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서동욱 지음 / 김영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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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평론가가 추천한 도서라 읽어보고 싶었다. 철학이 날씨릉 바꾼다니.. 제목도 나의 흥미를 돋구었다. 인내심이 필요한 신착 도서를 기다리는 시간 끝에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그것도 내가 처음 펴보게 될 책으로!! 책을 마주한 벅찬 감정을 만끽하며 바로 빈 자리에 앉아 읽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내용이!?
제목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다만 생각의 끝에 서있는 철학자의 문학적인 박식함과 삶에 대한 고찰을 엿볼 수 있었다. 책을 처음 펴는 것은 쉬웠으나 끝까지 읽는데는 꼬박 2주가 걸렸다. 시간 날 때 계속 펴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치만, 문장 문장들이 멋졌다. 수 십년간 자기 안에 쌓인 경험과 지식을 문학적인 감성으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나중에 시간이 넉넉할 때 한 문장 한 문장 다시 곱씹어 보고 싶은 책이다!

악상에 대한 고민에 빠졌던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에게만해답이 되어 민요조의 분위기를 지닌 <7번 교향곡>의 4악장을 완성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해답은 널려 있지만, 제대로된 문제를 가진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 아무런 문제의식 없는빈털터리가 그것을 집어 들면 그저 돌멩이, 아니면 영문 모를
‘42‘라는 숫자로만 나타난다.
소설로 돌아가보자.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
이 문제이기나 한 것인가? 이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문제는 모든 것을 노력 없이 단번에 알아내겠다는 미련한 욕심의 표현에 불과하다. 마치 전혀 공부하지 않은 이가 침대에 빈둥거리며 누워 내일 시험에서 백점 맞을 궁리를 하는 것처럼. 저질문의 정답은 확실히 ‘42‘이다. 그러나 질문을 자신의 삶에서절실하게 피워내지 못한 이에게 질문은 추상적인 남의 질문이며, 따라서 해답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저 거대한 문제가 제대로 된 질문의 모습이 되기 위해선, 의미심장하게도
‘지구‘라는 컴퓨터가 자신의 장구한 전 역사를 조금도 건너뛰지 않고 하나하나 몸소 체험해야 했다.

(...) 당신은 저와 함께 계셨건만 저는 당신과 함께 있지않았습니다."
핵심은 마지막 구절에 있다. 당신(하느님)은 늘 나와 함께있었다. 그러나 그 의미를 깨달은 것은 늦게 이루어지는 반추속에서다. 배움이란 늘 늦게 되새겨보는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고, 과거는 현재에 반복됨으로써만 그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 반복의 체험을 우리는 프루스트Marcel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 유명한 마들렌 과자 체험에서도 발견한다. 어린 시절의 마들렌 체험은 어른이 된 후반복한 마들렌 체험 속에서야 비로소 그 행복한 비밀을 알려온다.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어떤 것을 겪을 당시엔그 의미를 모르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반복할 기회가 생겼을 때 비로소 그 진정한 의미를 배우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역사를 창조하는 일 역시 이해할 수 있다.
들뢰즈만큼이나 반복을 자신의 철학에서 핵심으로 삼은 하이데거는 어떤 의미에서 저런 아우구스티누스적인 반복을 계승한다고 해도 좋을 텐데, 그는 과거를 다시 깨닫게 되는 것을반복이라 여겼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 입문》에서 이렇게말한다.

하나의 시작은, 사람들이 이미 지나간, 잘 알려진 것을그저 똑같은 방법으로 모방해서 단순하게 반복함으로써가 아니라, 출발이 ‘원천적으로 고유하게‘ 다시 시작됨으로써, 따라서 진정한 시작이 지니는 모든 난처함,
어둠, 불확실성과 함께 다시 한번 출발함으로써 되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과거란 먼지 쓴 유물처럼 사망한 채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시 시작함을 통해 현재에 반복된다. 과거를 다시 시작하는 일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오늘을 위한 역사를 만든다.

반면 그런 공통성을 전제하지 않는 ‘차이‘는 사람들 사이에어떤 위계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나와 공통의 척도를 지니지않는 자에게 내 이해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까닭이다. 공통의 척도가 없는 대상에 대해 자신만의 잣대를 억지로 들이대려 할 때 우리는 폭력의 행사라는 비난을 감수해야만 한다.
이렇듯 차이는 사람들의 관계를 ‘평등하게 만들며 위계가 끼어들지 못하도록 보호한다.

