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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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의 소설 <소소한 풍경>은 작위적이다. 세상의 모든 소설이 작가의 의도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까닭에 소설은 단순히 허구이고, 작위적이라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 안에 거하는 순간만큼은 그에게는 그것이 전부이고 전 우주였던 것처럼 소설을 읽는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때 소설은 직접적인 자신의 삶이자 경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순간 마치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난 것처럼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훤히 꿰뚫게 되거나 의도된 설정이라고 느끼는 순간 소설은 그저 하나의 텍스트이자 영 시시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예컨대 주인공 'ㄱ'이 '남자1'과 처음 조우할 때 같은 운동화를 신었다거나 비오는 날 같은 색의 구두를 신었다는 설정, '남자1'의 여동생이 사고로 죽었다는 설정과 'ㄱ'의 오빠와 어머니 아버지가 모두 사고로 죽었다는 설정은 공감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두 여자('ㄱ'과 'ㄷ')와 한 남자('ㄴ')가 같은 집에서 '덩어리'진 채 사는 모습은 그야말로 어색하다.

 

소설은 주인공 'ㄱ'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남자1'이 등장하고 그와 'ㄱ'은 대학에서 만나 사랑하게 되는 사이다. 'ㄱ'의 오빠가 죽고 연이어 어머니 아버지를 잃은 'ㄱ'과 여동생을 잃은 '남자1'은 끝내 결혼했으나 1대1의 폭력적 사랑을 1년만에 종식한다. 여자 'ㄱ'은 부모님이 살던 소소시의 포도밭이 딸린 외딴집으로 귀향한다. 포도밭 옆에는 다세대 주택이 있고 그곳에서 늘 물구나무를 서던 'ㄴ'을 만난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아버지와 형을 잃은 'ㄴ'은 실어증에 걸린 어머니를 요양원에 맡긴 채 떠돈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ㄴ'은 한동안 어느 보컬 그룹의 베이시스트로 지냈으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들로부터 내쳐진다.

 

'ㄱ'과 'ㄴ'이 외딴집에서 동숙을 시작한 지 얼마 후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에 온 'ㄷ'이 등장한다. 북한을 탈출하면서 아버지를 잃고 'ㄷ'과 그녀의 오빠, 어머니는 중국의 어느 조선족의 집에 흘러든다. 어머니와 'ㄷ'은 그집 주인 남자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한다. 주인 남자의 부인과 딸이 죽자 'ㄷ'과 어머니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ㄷ'은 결국 대한민국의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ㄱ'을 만난다.

 

눈으로 뒤덮인 소소시의 외딴집에서 'ㄱ'과 'ㄴ' 그리고 'ㄷ'은 '덩어리'인 채 또는 각자인 채 겨울을 난다. 'ㄴ'은 우물을 파고 'ㄷ'은 집 안을 광이 나도록 닦으면서. 봄이 오고 'ㄴ'이 판 우물에서 물이 솟고 그들은 이별을 예감한다. 자신이 판 우물에 빠져 죽은 'ㄴ'과 레미콘으로 우물을 메우는 'ㄷ', 그것을 지켜보는 'ㄱ'. 'ㄷ'은 'ㄱ'을 떠나 티켓다방의 여종업원 신분으로 몸을 숨긴다.

 

소설에서는 이야기의 주체가 섞바뀌고 있다. 'ㄱ'에서 'ㄴ'으로 그리고 'ㄱ'의 선생님으로. 줄리언 반스의 소설《사랑, 그리고》에서 모든 등장 인물들이 각자 자신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도 그렇다. 'ㄴ'과 '남자1'은 화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에서는 많은 소제목들이 하나의 상징처럼 등장하기도 한다. 손, 성장, 화석, 모딜리아니, 바르도, 고원지대, 본, 아바타, 묘비명, 아크로칸트사우르스, 베르글라...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을 떠올리게 한다. 각각의 소제목에 붙은 이야기들이 아무런 연관성이 없이 흘러 가는 듯하다가 전체로서 통일성을 갖추는 모습이다. 그것은 마치 색색의 천조가들이 하나로 이어져 멋진 작품으로 재탄생하는 퀼트를 보는 듯한 효과가 있다. 잘 썼을 때는 그렇다는 얘기다.

 

'ㄴ'의 죽음은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따가운 햇살에 살의를 느끼는 '뫼르소'의 충동과 닮아 있다.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죽고 싶고 미치고 싶은 그 모든 감정 말이에요. 희로애락(喜怒愛樂)과 애오욕(愛惡慾)이 요지경처럼 뒤섞인 채 다가와 우리들 마음을 천 갈래로 흩어놓는 것이 봄이잖아요. 그래서 나는 지금 이렇게 생각해요. 모든 건 그날의 햇빛과 천 갈래 봄빛 때문에 비롯됐었다고." (p.221)

 

이 책의 제목인 '소소한 풍경'에 대해 말할 시간이 되었다. 작가는 주인공 각자에게 처음부터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의 풍경으로 존재해야 하고 작가의 의도도 그랬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풍경'은 바라보는 주체와 오브제 사이의 일정한 거리를 전제로 한다. 여기서의 거리는 물리적 거리가 아닌 마음의 간격을 의미한다. 주체의 관심이 객체에 밀착되는 순간 '풍경'은 '사유'로 전환되게 마련이다. 작가 박범신은 그들을 온전하게 '풍경'으로 그려내지 못했다. 하여 '소소한 풍경'은 오히려 '소소한 사유'로 읽힌다.

 

또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소설에서 소제목이 갖는 효과에 관한 문제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에서 작가는 각각의 소제목에 딸린 글들이 다른 소제목의 글들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교묘히 숨기고 있다. 독자는 그로 인하여 각각의 글들을 개별적으로 인식하게 되고 막간의 휴식과 호흡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소소한 풍경>에서 화자 'ㄱ'의 호흡은 너무 가쁘다. 그리고 각각의 글들이 독립성을 유지하지도 못하는 까닭에 독자는 소제목으로 구분된 글들을 단지 단락의 구분쯤으로 인식하게 된다.

 

작가 박범신은 아마도 그동안 자신이 유지해오던 소설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근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도 그랬듯 묘사보다는 사유가 지배하는 소설은 독자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 나이가 들수록 작가는 상상력의 부족을 철학적 사유로 대체하려는 경향이 있다. 분명한 것은 묘사 속에 철학적 사유를 담을 수는 있어도 철학적 사유 속에 묘사를 담는 일은 어색하다. 장롱 속에 집을 담으려는 꼴이다.

 

창작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시도와 모험에 직면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올바른 자세이고 독자에 대한 에의라고 본다. 그러나 철저한 사전 준비와 분석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경력이 화려한 노작가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이 소설에서 불필요한 한자어의 남용도 눈에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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