사실 별로 특별한 감흥을 느끼진 못했다. 그런데 그것을 잠시 잊고, 다른 여행기를 읽고, 다른 건축을 그려보다, 만난 몇페이지에 걸린 그 교회의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소문으로 듣던 것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아마 그 사진부분에서 그의 작품들을 몇개 짚어보며, 나는 그 안도 다다오라는 인물의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하게 되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그의 글들은, 건축가의 열정에 맞추어 설명해야 옳겠지만, 그와 못지 않은 예술과 삶에 대한 고찰을 만났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사실 어느것이 우선이 되느냐 라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지 못하겠다. 다있다. 다들어있다. 건축도, 예술도, 삶도. 그가, 그의 건축이, 지금까지의 위치에 자리잡기 위해서 그가 오로지 설계에만 전념한게 아니 듯(그의 여행기가 증명하듯) 그는 건축물은 당연하거니와, 다른 수많은 예술가, 예술작품 들을 만났고, 또 그만큼 자신의 건축과 삶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있었을 테니깐. 실용적 목적, 현실적 제약이 결코 배제될 수 없는 건축의 (그는 이미 그런 과정을 건너뛰었지만) 창조에 있어, 그런 고찰이 없었다면 그만한 작품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건축에 대한, 건축을 통한, 건축을 넘는 그의 통찰에서 나는 예술적 열정과 집착을 보았다. 그의 예술의 대한 태도는 곧 삶의 대한 태도 였고, 방황은 있을지언정, 포기나 안일함은 없었다. 건축가를 있게한, 그리고 건축가가 생각하는 여행을 좇는동안 수많은 과정들을 생각했다. 완성된 건축보다 오히려 완성되기 전의 건축을 더 좋아하기도 하는 그 처럼, 나 또한 수많은 과정의 가치들과 거기에 덧씌워질 열정을 반문했다. 

총체적인, 예술을 향한, 삶을 향한 열정을 건축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볼 수 있는 이 책은, 안도 다다오의 팬, 건축 미학에 흥미를 갖고 있는 이들 외에 일반인들이 읽어도 충분히 무리가 없을만한 책이다.    

 

마치면서.. 책의 디자인에 관하여..

이 책의 디자인또한 매우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보이는데, (처음엔 표지를 펼치면 포스터가 되는 줄 알았다) 그 노력과 가치는 책을 읽기전보다 책을 읽은 후에 더 뚜렸했다. 물론 책의 그 본래적 목적 (기존의 형식에 대한 익숙함과 가독성) 에는 다소 어긋나는 지점들이 있다. 모든 페이지의 글자는 사각프레임 안에 구성되어 있고, 때로는 글자색이 반사되어 읽는 자세를 조금씩 고쳐야 하기도 한다. 투덜투덜 읽고나니, 안도 다다오의 고백이 떠오른다. 좁은 집을 설계하고 건축한 후, 그 건물주에게는 미안하다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그 자신이 의도한 것의 가치와 신념을 버리지 않는 태도. 아마 그런것이 이 책의 디자인에 녹아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 보니.. 어느새 이 건축가에 좀 빠져들었긴 한가보다. 책의 디자인을 보편적으로 하여 단가를 조금이라도 낮추어 판매지수에 유리하게 하던지, 혹은 이렇게 컨셉츄얼하게 가던지 그것은 출판사의 판단이겠지만, 이런 시도도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조금은 불편한 감도 있었지만, 큰편도 아니었고, 결국 스페셜한 디자인의 책으로 기억될 듯 하다. (다만 여기서 조금 더 과해진다면 그건 재고할만한 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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