진실은 순식간이다(그 후에는 모든 게 그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 (...) 그 순간은 그저 그 자체였다. 그것은 다른무엇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 순간에는 모든 게 충족되었으며, 모든 걸 보상받았다.
최고의 순간은 그 자체로 충족적이다. 그 이후에 흘러가는시간은 바로 이 순간의 의미를 지키고 또 반복하는 것으로서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후의 시간, 계속 스쳐 지나가는 현재는 그 자체로 충족적인 저 최고의 순간을 어떤 식으로든 지시해 보이는 기호일 것이다

"9현재라는 순간을 영위하는 것들은 과거의 것들이 변장한모습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버마스가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에서 보들레르를 읽어나가며 말하듯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현실성은 오로지 [현재 흘러가고 있는] 시간과 영원의 교차점으로서만 구성된다. 지금 생기롭게 흘러가고 있는 시간과, 조각상처럼 서 있는 영원한 과거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현재라는 순간이 태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과거와 지금의 교차
‘로서 현재의 순간‘은 인간이 역사를 인식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벤야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말한다.
과거의 이미지는 획 지나간다. 과거는 인식 가능한 순간에 인식되지 않으면 영영 다시 볼 수 없게 사라지는 섬광 같은 이미지로서만 붙잡을 수 있다. (...)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원래 어떠했는가‘
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의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다는 것을뜻한다. 10과거는 박제나 골동품처럼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현재는 과거와 단절한 채 완벽한 새로움 속에 등장하지도않는다. 과거의 지도를 받으면서만 우리는 현재의 사건들을

인지할 수 있다.
만일 과거의 빛나는 한순간이 지금 순간에 개입해서 더할나위 없이 의미 있고 소중한 현재를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벤야민의 말을 빌려 현재의 모든 순간은 메시아가 들어오는 작은 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프루스트가 마들렌과 함께 차한잔을 마시는 현재의 순간 속으로 과거의 콩브레가 들어와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만들 듯이 말이다. 그러나 과거의 순간은 그 자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현재의 사건으로 변화한 채 다가오기에 우리에게 현재는 늘 새롭고 유일무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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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는 세계 -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이소임 지음 / 시공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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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고 일을 하는 비슷한 연배의 워킹맘인 점, 책을 읽는 취미를 가진 점이 나와 같지만, 나와 다른 직업을 가지고 글로 자신의 생각을 남기는 작가의 이야기
나와 생각이 비슷한 부분이 많아 공감되었다. 또 사회 현상들을 바라보는 시각과 자기 자신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관점도 비슷했다. 그래서 밑줄 긋고 싶은 부분이 많았나보다.
이런 책들을 읽으면 예전에는 “우와, 저 사람 참 대단하다.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8할이었는데, 요즘에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의 희망을 엿본다. 더이상 좋을 날과 좋아질 일이 없어보이는 막막한 세상에서 단단하게 자신의 생각을 던지는 사람이 있어 위안이 된다. 의미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의미를 찾아야만 하는 존재이다. 의미를 찾기 위해 애쓰는 존재들과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존재들이 모여 세상은 그래도 살아갈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삶에 정답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습관적으로 정답을찾았다. 정답이 있는 세계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로스쿨까지 시험 다음에 또다른 시험을 쳤다. 시험지 속 세상은 명확했다. 시인의 의도도, 정의도, 삶의 의미도 오지선다 속에 있었다. 하나는 옳고나머지 넷은 틀렸다. 정답을 맞혀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있었다. 하지만 맞는 답을 찾아가며 나아간 끝에 정답이 없는 삶과 맞닥뜨리자 나의 작은 세계는 조용한 혼란에 빠졌다. 깨어지지 않았지만 금이 간 도자기처럼 무언가가 미묘하게 잘못된 것 같았다. 답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내가 찾아야 할 것은 정확한 답이 아니라 정확한 질문이었

다. 한 인간으로, 엄마로, 변호사라는 직업인으로, 사회의 구성원으로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스스로 묻고 답해야 했다.
나의 세계는 여전히 좁고, 미숙하고, 엉성하다. 매일실수하고 수시로 한계를 느낀다. 건실한 어른이 되었다고흡족해하다가 금세 철없는 아이 같은 나를 발견하고 좌절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성공이 완성은 아니었다. 언제나 새로운 실패가 다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혹여 작은 성공이라도 하고 나면 스스로 이렇게 경고해야 한다. "정신 차려. 기쁨은 잠깐이야. 성공은 새로운 실패의 전조일 뿐이라고!" 마치 겹겹의 우물에 갇힌 개구리 신세다. 애써 기어 나와 보면 또다시 우물이고, 기어 나오면 또다시 우물이고, ‘이제 밖으로 나왔겠지?‘ 하고 앞으로 기어가다 보면또다시 우물 안쪽 벽이다.

사회에게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앞도 제대로보지 못하고 기어가다가 축축하고 이끼 낀 우물 벽에 코를부딪치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본다. 하늘 가득 총총한 별이 우물 밖의 세상을 상상하게 한다. ‘언젠가는 밖으로 나갈 수 있겠지?"라는 소망을 담아 나지막이 질문한다. 밤하늘을 조금 더 깊이 바라보면 별빛 뒤에 펼쳐진 광활한 어둠이 나를 압도한다. ‘이렇게 작구나.‘ 끝없는 우물을 벗어난 자신을 상상한다. 결국 나는 드넓은 벌판에 던져진 외로운 개구리 한 마리일 뿐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고작 작은 개구리만큼만 나아간다. 정답을 맞히며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질문을 하며 나아간다.

