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듣는 시간 - 다른 세계를 여행하는 다큐멘터리 피디의 독서 에세이
김현우 지음 / 반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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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단어에서 여러 의미를 읽어 내고 나면 우선은 쓸쓸하다. 각자의 의미 안에 갇힌 개인이 쓸쓸하지 않을 도리는없다. 하지만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타인에게 결례를 범하지 않는 전제 조건일 것이다. 나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싫고, 그 말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우리는 남이다. 우리가 남이라고 생각해야 우리는 서로에게 결례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다를 그 ‘개인의 의미들을 모두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누군가에게는 결례를 범하게 될 테지만, 결례를 적게 범할 수는 있다.

혁명의 언어는 때로는 무례하고, 자주 무력하다. ‘더 나은삶‘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더 나은 삶이라는것은 어떤 사람이 그때까지 살아온 몸의 경험과 감각에 따라결정된다. 나의 질문은 상대의 몸의 경험, 감각의 경험을 내몸과 감각으로 경험해 볼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가지지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던지는 질문이었다. 그런 언어가 힘을 가질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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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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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더 벌기 위한 공부, 더 유식해 보이기 위한 공부, 남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공부, 즉각적인 쓸모에 연연하는 공부가 아니라고 해서, 공부의 결과에 대해 어떤 기대도없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호기심에서 출발한 지식 탐구를통해 어제의 나보다 나아진 나를 체험할 것을 기대한다. 공부를 통해 무지했던 과거의 나로부터 도망치는 재미를 기대한다. 남보다 나아지는 것은 그다지 재미있지 않다. 어차피 남이아닌가. 자기 갱신의 체험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보고있다는 감각을 주고, 그 감각을 익힌 사람은 예속된 삶을 거부한다.
지식 탐구를 통해 자신의 어떤 부분이 달라지는가? 지식이 깊어지면, 좀 더 섬세한 인식을 하게 된다. 아시아 사람들을 얼마 만나보지 않은 서양인의 눈에는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몽골인이 잘 구별되지 않는다. 다 비슷하게들 생겼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좀 더 많은 아시아 사람들을 만나본 끝에 인식의 깊이가 깊어지고 나면, 처음보다 더 섬세하게 대상을 구별하게 된다. 음, 한, 중, 일 사람들이 다 다르게 생겼군. 마찬가지로, 소위 백인을 별로 만나보지 않은 사람들은, 세상 백인들이 다 똑같이 생긴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많은 백인들을 만나보고 나면, 명칭만 백인일 뿐, 그들의 피부가 모두 흰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 와인도 그렇다고 하지 않는가. 오랜경험을 통해 와인의 맛을 섬세하게 구별하는 이가 있기에 와인이 세분화될 수 있다. 그런 사람 앞에서 와인 맛이 다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와인에 대한 무지를 선언하는 것과도 같다.
잘 모르니까 다 비슷해 보일 뿐, 잘 모르니까 구별이 안 될 뿐대상을 섬세하게 판별하게 되는 일이 꼭 축복만은 아니다.
그에 수반하는 저주도 만만치 않다. 안목이 밝고 섬세해져 대상을 보다 선명하게 보게 되면, 그간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도감각할 수 있게 되지만, 그간 몰랐던 더러움도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시집을 가까이 해보라. 이제 곧 지하철역에 걸린 시들 상당수가 거슬리기 시작할 것이다. 술자리에서 읊어대는삼행시들 대부분이 참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니, 그 시들 자체는 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를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참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로부터 쓸데없이 까다로운 인간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급기야는 어느소설의 주인공처럼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일부러나쁜 시력을 고집하게 될지도 모른다.
200그러나 섬세한 구별 없이 문명은 존재할 수 없다. 대충 그쪽으로 날아가 봐, 그러다 보면 달에 도착하게 될 거야. 이런식으로 해서 우주선을 달에 보낼 수는 없다. 방향과 거리를 섬세하게 나누고 계산하여 우주선을 쏘아 올려야 목적지에 제대로 도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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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발견의 저자 지바 마사야
일본에서 주목받고 있는 젋은 철학자의 신간!

