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자의 철학 수업 - 어떤 철학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까
마루야마 슌이치 지음, 송제나 옮김 / 지와인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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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은 우리에게 소속감도 주지만 불안도 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갈등은 거의 대부분 인간관계에서 오는데, 더 많은 관계가 생겨나면 어떻게 될까요? 스트레스의정도가 점점 더 늘어납니다. 자신을 긍정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점점 줄어듭니다. 살아가는 동안 겪는 숱한 갈등과 위기를 해결하려면 궁극적으로 ‘나‘에 대한 긍정적 감각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런 감각 없이는 좋은 삶을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감각, 이것이바로 오늘날 필요한 ‘개인주의‘의 정체입니다.

소세키가 발견했던 개인주의 사고법은 오늘날에 더 쓸모있는 사고법입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고독감‘ 때문입니다. 과거보다 현재의 사람들이 더 고독감을 많이 느낌니다. 인터넷을 비롯하여 언제 어디서나 누군가와 접속하고 접촉할 수 있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더 외로워합니다. 그접촉은 언제든지 끊어짐을 당할 수 있는 접촉이기 때문입니다. 그 접촉이 이루어지는 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가 아니라 ‘남에게 보여주려고 만들어낸 나‘이기때문입니다.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이를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사실 집단은 개인의 생각을 내세우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효율성 때문입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만 모여 있으면 결론이 빨리 납니다. 시간이 절약됩니다. 위험 요소도 적습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면 뒷말도별로 없습니다.
결론을 빨리 내고 싶어 하는 곳일수록, 모험하기를 꺼리는 곳일수록 개인에게 주어지는 동조압력이 강합니다. 전체가 잘못된 생각을 하고 한 사람만 상식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동조압력‘은 생각의 질적 차이를 따지지 않습니다. 사느냐 대 사느냐‘의 요구가 강해질수록 동조압력도 강해집니다

사람에 기술을 맞추는 게 아니라, 기술에 사람을맞춘 것입니다. 기술이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오늘날과도 비슷합니다. 기술의 발달은 우리에게 끝없는 적응을 요구합니다. 모두가 새로운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삶의 방식은 비슷비슷해집니다.
기술의 발전은 현대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선(善)‘입니다.
세상은 각 개인에게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와 창의성을 내놓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아이디어와 창의력은 지극히 개인적인 정신 활동입니다.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때 발현되는 능력입니다.
이런 정신 활동조차 사느냐 대 사느냐‘를 위해 발동시키고 경쟁해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피로를 주고 맙니다. 일상을 편하게 만들어주고, 일을 더 빠르게 처리해주는 기술이엄청나게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늘상 피로하다고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감정은 ‘상품‘입니다. 감정이 상품이라는 말이 썩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내 감정이 물건처럼 쓰고 버리고 폐기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면, 우리가감정을 소중히 여길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미 많은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SNS를 봅시다. 우리는 SNS를 통해 다양한 인간관계를맺고, 나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SNS를 통해 드러난 나의 감정은 기업의 이윤을 만들어주는 데에 기능합니다.

현대 사회의 소비 특징이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일을 해서 돈을 벌면 생활에 필요한 것을 샀습니다. 사야 할 목록과 우선순위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세탁기, 냉장고 등 기능이 중요한 제품부터 사던 때가바로 그런 소비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소비 형태는 다릅니다. 필요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라, 기분에 의해사는 비중이 높습니다.
가장 쉬운 예가 바로 체험에 돈을 쓰는 일입니다. 게임앱, 웹툰 플랫폼, 드라마나 영화 구독 서비스, 다양한 캐릭터 굿즈 등에 쓰는 비용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소비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가치‘를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식품, 가구, 가전처럼 물건 자체가 상품인 것들은 완성되기까지의 작업 과정을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상품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가격이 얼마 정도면 적당한

