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든다. 로봇 기술이 날로 발전하면 언젠가는 살인 청부업자가 할 일도 로봇이 대신하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거라고 말이다. 지금도 내가 모르는 세계의 어느 곳에서는 그러한 일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을 지시한 범인은 과연 찾아낼 수 있기나 한 건지, 그리고 로봇에 의한 살인이 돌연사나 미제 사건으로 처리되는 건 아닐지 이런저런 궁금증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로봇을 살인 혐의로 기소할 수도 없는 일이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인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높아진 게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테러와 같은 대량살상이나 대형사고로 인한 인명 손실은 과거에 비해 크게 늘어난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인간의 목숨은 이제 인간의 존엄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명 손실의 뉴스는 이제 그 뉴스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도 전달하지 못한 채 그저 무덤덤할 뿐이다. 이러한 추세로 간다면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어쩌면 로봇에 의한 살인이 보편적인 사회현상으로 자리잡을런지도 모르겠다.

 

김언수의 소설 <설계자들>은 리 차일드의 잭 리처 시리즈를 떠올리게 한다. 소설의 구성이나 배경은 판이하게 다르지만 장르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다는 점에서 리 차일드 못지 않다는 얘기다. 소설은 청부살인을 계획하는 설계자와 암살자,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하나씩 사라져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물론 그들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브로커와 암살자에 의해 살해된 사람의 시신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는 사람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등장한다.

 

"그 이후 수천 년 동안 인류는 오로지 전쟁을 통해서만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었지. 문명이건 예술이건 종교건 하다못해 평화도 말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니? 이것이 인간이란 종이야. 인간이라는 종은 처음부터 서로를 끊임없이 죽이면서 살도록 설계되어 있었던 거지. 살인자의 편에 기생하거나 아니면 상대편을 죽이거나. 그게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지. 인류는 그런 아포토시스로 지금까지 버텨왔던 거야. 그게 이 세계의 참모습이지. 인간은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했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지. 아마,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고. 그것을 멈추는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으니까." (p.212)

 

소설의 주인공인 래생(來生)은 쓰레기통에서 수녀님들에게 발견된 뒤 '개들의 도서관'에서 성장한다. 말하자면 이 도서관의 관장인 '너구리 영감'이 그를 양자로 받아들인 셈이었다. '개들의 도서관'은 일제시대 이래 가장 강력한 암살 청부집단으로 평가받아 왔지만 민주화와 함께 도서관은 암살의 중심부에서 서서히 밀려난다. 이런 와중에 도서관 출신의 유학파 경영인인 '한자'가 기업형 보안 회사를 설립하게 되고 고가의 암살 청부는 모두 '한자'에게 몰린다. 본의 아니게 '한자'와 '너구리 영감'은 동종 업종의 경쟁자가 된 셈이었다. 물론 '개들의 도서관'과 '한자'가 세운 보안 회사는 모두 위장 사업체라고 할 수 있다.

 

"암살 사업의 팽창을 가속화시킨 것은 자신의 정부를 도덕적으로 포장하고 싶은 새로운 권력의 등장 때문이었다. 아마 그들은 "여러분, 안심하세요. 우리는 군인이 아닙니다"라는 표어를 이마에 붙임으로써 국민들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무늬가 어떤 것이든 권력의 속성이란 본질적으로 동일했다." (p.81)

 

소설은 래생이 전직 장군의 암살 설계를 변동하면서 한자의 회사와 너구리 영감의 도서관은 충돌하기 시작하고 이내 걷잡을 수 없는 갈등을 빚게 된다. 래생을 전문 킬러로 길러낸 훈련관 아저씨 '추'는 암살 대상자였던 여자를 살려줌으로써 '한자'의 눈 밖에 나게 되고 결국 그에 의해 살해된다. 래생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던 '추'가 살해되고 가장 친한 친구이자 정보 수집원이었던 정안마저 한자와 한자의 암살자인 이발사에게 살해당하자 래생은 도서관과 별개로 움직이기에 이른다.

 

"정안의 말에 따르면 훌륭한 그림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민첩함, 위장과 잠복 능력, 화려한 변장 기술 같은 것들이 아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애초부터 사람들이 기억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거나 기억을 떠올려도 주목할 만한 특징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p.224)

 

한편, 설계자에게 아버지를 잃은 미토가 설계의 세계를 전복하기 위해 래생에게 접근해오면서 엄청난 사건들이 꼬리를 물며 이어지게 된다. 생각해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이 소설이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입과 입을 통하여 알려지게 된 까닭은 긴박한 사건 전개와 시적인 문장, 여러 인물들의 심리를 그럴 듯하게 그려낸 점, 그리고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번번이 등장했던 의문사가 작가의 상상력과 결합하여 멋지게 재탄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장르소설의 특성상 글을 풀어가는 솜씨는 전적으로 작가의 능력에 달려있음은 물론이다.

 

"맞는 말이다. 누구나 사연이 있다. 너구리 영감도, 추도, 털보도, 미토도, 이발사도 그리고 심지어 한자도 각자의 사연이 있다. 그 사연으로 분노를 키우고, 서로를 증오하고, 또 서로를 죽인다. 모두들 자기 사연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모두들 자신의 상처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당할까?" (p.350)

 

이 소설을 읽고 문득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장자의 일화가 떠올랐다. 어느 날 장자는 커다란 날개를 가진 새 한 마리를 향해 화살을 날리려는 순간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매미가 눈에 들어왔고, 매미를 보느라 활쏘기를 멈추었던 그 순간에 장자는 매미를 향해 다가가는 사마귀 한 마리를 보게 된다. 매미를 노리는 사마귀와 사마귀를 노리는 새, 그리고 새를 잡으려는 자신, 장자는 먹이사슬의 맨 꼭대기에 활을 든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화살을 거두고 숲을 떠났다고 한다. 우리 모두는 어쩌면 설계자인 동시에 그 계획을 실현시키는 킬러이며 또한 그들 사이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가는 희생자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장자가 생각하는 인생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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