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라이프 - 우리가 꿈꾸는 또 다른 삶
쓰지 신이치 지음, 김향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기름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요즘, 친구들 사이에선 차를 팔아야겠다는 말을 심심찮게 듣게 된다.  물론 그 말을 실천으로 옮기는 친구는 거의 없지만 다들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과연 지금 시점에서 석유가 고갈되면 어떻게 될까?"  
모든 공장이 문을 닫고, 전기마저 끊긴 암흑세계에서 나는 살아날 수 있을까?
나는 농사 지을 줄도 모르고, 먹거리를 생산할 텃밭도 한 뙈기 없는데 무엇으로 내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 공포감이 밀려온다.  나와 내 가족의 생명과 안전을 나는 그 무엇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의존도는 얼마나 되는지...  단 한 번도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성공'이나 '부'로 대변되는 환상에 사로잡혀 오늘도 나는 내 삶을 즐길 여유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이규(李珪)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한국계 일본인이다.
코넬대학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메이지가쿠잉대학 국제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전 세계적으로 환경운동과 문화운동을 하는 한편, 환경공생형 비즈니스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는 영어에도 존재하지 않는 슬로 라이프(slow life)라는 말을 처음으로 세상에 퍼뜨린 인물이기도 하다.  저자는 경제, 문화, 환경, 정치, 먹거리 등 다양한 분야의 키워드를 주제로 자신의 생각과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며 독자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그것은 강제적이거나 강압적이 아니며 어떠한 규칙도 제시하지 않는다.  이 새롭고 평화롭고 친환경적인 삶을 디자인해 나가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돈과 직결되지 않는 모든 것을 잡일, ,잡담, 잡생각, 잡지, 잡념, 잡음 등으로 표현하며, 그런 일들을 천시하거나 터부시하여 왔다.  오직 효율성과 '빨리빨리'라는 속도에 나 자신을 맞추고 끝없는 경쟁구조로 내몰았던 것이다.
상대가 자연이든 사람이든,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리게 하는 일에 점점 더 서툴러지고 있다.  요컨대 함께 살아가는 일에 점점 더 서툴러지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왜냐하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기다리고 또 기다려주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는 지금 남을 사랑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기다림을 뺀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P.55)
더글러스 러미스가 주장하듯 경쟁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기본적인 정서는 공포심이다.  뒤쳐질지 모른다는 공포, 급기야는 낙오되어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우리는 언제나 그 대열의 앞에 서야 하는데 그  줄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정황조차 없는 긴박함과 절박함을 갖추어야만,  사람들은 비로소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일주일 생활비가 10달러에서 30달러로 바뀌는 것을 진보라 여겨 왔던 이유는 이러한 공포를 이용한 개발의 논리가 대중을 세뇌시켰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인구는 점차 줄어 가는데 1년에 몇십 만 채의 아파트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현상을 보면서도 아파트값이 매년 오를 것이라는 환상과 함께 그 대열에 참여하지 못하면 낙오자로 전락할 것이라는 공포를 심어주는 것은 성장을 지향하는 기업과 국가의 얄팍한 눈속임이다.   아무런 까닭도 모른 채, 우리는 그들의 논리에 잘도 이끌려 단문형 냉장고를 양문형 냉장고로 바꾸고,  일반 세탁기를 드럼세탁기로 바꾸며 살아 왔다.  우리의 정원이자 텃밭인 그린벨트를 해제하고, 수십만의 빈곤층이 생성돼도 GDP는 성장하고, 범죄와 질병이 증가해도 성장은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러한 성장 논리의 세뇌에서 벗어날 시점이 되지 않았을까?  경제학자 슈마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술은 인간이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법칙과 원리로 발전해 간다.  반면 자연계는 성장과 발전을 '언제, 어디서 멈출 것인가'를 알고 있다.  자연계의 모든 것에는 킈,빠르기,힘의 한도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 일부인 인간도 자연계 안에서는 균형, 조화, 정화의 힘이 작동동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기술이라는 것은 크기,빠르기,힘을 스스로 제어하는 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거기에는 균형, 조정, 정화의 힘이 작동하지 않는다. (P.123)
요즘 아이들의 교육을 보면서 무서움을 느낄 때가 있다.  전에는 한 분야만 잘해도 그럭저럭 밥벌이는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학습 분야가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어쩌면 인간의 능력이나 한계를 초과하는 범위로 확대되었다는 느낌마저 지울 수 없다.  성장의 논리로 따진다면 인간은 이미 그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오직 자신의 능력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어쩌면 협동과 조화를 상실한 현대사회의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세계의 시간 틀은 둘로 나뉜다.  첫째는 지구와 생물의 생태적인 시간의 틀, 거기에는 지구의 역사와 함께 발맞추어 온 생물 진화의 원대하고도 유장한 시간의 흐름, 개개 생명의 삶과 죽음의 사이클 등이 포함된다.  둘째는 산업이나 상업 등의 경제적 시간의 틀이다.  비즈니스는 속도를 다투고 변화를 좋아한다.  거기에는 가속화의 끊임없는 변화, 무한한 성장이 철칙이다.  이에 반하는 자는 그에 따른 제재를 받게 된다.  이것이 현대 세계의 지배적인 시간의 틀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P.199)
'녹색 성장'이라는 슬로건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자연 환경과 생태계의 보호나 개선을 의미하는 '녹색'과 경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성장은'절대 같이 어울릴 수 없는 상반된 개념이다.  여기에는 그럴 듯하게 포장된 속임수만 존재한다.  결국 녹색이냐 성장이냐는 선택의 문제이지 공생이나 조화의 문제는 될 수 없는 것이다.
가끔 사람들은 불가능한 것조차 광고라는 프랑켄머쉰에 들어갔다 나오면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곤 한다.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며 기다림 속에는 길게 이어지는 다양한 상념, 근원적인 어떤 것으로의 지향, 그 궁극적인 소실점에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와 마주하게 된다.
이 필연적인 상념의 터널을 통과하는 행위, 그 자체가 바로 '삶'이다.  우리는 지금도 기다림의 긴 터널을 '설레임'과  동반하여 천천히 걸어나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