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상품을구매하는 사람이든 구매하지 않는 사람이든, 가치와 가격에 대해 비슷한 기준을 공유합니다. 그러나 감정의 영역이상품이 된 것은 기준을 공유하기가 어렵습니다.
콘서트를 예로 들어봅시다. 열광적인 팬은 수백만 원을주고서라도 콘서트 티켓을 사려고 할 것입니다. 반면 그 콘서트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가치 자체가 없습니다. ‘감동 체험‘이라는 상품의 가치는 개인의 주관에 의해크게 좌우됩니다. 고양감, 열광, 해방감 등이 상품가치의기준이 됩니다. 문제는 그 상품의 가치와 가격이 만족도가
‘높은 쪽‘에 맞춰진다는 것입니다. ‘난 삼십만 원을 주고서라도 가겠어‘라는 사람이 있다면, 가격이 껑충 뜁니다.
이 때문에 역전 현상도 발생합니다. 높은 가격이 곧 높은가치를 나타내는 현상입니다. 비싸기 때문에 더 공감하게되고, 저렴하기 때문에 하찮게 여겨지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비싼 돈을 주고 산 체험에 낮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비싼 값이 책정되어 있으면 그 체험이 다른 유사한 체험보다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를 위해 소비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감정을 상품으로 하는 소비의 특징은 만족이 오래가지않는다는 것입니다. 필요한 기능을 사용하는 소비가 아니라 감정을 체험하는 소비이기 때문에, 또 다른 체험을 하고싶어집니다. 소비는 점점 늘어나고, 소비의 수준도 점점 높아집니다. 쓰는 돈이 점점 많아집니다. 이렇게 되면 소비 그자체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 속에서
‘나의 필요는 사라져버립니다.

‘비싸니까 (그것을 가지고 싶다‘라는 감정의 뒷면에는
‘다른 사람이 원하니까 그것을 가지고 싶다‘라는 감정이숨어 있습니다. 즉 나에게 ‘소중하니까 산다‘라는 사용가치가 아니라 남들도 원하는 것이니까 나도 원한다라는 교환가치가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결정과 선택을 하든, 그것이 콘서트 티켓 하나를 사는 일에 불과하다 해도, 인간의 생각과 행동 아래에는결국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다‘라는 자기 판단이 깔려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자기 판단을 분명하게 가지기가 쉽지는 않죠. 백 년이나 더 옛날에 살았던 소세키도 이와 비슷한 고민을 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나는 그야말로 안개 속에 갇힌 고독한 인간처럼 그 자리에 선 채 꼼짝못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한 줄기 빛이 들어올지모른다는 희망을 품기보다도 내 쪽에서 탐조등을 사용하여단 한 줄기 빛이라도 좋으니 끝까지 명확하게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느 방향을 바라보아도 흐릿합니다.
마치 자루 속에 갇혀서 빠져나올 수 없는 사람처럼 느낍니다.
나는 ‘내 손에 송곳이 단 한 자루만 있어도 어딘가 한곳을 찢어서 보여줄 텐데‘라며 몹시 초조해했지만, 공교롭게도 그 송곳은 다른 사람에게 받을 수도, 스스로 찾아낼 수도 없어서,
그저 마음속으로만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하며 남몰래 우울한 날을 보냈습니다.

2004이때 나는 처음으로 ‘문학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개념을 근본에서 내 힘으로 만들어내는 것 외에 나를 구원할 길이 없다는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는 완전히 ‘타인본위(他人本位)‘로 뿌리 없는 개구리밥처럼 그 근방을 아무렇게나 떠다니고 있었으므로 모두 소용이 없었다는 사실을 겨우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타인본위란 말은 자기 술을 다른 사람에게 마시게 하고 나중에 그 품평을 듣고, 누가 뭐라 해도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이른바 남 따라하기를 의미합니다.
소세키가 말한 ‘나를 구원하는 일‘이라는 말이 거창하게여겨지나요? 그러나 우리 일상의 모든 일들은 매순간 ‘나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된다‘는 판단하에 행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인생 전체를 염두에 두면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남을 따라 하는 일이 습관이 될 때 발생합니다.
사소한 일도 주변의 누군가를 참고하면서 결정하게 되면,
만약 주변에 참고할 만한 타인이 없을 경우 아무 일도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면 자기만의 생각이 잘 만들어질까요? 같은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어떤 사안에 대한 찬반을 말하는 상황에 놓였다고 가정해봅시다. 여러참석자들이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첫 번째 발언자부터 계속찬성을 말하는 상황에서 내차례가 왔을 때, 여러분은 강하게 반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미 다수의 전문가들이 찬성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상태라면 나 또한 애매하게 입장을 돌려 말하게 됩니다.
나의 의견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그 의견을 타인에게 말하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반대를 이야기한 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불안도 올라옵니다. 잘못해서 전체 분위기를 망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눈치를 살펴서 그 순간을 넘어간다고 해도, 마음은 계속 불편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제대로 인정받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기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이 인정욕구는 능동적인 행동을 통해 채워질 때 충분함을 느낍니다. 남들과 비슷하게 행동하여 칭찬받는다고해도 그것이 ‘나답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본인도 잘 압니다. 때문에 남들과 비슷하게 행동하는 게 편할 수는 있지만,
그 편안함은 공허함이 되고 인정 욕구가 제대로 채워지지않습니다.

