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덫‘이란 소설을 쓴 이종건은 조지아 공대 건축 대학에서 역사/ 이론/ 비평 전공으로 박사가 된 사람이다.

몆 귄의 건축비평서를 쓴 그의 최신작인 ‘영혼의 말‘은 존재함에 따라 타인에게 줄 수 밖에 없는 상처에 대한 두 가지 시각을 다룬 책이다.

하나는 최소로 존재함으로써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기꺼이 상처를 껴안음으로써 최대로 존재하는 길이다.

전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지도 않음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

로버트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 학교‘의 주인공 크라우스는 이런 인물의 전형이다.

이종건에 의하면 크라우스는 진정한 신의 작품이며 무(無)이며 하인이다.

그런데 신의 작품이나 무는 그렇다 해도 그는 왜 하필 하인인가?

크라우스는 사람과 세상에 대해 어떤 욕심도 품지 않는 존재다.

이 부분에서 나는 ‘겨우 존재하는 것들‘이란 말을 생각한다.

그리고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Das Glasperlenspiel)‘의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를 생각한다.

겨우 존재하는 것들이란 질량이 미미한 소립자인 중성미자(neutrino)를 이르는 말이다.

요제프 크네히트에서 크네히트란 하인을 의미하는 말이다. 물론 크라우스는 어떤 욕심도 품지 않기에 무엇도 그를 공략할 수 없는 바위 같은 존재다.

그러니 무, 하인이란 말은 역설적이기만 한 표현이다.

어제 나는 조용미 시인의 ‘물의 점령‘이란 시를 인용하며 이 시를 욕망의 넘침과 무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시인의 의지가 반영된 시로 읽었다.

˝이 생을 조금만 더 사랑하기 위해˝란 표현 때문이다.

이제 내 읽기는 어디로 가게 될까? 이종건의 ‘영혼의 말‘을 다 읽고 그의 다른 작품인 ‘건축 없는 국가(건축비평서)‘와 ‘건축의 덫(소설)‘을 읽게 될 것이다.

행복한 시간들이 되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해(읽어)야 할 것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린다. 행복한 고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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