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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격하게 솔직한 사노 요코의 근심 소멸 에세이
사노 요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TV를 자주 보는 건 아니지만 이따금 TV를 볼라치면 연예인들도 자신의 컨셉을 유행에 맞게 잘 잡아야 성공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때와는 방송문화가 판이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인기 있는 연예인의 모습도 크게 달라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성(性)의 구별이 확실했던 것인지, 이를테면 여성은 청순가련형의 얼굴에 행동거지도 매우 조심스러운 그런 여자가 인기를 끌었는가 하면 남자는 주로 외모보다는 오히려 기운이 넘치고 박력이 있는 남성다움이랄까, 수컷냄새랄까 뭐 그런 것들이 뭇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듯하다. 그러나 과거의 트렌드에 멈춰 있는 나의 사고방식과 요즘 인기가 있다는 연예인들의 모습이 너무도 달라서 깜짝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과거에 비해 여성의 주장이나 발언권이 세진 탓인지 요즘 TV에서 보는 연예인들은 유니섹스를 한참이나 지나쳐 남성과 여성의 성적 특성이 완전히 뒤바뀐 듯한 인상을 받곤 한다. 이를테면 여성은 노출이 심한 의상에 조신한 모습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는, 11자 복근의 탄력 있는 몸매와 털털한 성격이 대세를 이루는 듯하다. 물론 외모보다는 털털한 성격 하나로 인기를 끄는 연예인들도 많은 걸 보면 외모에 대한 비중이 과거에 비해 다소 낮아진 것도 사실인 것 같지만 말이다. 반면에 남성은 수컷의 냄새가 완전히 사라진, 예쁘장한 외모에 다소곳하고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남성이, 남성이라기보다는 여성에 가까운 꽃미남 스타일의 남자 연예인들이 인기를 끄는 걸 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사노 요코의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를 읽다가 문득 들었던 생각이다. 1938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난 작가는 전쟁이 끝난 후 일본으로 건너와 무사시노 미술대학 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석판화를 공부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글을 쓰는 직업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을 듯한 그녀의 삶은 일본의 국민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와 두 번째 결혼을 함으로써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책은 그와 결혼을 하기 전에 나온 책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노 요코는 이미 2010년에 고인이 되었고 독자들은 이제 그녀의 독특하고 유쾌한 글을 더 이상 기대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였지만 과거에 쓴 그녀의 글이 여전히 책으로 출판되는 걸 보면 새삼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정말로 아름다운 사람이란 것을 볼 수가 없다. 미의 기준 그 자체가 없어졌다고 해도 좋다. 아름다운 사람이란 것은 이 세상 사람 같아서는 안 된다. 범접할 수 없이 신성하고 그윽한 기품이 있고 환상 같아서, 리얼리티 같은 건 한 조각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 땐 이미 그와 같은 사람은 없었다." (p.145)
작가인 동시에 일러스트레이터로도 유명했던 사노 요코는 자신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부터 40대의 일상에 이르기까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들을 이 책에 솔직하게 씀으로 해서 책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을 가볍게 한다. 독자들을 훈계라도 하려는 듯 처음부터 어렵고 이해하지 못할 말들만 늘어놓는 책에 비하면 사노 요코의 책은 우리의 눈높이에 최적화된 책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이 책은 이제 막 이성에 눈을 뜬 아가씨들이 긴긴 겨울밤에 남의 집 사랑방에 모여 땟국이 줄줄 흐르는 담요 밑에 시린 발을 겨우 묻고 화장기 없는 민낯으로 의미도 없는 수다를 밤새도록 늘어놓는 정경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고급한 철학 같은 건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신주쿠의 지하도에 뒹굴뒹굴 누워 있는 아저씨들이 부럽다. 나는 식당 테이블에 멍청히 앉아서 두 시간이든 세 시간이든 집앞의 참억새를 바라보곤 한다. 눈썹을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다. 지진이 와도 도망치지 않을 거야 하고 생각한다. 장식장 안의 정리해야 할 물건들이 생각나지만 그것들을 직각으로 정리해 놓는다 한들 내 마음이 정리되는 것도 아닌데 하며 그냥 둔다." (p.71)
주인공에게 완전히 빙의된 채 드라마를 보고, 영화 속에서 멋진 주인공들이 연애를 하는 걸 보면서 자랐기에 연애는 그들만 하는 하는 걸로 알았다거나 여행이 가고 싶으면 먼저 몸이 아파지는 바람에 병원에서 며칠이고 누워있다 퇴원한다는 작가, 스키를 타러 다니는 사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작가, 볼일이 급해서 차를 세운 채 도로 옆에서 볼일을 보는데 버스가 지나갔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쓰는 작가의 모습에서 나는 요즘 TV애 자주 나오는 연예인들을 생각했다. 시청자들의 인기만 얻을 수 있다면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과감하게 망가지는 요즘의 연예인들을 말이다.
"내가 열네 살 때 좋아하던 남학생은 수재에 문학소년 타입이었고, 그래서 그가 창백하고 휘청거리면 거릴수록 더 섹시해 보였다. 공을 던져도 톡하고 1미터 50센티 되는 곳에 떨어져 버리는 수재를 보면 실신할 지경으로 멋있어 보여서 가슴이 두근두근했고, 나도 따라서 1미터 50센티 되는 곳에 톡하고 떨어뜨렸더니 체조 교사가 얼굴이 새빨개져서 "제대로 해라아!" 하고 고함쳤던 일이 생각난다." (p.272)
내일은 제36주년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이다. 올해도 정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 요구를 거절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싶은 이유일 터였다.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식장에서 노래 한 곡조 함께 부르는 것조차 무서워 벌벌 떠는 행태가 참으로 우습고 한심스러워 보이지만 말이다.사노 요코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이런 현상에 대해 신랄하게 비웃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서는 그처럼 나에게 지성도 교양도 가져다주지 않지만 때때로 감동하거나 감탄하거나, 아름다운 마음씨가 되거나, 분노에 떨거나 하는 것을 몹시 싼 값으로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만큼은 좋다. 나는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채로, 눈만 두리번두리번거리면서 마음속에서 꺄아 꺄아 기뻐하고 싶은 거다." (p.320)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