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老子)는 끊임없이 태평성대 그 중에서도 특히 대동(大同)으로의 복귀를 주장한 이상주의자, 그의 도덕경(道德經)은 그런 가치관을 반영한 이상주의적 정치이념서적˝(안성재 지음 노자, 정치를 깨우다서문)이라는 글을 처음 접했을 때(20155)의 신선한 충격을 잊지 못한다.

 

저자는 이에 따라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대동사회의 나라를 다스리고 유지하는 제도는 말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만일 오늘날과 같은 보편타당한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변치 않고 오랫 동안 유지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라고 풀었다.

 

이한우 기자의 중용(中庸) 풀이를 보자. 저자에 의하면 공자는 중용(中庸)을 간절함, 절절함, 열렬함, 애씀이 있을 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다는 것은 문제의 본질에 적중한다는 말이고 용()하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끌고 가는 것을 말한다.(‘슬픈 공자참고).. 독특한 해석이다.

 

중용의 일반적 해석(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않은, 떳떳하며 변함이 없는 상태나 정도)과 많이 다르다.

 

이런 해석은 이한우 기자가 유일한가 싶지만 신정근 교수의 해석을 볼 필요가 있다.

 

신 교수는 맹자(孟子)중용(中庸)’을 혁명을 선동하는 책으로 풀이했다. 언론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정부에 대해서라면 균형을 잡기 위해 혁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용의 논리라는 것이다.

 

적당, 중간, 움직이지 않음(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논리에 따른 행동)과는 확연히 다르다.

 

한편 이한우 기자는 흔히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로 풀이하는 학이시습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를 임금에게 스승 같은 신하[師臣]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먼 곳의 벗이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로 풀이하는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를 임금에게 뜻을 같이하는 벗과 같은 신하[朋臣]가 있어야 한다는 말로 풀었다.

 

정치 이야기에 즈음해 아프지만 들춰보지 않을 수 없는 말이 있다.

 

˝현 정권에게 권력을 위임한 것은 우리 자신이며 그 점에서 위임자인 국민에게도 선택과 결정의 책임이 있다.

 

그러나 분명히 짚어야 할 사항은 국민 어느 누구도 현 수권세력을 향해 민주주의를 하지 말라고 말한 일이 없다는 것, 민주주의 실현은 여전히 국민적 약속이고 국민의 위임사항이라는 것, 따라서 현임 정권과 국가기관들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것은 권력 남용이고 배임이 된다는 사실을 엄정히 지적하고 비판해서 수권세력이 민주주의를 할 수 밖에 없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지적과 비판이야말로 모든 시민의 책임이고 의무이다. 그 책임과 의무를 방기한다면 우리는 시민일 수가 없다.˝(2010년 출간 김상봉, 한홍구, 도정일 등 지음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15 페이지)

 

올바른 시민의식은 필수적이다. ˝어렵게 성취되었다가 허무하게 무너져버릴 수 있고 안정적이고 성숙한 단계에 진입했다고 방심하는 순간 안으로부터 타락할 수 있는 위태로운 성취물˝(김비환 지음 이것이 민주주의다‘ 5 페이지)인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는 아침이다.

 

지난 18일 민주시민사회 워크숍 뒷풀이 자리에 합석한 것을 계기로.. 그간 정치보다 실존에 우위를 두었다는 생각이 씁쓸하게 드는 아침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