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번째 여자친구는
마커스 주삭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순간이 주는 미묘한 떨림을 뒤로 한 채 막바지의 더위가 사그라들고 있습니다. 너무나 길었던 더위였고, 그만큼 가혹했던 여름이었습니다. 계절의 이쪽 편에서 저쪽 편으로의 도약을 준비하는 이맘때쯤이면 마치 사춘기 소년의 탄력있는 다리가 물이 불은 시내를 훌쩍 뛰어 넘는 것처럼 계절은 그렇게 거침이 없이 변하겠지요. 확실했던 어떤 것들이 영화의 자막처럼 빠르게 흘러가는군요. 그리고 나는 먼 과거를 떠올립니다. 인생의 불확실한 어떤 것을 향해 자존심과 무모함, 때로는 오기 하나로 자신의 몸을 불사를 준비가 되어 있던 그 시절을.

 

마커스 주삭의 소설 <내 첫번째 여자친구는(Getting The Girl)>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가 쓴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캐머런 울프의 성격이 홀든 콜필드처럼 반항적인 것은 아니지만 사춘기를 겪는 십대 소년이라는 점, 이따금 자신의 삶을 염두에 두고 깊은 사색에 빠져든다는 점에서 두 인물은 서로 닮아 있는 듯 보입니다. 주지하는 사실이지만 호주 출신의 소설가 마커스 주삭은 그의 소설 <책도둑>과 <메신저> 등으로 국내의 독자들에게도 꽤나 많은 사랑을 받았었지요. 성장소설로 분류되는 이 소설은 주인공 캐머런 울프의 성장기를 다루고는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사색과 글쓰기를 좋아하는 한 소년의 눈을 통해 바라본 삶의 스케치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여 나는 스토리 전개에 집중하기보다는 소설 곳곳에 산재한 마커스 주삭의 아름다운 비유와 문장 표현에 감탄하며 읽었던 것입니다.

 

"앞문이 뒤에서 쾅 소리를 내며 닫혔고, 방충망이 덜거덕거렸다. 마치 모든 문이 그 집에서 살았던 낡은 삶으로부터 나를 쫓아내는 것 같았다." (p.117)

 

"어떤 면에서 보자면, 나는 쓰레기를 뒤지듯, 괜찮다고 위로받는 순간을 찾아 헤매야 했다." (p.10)

 

"곧 저녁이 하늘로 파고들고, 도시는 몸을 웅크렸다." (p.20)

 

"그 순간 밤이 터져 열리며 하늘이 내 주위에 널빤지처럼 떨어져내렸다." (p.124)

 

소설의 줄거리는 대략 이러합니다. 배관공인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엄마로부터 삼남일녀 중 막내로 태어난 캐머런은 두 형에 비해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늘 주눅이 들어 지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맘만 먹으면 어떤 일이든 성취해내고야 마는 큰형 스티브는 독립하여 여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고, 작은형 루벤은 잘생긴 외모와 말솜씨 덕분에 딱히 노력을 하지 않아도 여자들이 달라붙고, 그런 까닭에 수시로 여자친구를 갈아치우곤 하는데 여자친구를 간절히 원하는 자신은 이제껏 여자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캐머런이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작은형 루벤의 여자친구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도시의 골목을 정처없이 걷거나, 맘에 두었던 여자애네 집 앞에서 무작정 서 있는 게 전부였습니다.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금 외로운 새끼'였던 거지요.

 

"거리에는 나뿐이었다. 여전히 평화로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짧은 행복은 떠나가고 슬픔이 아주 천천히, 꼼꼼하게 나를 찢어 열었다. 도시의 불빛들이 허공을 뚫고 다가와 나를 향해 팔을 뻗었지만, 나는 절대 그 빛이 나에게 닿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p.23)

 

사춘기의 성장통을 겪고 있는 캐머런은 주말이면 루벤과 함께 아버지 일을 돕거나 외로울 때면 이따금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적어 감춰두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형 루벤(또는 루브)의 새로운 여자친구 옥타비아가 그의 눈에 들어옵니다. 부둣가에서 하모니카 공연을 하는 옥타비아는 이전에 형과 사귀다 헤어졌던 다른 여자애들과는 뭔가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사실 나는 우리 모두가 변태라고 생각한다. 남자들은 모두. 여자들도 모두. 나처럼 뚱한 조그만 새끼들은 모두. 아버지가 변태라고, 어머니가 변태라고 생각하니 재미있다. 하지만 그들도 어딘가로, 그들의 영혼의 갈라진 틈으로 가끔 미끄러진 적이, 아니, 심지어 뛰어든 적이 있을 게 분명하다. 나로 말하자면, 나는 때때로 아예 그런 틈 안에서 사는 기분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그런지도 모른다. 내 인생에 아름다움이 있다면, 거기서 기어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p.68~p.69)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루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옥타비아와 헤어지고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게 됩니다. 그러나 행실이 안 좋아 보이는 줄리아가 캐머런은 영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캐머런은 다시 스테퍼니의 집 앞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일을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테퍼니의 집 앞에 있는 캐머런을 찾아 온 옥타비아가 그에게 묻습니다. 자신의 집 앞에서 기다려 주지 않겠느냐고 말이지요. 한때 형의 여자친구였던 옥타비아에게 캐머런은 자신이 써서 꽁꽁 숨겨두었던 글을 읽어줍니다. 어쩌면 그것이 옥타비아를 향한 캐머런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집에서 이런 캐머런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건 누나 세라뿐입니다. 캐머런이 글을 쓰고 있다는 걸 진작에 말고 있었던 세라는 가족을 그린 자신의 스케치북을 캐머런에게 보여줍니다. 그 속에는 캐머런을 그린 그림도 있었습니다. 옥타비아를 마음에 두고는 있지만 루벤 때문에 갈등하고 있는 캐머런을 세라는 적극적으로 응원해 줍니다.

 

"그럼 루브건 다른 누구건 너한테 이렇게 해라, 아니면 이런 사람이 돼라 말하게 놔두지 마.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건 신경쓰지 마. 어떻게 하면 그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편하게 해줄까 신경쓰지 말란 말이야. 그냥 네가 원하는 걸 해, 캠. 알았어?" (p.193)

 

한편 루벤은 새로 사귄 여자친구 줄리아의 전남친으로부터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협박에 시달립니다. 결국 줄리아는 옛 남자친구에게 되돌아갔지만 루벤에 대한 남자친구의 협박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옥타비아와 캐머런의 관계를 알게 된 루벤은 불같이 화를 냅니다. 결국 옥타비아도 캐머런과 헤어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벤은 줄리아의 남자친구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철도 조차장의 공터에서 싸움이 벌어집니다. 도와줄 친구도 없이 밤에 혼자 나갔던 루벤이 몹시 걱정되었던 캐머런은 가족들 몰래 집을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루벤을 안고 그 먼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사춘기의 그 시절에 우리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남기를 간절히 바라곤 합니다. 그 대상이 남자건 여자건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순수하게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추억이 어느 누구의 가슴엔들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찬 기운이 옷깃 속으로 파고드는 이맘때쯤이면 문득 그 시절이 그리워지곤 합니다. 꿈처럼 아련하기만 한 그 시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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