이항대립을 탈구축하는 현대사상
하지만 어떤 주장이든 모두 ok는 아니다. 단지 타자와 마주하고 그 타자성=고유성을 존중한다는 윤리가 있고, 또한 함께 살기 위한 질서를 임시로 유지한다는 것이 이면의 테마.
뿔뿔히 흩어져서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철저하게 기성 질서를의심해야 근본=급진적으로 함께의 가능성을 다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현대 사상의 자세(stance)

질서로부터의 일탈
자신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타자를 환영하며 맞아들이는 것

프로세스는 항상 도중이다중요한 전제는 세계는 시간적이며 모든 것은 운동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물을 개념적으로, 추상적으로, 마치 영원히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할까, 리얼하지않습니다. 리얼하게 사물을 생각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운동 속에,
그리고 변화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또 키워드가 나옵니다. ‘생성변화‘와 ‘사건‘입니다.
생성변화는 영어로는 비커밍becoming, 프랑스어로는 드브니르

devenir입니다. 이 동사는 뭔가가 되다‘라는 뜻이에요. 들뢰즈에 따르면 모든 사물은 상이한 상태로 ‘되는‘ 도중입니다. 사물은 다방향의 차이‘화‘의 프로세스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물은 시간적이고, 그래서 변화해 가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한 사람도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사건‘인 것입니다. 프로세스는 항상 도중(중간)이며, 결정적인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세계를 이렇게 파악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어 우리는 일을시작하는 것이 힘겹다, 일을 끝내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매일매일생각하는데, 모든 것은 도중이고, 진정한 시작이나 진정한 끝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뭔가 비즈니스의 자기 계발에 응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사실 저는 어떤 시기부터 이 사고방식을 응용하고 있습니다. 원고를 써야 할 때 ‘영차‘ 하고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기합을 넣어 작업하는 것은 힘들기 때문에 일단 컴퓨터를 열고 트위터를 보고 그런 흐름으로 메일을 보고 한 가지 답신이라도 해 볼까 하는 식으로장벽이 낮은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뭔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고 할까, 프로세스가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내친김에 잠깐 생각난 것을 메모하기도 하는데요, 그 메모를 이제 원고의 일부로 삼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즉,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라는 시작을 잘 설정해야 한다는 규범의식을 버리고 왠지 모르게내친김에 착수해서 써 버린 것을, 이제 그것을 정식 작업으로 파악해서 OK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왠지 모르게 생각나는 것들을 그냥 쓰다 보면 글이 되는 거죠.

그 결과, 마지막 마무리도, 궁극적인 완성형을 목표로 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디까지 갔어도 프로세스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느 정도의 지점에서 "뭐 됐어"라고 하며 끝을 냅니다. 이런 것들을 글쓰기의 철학: 쓸 수 없는 고민을 위한 집필론』이라는 책에서 설명했습니다.
이런 것도 사실 들뢰즈의 사상과 연결되어 있는 거죠. 모든 것은생성변화하는 도중에 있다고 생각했을 때, 모든 것을 ‘내친김에‘
해 나가는 꿀팁이 됩니다. 모든 작업을 내친김에 한다 - 이것이 들뢰즈적 작업이죠.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은 밖에서부터 반강제로 주어지는 모델에자신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 속에서 여러 가지 도전을해서 스스로 준안정상태를 만들어 나가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꽤 엄격한 요구입니다.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들뢰즈+가타리가 생각하는 것은 모종의 예술적, 예술적 실천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활 속에서 독자적인 거처가 되는, 자신의 독자적인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여러 가지 만들어 나가자고 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고, 관엽식물을 기르는 것도 좋고, 사회활동에 몰입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한 새로운 활동을 다양하게조직화함으로써 인생을 준안정화해 나가면 되는 것이지, ‘진정한나의 본모습‘을 탐구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를 하자,
여러 가지를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은 그렇게 낙관적이고, 행동으로 사람들의 등을 떠밀어 주는 사상이거든요.

