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서동욱 지음 / 김영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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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평론가가 추천한 도서라 읽어보고 싶었다. 철학이 날씨릉 바꾼다니.. 제목도 나의 흥미를 돋구었다. 인내심이 필요한 신착 도서를 기다리는 시간 끝에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그것도 내가 처음 펴보게 될 책으로!! 책을 마주한 벅찬 감정을 만끽하며 바로 빈 자리에 앉아 읽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내용이!?
제목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다만 생각의 끝에 서있는 철학자의 문학적인 박식함과 삶에 대한 고찰을 엿볼 수 있었다. 책을 처음 펴는 것은 쉬웠으나 끝까지 읽는데는 꼬박 2주가 걸렸다. 시간 날 때 계속 펴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치만, 문장 문장들이 멋졌다. 수 십년간 자기 안에 쌓인 경험과 지식을 문학적인 감성으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나중에 시간이 넉넉할 때 한 문장 한 문장 다시 곱씹어 보고 싶은 책이다!

악상에 대한 고민에 빠졌던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에게만해답이 되어 민요조의 분위기를 지닌 <7번 교향곡>의 4악장을 완성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해답은 널려 있지만, 제대로된 문제를 가진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 아무런 문제의식 없는빈털터리가 그것을 집어 들면 그저 돌멩이, 아니면 영문 모를
‘42‘라는 숫자로만 나타난다.
소설로 돌아가보자.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
이 문제이기나 한 것인가? 이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문제는 모든 것을 노력 없이 단번에 알아내겠다는 미련한 욕심의 표현에 불과하다. 마치 전혀 공부하지 않은 이가 침대에 빈둥거리며 누워 내일 시험에서 백점 맞을 궁리를 하는 것처럼. 저질문의 정답은 확실히 ‘42‘이다. 그러나 질문을 자신의 삶에서절실하게 피워내지 못한 이에게 질문은 추상적인 남의 질문이며, 따라서 해답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저 거대한 문제가 제대로 된 질문의 모습이 되기 위해선, 의미심장하게도
‘지구‘라는 컴퓨터가 자신의 장구한 전 역사를 조금도 건너뛰지 않고 하나하나 몸소 체험해야 했다.

(...) 당신은 저와 함께 계셨건만 저는 당신과 함께 있지않았습니다."
핵심은 마지막 구절에 있다. 당신(하느님)은 늘 나와 함께있었다. 그러나 그 의미를 깨달은 것은 늦게 이루어지는 반추속에서다. 배움이란 늘 늦게 되새겨보는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고, 과거는 현재에 반복됨으로써만 그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 반복의 체험을 우리는 프루스트Marcel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 유명한 마들렌 과자 체험에서도 발견한다. 어린 시절의 마들렌 체험은 어른이 된 후반복한 마들렌 체험 속에서야 비로소 그 행복한 비밀을 알려온다.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어떤 것을 겪을 당시엔그 의미를 모르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반복할 기회가 생겼을 때 비로소 그 진정한 의미를 배우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역사를 창조하는 일 역시 이해할 수 있다.
들뢰즈만큼이나 반복을 자신의 철학에서 핵심으로 삼은 하이데거는 어떤 의미에서 저런 아우구스티누스적인 반복을 계승한다고 해도 좋을 텐데, 그는 과거를 다시 깨닫게 되는 것을반복이라 여겼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 입문》에서 이렇게말한다.

하나의 시작은, 사람들이 이미 지나간, 잘 알려진 것을그저 똑같은 방법으로 모방해서 단순하게 반복함으로써가 아니라, 출발이 ‘원천적으로 고유하게‘ 다시 시작됨으로써, 따라서 진정한 시작이 지니는 모든 난처함,
어둠, 불확실성과 함께 다시 한번 출발함으로써 되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과거란 먼지 쓴 유물처럼 사망한 채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시 시작함을 통해 현재에 반복된다. 과거를 다시 시작하는 일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오늘을 위한 역사를 만든다.

반면 그런 공통성을 전제하지 않는 ‘차이‘는 사람들 사이에어떤 위계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나와 공통의 척도를 지니지않는 자에게 내 이해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까닭이다. 공통의 척도가 없는 대상에 대해 자신만의 잣대를 억지로 들이대려 할 때 우리는 폭력의 행사라는 비난을 감수해야만 한다.
이렇듯 차이는 사람들의 관계를 ‘평등하게 만들며 위계가 끼어들지 못하도록 보호한다.

진실은 순식간이다(그 후에는 모든 게 그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 (...) 그 순간은 그저 그 자체였다. 그것은 다른무엇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 순간에는 모든 게 충족되었으며, 모든 걸 보상받았다.
최고의 순간은 그 자체로 충족적이다. 그 이후에 흘러가는시간은 바로 이 순간의 의미를 지키고 또 반복하는 것으로서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후의 시간, 계속 스쳐 지나가는 현재는 그 자체로 충족적인 저 최고의 순간을 어떤 식으로든 지시해 보이는 기호일 것이다

"9현재라는 순간을 영위하는 것들은 과거의 것들이 변장한모습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버마스가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에서 보들레르를 읽어나가며 말하듯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현실성은 오로지 [현재 흘러가고 있는] 시간과 영원의 교차점으로서만 구성된다. 지금 생기롭게 흘러가고 있는 시간과, 조각상처럼 서 있는 영원한 과거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현재라는 순간이 태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과거와 지금의 교차
‘로서 현재의 순간‘은 인간이 역사를 인식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벤야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말한다.
과거의 이미지는 획 지나간다. 과거는 인식 가능한 순간에 인식되지 않으면 영영 다시 볼 수 없게 사라지는 섬광 같은 이미지로서만 붙잡을 수 있다. (...)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원래 어떠했는가‘
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의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다는 것을뜻한다. 10과거는 박제나 골동품처럼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현재는 과거와 단절한 채 완벽한 새로움 속에 등장하지도않는다. 과거의 지도를 받으면서만 우리는 현재의 사건들을

인지할 수 있다.
만일 과거의 빛나는 한순간이 지금 순간에 개입해서 더할나위 없이 의미 있고 소중한 현재를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벤야민의 말을 빌려 현재의 모든 순간은 메시아가 들어오는 작은 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프루스트가 마들렌과 함께 차한잔을 마시는 현재의 순간 속으로 과거의 콩브레가 들어와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만들 듯이 말이다. 그러나 과거의 순간은 그 자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현재의 사건으로 변화한 채 다가오기에 우리에게 현재는 늘 새롭고 유일무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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