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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분노하지 않는가 - 2048, 공존을 위한 21세기 인권운동
존 커크 보이드 지음, 최선영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 1948년 UN 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 제1조에 명시된 항목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각국의 지식인, 정치지도자들에 의한 의견으로 이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뜻밖에도(?) 국제적 권위를 얻게 되어 수많은 나라들의 헌법 구성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어떤가. 이 ‘만인에 평등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현상을 보면 그것은 결코 ‘만인에 평등하지 않다.’(서구식 자본주의의 헤게모니가 담겨있다는 것 또한 비판을 받지만 말이다) 왜? 그것은 선언이 각 나라의 현실에 맞춘 ‘경제적’ 인권실현의 뜻을 무의식적으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제25조를 한번 볼까. 「모든 사람은 먹을거리, 입을 옷, 주택, 의료, 사회서비스 등을 포함해 가족의 건강과 행복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가 있다.」 이것은 세계인권선언에 분명히 명시된 내용이다. 무상급식, 학생인권조례 등을 관통하는 것 역시 바로 이 세계인권선언일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꽝, 이다. 자, 제20조를 보자. 「모든 사람은 평화적인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세계’인권선언이지만 왠지 2008년부터 불붙은 한국을 염두하고 만든 조항 같기만 하다……. 문제의식, 말로만 문제의식이 아니라 좀 더 새로운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이건 지구에 발붙이고 사는 모든 사람들이 주체가 되는 공적 영역이다. 소위 국제레짐. 국제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규범. 하지만 국제레짐은 기본적으로 국가들이 서로 상호의존적일 때만 가능하지 않나. 그런데 알다시피 국제사회는 아나키즘의 덮개 아래 있다. 왜일까. 어떤 나라든 상호의존이라기보다는 배타적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용이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정치적 힘을 이용하는 소수집단만을 위한 인권은 인권이 아니다(특히 아시아를 보면 잘 드러난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세계인권선언은 일상 언어에서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내 생각은 그렇다, 이다. 비록 아무리 정직하고 누구나 끄덕일만한 내용을 담고 있을지언정 그것이 텍스트를 벗어나 사람들의 생활에 파고들면 순식간에 악마적으로 바뀌어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궁극적인 문제는 텍스트 밖에 있다. 앞서 말했듯 국가가 우리를 상호적인 눈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고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타일러도 안 된다면 ‘분노’라도 내어 침을 뱉는 게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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