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4/유하

    불의 뷔페

 소망교회 앞, 주 찬양하는 뽀얀 아이들의 행렬, 촛불을
들고 억센 바람 속으로 걸어간다 태초에
불이 있나니라, 이후의-

 칠흙의 두메 산골을 걸어가다 발견한,
그 희미한 흔들림만으로도
반갑던 먼 곳의 등잔불이여

 불빛을 발견한 오징어의 눈깔처럼
눈에 거품을 물고 돌진 돌진

 불 같은 소망이 이 백야성을
만들었구나, 부릅뜬 눈의 식욕, 보기만 해도 눈에
군침이 괴는, 저 불의 뷔페 色의 盛饌을 보라
그저 불밝히기 위해 심지 돋우던 시절은 지났다

 매서운 한강 똥바람 속,
촛불의 아이들은 너무도 당당해 보인다
그들을 감싸고 있는 이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수정 샹들리에이므로

 風前燈火, 불을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
이젠 바람도 불과 함께 놀아난다
휘황찬란 늘어진 샹들리에 주위에 붙은 똥파리

 불의 소망 근처에서
불의 구린내를 빠는 똥파리의
윙윙 날개 바람

 바람 속으로 빽이 든든한
촛불들이 기쁘다 구주 기쁘다
걸어간다, 보무도 당당히, 오징어의 시커먼 눈들이
신바람으로 몰려가는, 불의 뷔페 파티장 쪽으로


 봄바람이 제법 거세게 불었다.
지금은 영화감독이자 대학 교수가 된 시인 유하의 시가 생각나는 그런 날씨.
서울에 살지 않으니 한명회의 정자가 있었다는 압구정동의 거리를 걸을 수는 없겠다.
바람따라 가슴이 휑한 탓일까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아 이책 저책 책장만 넘기다가 얕으막한 동네 뒷산을 올랐다.
눈 녹은 물이 산길의 낙엽 밑으로 흐르고.....
물기 머금은 낙엽이 자신의 마지막 존재를 알리려는듯 낙엽 내음이 진동한다.
바람에 해묵은 솔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고, 놀란 산새가 홰를 치는 오후.
인적이 끊긴 산길을 그렇게 홀로 올랐다.
오늘처럼 바람 부는 날에는 잊혀진 첫사랑의 기억도 마냥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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