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쟁의 슬픔 ㅣ 아시아 문학선 1
바오 닌 지음, 하재홍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5월
평점 :
지난 해 하롱베이와 앙코르와트를 연결하는 여행을 다녀오기 전까지 베트남에 대한 기억은 청룡부대와 맹호부대가 부산항을 떠나던 장면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밖에도 우리소설로는 황석영님의 <무기의 그늘>, 이상문님의 <황색인>, 안정효님의 <하얀전쟁> 등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대체로 전쟁의 참상이나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내용이나 베트남 전쟁의 근원까지 다루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밖에도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굿모닝 베트남>이나 로버트 드 니로가 주연한 <디어 헌터> 등, 역시 전쟁이 인간의 정신을 얼마나 황폐화하는지를 적나라하게 그려낸 영화 등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작품들은 모두 베트남전쟁에 뛰어든 외부인들의 시선으로 전쟁을 바라본 것이었습니다. 과연 베트남사람들은 베트남전쟁을 어떻게 치렀는지, 그리고 전쟁이 그들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았습니다. 베트남전쟁 직전의 베트남사회를 그린 <하얀 아오자이>나, 베트남의 정글을 누비며 전투를 치른 참전작가 반레(본명은 레지투)의 <그대 아직 살아있다면>이나 바오 닌의 <전쟁의 슬픔> 등이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전쟁의 슬픔>을 읽게 되었습니다.
작가 바오닌은 1969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로 베트남인민군대에 자원입대하여 3개월간의 군사훈련을 받고 B3 전선에 투입되었는데, 소대원 대부분이 전사한 첫 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입대 5개월 만에 소대지휘관이 되어 6년여에 걸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최전방을 누비며 전투를 치렀다고 합니다. 베트남 전쟁에서는 전후방 개념이 분명치 않았다고 들었습니다만.... 마지막 작전은 사이공진공작전으로 소대원들과 함께 떤 선 녓 국제공항 점령 전투에 투입되었다(우리는 탄 손 누트 공항으로 알고 있습니다). 남베트남 공수 부대와 치열한 교전 끝에 공항을 장악했을 때 살아남은 소대원은 그를 포함하여 단 두 명이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전사자 유해발굴단에 참여하여 옛 전투지역을 누비며 전우들의 시신을 수습했는데, 이 모든 과정이 <전쟁의 슬픔>에 녹여져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퇴역군인들이 심각한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바로 자전적 소설이라고 할 <전쟁의 슬픔>에서는 작가 또한 PTSD로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작품의 초반에는 주인공 끼엔이 전사자의 유해를 발굴하면서 그 지역에서 벌였던 전투장면을 회상하고 있는데, 작가의 입장에서는 기억의 심연에 묻어버리고 싶은 전투장면들이 저절로 살아나오는 고통을 다시 겪어야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지 현재와 과거가 마구 뒤섞이는 것 같아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버거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영혼은 그 시간들에 붙박여 있었다. 내게는 내 삶처럼 내 영혼을 바꿀 재주가 없었다. 직감적으로 나는 과거가 내 주변에 몸을 숨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때로는 눈만 감아도 내 안에서 기억이 스스로 몸을 돌려 옛길을 쫓고 오늘의 현실은 통째로 풀밭에 내던져지곤 했다.(64쪽)”
전쟁터에서 있었던 일만 적었다면 아마도 작가는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장의 이야기에 더해진 끼엔의 사랑 이야기는 더욱 안쓰럽고 슬픈 것 같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뜨겁게 사랑하던 두 사람이었기에 전장으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려는 욕심이 화를 불러 사랑하는 이를 곤경에 빠트렸던 것인데, 끼엔은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전쟁이 지나가는 6년의 세월은 많은 것이 변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집에서 만난 그녀를 안았을 때 끼엔은 그녀의 우아한 몸에서 한없는 행복감에 뒤섞인 혼란과 두려움과 당혹스러움이 전해져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뭐가 잘못 되었을까요? 전쟁은 사랑을 망가뜨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망가뜨립니다. 지나친 욕심과 오해가 끼어들면 더욱 그렇습니다.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온 사람은 또 다른 전쟁을 마주하게 됩니다. 전쟁에서는 승리했을지 몰라도 그 전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희생자가 되는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