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콩의 슬픈 그림자 인도차이나 - 유재현의 역사문화기행
유재현 지음 / 창비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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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는 책에는 나름의 장점이랄까, 미덕이란 것들이 있다. 이 책도 여러 미덕을 갖추고 있는데, 우선 다른 여행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해박한 역사지식을 들 수 있다. 여행서와 역사란 언뜻 무거운 궁합으로 보이지만 여행서를 읽는 대부분의 목적은 외국의 문화가 궁금해서가 아니던가. 그리고 문화란 다름아닌 그 나라가 겪어온 역사가 현재의 생활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깊이 알고 그 나라를 여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그래서 대부분의 여행서들은 추측과 인상으로 일관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캄보디아에 가면 캄보디아인의 역사가 펼쳐지고, 베트남에 가면 베트남인의 역사가 펼쳐진다. 앙코르 와트에 대해 몇몇 글들을 읽었지만 직접 앙코르에 가고 싶다고 느낀 것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보는 사람마다 똑같은 탄성만 내지르는 앙코르 와트라 오히려 심드렁한 기분이 없잖아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막연한 감동 대신 앙코르의 조각에서 캄보디아인의 문화와 생각들을 실감나게 읽어내고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신비의 극치를 달리는 국적불명의 유물만이 아닌, 고대 캄보디아인 삶과 정신세계가 깊게 아로새겨진 앙코르와트를 소개받은 것 같았다.

베트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경이라기엔 비효율적으로 길쭉한 베트남의 나라모양에 대해 오랜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책에는 어느 정도 대답이 나와 있었다. 외침의 역사 못지 않게 비옥한 들을 가진 남쪽으로의 확장도 베트남 역사의 특징이었으며, 오랜 세월동안 계속된 남벌정책으로 결국에는 남부의 크메르인을 굴복시키고 길쭉한 국가모양을 갖게 된 베트남. 그리고 현대까지 지속되는 남북의 이질성에 대해 알고 나니 피상적인 베트남에 대한 인상은 사라지고 베트남을 좀 더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완벽한 무지에서 몇 가지 상식을 소개받았을 뿐인데도 인도차이나에 대한 나의 인식은 크게 바뀌었다.  전에는 간단하기 짝이없는 이미지로 인도차이나를 정리하곤 했지만, 이제는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 그곳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채로운 세계인지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역사에 대한 서술도 상당히 많고, 제목대로 식민지, 전쟁, 독재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인도차이나의 슬픔을 다루고 있지만 의외로 이 책의 분위기는 재치있고 일견 발랄하기까지 하다. 쉽게 지나치기 쉬운 것들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에피소드는 여느 가벼운 여행기는 따라가지 못할 유머를 지니고 있다. 저자는 특히 캄보디아에 애정을 갖고 있는 듯한데, 한때 컴퓨터를 가르쳐준 캄보디아 청년과의 우정은 무척 다정해서 읽기에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실제로 체류하기도 했던 캄보디아, 나아가 인도차이나와 작가의 밀착감은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감동이다.  뭐니뭐니해도 여행한 곳을 사랑하는 여행가의 글이 가장 실감나고 재밌는 법이니까.

비록 위트있는 눈으로 보여지기는 하지만 이 책이 말하는 인도차이나는 아직도 아픔에 신음하는 곳이다. 많은 나라가 다닥다닥 국경선을 붙이고 있는 이 곳은 셀 수 없는 많은 전쟁이 있어왔다. 베트남은 시시때때로 중국과 서구열강의 점령시도에 시달렸으며,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베트남의 등쌀에 고생해왔다. 천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강산은 반세기동안 고엽제와 폭탄에 불바다가 되기도 했다. 베트남의 밀림은 많이 회복됐지만, 캄보디아의 풍요로웠던 들은 생산도 할 수 없는 황무지로 변해버렸고 지금도 셀 수 없이 많은 지뢰와 불발탄을 껴안고 있다. 인적이 드문 곳의 아름다움에 끌려 걸어갔다가 지뢰를 밟을 수도 있는 곳, 그곳이 인도차이나다. 그곳은 여전히 슬프고 위험하지만, 수많은 인간군상이 살아가고, 외부인을 유혹하는 아름다움이 있는 흥미로운 곳이기도 하다. 언젠가는 꼭 나만의 인도차이나를 담아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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