평범함을 받아들이면 자유를 얻는다. 일상을 위해 애쓰는 자신을 인정하게 된다.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노력하고 사는지 돌아보게 된다. 특별한 사람들은 별처럼 총총히 빛난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별만 가득한 듯하다. 하지만 빛나는 별 뒤에서 밤하늘을 채우고 있는 것은 넓고도 깊은 어둠이다. 밤하늘의 본질은 별이 아니라 평범하면서 광활한 어둠일지 모른다.

아이 담임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아이가 민이라는 친구와 싸웠다고 했다. 선생님의 말씀을 요약하자면 ‘우리 아이는 단짝이랑 노는 성향인데 민이는 여러 명과 두루 놀고 싶어 한다. 민이가 우리 아이 때문에 답답함을 느낀다, 그래서오늘 두 아이를 불러다 너희는 성격이 맞지 않으니 앞으로놀지 말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아이가 속상할 테니 가정에서 즐거운 활동이라도 하면 좋겠다‘라는 것이었다. 그동안아이가 민이와 갈등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했기에 예상하지못한 일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앞으로 놀지 말라는 것이 공정한 해결책인지 의문이었다. 우리 아이 편에서는 단짝과 놀지 말라는 것이니 앞으로 외톨이가 되라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아이는 조금 울먹이기는 했지만 담담하게 새 친구가 생길 때까지 혼자 놀겠다고 했다. 곧 괜찮아지겠지 싶었는데 아이는 그 후 몇 주간 억울한 마음을 토로했다. 나의 일이라면 5분도 고민을 안 할 문제인데 아이 일이니 영 신경이쓰였다.
"엄마, 애들은 왜 인기 많은 애한테만 친절해? 너무불공평해"
"애들이 아직 어려서 그렇지. 영이 너는 인기 없는 친

구한테도 친절하게 대해주렴."
"엄마, 민이는 진짜 인기가 많아. 옷도 아이돌처럼 입고, 예쁜 물건도 많아."
"영이 너도 장점이 얼마나 많은데. 시간이 지나면 알아줄 거야. 또 남들이 몰라주면 어떠니? 엄마가 아는데."
"민이가 중간 놀이 시간에 카페를 차렸는데 나도 직원으로 취직했거든. 그런데 나만 인턴이래. 기분 나빠서 관두었어."
"정말 불공평한데."
"엄마, 어떻게 하면 나도 인기가 많아질까?"
"글쎄, 엄마는 인기가 없어보아서 잘 모르겠는데. 엄마는 친구가 없어서 소풍 가서도 바위에 앉아 혼자서 도시

락을 먹은 사람이라서."
이야기를 듣던 남편이 끼어들었다.
"영아, 공부 잘하면 애들이 적어도 무시는 안 할걸?"
남편의 말을 들은 아이가 눈살을 찌푸린다.
"아빠 정말 너무해."
나는 남편의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음, 우리 애는 엄마, 아빠를 닮아서 인기가 없구나‘
신기했다. 인기를 원하다니!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는 친구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특히 중2병으로H.O.T. 광팬이었던 친구에게 "이런 음악만 들으면 귀가 썩을걸?"이라는 사회성 떨어지는 말을 해서 따돌림을 당했다(이글을 빌려 H.O.T.와 팬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당시에는 따돌림당하는지도 모르고 점심시간에 혼자 도시락을 먹으며
‘인생은 역시 고독하군‘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나중에 학기말 롤링 페이퍼에 적힌 수두룩한 악담을 보고 나서야 아이들이 나를 싫어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가 인기를 갈구하며 의기소침한 모습을 볼 때마다 몹시 괴로웠다. 그래도 아이가 스스로 이겨내야 할 일이었다. 괴롭지만 내가 해결하려 들면 안 될 일이었다. 아이를낳기 전에는 육아란 내가 아이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것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육아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기다리고참는 일이다. 인기 많은 아이로 만들기 위해 아이돌같이 옷을 입히고 예쁜 학용품을 잔뜩 사주고, 친구를 집으로 불러놀게 해줄 수도 있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일, 내가 아이 대신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은 욕망을 참는 일은 어렵다.
대학교 때 버스에서 인상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모녀가 나란히 앉았는데 딸이 무슨 일인지 흐느껴 울었다. 엄마는 옆에서 담담한 표정으로 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딸이버스에서 먼저 내렸는데 그때도 엄마는 "잘 들어가" 하고 짐짓 명랑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딸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엄마의 표정은 슬픔으로 무너졌다. 눈시울을 붉히며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나는 당시에 그 딸을 보고 한심해했다. ‘엄마 앞에서 우냐, 걱정하게! 그런데 지금은 딸이 엄마 앞에서 울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 엄마가 좋은 엄마라는 생각이 든다. 김미경 강사가 말했듯 부모는 자식이 지하 10층까지 들어가서괴로워하고 있으면 11층에 내려가서 기다려주어야 하는 사람이다.
며칠 전 반전이 일어났다. 아이가 말했다.

