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易)을 가지고 말하려는 자는 그 풀이를 숭상하고, 행동하려는 자는 그 변화를 숭상하고, 기술적 응용을 원하는 자는 그 상(象)을 숭상하고, 미래를 예견하려는 자는 그 점(占)을 숭상한다..

이것이 바로 주역(周易)이 말하는 네 가지 도(道)이다. 나는 어떤 경우인가?

전형적으로 들어 맞지는 않지만 나는 풀이를 숭상하는 사람 즉 이론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다.

허수경(許秀卿) 시인의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 주역의 괘로 풀이한 적이 있다. 그때 활용한 것이 소축(小畜) 괘와 이(頤) 괘이다.

소축(小畜)은 리(履)와, 이(頤)는 대과(大過)와 짝을 이룬다.(小畜은 굴레를 씌워 길들이는 원리, 履는 놓아주어 이행하게 하는 원리, 頤는 먼저 내실을 다지는 길, 大過는 큰 과오를 감수하는 길이다.)

주역의 괘들은 이렇듯 대대(待對; 짝)로 구성되었다. 나에게 관심거리로 다가오는 것은 이(頤) vs 대과(大過)이다.

관심거리로 다가오기보다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왜 아픈가?

내실을 다진 삶도 큰 과오를 감수하며 행동한 삶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차라리 내실도 다지며 과오도 감수하며 실행하는 길을 가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 말하는 바 가르치며 성장하듯, 육체와 정신, 감성과 이성이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듯(강남순 교수 지음 ‘배움에 관하여‘ 323 페이지), 이론과 실천, 이해와 변혁이 상호 대립되는 것이 아니듯(김영민 교수 지음 ‘신 없는 구원 신 앞의 철학‘ 70 페이지) 내실 다지기와 감행(敢行)은 상호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현장에서 배우고 이론으로 현장을 상상하는 길을 갈 수 있고 또 그래야 하리라.

이렇게 나는 ‘주역‘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자신의 괘로 삼을 것을 제안하는 강병국 저자의 ‘주역독해‘란 책을 읽고 새해 첫 날 나의 길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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