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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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을 자제하라는 기상청의 예보 때문이었는지 햇살이 가만가만 퍼지는 이른 시간부터 거리는 무척이나 한산했습니다. 테라스 유리창에 의해 차단된 완전한 침묵. 밝음 속에 스며든 어둠처럼 침묵은 그렇게 한정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소리가 사라진 정적의 공간 속으로 한가로운 햇살만 넘실대는 바깥 풍경을 나는 그렇게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소리를 완전히 지운 듯한 비현실적인 풍경에서 눈을 뗀 나는 '이 더위가 언제까지 갈런지 원...' 하는 현실적인 걱정을 이끌어냈던 것입니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주의보와 오존주의보 그리고 인적이 끊긴 보도. 늦잠을 자느라 아침을 걸렀지만 주말 휴일의 허기는 언제나 어렴풋한 느낌으로만 존재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쉬는 날이면 나는 마음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을 향해 하루에도 수십 번 달음박질치는 까닭에 육체의 허기는 잠시 잊혀지는 어떤 것이 되기 일쑤입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 소식은 일견 기쁘면서도 씁쓸한 것이었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작가를 향해 내가 느꼈던 양가감정은 나로서도 그 까닭을 알 수 없는 묘한 일이었고, 그래서 다시 집어든 책이 <희랍어 시간>이었습니다. 책에는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語을 잃은 여자가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희랍어 시간은 상실의 고통과 기억을 지닌 그들만의 공간인 셈이었습니다. 정교한 언어이지만 문법적 복잡성으로 인해 서서히 사라져간 언어, 더이상 언어로서의 최소한의 기능마저 상실한 희랍어는 소설 속 남녀 주인공과도 무척이나 닮아 있습니다.

 

남자는 희랍어 강사로 여자는 희랍어를 배우는 학생으로 만납니다. 대학이나 학원에 개설된 희랍어 강의가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아카데미 중 하나였습니다.   과거와 멀어질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과거의 기억은 우리가 어떤 것을 잃음으로써 다른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기본적인 통념과는 사뭇 배치되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흘려보냄으로써 원하지도 않았던 기억 한 줌을 손에 쥐었다는 건 이론상으로 맞지 않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남루한 맥락에서 나는 플라톤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라고. 그 역시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라고.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p.120~p.121)

 

십대 중반의 나이에 가족 전체가 독일로 떠났던 남자는 언어와 문화가 두 동강이 난 채 그곳에서 살다가 십수 년 만에 혼자 귀국하여 아카데미에서 희랍어를 가르치며 삽니다. 부계 유전에 따라 독일에서 그는 이미 마흔 이후에는 앞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성치 않은 몸으로 귀국을 결심한 남자를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떠나기 전부터 걱정했습니다. 남자는 독일에서의 청소년기를 지극히 외롭게 보냈습니다. 아시아계 이방인이라는 것에 더하여 그의 내성적인 성격이 만들어 낸 결과였습니다. 남자의 이야기는 청소년기에 그가 사귀었던 두 사람(그의 첫사랑이었던 농아 여인과 유일한 독일 친구이자 그를 사랑했던 요하임 그룬델-그는 이미 사망했다)과 여동생 란이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잘 보이지 않으면 가장 먼저 소리가 잘 들릴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감각되는 것은 시간입니다. 거대한 물질의 느리고 가혹한 흐름 같은 시간이 시시각각 내 몸을 통과하는 감각에 나는 서서히 압도됩니다."    (p.39)

 

열입곱 살 때 처음 실어증을 앓았던 여자는 그때 우연히 배운 불어 단어로 인해 다시 말을 찾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와 편집대행사에서 일했고, 대학과 예술고등학교에서 문학 강의를 했고, 시집 세 권을 냈고, 칼럼을 쓰며 문화잡지 창간 멤버로 활동했던 여자는 반년 전에 어머니를 여의고, 수년 전에 이혼했고,  소송 끝에 아홉 살 난 아들의 양육권마저 잃고, 아들을 못 만난 지 오 개월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여자는 20년만에 다시 찾아온 실어증을 극복하기 위해 희랍어를 배웁니다. 어머니를 추모하며 늘 검정 옷을 입고, 아들이 없는 집에서의 불면의 밤을 두려워하여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때까지 걷는 여자는 희랍어 수업에 나가는 것 외에는 딱히 하는 일이 없습니다.

 

어느 날 건물 안으로 날아든 박새를 내쫓으려다 남자는 계단에서 굴러 상처를 입고 안경마저 부서져 앞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여자는 그런 남자를 부축해 함께 병원엘 가고 남자의 집까지 데려다 줍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마치 독백을 하듯 가만가만 들려주고 여자는 앞을 보지 못하는 남자로 인해 오랫동안 굳어 있던 마음에 따스한 감각이 되살아납니다.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단어들이 보도블록에, 콘크리트 건물의 옥상에, 검은 웅덩이에 떨어진다. 튀어오른다."    (p.174)

 

소설에 등장하는 말을 잃은 여자와, 시력을 상실해가는 남자와, 청각을 잃었던 남자의 첫사랑과, 일찍 세상을 떠난 사춘기 시절 남자의 독일인 친구는 모두 자신이 소유했던 무엇인가를 내어주고 끝내 다시 돌려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작가는 어쩌면 삶을 영위하는 모든 사람들이 비록 각자가 소유하는 시간은 다를지라도 시간이라는 블랙홀에 결국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임을 아프게 말하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중한 것을, 소중하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을, 그리고 영원하리라고 생각했던 것들마저도 결국에는 시간의 소멸과 함께 어쩔 수 없이 내어줄 수밖에 없는 게 인생이라고 말입니다. 시력도, 청력도, 말語도 사람에 따라 임대 기간은 서로 다를지언정 얼굴도 모르는 주인으로부터 잠시 빌려 쓰고 있다는 점에서는 우리 모두가 같은 처지일 뿐입니다. 결국 우리는 세상이라는 임대하우스에 잠시 세 들어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온전히 내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런게 있기나 할런지요. 곧 있으면 저녁 어스름이 내릴 시간입니다. 빛이 소멸하는 시간이지요. 애초에 내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섭섭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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