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살았던 날들 - 죽음 뒤에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에 관하여
델핀 오르빌뢰르 지음, 김두리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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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살았던 날들' 리뷰 대회

숱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더러 있다. 기억 속을 아무리 헤집어 봐도 같거나 비슷한 것을 도무지 찾을 수 없어 매번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하게 되는 순간순간들. 삶과 죽음이 갈라놓는 상실의 고통이 그렇다. 나이가 들수록 상실과 애도의 경험은 가파르게 증가하지만 그에 반비례하여 차츰 고통이 줄어들거나 마음에 굳은살이 박이는 것도 아니어서 상실의 고통은 언제나 처음. 무작정 아픔. 그리고 넋을 놓게 되는 여러 날들. 가슴에 뚫린 커다란 구멍으로 불어오는 휑한 바람과 휑뎅그렁하게 변한 세상. 이어지는 회한과 자책. 그 모든 게 언제나 처음처럼 하나도 빠짐없이 되풀이된다.

 

지난해에도 나는 장인어른을 그리고 몇 달 뒤에는 어머니와 작별했다. 그럼에도 나는 두 분 모두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당신 스스로 죽음을 직감했던 장인어른은 삶의 마지막 1주일을 남겨 두고 병원에 입원하셨다. 곁에 있는 여러 가족들을 힘들게 하기 싫다는 게 입원에 대한 당신의 정당성이었다. 어머니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약간의 치매 기운이 있으셨던 어머니는 요양병원 생활을 1년쯤 이어오고 있었다. 대면 면회가 금지되는 코로나 시국의 자식들은 이따금 걸려오는 어머니의 전화에 건성건성 답을 하거나 병원 관계자로부터 전해 듣는 어머니의 근황은 마치 남의 일처럼 가벼웠다. 그렇게 나는 회한과 자책 속에서 두 분을 보내드렸다.

 

"아무도 죽음에 대해 말할 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이 죽음에 대해서 내릴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정의일 것이다. 죽음은 말을 벗어나는데, 죽음이 정확히 발화의 끝에 도장을 찍기 때문이다. 그것은 떠난 자의 발화의 끝일 뿐 아니라, 그의 뒤에 살아남아 충격 속에서 늘 언어를 오용할 수밖에 없는 자들의 발화의 끝이기도 하다. 애도 속에서 말은 의미작용을 멈추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것이 더이상 없음을 전하는 데에만 종종 쓰일 뿐이다."  (p.139)

 

직접 목격하지 않은 죽음은 언제나 비현실적이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생전에 쓰던 유품 하나하나가 영원히 주인을 잃고 곧 버려질 운명에 처했다는 걸 인정하기 어려운 것도 바로 그런 데서 비롯된다. 사라졌던 주인이 내일이라도 당장 자신이 쓰던 물건을 찾아 집안 곳곳을 헤집고 다닐 것만 같은 것이다. 현대인의 죽음은 늘 이런 식이다. 삶과 죽음이 집과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 벌어지지 않기에 죽음을 맞는 사람도, 살아서 고인을 추모하는 가족도 죽음은 늘 엉겁결에 일어나는 일이며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후에나 현실의 틈새를 비집고 겨우 제 자리를 찾아가는 어떤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죽음을 배운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다. 단 두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모세처럼 돌아서 미래를 본다는 조건하에서 가능하다. 미래는 우리 앞이 아니라 우리 뒤에, 우리가 막 오른 산의 흙 위에 새겨진 우리 발자국에 있다. 그 흔적 속에서, 우리를 뒤따를 사람들과 우리 뒤에 살아남을 사람들이 우리가 아직 거기에서 볼 수 없는 것을 읽을 것이다."  (p.221~p.222)

 

델핀 오르빌뢰르가 쓴 <당신이 살았던 날들>은 프랑스의 세 번째 여자 랍비로서 작가가 대면했던 여러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랍비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손녀인 그녀는  랍비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손녀인 그녀는 이 책에서 원리주의에 희생당한 「샤를리 에브도」의 정신과 의사 엘자 카야, 그와 생전에 ‘죽음’과 ‘공포’를 주제로 서신을 교환했던 의사 마르크, 아우슈비츠에서 함께 살아남아 생의 마지막까지 특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시몬 베유와 마르셀린 로리당, 자식에게조차 자신의 삶을 설명할 방법이 없어 끝내 침묵 속에 눈을 감은 홀로코스트 생존자 사라, 늘 같이 놀던 동생 이사악이 어디로 갔는지, 어디에서 그를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해하는 어린 형, 병마에 시달리며 예전과 같은 ‘나’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진 친구 아리안과 그 끝을 예감하면서도 친구 곁을 지킨 오르빌뢰르 본인의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유대교는 성직자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랍비가 수행하는 모든 일은 원칙적으로 다른 누군가에 의해 실행될 수 있고 발화될 수 있다. 랍비는 공동체로부터 학식을 인정받고 그들의 지도자로 선택된 사람일 뿐이지 절대, 그나 그녀는 하느님과 인간을 매개하는 자가 아니다."  (p.116~p.117)

 

물리학에서 일컫는 '열역학 제2법칙' 다른 말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의하면 우리 몸의 세포 배열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헝클어지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이 지극히 자연스럽다는 말씀.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죽음이 불쑥 우리 집 문턱을 넘었을 때의 고통과 비애는 물리학 법칙만으로 말끔하게 설명할 있는 어떤 대상이 될 수 없다. 죽음이 있음으로 해서 각자의 삶은 유일하고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와 같은 명제만으로 유족의 슬픔을 모두 위로할 수도 없다. 죽음 앞에선 이따금 악의 없이 뱉은 말이 커다란 상처가 되어 누군가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도 끝내 발화하지 못한 채 뒤돌아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쭙잖은 말이 상처로 남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죽음은 삶의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조용하고 편안한 의식이 아니다. 이름도 모르는 의료인의 체계적이고 냉담한 손길에 의해 인도되는 하나의 절차일 뿐이다. 더구나 팬데믹과 같은 대규모 상실의 시대에 각각의 죽음은 개별적인 슬픔으로 위로되지 않는다. 큰 슬픔으로부터 쪼개진 하나의 파편화된 슬픔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체온이 변하지 않는 한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슬픔 역시 차갑게 식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당신이 살았던 날들>을 읽었던 우리도 역시 예전보다 죽음에 좀 더 익숙해진 것도 아니고, 상실의 고통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 더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넬 자신이 생긴 것도 아니고, 삶과 죽음에 대한 숱한 질문에 명징한 해답을 제시할 만큼 해박한 지식을 갖추게 된 것도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누군가가 살며 사랑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같이 슬퍼하면서 나아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예전보다 덜 외롭다고 느낀다. 그것만으로도 가슴 한켠이 따뜻해진다. 책이란 모름지기 그런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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