들뢰즈+가타리는 가족의 수수께끼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든 사회 활동이든 뭐든 구체적으로 행동을 해 보라고 격려하는 사상이라고 설명했는데, 거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한한X를 향해 가는, 항상 욕구불만의 활동으로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다양한 활동들이 제각각 유한하게, 나름대로 만족을 주는 나름대로 완결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무한한 부채를 지고, 갚을 수 없는것들을 위해 비극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항을
"그것은 그것"이라며 절단하고 나름대로 과제 task를 완료해 나갑니다. 들뢰즈+가타리는 그런 홀가분한 인생을 권장하고 있다고 저는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유한한 희극입니다.
하나의 X를 둘러싼 인생이란 이른바 단수적인 비극이지만, 그렇지 않고 인생의 모습을 좀 더 복수적으로 만들어, 각자 자율적인기쁨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아즈마는 단수의 X에서 "복수적인 초월론성으로"라는 전환을 데리다에게서 강조했습니다.

사변적 실재론이란 크게 말하면, 인간에 의한 의미 부여와는 관계없이, 그저 단적으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사물 쪽으로 향한다는 방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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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던 7년
에트가르 케레트 지음, 이나경 옮김 / 이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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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작가의 에세이를 보고 메모해 두었던 책.
기억에 의하면 장강명 작가의 부인이 추천한 책.
처음 들어본 작가의 에세이인데, 단편으로 꽤 유명한 작가인가보다.
여작가인 줄 알았는데, 책머리의 첫 쪽에서 남성 작가임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내전을 생각하면 팔레스타인이 안타까웠고, 이스라엘은 그에 비해 좀 악하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에세이 속에서도 전쟁의 그늘은 드리워졌고, 또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로서 이스라엘 사람의 입장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작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 관한 책으로 글의 모든 면면에서 가족에 대한 애정이 넘친다.

한 작가가 저서를 가리켜 자신에게 특별히 중요한 책이라고 말해도 큰 의미를 부여할 일은 아니다. 책 한 권이 존재하려면 으레 한 사람에게는 특별히 중요한 책이어야 한다. 운이좋으면 그 사람은 독자 중 한 명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마냥,
자기 책이 나온 것을 보고 신이 날 작가는 항상 있기 마련이니까. 나는 네번째 책을 쓰던 때에 이를 처음 깨달았고, 그래서 지금은 그런 말에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내게 정말로 각별한 책이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이십오 년여 만에 처음으로 쓴 논픽션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 관한 책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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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의 리듬은 생각의 리듬을 낳는다. 풍경 속을 지나가는 일은 생각 속을 지나가는 일의 메아리이면서 자극제이다. 마음의 보행과 두 발의 보행이 묘하게 어우러진다고 할까. 마음은 풍경이고, 보행은 마음의풍경을 지나는 방법이라고 할까. 마음에 떠오른 생각은 마음이 지나는풍경의 한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는 일은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기보다는 어딘가를 지나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보행의 역사가 생각의 역사를 구체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두 발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은가능하잖은가 말이다. 걷는 일은 곧 보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보면서 동시에 본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고, 새로운 것을 이미 알고 있는것 속으로 흡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느긋한 관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색하는 사람에게 걷는 일이 특별히 유용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여행의 경이와 해방과 정화를 얻자면, 세계를 한 바퀴 돌아도 좋겠지만 한블록을 걸어갔다 와도 좋다. 걷는다면 먼 여행도 좋고 가까운 여행도 좋다. 아니, 여행이 아니라 몸의 움직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제자리를 걷는 것도 가능하고, 좌석벨트에 묶인 채 전 세계를 도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보행의 욕구를 만족시키자면 자동차나 배, 비행기의 움직임으로는부족하다. 몸 자체의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마음속에서 일이 일어나려면 몸의 움직임과 눈의 볼거리가 필요하다. 걷는 일이 모호한 일이면서 동시에 무한히 풍부한 일인 것은 그 때문이다. 보행은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며, 여행인 동시에 목적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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