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덤 라이터스 다이어리 - 절망을 이기는 용기를 가르쳐 준 감동과 기적의 글쓰기 수업
에린 그루웰 지음, 김태훈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여러 책에서 수도 없이 읽었고,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이야기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것을 실천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만일 누군가를 겉모습만으로 평가했다면 최소한 우리는 그 사람에게 무관심하거나 적어도 우리는 그에게 애정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내가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애정을 갖고 있다면 영원히 마음에 상처가 될 그런 가벼운 평가나 편견으로 그 사람을 매도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간혹 자신이 경솔했었다고 뒤늦게 후회하는 사람들조차도 용서를 비는 태도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무례함’ 그 자체인 경우가 많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저 '미안'이라는 말 한 마디 툭 던져놓고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다했다는 투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너무너무 바쁜 상황이었기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아무런 생각 없이 내뱉었던 말은 이미 상대방의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남기고도 남았으리라.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에 있는 윌슨고등학교.  에린 그루웰은 윌슨고의 국어선생님으로 교사활동을 시작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문제아반은 으레 신참에게 가지 않던가.  그루웰 선생님이 맡은 아이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가르쳐야 할 아이들은 보호 관찰 대상이거나 마약 중독 치료중인 아이, 전학 조치를 당한 아이들이 대부분인 203호 교실이었다.  인종차별과 무자비한 폭력, 이유도 없이 희생당하는 아이들, 단 한 사람도 믿고 의지할 수 없는 현실에서 자신의 목숨은 스스로 지켜야만 했던 아이들, 그리고 그 모든 것으로 인한 숙명적인 가난과 체념.  이 책은 그 모든 악조건 속에서 희망의 빛으로 나아가는 학생들과 그들을 지도하는 그루웰 선생님이 직접 쓴 142편의 릴레이식 일기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졸업장보다 죽음이 더 가까웠던 아이들을 위해 그루웰 선생님이 고른 네 권의 책은 <안네 프랑크-어느 소녀의 일기>, <즐라타의 일기-어느 사라예보 소녀의 삶>, 그리고 토드 스트라서의 <파도>와 엘리 비젤의 <밤>이었다.  해가 바뀌어 <호밀밭의 파수꾼>과 <컬러 피플> 등 다른 책이 포함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책의 저자나 관련 인물을 초청하여 강연을 듣고, 때로는 박물관을 견학하거나 후원자인 매리어트 호텔에서 가족 초청 만찬을 하는 등 그루웰 선생님의 수업 방식은 다른 선생님의 그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차츰 변하기 시작했다.  1994년 봄학기부터 1998년 가을학기까지 아이들과 그루웰 선생님이 쓴 릴레이식 일기는 우리가 왜 불의에 저항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보여준다.

 

"다시 또 다른 친구의 무덤 앞에 꽃과 담배가 놓여졌다.  요즘 전사들이 너무 많이 죽거나 감옥에 가고 있어서 조만간 재모집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정말 까다롭게 뽑아야 한다.  전사는 유능해야 하고, 기꺼이 총을 쏘거나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거기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    (p.53)

 

자유와 꿈의 나라 미국!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행되는 폭력과 인종차별, 마약과 알콜 중독, 성폭력과 인간 소외는 아이들의 시각에서 전쟁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언론과 기성 세대는 그렇게 인식하지 않는다.  하루하루를 공포와 절망감 속에서 사는 아이들과는 달리 그 누구도 미국의 치부를 드러내고 문제의 심각성을 고발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아이들만의 문제일 뿐이다.  그루웰 선생님은 아이들 편에서 생각하고 그들의 문제를 공유하려 했다.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었던 아이들은 비로소 닫혔던 가슴을 열고 악에 저항하며 관용의 정신을 배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합리와 폭력의 악순환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우리들의 체념이 아이들을 통해 가능성으로 전환되는 시점이다.

 

"오늘 나는 그루웰 선생님에게서 진정으로 주체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운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실천하며, 변명만 해서는 성공할 수 없고, 역경은 탓할 것이 아니라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선생님의 말대로 장애물은 자신이 극복할 때만 장애가 된다.  쇠사슬의 강도는 가장 약한 고리에서 결정되듯이, 진정으로 주체적인 사람은 자신의 약한 부분을 찾아 단련한다.  앞으로 나도 주체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p.241)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이 책은 <굿 윌 헌팅>이나 <죽은 시인의 사회> 또는 <언제나 마음은 태양>에서 보여지는 훌륭한 교사상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불의에 저항하고 아이들을 진심으로 위하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루웰 선생님의 교육 방식은 전적으로 독서와 글쓰기, 견학과 강연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책을 극도로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심어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자기 비하와 자기 부정이 일상화된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훈련시킨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아이들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4년 전, 누군가 그루웰 선생님이 한 달 이상 버틸 거라고 말했다면 아마 대놓고 비웃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절대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모두들 퇴학당할 거라고 생각했던 우리는 이제 대학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 같은 불량학생들이 졸업생이 될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4년 뒤면 졸업생이 된다.  우리의 이름은 콜럼비아 대학, 프린스턴 대학, 스탠포드 대학, 심지어 하버드 대학의 졸업생 명부에 실릴 것이다."    (p.514) 

 

부와 물질적 안락만을 좇아 경쟁의 덫에 꼼짝없이 갇힌 우리의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우리나라 공교육에 대한 불신과 화를 억누르지 못한다.  게다가 우리 기성세대는 자신들의 잘못이나 현 체제의 불합리성을 비판하는 젊은이들에게 미안해하거나 반성은커녕 그들 모두를 '좌빨', '종북'으로 매도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것이 옳다고 주장한다면 우리의 교육은 그야말로 체제에 순응하고 잘못을 외면하는 '인간사육'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들과 대화를 해보면 80-90%의 아이들이 현재의 제도와 정책 방향에 부정적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자녀들 모두가 종북이고 좌빨이란 말인가. 프랑스의 작가 카뮈는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저항이다"라고 했다.  삶의 부조리성과 무의미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불의에 대한 저항은 그 사회가 건강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며칠 있으면 '스승의 날'이다.  위선과 편견, 폭력과 불의에 저항하고 관용의 정신을 일깨울 수 있는 진정한 스승이 그립다.  체제에 순응하고 불의를 외면하는 그런 젊은이는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형제로 같이 사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바보로 같이 죽게 될 것이다.'라고 했던 마틴 루터 킹의 한마디는 분열된 우리 사회에 던지는 경고의 메시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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