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김승옥 소설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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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도무지 주인 몰래 입에 넣은 포도알처럼 삼키지도 그렇다고 내뱉지도 못하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면 흐르는 시간에 무작정 의지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시간이 흘러흘러 미래의 어떤 순간에 도래하게 되면 지금으로서는 그 향방을 예측할 수 없어 불안하기 그지없지만 나중에는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럴 때 나는 마치 시간이라는 판관 앞에서 처분만 기다리는 죄인이 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홀연히 찾아 드는 그런 느낌은 때론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낯설거나 생경하지 않고 오히려 오래된 친구처럼 익숙하기만 하다. 예컨대 내일이 시험인데 몸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고 걱정으로 입안은 바싹바싹 타들어가지만 공부는 도통 손에 잡히지 않은 채 한심스레 붓방아만 찧게 되고 급기야 졸음이 밀려올라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시간의 처분에 맡긴 채 잠을 청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살찐 게으름에 불과할런지도 모른다.

 

"새출발이 필요할 때 무진으로 간다는 그것은 우연이 결코 아니었고 그렇다고 무진에 가면 내게 새로운 용기라든가 새로운 계획이 술술 나오기 때문도 아니었었다. 오히려 무진에서의 나는 항상 처박혀 있는 상태였었다. 더러운 옷차림과 누우런 얼굴로 나는 항상 골방 안에서 뒹굴었다. 내가 깨어 있을 때는 수없이 많은 시간의 대열이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비웃으며 흘러가고 있었고, 내가 잠들어 있을 때는 긴긴 악몽들이 거꾸러져 있는 나에게 혹독한 채찍질을 하였었다." (p.162)

 

김승옥의 단편집 <무진기행>을 읽었던 어제를 돌이켜 보면 시간이 무척이나 더디게 흘렀다는 느낌이 든다. 안개가 자욱한 무진의 거리를 헤매는 양 종일 흐리기만 했던 의식과 어둑신하게 내려 앉은 우울이 적당한 속도로 흘러 가는 시간의 경과를 까맣게 잊게 했었는지도 모른다. <무진기행>을 처음 읽었던 학창시절의 어느 날 이후, 성인이라고 불리워지기 시작했던 그 시간 이후 나는 수차례 반복하여 이 책을 읽어왔다. 떨어져나간 양장본의 겉표지를 투명 테이프로 수선하였던 것도 여러 번, 그 반복의 매듭에는 항상 갈수록 희미해지는 과거에 대한 확신이 세월의 대열에 묶여 있었다.

 

"흐린 날엔 사람들은 헤어지지 말기로 하자.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가까이 가까이 좀더 가까이 끌어당겨주기로 하자. 나는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라는 그 국어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의 충동을 쫓아버렸다." (p.191)

 

나달나달 헤질대로 헤져 이제는 책으로서 갖는 최소한의 권위마저 상실한 듯한 이 책은 내 과거로 슬몃 스며든 듯 자연스러웠다. 개인의 과거라는 게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시간의 순서대로 잘 정리되지도 않고 목차마저 희미해지게 마련이어서 찾고 싶은 과거를 그때마다 바로바로 찾을 수도 없을 뿐더러 때로는 다른 사람의 과거가 내 과거인 양 뒤섞이기도 하고 오래전에 읽었던 소설의 일부가 내것인 양 훅 끼어들기도 한다. 하여 나이가 들수록 사람의 기억은 믿지 못하는 어떤 것이 되고 만다.

 

김승옥 소설전집 1권에 속하는 이 책에는 표제작인 <무진기행>을 비롯하여 총15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어쩌면 작가 김승옥의 과거가 될 수도 있는 이 책이 아무런 이물감도 없이 내 과거로 슬몃 끼어든 것은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만 작가의 글이 2016년 지금의 현실과 비교해서 크게 다르지 않거나 핵심과 의표를 찌르는 작가의 글솜씨가 그만큼 훌륭했다고 나 나름의 평을 이유로 들어 스스로를 납득시키곤 한다. 작가의 글이 내 과거에 슬몃 포개어진 것도 다 그런 이유라고 말이다.

 

"문학은 삶의 불량스러움과 냉소를 연민으로 감싸고 돌보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무진의 안개에 홀린 사람이 어찌 나뿐일까. 오랜 세월을 다른 최면에 드신 듯이 김승옥 선생이 소설로 돌아오지 않고 계셔도 과거는 우뚝하다. 힘센 시간이 수많은 소설들을 소멸시키며 흘러갔으나, 선생의 소설들은 가슴에 아로새긴 청춘의 어느 하루처럼 나날이 더 빛나고 있다." ('내가 읽은 김승옥-신경숙' 중에서)

 

누군가의 이야기가 때로는 덧붙여지고 잘려나가기도 하면서 유구한 시간이 신화와 전설을 만드는 동안 수많은 생명이 나고 또 졌을 것이다. 오월도 하순을 향해 가는 지금, 지난 번 내린 비에 아카시아꽃이 하얗게 떨어지고 아파트 화단에는 넝쿨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계절에 맞춰 꽃이 피고 지듯 누군가의 이야기가 또 끝없이 소설로 되살아나고 사라져 갈 것이다. 봄에서 여름으로 향하는 이 계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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