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꾸는 존재에게
은유 지음 / 서해문집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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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감성도 시시각각 나이를 먹어간다는 걸 느낀다. 젊어서는 잘 몰랐었는데 과거에 썼던 글과 최근에 내가 쓴 글을 비교하며 읽어보면 푸석푸석 메마르고 물기가 빠진 듯한 인상을 받곤 한다. 물기가 빠진 피부가 쭈글쭈글 탄력을 잃고 허옇게 각질이 피어나는 것처럼 물기가 빠진 문장 역시 뭔가 활력을 잃고 시들시들 메말라 가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시를 읽지 않는 데서 오는 '정신적 나이 듦'이 원인일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12년 전이다. 2008년 11월 개인 블로그에 '올드걸의 시집'이란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생활에서 자라나는 감정에 시를 덧대어 한 편 두 편 글을 올렸다. 돈을 벌거나 책을 내려고 쓴 게 아니라 속을 달래려고, 일이 버거워서, 어쩌면 쓴다는 의식도 없이 쓴 글들이다. 생애 가장 눈물 많던 시절이다. 몸의 우기雨期를 지나며 썼던지라 자기 연민이 과했지만, 돌이켜보면 그때가 글과 삶의 거리가 없었던 유일한 시절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에 가장 고통 없이 글을 썼던 것이다." (p.5~p.6)

 

작가는 '고통 없이 글을 썼다'고 하지만 사실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은 서로 상쇄되는 효과가 있는 까닭에 우리는 때로 정신적 고통을 잊기 위해 육체적 고통을 짊어지기도 하고, 육체적 고통을 덜기 위해 정신적 고통을 자원하기도 한다. 글쓰기를 통해서 말이다. 이를테면 정신적 고통이 심한 경우에 밤잠을 줄여가며 누군가의 글을 필사하거나 자신의 블로그에 두서도 없는 글을 수십 편 쓰다 보면 정신적 고통은 이따금 잊혀지기도 하고, 콩알만큼 줄어든 고통을 지긋이 바라볼 수 있게도 된다. 반대로 육체적 고통을 정신적 고통으로 치환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는 것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목격하곤 한다. 죽음을 눈앞에 둔 말기암 환자가 글을 쓰는 이유도 그러한 까닭이지 않을까 싶다.

 

"삶은 천연덕스럽고 시는 몸부림친다. 시가 뒤척일수록 삶은 명료해진다. 삶이 선명해지면 시는 다시 헝클어버린다. 나는 시라는 말만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가슴 아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좋은 시를 읽으면 자동인형처럼 고개가 올라간다. 가슴에 차오르는 것을 누르듯이 책장을 덮는다. 방 안을 한 바퀴 돌고 나서야 다시 시 앞에 앉아 베껴 쓴다. 그러고 나면 어김없이 글쓰기 충동에 시달렸다." (p.19)

 

우리는 과연 어떤 나이에 철이 들고 어떤 나이에 삶은 더 익숙해지는가, 생각할 때가 있다. 어쩌면 우리의 전 생에 그런 나이는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우리는 배부르게 나이만 먹은 슬픈 어린애로 생을 마감하게 될 터인데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다만 시나브로 우리의 삶이 그 기한을 줄여가면 갈수록 우리의 영혼 또한 더욱 단단해지고 풋밤처럼 영글었으면 좋겠다. 그러자면 시를 읽어야 한다. 나이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 정신의 부활을 위해서라도 시집 한두 권쯤 곁에 놓아야 한다. 육체적 젊음을 회복하기 위해 수술을 하고, 보톡스를 맞고, 몸에 좋다는 온갖 것들을 찾아 헤매는 것처럼 영혼의 젊음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그보다 더한 노력을 실천해야 할지도 모른다. 백석의 시집을, 이성복의 시를, 최승자의 시를...

 

"엄마의 기일이었다. 돌아가신 지 3년이 흘렀다. 긴 시간이었다. 여자에게 엄마의 죽음은 아이의 출산에 버금가는 중요한 존재 사건이다. 엄마의 죽음으로 나는 한 차례 변이를 경험했다. 세상을 감각하는 신체가 달라졌다. 삶이라는 것, 그냥 살아감 정도였는데, 엄마를 통해 죽음을 가까이서 보고 나니까 '삶'이라는 추상명사가 만져지는 느낌이었다." (p.127)

 

육체의 주름을 없애기 위해 보톡스를 맞는 것처럼 영혼의 방부제 역할을 하는 게 시일지도 모른다. 시는 영혼의 방부제인 동시에 삶의 고통을 잊게 하는 영혼의 진통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작가가 시를 놓지 못했던 까닭도 그와 같았으리라. 자신의 영혼을 젊게 유지하고, 삶의 고통을 온전히 잊게 하는 것,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은 결국 마법과 같은 시의 힘이다. 시로 인한 영혼의 성장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기적과 같은 '도약'이 아니라 하루하루 차곡차곡 쌓여가는 '축적'이었음을 은유 작가를 통해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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