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박물관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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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의 날씨가 어쩜 이렇게나 다른지. 어제 꺼내 입은 봄옷이 무색해지는 하루였다. 온종일 나는 맹맹한 느낌의 코를 시원하게 뚫어야 하는 사명이라도 부여받은 듯 일정한 간격으로 킁킁대거나 집의 거실 옷걸이에 무심히 걸려 있을 패딩점퍼를 생각했다. 인공지능 알파고가 프로 9단의 이세돌을 이겼다는 소식과 여당의 어느 의원이 같은 당의 대표를 무참히 깠다는 소식이 막힌 코를 더 맹맹해게 하면서 맹맹한 하루는 부분일식처럼 저물고 있었다. 내 몸이 어제의 온기를 기억하는 까닭에 오늘의 날씨가 더 춥게 느껴졌는지도 몰랐다. 몸이 기억하는 과거는 언제나 직선적이다.

 

부분일식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날씨는 맑고 쾌청했다. 날씨 때문이었는지 문득 떠오르는 책이 있었다. 오늘 같이 으스스 추워진 날, 윤대녕의 소설집<대설주의보>를 읽으면 금방이라도 봄에서 다시 겨울로 회귀할 것만 같았다. 나는 이상하게도 '윤대녕' 하면 이 책이 가장 먼저 떠오르곤 한다. 그가 쓴 다른 책들도 많건만 도통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윤대녕이 떠오른 차에 근처의 도서관에 들러 그의 소설집<도자기 박물관>을 빌렸다.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은 하나같이 과거의 시간에 저당잡힌 사람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그들의 다양한 모습을 단편소설로 쓰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 과거 일정 시점의 기억은 자신의 삶 전체를 통제하는 족쇄처럼 작용한다. 돌부리에 채이듯 인생 구비구비마다 만나는 풍파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운명을 그들은 거부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적극적인 긍정이 아니라 어찌할 수 없이 떠안게 되는 순응의 과정일 뿐이었다.

 

"나는 내 삶에 있어서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미처 모르는 사이에 세계에서 멀어져 어딘가에 격리돼 있던 시간들을. 언제 어디서 나는 잃어버렸던 세계와 다시 만날 수 있을 지…… 그만 까마득한 심정이 되어 나는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p.220)

 

자신의 운명을 인정하고 순순히 따를 수 있는 경지에 이르자면 참을 수 없는 고통의 반복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것은 세월의 조탁과정일 수도 있겠다. <도자기 박물관>의 소설 속 인물들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이미 스러진 사랑을 끝내 잊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편지글 형식의 단편 '비가 오고 꽃이 피고 눈이 내립니다'의 주인공은 대학 동아리에서 만나 우연히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던 선배에게 20여년 만에 편지를 보낸다. 그것은 단순히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집착이나 갈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랑의 불꽃을 되살리겠다는 욕망보다는 그 시간에 대한 확인 정도로 그친다.

 

"어쩐지 너무 많은 얘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만 네, 나는 지금 고통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고통은 언어화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그 화염 같은 속내를 고작 말로써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것을 통해서 누군가를 이해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27)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과거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소설 속 인물들이 일견 답답하고 어리석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그런 과정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 '반달'의 주인공은 입대하기 직전 한동안 반목하며 지내던 어머니와 우연한 이별여행을 하게 된다. 제대를 하고 다시 혼자가 된 주인공은 섬이 고향이었던 같은 과 동기를 찾아나선다. 동기는 휴학을 하고 새우잡이 어선을 타고 있었다. 그를 따라 새우잡이 어선을 타게 된 주인공은 선상에서 동성 간의 사랑을 나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그 후 주인공도, 동기도, 어머니도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서로 만나지 못한 채.

 

"삶의 길을 잃고 헤매던 젊은 날이 있었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덧없는 꿈이니 고독한 환상이니 화염 같은 고통이니 하는 말들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렇게 길을 잃었었기 때문에 어쩌면 사랑이 가능했고 가까스로 삶의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내가 알던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말이다." (p.78)

 

반면 표제작인 '도자기 박물관'은 어려운 환경에서 만나 결혼을 한 두 남녀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아내와는 달리 도자기에 미친 사내는 아내를 돌보지 않고 도자기만 찾아 헤맨다. 결국 아내는 죽고 혼자 남은 사내는 지난 시절을 후회한다. 그리고 병중에 있는 아버지의 묫자리를 둘러보기 위해 시골로 내려간 두 형제의 대화로 구성된 '구제역들'의 주인공은 10년 전 헤어진 여성과의 추억을 불러내어 형제간의 반목을 이어나간다. 형이 사랑했던 여인을 동생이 사랑하게 됨으로써 끝내 두 사람과 이별하게 된 여인은 사랑으로 인해 형제의 관계마저 소원하게 만드는 촉매로 작용한다.

 

건강검진을 받는 과정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자의 이야기를 쓴 '검역'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지쳐버린 중년 남자의 이야기이다. 어찌 보면 이 소설집에서 예외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문어와 만날 때까지'는 아내의 계부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아내로 인해 부부관계마저 소원해졌던 주인공 '나'가 삼척 바닷가에 사는 대학 동창의 전화를 받고 동해로 달려가는 이야기이다. 삶은 문어를 안주로 동창과 긴 술자리를 이어가면서 '나'는 정체를 알 수 없었던 문자 메시지를 생각하고 결국 '육 년 전 약속'의 정체와 상대를 기억해낸다. 마지막으로 치명적인 질병을 핑계로 사랑하는 여인 '숙'으로부터 도망쳤던 '통영-홍콩 간'의 주인공 '백'은 그녀와 함께 했던 통영과 홍콩을 마치 순례를 하듯 더듬으며 지난 과거와의 화해를 도모한다. 완강하게 저항하던 숙은 결국 여정의 끝자락에 이르러 백을 용서한다.

 

윤대녕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세월에 순화되거나 소화되지 못한 이야기들이 결국 소설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비극일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도. '우리의 삶이 행복하려면 고통의 순간들도 세월 속에 잘 소화시켜야 하는구나' 하는 것도. 세월에 소화되지 않은 가슴 속 응어리들이 결국 소설이 되고 너와 나의 전설이 되는 삶은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니라는 걸 윤대녕의 소설은 말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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