려고!"
"엄마, 내가 꾀를 좀 부렸어! 아이돌 소속사 만들어보
"응?"
"민이네 카페가 망했거든. 내가 그 틈에 소속사 차려서 아이돌을 시켜주겠다고 하려고. 아이돌은 다 좋아하잖아. 이름도 정했어. ‘김 앤 마카롱‘ 기획이야."
"김앤 마카롱?"
"내가 사장이니까 김이고 마카롱처럼 달콤한 아이돌을 만든다는 뜻이야. 이따가 간판 만들 때 엄마가 좀 도와줘.
벌써 민이도 아이돌로 섭외했어."
"민이? 민이는 원수 아니야?"
"원수가 뭐가 중요해. 일단 회사가 잘되고 봐야지."
"그, 그래. 좋은 생각이네."
아이의 지시대로 도화지로 만든 간판을 색연필로 칠해주면서 속으로 감탄했다. ‘나라면 절대 떠올리지 못할 해결책이군. 그때 수학 학원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어머님, 저기 영이가 계산을 안 하고 아무 숫자나 막써서 숙제를 해왔는데요."
이런, 맙소사. (반전의 반전) 또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당연한 것들이 갑자기 생경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엄마, 잘잤어?" 딸아이가 나를 깨우며 아침 인사를 할 때 새삼 놀란다. ‘아, 맞다. 내가 엄마지!‘ 9년을 엄마로 지냈는데 엄마로서의 정체성은 밤사이 잊힐 만큼 가볍다.
아이가 태어나면 뚝딱 엄마와 아빠로 재탄생되고 모성애와 부성애가 저절로 장착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출산직후 내가 느낀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공격성이었다. 아이를 낳고 대학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이었다. 남편이 차를 빼는 동안 대합실에서 혼자 아이를 안고 기다렸다. 깃털같이가벼운 신생아가 닻처럼 무거워서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오감이 예민해져 주위 사람의 동작 하나하나가 신경에 거슬렸다. 똑. 딱. 똑. 딱.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왜 이렇게 안와?‘ 남편에게 짜증이 났다. 벤치 사이를 뛰어다니던 초등학생 남자아이에게는 알 수 없는 적개심까지 느꼈다. 아이가근처에 올 때마다 화가 났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를 드러내고 공격하고 싶었다. 차에 타자마자 이성이 돌아왔다. ‘맙소사, 나 방금 새끼 낳은 어미 개 같았다‘ 한 번도 느껴보지못한 이상한 감정이었다. 남편을 기다린 시간은 겨우 5분이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대단한 사랑을 베풀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내가 엄마로서 한 일은 3000번 잠을 재우고 8000번밥을 먹이고 3만권 책을 읽어주고 10만 번 질문에 대답해주는, 작고 귀찮고 피곤하고, 지겹고 간단하고 표도 안 나는,
그리고 말하기도 구차한 희생을 자주 끝없이 반복한 것뿐이다. 의연하게 견딘 것도 아니다. 나의 모성애는 자주 방황했다. 아이는 사랑스럽지만 모래주머니 같아서 다리에서 떼어내고 싶은 충동을 수시로 느꼈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아이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줄 수 있다. 하지만 목숨보다 가벼운 일상의 순간에는 나를위한 선택을 할 때가 많다. "지금 못 놀아줘. 엄마는 일해야해" "지금 레고 못 해. 엄마 허리 아파" "지금 쿠키 못 구워. 엄마는 책 읽고 싶어" 이렇게 내가 이기적으로 굴 때마다 마음속 삼신할머니가 나타나 속삭인다.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해야지!" 마음속 삼신할머니는 성질이 고약해서 내가아이에게 해준 일은 결코 공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대신내가 해주지 못한 일은 엄히 꾸짖는다.
육아 번민의 순간마다 내가 떠올리는 두 가지 조언이있다. 하나는 엄마가 해준 말이다. 나는 당시 출산 후 로스쿨복학을 고민했다. "학교를 관둘까? 자식은 엄마가 키워야 하지 않을까?" 내 말에 엄마는 고민거리도 아니라는 식으로 대

