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내려앉은 새벽 숲길은 차라리 강(江)이다. 산길을 걷다 보면 강물 위로 뿌옇게 번지는 새벽 물안개처럼 생각의 운무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몸은 오롯이 어둠에 묻은 채 앞서 가는 시선만 간신히 플래시 불빛의 좁은 동심원 속에 우겨넣는다. 등 뒤의 어둠은 아주 어릴 적 동네 형들로부터 들었던 무서운 이야기들을 한 보따리 메고 따라오면서 이따금씩 이야기 한 토막을 풀어놓곤 한다. 나는 어둠이 들려주는 무시무시한 이야기에 오싹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고 옛 추억에 젖어 모든 걸 다 잊기도 한다. 등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털이 쭈뼛 서다가도 플래시 불빛에 놀란 꿩이 푸드덕 날아 오를 때마다 슬몃 미안해진다. 어둠을 배경 삼아 어룽어룽 달빛이 새긴 산길 그림을 밟으며 한 발 한 발 걷다 보면 어느새 정상이 눈앞이다. 누군가 올려다 놓은 나무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산 아래 펼쳐진 도시의 야경. 저 멀리 보이는 주택가 불빛이 따사롭다.
부쩍 추워진 아침 기온 탓인지 산을 오르는 사람들도 많지 않다. 인적이 끊긴 아침 산길은 괴괴하다. 취향이나 기호로 따질 문제는 아니지만 나는 겨울 산행을 더 좋아한다. 인적이 끊긴 산길을 걷다 보면 반가운 추억들을 만나게 된다.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기억들과 잊혀진 얼굴들. 무작위로 떠오르는 시 한토막.
물안개
-류시화-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후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안개처럼
몇 겁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세월은 온전하게 주위의 풍경을
단단하게 부여잡고 있었다.
섭섭하게도 변해버린 것은
내 주위에 없었다.
두리번거리는 모든것은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흘렀고
여전히 나는그 긴 벤치에 그대로였다.
이제 세월이 나에게 묻는다.
그럼 너는 무엇이 변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