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사람과 눈사람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약자에 대한 지지와 연대가 매번 감사와 칭찬의 말로 되갚아지는 건 아니다. 돈과 시간이 남아돌아서, 또는 남들이 모르는 다른 목적이 있어서 하는 행동으로 오해받을 때도 더러 있고, 그보다 더 큰 루머나 험담 수준의 말을 듣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른바 동기의 순수성이나 열성을 의심받게 되는 것인데 오해를 받는 당사자는 속마음을 까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 되고 만다. 사람 사는 곳이니 그만한 오해는 참고 감수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더 큰 오해를 살지라도 억울한 건 낱낱이 드러내고 풀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러한 판단이 쉽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다.

 

임솔아의 소설집 <눈과 사람과 눈사람>에는 표제작을 포함한 여덟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그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끌었던 작품은 단연 표제작인 '눈과 사람과 눈사람'인데, 소설에 등장하는 나와 영혜, 지원, 민조, 규미는 우연한 기회에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표했다가 생각지도 못한 오해와 불신을 받게 된다. 그 시작은 이랬다. 재작년 가을부터 알려지기 시작한 나래씨의 블로그에 올라온 글을 읽고 다른 사람들처럼 공감 버튼을 누르고 '연대합니다'라는 댓글을 남기곤 했는데, 어느 날 자신이 모든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는 호소와 함께 누구라도 함께 일하지 않겠느냐는 나래씨의 요청 글에 죄책감을 느낀 사람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집회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집회에 참가했던 사람들 중 몇몇은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하고, 고소 위협을 받는 사람도 있었고, 가해자를 법정에 세우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연대에도 자격이 있겠지요. 우리에겐 그 자격이 없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봤어요. 나래씨는 성폭력 피해자였고 앞장서서 싸워왔어요. 나래씨는 피해자들의 싸움에 우리가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고 받아들인 것 같아요. 고통받아본 적도 없으면서 남의 고통마저 약탈해서 정의로운 척하는 족속을 보듯이 우리를 본 것 같아요. 우리가 정말 그런 사람들일까요?" (p.183)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와 연대에 동참하면서부터 진천에서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하는 게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지원은 산책을 할 겨를이 없어졌고, 영혜는 십 년 넘게 키워온 화분들을 죽였고, 규미는 삼 개월 동안 이삿짐을 풀지 못했고, 아토피를 앓는 어린아이를 키우는 민조는 아이가 불안증세를 보인다고 했다. 성폭력 피해자 중 한 명이 자살 시도를 했을 때 영혜가 백만 원이 넘는 병원비를 카드로 결제했을 때 인터넷에서는 영혜가 으스대며 카드를 내밀었다는 둥 거액을 쉽게 결제하는 모습에서 없는 자의 소외감을 느꼈다는 둥 성폭력 피해자와 연대하는 일도 있는 자들이 차지한다는 둥 여러 안 좋은 이야기들이 떠돌았다. 그 모든 피해를 속절없이 견딜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받은 피해를 속속들이 밝히면 그것을 빌미로 성폭력 가해자들의 공격이 이어질 수도 있는 까닭에.

 

소설에는 새해 첫날을 낀 연휴 동안 지원이 사는 진천으로 여행을 가는 내용이 그려진다. 아이를 돌봐야 하는 민조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나와 영혜, 규미 그리고 지원은 각자의 노트북을 통해 영상 채팅을 한다. 나래씨의 블로그에 올라온 입장문은 연대하는 사람들로부터 피해자가 착취당하고 이용당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입장문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은 나와 영혜, 지원, 규미, 지원이었다. 그들이 모인 목적은 이 일에 대해 다 함께 모여 이야기를 모으다보면 글로 정리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일일수록 항상 그 현장에는 자기 밥그릇을 채우려는 은밀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도 함께 있었다. 재래시장에서 기념사진만 찍고 떠나가는 정치인처럼 행동하는 사람들도 보았다. 조금씩 마음을 보태는 사람부터 현장에 상주하며 함께 싸우는 연대자, 그리고 피해 당사자까지, 이 모든 이들이 백 퍼센트 순결하지 않은 경우를 사람들은 용납하지 않았다." (p.194~p.195)

 

우리는 현실에서도 그와 같은 경우를 자주 목격한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난민이나 성폭력 피해자 연대에서... 그런 오해와 불신, 갈등과 법적 다툼에 의해 연대는 깨지게 마련이고 사람들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만 남는다.

 

"한 사람이 뭉친 눈에 다른 사람이 뭉친 눈을 더했다. 쪼그려앉아 눈덩이를 굴렸다. 두 손으로 눈덩이를 토닥이고 다시 굴렸다. 넷이서 눈덩이를 들어올렸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눈덩이 위에 우리가 만든 눈덩이를 올려놓았다. 영혜가 눈밭에서 솔방울을 찾아왔다. 지원은 나뭇가지를 주워왔다. 나와 규미는 돌멩이를 찾아왔다. 이목구비를 만들고 두 팔을 만들었다." (p.199)

 

소설의 마지막엔 네 주인공이 눈사람을 만드는 장면이 그려진다. 약한 사람들의 연대는 결국 흩어진 눈송이를 모으고 손으로 다진 작은 눈덩이를 굴려 더 큰 눈덩이를 만들어 눈사람으로 세우는 일과 같다는 것을 일깨운다. 약한 자들의 바람막이가 되기 위한 연대가 오히려 서로 간의 불신과 반목 속에서 쉽게 깨지는 경험이 반복되면 될수록 연대의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진다는 이치를 작가는 독자에게 말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향하는 연대와 지지를 결코 철회하지 못한다. 그것은 어쩌면 태곳적부터 이어져온 연대의 DNA가 아닐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