꾸했다. "야, 세종대왕도 유모가 키웠는데 무슨 소리니? 네가 키우는 게 아니라 아이가 자라는 거지." 또 다른 하나는로스쿨 재학 시절 김두식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해준 말이다. "육아 죄책감이 들면 6·25 때 흙 주워 먹고 자란 아이들도 잘 커서 멀쩡한 사회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세요. 여러분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자랄수록 그말의 뜻을 알게 되었다. 아이는 스스로 자랐다. 혼자 뒤집고,
걷고, 말했다. 내가 가르쳐서는 이룰 수 없는 일들을 기특하게 혼자 해냈다.
나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나의 사랑이 얄팍함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주는 배려와 애정, 희생도 결국 자기애의 변주일 뿐이었다. 아이에게 주는

마음은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이지만 그 최선은 고작 갈등하는 사랑이다. 엄마가 되어서 알게 된 사랑은 나의 모성애가아니다. 작고 연약한 어린 생명이 나에게 주는 절대적 사랑이다. 아이의 사랑은 조건이 없고 무한하다. 부족한 나를 자신의 세상으로 받아주고 아껴준다. "엄마 사랑해!" 말을 시작한 아이는 수시로 사랑을 고백한다. 온 세상처럼 웃어준다. 퇴근하면 작은 발로 다다다다 달려와서 힘껏 안아준다.
나의 모성애는 어쩌면 아이의 무한한 사랑에 보답해주지 못해서 방황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절대적 사랑에는 단 하나의 제약이 있다. 바로시간이다. 자신의 인생이 시작되면 부모는 배경으로 밀려나야 한다. 나도 그랬다. 엄마, 아빠보다 나만 생각한다. 그래서아이가 나를 사랑해주는 이 짧은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달빛 같은 것임을 안다. 혼돈과 인내, 행복과 괴로움이 뒤섞인 아름다운 나의 육아 시절이 지나가면 나의 사랑스러운 모래주머니, 너는 곧 나를 잊겠지만 나는 어쩐지이 시절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데없는 짓을 하는, 잠을 줄여 만든 그 두세 시간이 소중하다.
그 무용한 시간이 나를 나답게 해준다. 열대 우림의 나무는나이테가 없거나 흐리다. 나이테는 계절의 변화에 따른 생장 속도 차이로 만들어져서, 언제나 여름인 열대의 나무에는 세월의 흔적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유용과 무용, 성숙과미숙이 번갈아 나타나서 나의 마음에 나이테를 아로새긴다.
조지 버나드 쇼의 말처럼 삶을 낭비하는 것이 젊은이의 징표라면, 애써 만든 짧고 소중한, 무용하게 낭비되는 밤이 나의 젊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일상에서 스치는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다정한 마음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배려, 친절, 양보라는 단어를 뜯어보면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다. 배려(配慮)는 나눌 배(配)에 생각할 려(慮)를 쓴다. 나눌 배는 술이 잘 익었는지 보기 위해 술독을 살피는 사람의 모습을 따서 만든 글자로, 나누다라는 의미 외에도 자세히 살펴본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배려는 자세히 살펴보고 생각한다는 의미다. 친절(親切)은 친할 친(親)에 끊을절(切)을 쓴다. 끊을 절은 정성스럽고 적절하다는 의미로도쓰인다. 친절은 친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한다는 의미다. 양보(步)는 사양할 양()에 걸음 보(步)를 쓴다. 양보는 남을위해 발걸음을 멈춘다는 의미다. 배려와 친절과 양보는 맹목적 선함이 아니라 사려 깊은 선함이다.

괴롭고 팍팍한 현실에서 다정한 마음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무례하고 무신경한 사람이 편히 사는 것 같다.
"안 주고 안 받을래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몸을 움츠린다.
이럴 때 다정함이 무엇인지 떠올린다. 우리는 되돌려받기위해 다정한가? 나는 타인의 다정함에 모두 보답했는가? 우리는 왜 다정한가? 다정함은 어쩌면 나를 위한 마음일지도모른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나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 남에게 드러내는 나의 모습에 책임을지기 위해서 우리는 다정한 사람이 된다. 내가 다정한 마음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타인에게 베푼 마음을 아까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꿈도 모르고 미래 예측 능력도 떨어지는 나같은 부지런한 베짱이를 위해 변명하자면, 베짱이들도 베짱이 나름의 생각이 있다. 부지런히 양식을 모으는 개미 주위에서 기타를 치면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한다. 눈치 없이 기타를 치는 이유는 재미있기 때문이고 멍청하게 양식을모으지 않은 이유는 왜 양식을 모아야 하는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해서다. 나 같은 멍청하고 부지런한 베짱이를 위해조언하자면, 싫은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실패를기꺼이 삶으로 받아들이면 아무리 많이 실패해도 손해가 아니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언제나 배우면 된다.

