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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살아보기 - 한껏 게으르게, 온전히 쉬고 싶은 이들을 위한 체류 여행
김남희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12월
평점 :
품절


어떤 이유에서 비롯되었든지 싸움은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상책입니다. 그게 말싸움이든 주먹다짐이든 가리지 않고 말이지요. 싸움이란 결국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안 볼 사람이라면 몰라도(설사 그런 사이라고 하더라도 싸웠던 기억은 오래도록 남게 마련이지만)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보아야만 하는 관계라면 싸움은 더더욱 피해야만 합니다. 예컨대 순간적으로 욱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싸움이 벌어졌다면 가능한 한 빨리 사과를 하는 게 상책이지요. 그러나 일단 저질러진 싸움은 두 사람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앙금을 남기게 마련인 듯합니다. 서로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했다고 할지라도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옛말은 그닥 신빙성이 없는 말인 듯 들립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며칠 전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말싸움을 한 탓에 하루하루가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요. 연휴 다음주라는 특성도 한몫 했겠지만 말입니다. 혼자 잇는 시간에 말싸움을 하게 된 경과를 차분하게 되짚어 보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평상시 같으면 그저 한 번 웃고 지나갈 일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요. 도시에서 산다는 건 마음의 칼끝을 날카롭게 벼린 사람들이 호시탐탐 적을 찾아 헤매는 전쟁터와 같은 삶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요. 불편한 것 투성이인 여행지에서는 마치 다들 배려와 관용의 화신인 양 행동하게 되니 말입니다. 살아 있는 관음보살이라고 해도 믿을 판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다정했던 사람들도 일단 도시의 일상으로 되돌아오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곤 합니다. 여행지에서의 모습은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게 되지요.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 거리의 변하지 않는 풍경 속에는 이 도시 사람들의 변하지 않은 마음도 남아 있을 것이다. 단지 이제 이방인의 눈에는 쉽게 드러나지 않을 뿐. 지금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닫기 위해 이 도시로 돌아왔나 보다." (p.392)

 

저는 이따금 여행과 일상의 중간쯤에서 평생을 살 수는 없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이사하는 것을 그렇게나 좋아한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말이지요. 그가 쓴 에세이 <먼 북소리>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던 것도 그렇게 살 수 있는 작가가 너무도 부러웠기 때문인 듯합니다. 하루키처럼은 아닐지라도 여행작가 김남희의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살아보기>는 저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한 책이었습니다. 작가는 인도네시아 발리의 우붓을 비롯하여, 스리랑카, 태국의 치앙마이, 라오스 루앙프라방 등의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현지인처럼 슬렁슬렁 200일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 책은 그때의 순간을 마치 일기처럼 기록한 '생활여행자' 김남희의 일상입니다.

 

"핸드메이드 라이프를 산다는 것은 시간의 주인으로 사는 일의 은유 같기도 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온전히 몰입해본 사람은 안다. 그때 흘러가는 시간의 속도가 얼마나 다른지를. 발리에서 시간은 넘치도록 충분하다. 선물처럼 공짜로 주어졌다. 이 시간을 잃어버린 내 육체성을 회복하는 시간으로 삼고 싶다." (p.98)

 

제가 이 책을 선택했던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글은 몇 글자 되지도 않고 총천연색의 사진이 '나는 이런 곳도 다녀왔노라' 한껏 자랑하는 듯한 여타의 여행기와는 달리 작가는 현지에서 살면서 자신이 느꼈던 심정을 책에 소박하게 담았기 때문입니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말이겠지만 '인간중심적'이라는 말은 제게 한때 선명한 인상을 남겼던 적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저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마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없던 정도 갑자기 생겨나 그야말로 금방이라도 정이 철철 흘러넘칠 것처럼 느껴졌었지요. 그러던 것이 어느 날 '만약 이 말이 자연의 입장에서 쓰여진다면'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예전의 느낌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폭력적이고 오만한,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말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살고 잇는 이 행성의 아름다움을 꼽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다양한 생명의 공존을 첫 번째로 댈 것이다. 그 무수한 생명체들은 이제 '멸종위기종'이라는 말이 무감각하게 들릴 정도로 빠르게 자취를 감추고 있다. 하루에 한 종의 생명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멸종위기종'이 되지 못해 최소한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저 돌고래들은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p.118)

 

흔한 말로 '차별'과 '다름'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 책이었습니다. 생활의 편리함만을 따진다면 우리나라는 작가가 여행한 그 어느 곳보다도 뛰어날 것이기에 굳이 여행을 떠날 필요는 못 느끼겠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당연한 듯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먼 곳을 찾아갑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읽는 여행에 관한 글도 좋다. 여행을 떠나 길 위에서 읽는 여행에 관한 글도 좋다. 하지만 가장 좋은 건 막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그때 읽는 여행에 관한 글이다. 내 몸에 마지막 도시의 바람 냄새가 남아 있고, 미처 풀지 못한 짐이 한쪽에 쌓여 있고, 배낭에는 먼 도시의 이름을 단 비행기 짐표가 붙어 있고, 돌아왔다는 것조차 알리지 않아 전화는 울리지 않고, 내가 이곳도 아니고 저곳도 아닌, 떠나온 곳과 돌아온 곳 사이에 서 있는 듯한 그런 순간에 읽는 글들." (p.253)

 

오늘은 24절기 중 두 번째 절기인 우수(雨水)라는군요. 따뜻한 남족 나라에 가지 않아도 우리나라에도 곧 날씨가 풀리고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겠지요. 눈이 녹아 비가 되는 이 즈음이면 말이지요. 남과 북은 여전히 쌩쌩 찬바람이 불고 욕심 많은 사람들이 더욱더 부채질을 해대겠지만 계절은 여전히 시기에 맞춰 찾아오려나 봅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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