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미나토 카나에 지음, 김미령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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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행을 하는 성직자들이 가슴에서 마음 하나를 꺼내어 요리 굴리고 조리 굴리며 한나절 노는 것처럼 소설가들의 눈에도 우리가 볼 수 없는 어떤 세상이 펼쳐 보여지는 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가령 시간과 공간으로 한정된 어느 곳에는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는 여러 이야기가 구름처럼 둥둥 떠다니는데, 어느 소설가가 그중 하나를 골라 잡아 요리조리 살펴보고는 제 맘에 쏙 드는 놈으로 눈먼 독자들에게 선심쓰듯 툭 던져주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기발한 생각들을 소설로 옮겨 쓸 수 있을까. 그것은 아름다운 문장을 신들린 듯 써내려갈 수 있는 얕은 재주와는 사뭇 다르다. 지금껏 그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한 편의 소설로 읽고 있을 때, 나는 그 소설가가 어느 성인처럼 위대해 보이곤 한다.

 

소설가 미나토 가나에를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우연한 기회로 읽게 된 그녀의 작품 <고백>. 추리소설을 그닥 좋아하지 않던 나는 별 기대도 없이 책을 읽었었다. 그러나 내가 소설 속으로 정신없이 빨려들어가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소설의 여운이 어찌나 강했던지 다 읽은 후에도 진한 아쉬움이 남았고 기회가 되면 작가의 다른 소설도 읽어봐야지, 생각했었다. 그랬던 게 어제 같은데 나는 한동안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한눈을 팔게 되었고 미나토 가나에는 까맣게 잊고 지냈었다.

 

내가 오늘 읽은 미나토 가나에의 <속죄>는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와는 판이하게 다른 작품이다. 독자의 시각에 따라 각자 다른 주제를 이끌어낼 수 있겠지만 큰 테두리에서는 몇 가지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살인사건이 목격자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 하는 문제와 폐쇄적인 농촌 집단에서 도시 출신 이방인의 소외, 미성숙한 아이들의 또래집단에서 소통의 부재로 인한 오해와 그 결과 등으로 이 소설의 주제를 요약할 수 있겠지만, 이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은 조용한 농촌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과 그들이 받는 트라우마 정도가 아닐까 싶다.

 

소설은 도시에서 전학온 초등학교 여학생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작가는 <고백>에서도 그랬지만 먼저 살인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보여주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여러 원인들을 작중 인물들의 서술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밝혀나가는 방식을 취한다. 다분히 연역적이다. 인물들의 기억이나 증언은 동일한 질문에 대해서도 서로 다르다. 각자의 증언을 다 들어보기 전까지 우리는 누구의 말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다. 우리의 상상이 서서히 압축되어가는 살인의 실체를 향해 점차 다가감에 따라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작업복 차림의 한 남자에 의해 학교 풀장의 탈의실에서 에미리가 살해된다. 같이 놀던 네 명의 아이들이 그 현장을 목격하였고, 각자의 임무에 따라 흩어졌다. 여린 성격에다 체구도 작아서 자신은 또래보다 어리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에는 살해된 에미리를 지키게 되었고, 야무지고 똑똑하다는 주변의 기대를 받고 자란 까닭에 자신도 늘 그렇게 처신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렸던 마키는 선생님께 알리러 갔고, 곰 같다는 놀림을 받으며 외모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아키코는 에미리의 엄마에게 달려갔고, 지병이 있는 언니 그늘에서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는 유카는 경찰서를 향해 달렸다.

 

네 명의 아이들은 모두 범인을 목격하였지만 그 누구도 범인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했다.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외동딸을 잃은 에미리의 엄마는 사건 해결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했던 에미리의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원망의 마음을 품었고, 에미리가 죽고 3년이 지나 마을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부른다. 그 자리에서 에미리의 엄마는 아이들을 향해 험한 말을 내뱉는다. 범인을 잡거나 속죄를 하며 살라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친했던 아이들은 이제 그 사건으로 인해 소원한 관계가 된다. 그렇게 15년이 흘렀다. 결혼을 하고 남편을 따라 해외로 나갔던 사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을 살해하고 혼자 귀국한다. 선생님이 된 마키는 어느 날 풀장에 칼을 들고 난입한 한 남자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려다가 본의 아니게 그 남자를 물에 빠트려 죽음에 이르게 한다. 에미리가 살해된 것이 자신의 잘못인 양 느끼며 고등학교도 진학하지 않은 채 외톨이로 지내던 아키코는 딸이 있는 싱글맘과 결혼한 오빠가 어린 양딸을 추행하는 것을 보고 오빠를 살해하고 만다. 부모의 사랑에 사랑에 굶주려 있던 유카는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던 언니가 경찰과 결혼하자 에미리의 사건을 신고하러 갔을 때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경찰관을 떠올렸고 결국 유카는 형부의 아이를 임신한다.

 

사건을 목격하였던 네 아이의 삶은 너무도 비극적으로 펼쳐졌던 것이다. 남편을 살해하고 귀국했던 사에는 자신이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경위를 상세히 적은 편지를 에미리의 엄마에게 보내고 또 다른 불행을 예감한 에미리의 엄마는 에미리의 다른 친구들에게 편지를 복사하여 보낸다. 그러나 불행은 사에에게서 그치지 않고 그 네 명의 친구들에게 들불처럼 번진다. 시골 마을로 이사하여 하나밖에 없는 딸을 잃었음에도 어떤 위로의 말도 듣지 못했던 어머니의 증오가 현실에서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듯한 두려움에 에미리의 엄마는 경악한다. 그리고 자신의 딸이 죽게 된 배경에는 젊은 시절에 저질렀던 자신의 잘못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시골마을로 이사갔던 한 가족의 비극이 각자의 오해 속에서 또 다른 비극을 낳은 셈이다.

 

"내 안의 아픔과 어려움을 혼자서 감내하며 키워나갈 게 아니라, 용기를 내어 나 이렇게 아프다고 누군가에게 먼저 말해보는 것, 그래서 타인과 같이 나누고 공유하는 것이 하나의 치유책이 되지 않을까." (p.303, '역자 후기' 중에서)

 

대학을 갓 졸업했을 무렵 지방의 소도시에서 잠깐 살았던 경험이 있다. 그 때 나는 지역민의 알 수 없는 집단적 거부감에 무척이나 놀랐었다. 내게 있는 도시에서의 습관을 버리지 않는 한 그들과 동화되기는 어렵겠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시골 태생인 나도 그럴진대 온전한 도시내기는 오죽이나 힘들까.

 

"그러나 에미리가 이사 오고 나서 할아버지의 말씀을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예쁘고, 스타일 좋고, 영리하고, 운동 잘하고, 손재주까지 좋은 부자. 확실히 불평등하더군요. 에미리와 나 자신을 비교하다 보면 비참해질 뿐이었죠. 하지만 처음부터 갖고 태어난 것이 아예 다르다고 생각을 바꾸면 아무렇지도 않은 게 되죠. 에미리는 에미리. 나는 나. 다른 아이들은 에미리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난 처음부터 에미리를 다른 세계 사람으로서 좋아했어요." (p.133)

 

딸을 잃은 엄마의 증오에 찬 한마디 말은 결국 네 소녀의 운명을 수렁으로 이끌고 말았다. 어쩌면 작가는 이 책에서 불교의 연기설에 바탕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저질렀던 업이 딸에게, 그 딸의 죽음에서 비롯된 증오의 감정이 네 명의 소녀에게, 결국은 그 소녀들의 원망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구조는 약간의 억지스러움이 있지만 어쩐지 으스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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