우연히 얻은 여러 행운(전쟁이나 대기근을 겪지 않은 시대적 행운, 절대적인 빈곤, 정서적 학대, 장애, 심각한 범죄 피해 등을 경험하지 않은 개인적 행운)을 걷어내고 나면 나는 누구인가? 그럭저럭 괜찮은사람으로 살고 있지만 운을 걷어낸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의 한계를 깨달을 때마다 자꾸 역시 나는 절대적으로 밑바닥이라고 자책하게 된다.
스포일러이지만 영화에서 에블린은 최악의 에블린이어서 모든 평행 우주를 구한다. 하지만 현실에 사는 최악의 나는 우주는커녕 나 자신도 구하지 못한다. 나는 절대적으로 작고 보잘것없다. 언제나 나의 한계를 발견한다. ‘오, 나최악이네‘의 순간이 계속되기 때문에 최악의 나를 깨달음으로써 최악을 갱신한다. 어떨 때는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고통스럽다. 또 어떨 때는 고통이 부족해서 고통스럽다. 그렇지만 최악의 나를 깨닫고 한 걸음 나아가려고 애쓸 수밖에없다. 그것이 최악의 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 최악도 조만간 (또 다른 최악으로) 갱신되겠지만 말이다.

성인이 된 지 이미 한참이지났건만 삶의 층층 계단을 밟고 올라설 때마다 여전히 미숙한 나를 발견한다. 내가 상상한 어른은 마음이 호수 같은사람이었다. 모든 일을 확신하고 고민 없이 결정하고 관대한 사람. 대학교에 입학하면, 취업하면, 결혼하면, 아이를 낳으면 철이 들고 어른이 되어야 했었다. 나이가 들어서 미숙함을 남들이 알지 못하게 의연히 처리할 수 있게 되었지만여전히 번민과 갈등은 계속된다. 3학년이 되면서 아이의 사회생활이 복잡해졌다. 친구와 싸운 일, 학급 내 세력 다툼, 인기 있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의 머릿속도 복잡해졌다. 나의 교육관은 ‘아이가 요청하기전에 먼저 개입하지 않는다‘인데 아이의 미숙함과 미숙함때문에 겪는 괴로움을 지켜보기가 참 힘들다. 아이의 미숙함을 다루는 나의 미숙함을 깨닫게 된다. 나는 언제쯤 스스로 만족할 만한 어른이 되려나.
나이를 먹으면서 경험은 쌓아가지만 내가 한 경험이래야 평범하고 소소한 것뿐이다.

하지만 기성세대가 되면 지난 청춘이 그리워서인지 젊은이들의 삶을 기웃거리며 ‘요즘 애들은‘ ‘MZ들은‘ 같은 말을 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보았자 여전히 모르는 일투성이인데도 그렇다. 나의 소박한 경험에 압도되고 그 경험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언제나 나의 생각이 더 옳다고 고집을 부린다. 경험으로 깨닫게 되는 세상이 분명히 있지만 경험만으로 전부를 알 수는 없다. 아인슈타인의 아버지가 경험은더 많았겠지만 상대성 이론을 떠올린 사람은 아버지보다 어리고 미숙한 아들이었다.

타인을 이해했다고 생각한 모든 순간은 그저 착각일 뿐이었다. 살인을 저지를 법한 그럴듯하고 매끈한 이유가 있어서 나의 착각을 알아채지 못했을뿐이었다.
인간이 타인을 이해한다는 행위는 얼마나 허망한가.
수많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수많은 사람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해라는 것은 고작 나의 감정을 촉수처럼 뻗은 것일 뿐이었다. 나란 고작 이런 것이다. 나에게서 한 발짝도 떨어질 수 없다. 나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현실에서 남을 뜯어고치려는 프로크루스테스형 인간은 차고 넘친다. 답을 낼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자기 생각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그런 사람을 만나면 왜그렇게 남의 생각에 집착하고 고치려고 들려는지 궁금하다.
어쩌면 정답이라고 우기지만 자기 생각에 확신이 없어서가아닐까. 너무 자신이 없어서 남의 인정을 받아야만 자기 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다수결로 결정하려 한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침대에 꼭 맞는 테세우스에게죽임을 당한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침대보다 키가 컸기 때문에 테세우스가 그의 머리와 다리를 잘랐다. 은유적으로 보면 프로크루스테스는 자신의 의견에 살해당한 셈이다. 정작그 자신이 자신과 의견과 달랐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나의 삶에 바짝 다가올 때만 어떤 의미가 있다. 우리는 매트릭스에 살지 않고, 현실과 이야기를 구별할 줄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인식하는 현실은 매우협소하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삶은 나에게는 이야기처럼 존재한다. 나는 어떤 이야기에 다가가야 할까? 잠수정이냐, 난민선이냐? 어떤 이야기를 나의 현실로 가져올 것인가? 누군가에게는 당신도 이야기에 불과하다. 자세히 보아야 현실이 된다. 가까이 보아야 현실이 된다. 타인에게는 당신도 그렇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이야기는 바꿀 수 없지만 현실은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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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시도에도 포기한 책
나만 못 읽는 건가 싶어서 검색까지 해봤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서 조금 다행이다 싶은..
좀더 시간이 여유로울 때 천천히 다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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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글자도서] 슬픈 세상의 기쁜 말 -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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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담아 쓴 이야기
그녀의 섬세한 시선으로 읽어낸 사람들은 사정 많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다.
나또한 그런 이야기로 읽혀질 수 있을까?
나를 살아있게 하는 말을 찾아봐야겠다.

