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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전작과 매한가지로 일상의 언어, 입말이 아니므로 젠체하려 한다는 곡해가 생겨서는 안 된다. 예리한 날붙이는 여기서도 무뎌지지 않았다(다소 과잉된 해석일지라도). 그는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훤히 비추고 노출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디지털 통제사회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며, 그것은 '자유를 집중적으로 활용'한다고 말한다. 디지털 통제사회는 자유를 빨아먹고 산다고 말이다. 그러고는 투명(성)과 불투명(성)을 언급하며 훔볼트를 불러온다. 「그 누구도 어떤 말 속에서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것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 모든 이해는 언제나 몰이해이기도 하며 생각과 감정의 모든 일치는 동시에 분열이기도 한 것이다.」 오직 정보로만 이루어진 세계, 정보의 원활한 유통이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불리는 세계는 기계와 유사하다.(p.16) 그러므로 당연히 정보의 많고 적음은 그것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척도가 될 수 없으며, 모든 것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극장지배(theatrokratie)는 액체 민주주의(liquid democracy)와도 닿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수시로 사회에 참여하려는 개개인은 투명성/투명함을 요구한다. 그의 말대로 과잉 긍정의 세계에서는 '좋아요'만 있을 뿐, 눈을 씻고 보아도 '싫어요' 따위 존재하지 않겠지만(존재할 수 없다)ㅡ 물론 이러한 긍정사회는 '투명사회'라는 전체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그에 의하면 시각의 빈틈이 없는 사랑은 포르노이며 지식의 빈틈이 없는 사유는 사유가 아니라 계산적인 것에 불과하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투명사회 = 포르노적 사회>를 성립케 한다. 순수한 투명성/투명함이든 거짓된 투명성/투명함이든 ㅡ 표(表)와 리(裏)가 구분지어지든 말든 ㅡ 사람들은 투명이라는 단어 앞에 이면을 생각지 않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미지의 증가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가 되라는 강압에 있다. 모든 것이 가시화되어야 한다. 투명성의 명령은 가시화의 압력에 순응하지 않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 그 점에서 투명성은 폭력적이다.
ㅡ 본문 p.35
그가 인용하는 헤겔의 논의는 이렇다. 사유에는 일정한 부정성이 내재하는데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사유는 자신을 변모시키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스스로 달라진다는 부정적 특성은 사유를 구성하는 본질적 측면으로서, 단 하나의 인식이 기존의 인식 전체를 의심스럽게 만들고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ㅡ 히친스처럼 회의를 품으라 ㅡ 「정보에는 이러한 부정성이 결여되어 있다.」 투명사회는 시인이 없는 사회이며 유혹도 변신도 없는 사회다.(p.81) 그는 시인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연극적 환상, 가상의 형태, 제의적, 의식적 기호를 생산하는 자, 적나라한 사실에 예술작품, 반(反)사실을 맞세우는 자. 그렇다면 나는 아이웨이웨이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가 현실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생산적인 현실이다. 우리는 현실이지만, 현실의 일부라는 것은 우리가 또 다른 현실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아이웨이웨이』, 미메시스, 2011) 그러면서 한병철은 가상 세계의 무중력적 긍정성에 맞서 이번에는 하이데거를 인용한다. <'숨지 않은 것'은 어떤 '숨음'에서 뜯어낸 것>이다.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바로 신뢰가 사라진 상황에서 높아지는 것이므로ㅡ 이로써 신뢰의 줄어듦은 또 다른 형태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를 양산해낼 수 있음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