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인간 - 분석심리학자가 말하는 미래 인간의 모든 것
이나미 지음 / 시공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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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 성당에 가면 미사 중에 신자들끼리 평화의 인사를 주고받는다. 미사를 주재하는 신부님이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면, 신자들이 한 목소리로 '또한 사제와 함께' 한다. 그리고 양 옆과 앞뒤 좌석에 있는 신자들을 향해 서로 가벼운 목례를 하며 '평화를 빕니다. 평화를 빕니다.' 인사를 하게 되는데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이든, 처음 본 사람이든 모두 그렇게 한다.

 

다소 엉뚱하지만 나는 '평화를 빕니다.'라는 인사를 받을 때마다 '고독을 빕니다.'로 해석하곤 한다. 상대방의 발음이 부정확하거나 내 귀가 어두워서 그렇게 듣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귀가 어두워도 '평화'를 '고독'으로 알아들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나는 다만 평화와 고독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갈등이 없이 평온한 상태를 우리는 '평화'라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위험을 느끼지 않는 상태에서의 인간은 '연대(連帶)'의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평화가 지속될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속력은 약해지게 마련이다. 새로운 관계의 추구나 기존 관계의 유지도 느슨해질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한 권의 책을 선물 받았다. 책의 제목은 <다음 인간>. 신경정신과 전문의이자 분석심리학자인 이미나의 신작이다. 딱히 관심이 가는 책도 아니었고, 그닥 재미있는 책도 아닌 듯하여 며칠 동안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랬더니 웬걸, 나에게 책을 준 분과 우연히 마주쳤는데 나보고 다 읽었느냐 묻는 게 아닌가. 뜨끔했었다. 내가 우물쭈물 답변을 흐리자 재미있는 책인데 뭐 그렇게 오래 걸리느냐 타박 아닌 타박을 하셨다.

 

그날 저녁에 나는 책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이 책을 쓴 저자의 의도는 단순했다.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우리 인간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 미래의 인간상인 '다음 인간'은 어떤 모습일지 추측하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에 따른 생활상의 변화 또는 소비패턴의 변화 등 실생활과 밀접한 외부 환경의 변화를 추측하는 책은 많았지만 인간 내면의 변화를 예측하는 책은 상대적으로 적었고 우리의 관심도 뒤떨어졌던 게 사실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미래의 인간상에 대해 다소 비관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요즘 청소년들의 행태만 보아도 충분히 그렇게 예측할 수 있지만 말이다. 예컨대 무감동과 타성에 젖은 사람들, 사이코패스, 관계의 해체, 감정이 부족한 R 세대의 출현, 에볼라 바이러스 같은 전염병의 세계화 등을 예상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음 세대의 인간상을 예측해 보고 문제의 해결책을 함께 고민해보자는 이야기이다.

 

"오늘날 빈부의 격차는 점점 더 심해지고 신자유주의가 세습자본주의로 정착되면서 젊은이들은 패기를 잃었고 노인들은 여유를 잃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기 힘들다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물론 정치나 경제의 구조적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회 구성원들이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도 필요하다." (p.15)

 

그러나 나는 위 대목에서 저자와 의견을 달리 한다. 우리 청소년들에게 발생하는 문제는 어떤 제도나 시스템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물질적 풍요와 평화의 지속에서 오는 문제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삶에 대한 애착이나 결속의 필요성은 결핍이나 생명의 위협이 증가할 때 나타나는 인간 심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는 전쟁이나 기아, 범죄와 질병 등 인간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요소들이 많았다. 이러한 문제는 개개인이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인간 관계의 중요성, 사회 공동체나 국가 공동체를 통한 결속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가족 구성원에 대한 사랑,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에 따른 위험 요소의 감소는 물질적 풍요와 육체적 편리를 가져다 준 반면 적극적인 인간 관계의 도모, 꿈과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열정, 가족 구성원과 국가 구성원에 대한 애정과 감사는 상대적으로 약해지게 된다. 필연적으로 말이다. 먹고 살 걱정이 없는데 굳이 일을 할 필요도 없고, 전쟁의 위협이 없는데 굳이 내 나라를 고집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미디어의 발전은 최소한의 인간 관계를 유지 가능하도록 만들어 준다. 애써 노력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죽음과 종교에 대한 문제만 해도 그렇다. 저자는 종교의 쇠퇴와 종교인의 파산을 예측하면서 통합 종교의 출현도 예고하고 있다. 자살클럽의 증가와 잉여 살해를 돕는 비밀 조직의 등장도 말한다. 이것이 과연 사회 시스템이나 구조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오히려 물질적 풍요, 평화의 지속에서 오는 삶의 '권태'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생명에 대한 위험 요소가 많을 때에는 살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지지만 그러한 요소가 사라졌을 때는 오히려 삶은 따분하고 권태롭기만 한 것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참치를 잡으면 냉동 상태로 반입되지만 냉동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참치를 살려서 들여와야만 했다. 원양어선에서 잡은 참치를 국내에 반입할 때까지 더 많이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던 중 참치 수조에 상어 새끼 한 마리를 넣어 두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참치만 담아 왔을 때는 폐사율이 높았지만 천적을 한 마리 넣어 둠으로 해서 폐사율이 현격히 떨어졌다고 한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칠 수밖에 없었으므로.

 

"미래에 대한 비전은 안팎으로 곤경에 빠졌을 때 포기하려는 나를 격려해주고, 때로는 건강하게 타협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일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다시 시도해볼 수 있게 도와준다. 청사진을 갖고 씩씩하게 무언가를 시작했지만 도중에 크고 작은 실패에 좌절해 자신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싶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은 다시 한 번 자신을 추스리게 만든다. 이것이 이 책에서 미래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펼친 가장 중요한 이유다." (p.238)

 

요즘 아이들에게 결핍이나 생명의 위협을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따금 지구의 어느 곳에서 내전이나 자연재해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기사가 전해지기는 하지만 그것은 개별적이고도 직접적인 죽음은 아니다. '살아야겠다' 또는 '열심히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는 풍요와 평화가 인간의 내면을 심하게 부패시킨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평화를 빕니다'는 인사는 '고독을 빕니다'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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