나는 언제 어디서고 그날 밤의 반딧불이와 뱃사공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반딧불이가 사라지면 그도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데 내게는 이 생각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날 ‘돌고래‘와 ‘아더 사이드‘와 ‘스틸 뷰티풀‘이라는 말은 나의 ‘매직‘이 되었다. 이 말들은 처음 들은 순간부터 변함없이, 시들시들하고 풀이 죽은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떼어놓고, 보이지 않던 아름다움을 찾아 나서고 싶게 만든다. 이 말들은내가 힘없이 늘어져 있을 때 반복적으로 나 자신에게 말을건다. ‘현실의 다른 측면을 봐봐! 다른 쪽으로 가봐! 가서 여전히 아름다운 이야기를 찾아내봐.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인간의 목소리, 인간의 가능성에 빛을 비춰봐. 어디서나 아름

다움을 찾아낼 수 있잖아!‘ 누구에게나 시간은 흐르고 그 시간은 되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 진리인 만큼이나 누구라도일생에 한번은 아름다운 세계에 눈뜨고 아름다움과 함께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 역시 진리다.
최근 수년간은 이 생각에 의지해서만 초라한 자아를 극복하고 꺾인 무릎을 펴고 길을 나설 수 있었다. 우리는 대부분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검은 물살 위에서 이리저리 외롭게 흔들린다. 그래서 ‘아더 사이드‘는 우리 모두의단어가 될 수 있다. 무엇을 원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현실의 다른 측면을 보고, 다른 사람들을 보고, 다른 이야기를들어봐야 비로소 지금과 다른 삶이 가능하다. ‘아, 난 이것을 원하는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은 한 개인의 삶에 일어나는 강렬한 해방적 순간이다.
‘스틸 뷰티풀‘은 변주가 가능하다. 아무리 많은 일이 일어났어도 아름다운, 슬프지만 아름다운, 덧없지만 영원한,
슬프지만 기쁜 내 마음의 고독이 찾던 이야기들은 모두 이말과 관련이 있다. 몇 번이고 곱씹어볼 만큼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던 날들은 사랑스러운 일몰에 대한 기억처럼, 어느아름다웠던 별이 가득한 밤의 기억처럼 끝없이 떠오르는 마음속 풍경이다. 우리의 어둠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아름

답고 빛나는 이야기뿐이다.
한 사람의 운명을 알려주는 것은 모두 ‘시‘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내 인생에 거듭 나타나는 이 단어들이 나에게는 시다(그러고 보니 그날 내가 탄 배의 이름도 ‘운명호‘였다). ‘내가 그날 운명호를 타고 찾아 나선 것은 돌고래였다‘라는 짧은 문장 하나가 나에게는 내 운명을 암시하는 결정적인 시고, ‘아더 사이드‘, ‘스틸 뷰티풀‘도 모두 시다. 이 단어들에나의 수많은 현실이 달라붙었다. 나는 이 단어들에 의지해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나는 세상, 좋아할 수 없는일이 가득한 세상, 수시로 등지고 떠나버리고 싶었던 세상의 ‘조금 다른‘ 일부가 되는 방식을 겨우 찾아낼 수 있었고그 단어 안에 나 자신이고 싶은 마음, 나 자신으로만 머물고싶지 않은 마음, 나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가슴 아프게 스러지고 마는 세상의 온갖 것에 대한 애타는 사랑을 담으면서 내 삶의 형태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했다(그날 내가 돌고래를 그렇게 오래 생각했던 이유를 아주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깨달았고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돌고래를보자 내 가슴속에 꿈 하나가 애절하게 생겨났던 것이다. ‘나도 내 삶의 형태를 가지고 싶다‘). 지금은 내 단어들이, 내 꿈이 나보다훨씬 낫다. 앞으로도 이 단어들에 의지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더 가볼 수밖에 없다.

