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자의 공부 - 완벽한 몰입을 통해 학문과 인생의 기쁨 발견하기
오카 기요시 지음, 정회성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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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적은 일수의 달인데 중간에 설 연휴마저 끼이다 보니 한 달이 어찌 흘렀나 싶은 게 도통 정신이 없다. 틈 나는 대로 읽으려고 책상 한편에 쌓아 놓은 책들은 좀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되레 권수를 더하여 그 높이만 키우고 있다. 한숨 돌릴만한 짬이 나지 않는 까닭에 어떤 내용의 책인지 대충이나마 훑어볼 여유도 갖지 못했다. 이러다가는 입안에 가시가 돋는 형국을 지나 숫제 철조망이 쳐지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일까 입맛도 없고 매사가 그저 시큰둥할 뿐 활력이 생기지 않는다. 봄이 오려나 보다.

 

"몰입은 그런 식으로 찾아오는 것 같다. 약간의 긴장감을 유지한 채 난생처음 가는 길을 걷듯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을 계속 진행하기. 거기에 더해 졸음만 쏟아지는 일종의 방심 상태에 놓여 있기. 이 두 가지가 '발견'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던 게 아닌가 싶다." (p.23)

 

2월도 끝을 향해 가는 오늘, 하루의 노력으로 한 달의 무위도식을 만회할 수는 없겠지만 좋아하는 소설은 왠지 놀고먹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고민 끝에 선택한 책이 오카 기요시의 <수학자의 공부>였다. 1901년에 태어난 오카 기요시는 제국주의 일본을 대표하는 수학자였다. 다변수 함수론 분야의 최대 난제였던 '3대 문제'를 해결해 세계적 명성을 얻기도 했던 저자는 이 책에서 학문과 예술, 인생과 공부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적어 놓았다. 그러나 저자가 정립했던 '다변수 복소함수론'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설명이 있었다 해도 그러려니 하고 못 본 척 건너뛰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1963년 일본에서 처음 출간된 이후 반세기가 넘는 긴 세월 동안 세대를 관통하며 대를 이어 읽히고 있는 까닭에 나는 이 책의 내용이 궁금했던 게 사실이지만 저자의 업적보다는 천재 수학자의 일상적 태도와 생각을 엿보고 싶었다. 학문에 있어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는 저자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의 근원으로 '정서를 귀하게 여긴 삶'을 내세웠다. 조화와 균형을 배우기에 가장 좋은 대상은 '자연'이며 '수학적 자연'을 일궈내는 열쇠가 '정서'라는 것이다.

 

"수학교육의 목적은 계산이 아니다.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억지로라도 열어 신선한 바람을 쐬게 해주어야 한다. 수학교육은 대자연의 직관이 인간의 마음 중심에 닿도록 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우리의 통념대로, 계산을 잘하게 해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한 인간을 계산기로 만드는 일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p.77)

 

저자는 스스로를 '자연순응자'라고 칭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자신의 방식이 '자연을 따르는 삶'이라는 것이다. 중학교 입시에 낙방한 전력이 있던 저자는 대학에서도 물리학에서 수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수학에 있어 천부적 재능을 타고 태어난 것도, 자신의 재능을 남보다 일찍 발견한 것도 아니었던 저자가 '층 이론'의 수학적 토대를 이룬 위대한 수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자연과 정서를 중시하고 수학의 영역에 정서를 도입하려 했던 했던 획기적 발상, 즉 '정서적 수학'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의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자연과 학문을 매개함으로써 인류의 지적 성장을 이끌고자 했던 그의 열망이 한몫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무엇에 쓰려고 그렇게 열심히 수학을 연구하느냐고. 봄 들녘의 제비꽃은 제비꽃으로 피어 있으면 그뿐이지 않은가. 피어 있는 것의 소용은 제비꽃이 알 바 아니다. 피어 있느냐 피어 있지 않으냐, 중요한 문제는 그것뿐. 나도 마찬가지다. 나로 말하자면, 단지 수학을 배우는 기쁨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 뿐이다. 수학을 배우는 기쁨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 뿐이다. 수학을 배우는 기쁨을 먹고 마시며 사는 존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p.19)

 

봄으로 향하는 2월의 마지막 날, 온 국민의 바람처럼 단비가 내렸다. '인간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정서다.'라고 했던 저자의 말은 학문하는 자의 향기로운 삶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가 감언이설의 붓끝으로 세상을 현혹시켰던 대한민국의 어느 노시인에게서 나는 썩은 내가 아닌, 학문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도 한눈 팔지 않았던 한 수학자의 단순하고 청초한 삶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를 나는 이 봄에 맡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봄이 오고 있다. 대한민국 전역에 내리는 이 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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