내가 아는 한, 유사이래 인류 최고의 기쁜 자기발견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너를 행복하게 했단 말이지, 대단하다!"
나는 시 속에서, 그리고 시적인 순간들을 만나면서 달라지고 싶다. 현실을 변신의 장소인 것처럼 살고 싶다. 특별한이야기의 힘을 믿고 우리에게 마법 같은 힘이 있음을 믿고세상에 기적이 존재함을 믿고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운명을바꿀 수 있음을 감히 믿으면서 살고 싶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믿어야 자신도 달라질 수 있다.
나는 그 가능성의 증거가 되고 싶다. "누가 그래? 내가 예전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어떤 미래가 오든 미래는 결국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다.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인간이 인간일 때 얼마나 우아할 수 있는지는 알고 있다. 그래서 인간이지금과 다르게 존재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낭비하지 않는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당신의 가장 멋진 점을 표현할 단어를 찾아내면 정말 좋겠다. 우리의 좋은 결말을 위해서 어떤 단어가 필요한지 찾아내면 정말 좋겠다. 우리가 언젠가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실컷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면 정말 좋겠다. 지금은 말이 있어야 할 자리에 공허와 잔인함이 있지만 언젠가 우리의 말과 의미가 아름다운 관계를 맺고 ‘우리가 말을공유하고 있다니, 그런 멋진 일이 있다니‘라고 느낄 만한 이야기가 많아지면 정말 좋겠다.
우리가 곧잘 그 사실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지만 세상은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언제나 가장 좋은 이야기로 힘을내고, 가장 좋은 이야기와 함께 여러 가지 압력에 맞서 싸우면서 따뜻하면서도 깊게 대담하면서도 섬세하게 살 수 있게된다면 기쁠 것이다. 현실을 살되 마음의 한쪽에 뭔가를 품고 현실의 일부분을 바꿀 수 있다면 기쁠 것이다. 저마다 이문제 많은 현실의 ‘해결자의 목소리‘가 된다면 기쁠 것이다.
우리가 가진 여러 모습 중 가장 좋은 모습이 우리의 미래가된다면 정말 기쁠 것이다.
그때 잠시 땀을 닦으면서 당신을 당신으로 만든 이야기를 들려달라. 당신이 멈추지 않기 위해 필요로 했던 이야기도 들려달라. 두꺼운 고독을 뚫고 나오게 했던 존재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달라. 당신의 고유한 기쁨에 대해서도 말해달라. 나는 살아 있는 자의 귀로 듣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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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 삼대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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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우리는, 끊임없이 싸워온 우리의 결과다.
어쨌든 세상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져간다.

는 작가의 말이 진득하게 내 귀에 남아있다

진오는 국민학교 시절에 할머니 신금이에게 되물은 적이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그랬다 치고, 왜 우리 식구들은 힘센 쪽에 붙지못하고 맨날 지는 쪽에만 편들었어요?"
"왜, 약한쪽 편드는 게 싫으냐?"
"물론이지요. 너무 손해잖아요?"
그러면 할머니는 감실감실 주름살 잡힌 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웃으면서 말했다.
"그때에는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약한 이들이 이기게 되어있다. 너무 느려서 답답하긴 했지만."
그리고 신금이는 덧붙였다.
"오래 살다보면 알 수 있단다. 서로 겉으로 내색을 안 할 뿐이지속으론 다들 알구 있거든."

"같이 좀 살자, 못된 것들아. 같이 좀 살아."
이진오는 그녀가 말하려던 충분한 한마디가 바로 이 말이라는걸 알아들었다.
"노동자가 높은 데로 올라와 사람들에게 자기 처지와 입장을 알아달라고 농성하게 된 것만 해두 엄청난 사회적 변화라구. 우리 할머니는 늘 그렇게 말했어. 어쨌든 세상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져간다고."

나는 우리 근현대문학을 섭렵하면서 몇몇 빠진 부분이 있음을발견했다. 단편소설에 비해 훨씬 질과 양이 떨어지는 장편소설 부분과 그중에서도 근대 산업노동자들의 삶을 반영한 소설이 드물다는 점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잠깐 있었던 카프의 흔적에서도 대부분이 단편소설이거나 도시빈민 일용노동자 또는 룸펜 계층을 다룬것들이며 산업노동자가 전면에 등장하는 본격적인 장편소설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까지 쓰인 장편소설의 경우에도 대부분이 농민을 위주로 한 작품들이었다.
나는 이 시기의 노동운동 자료들을 살피면서 식민지 시대 이후조선의 항일노동운동은 너무도 당연하게 사회주의가 기본 이념의출발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방 이후 분단되면서 생존권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빨갱이‘로 매도당했고, 한국전쟁이 터지고 세계적인 냉전체제가 되면서 수십년 동안의 개발독재시대에 모든 노동운동은 ‘빨갱이운동‘으로 불온하게 여겨졌다. 우리가 기나긴 분단시대를 거쳐오면서 애초의 출발점부터 북한에 대하여 민족적 정통성을 주장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지만, 남한 민중이 근대화의 주체가 되어 산업화를 이루고 민주주의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피와 땀으로 이룩한 정통성을 갖추게 되었다.

에 돌 하나를 끼워넣는 작업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지금 혼란에 접어든 신자유주의적 세계의 모습을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몰락해가면서 무엇인가 다른 질서로 향하여 가는 이행기의그것이라고 말한다. 이 고통의 기간을 줄이거나 늘리는 것은 오로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방대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살던 시대와 삶의 흔적은 몇점 먼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상은 느리게 아주 천천히 변화해갈 것이지만 좀더 나아지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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