인간에게는 모두 ‘내가 보는 나‘가 있습니다. 스스로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상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사람은 대개 그 모습대로 나를 봐주지 않습니다. 내가 보는나의 모습과 타인이 보는 나의 모습. 이 두가지가 일치하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대개 두 모습에는 차이가 나고, 이차이 때문에 우리는 상처를 받습니다. 인간관계란 이 두 개의 나 사이를 잘 조절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번거롭고 힘든 일이기도 하지만 어른이 되어가고, 인간관계가 많아질수록 이 문제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나가 다른 건 사실은
‘내‘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이 변화의 핵심은 바로 ‘사회적 위치‘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수많은 ‘사회‘를 만납니다.
이사를 다니고, 학교를 옮기고, 새로운 친구가 생기고, 직장이 바뀝니다. 한 사회 속에서의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따라 ‘내 모습‘은 변화합니다. 사회 또한 계속 바뀝니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구성원들이 바뀝니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선택할 때, 그 안에서의 내 위치가어떨 것인지를 최대한 확인하고 선택합니다. 때문에 그 사

회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생기는 것입니다. 내 선택이 옳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 알아보고 선택한 사회라고 해도, 처음에는 환영을 받는다고 해도 상황은바뀌기 마련입니다.
나를 지지해주던 좋은 상사가 회사를 떠나고 이상한 사람이 뒤를 이어 상사가 되면, 한순간에 천국에서 지옥이 되기도 합니다. 타인의 변화가 나에게 영향을 크게 미친다는사실 자체에 화가 납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나 또한 항상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자신을 ‘똑같은 나‘로 느낄까요.
스스로 변화가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너무 변화가 없어 답답하고 바보처럼 느껴지나요? 어느 경우든 분명히 나는 매일 변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의 정도가급작스럽지 않아서 느끼지 못할 뿐이고, 변화하면서도 어떤 상태의 평형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화학에 ‘동적평형‘이란 개념이 있습니다. 바다가 끝없이움직이고 있지만 겉으로 볼 때는 잔잔해 보이는 것과 비슷합니다. 매일 똑같은 아침에 잠에서 깨 여느 때처럼 활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몸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의 경험에 따라 가치관도 변합니다. 그러나 어떤 상태의 값을 유지하기 때문에 같은 나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격이라고 하는 건 변하지 않는 성질이 아니라 내가 유지하고자 하는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부끄러움만큼 ‘나다움‘을 발견하게 하는 감정이 또 하나있습니다. 바로 다른 사람에게 응석을 부리고 싶은 감정입니다. 응석은 절대 나쁜 행동이 아니라 아이처럼 솔직해지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입니다.
나는 응석을 부리고 싶지만 다른 사람의 응석에는 엄격한 경우가 있습니다. 타인의 응석에 엄격하다면, 그만큼 자기 안에 응석 부리고 싶은 욕망이 해소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감정의 원형은 어린 시절 형제간의 싸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형제간의 다툼은 부모에게 응석 부리고 싶은 마음을 두고 티격태격하는 것입니다.
응석을 부린다는 건 내가 원하는 게 있고, 그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경우에는 응석으로 나타나겠지만, 성인들에게도 자기 욕망을 잘 드러내는것은 중요합니다. ‘이건 싫다, 이건 좋다‘ ‘이렇게 해줬으면좋겠다‘ 등을 자기답게 잘 표현하는 것이 ‘나다운 나‘를 찾는 길입니다. 타인에게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나‘의 차이를 좁히는 방법입니다. 나를 타인에게 잘 소개하는 일입니다.

이 책에서 프롬은 ‘나는 과연 자유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은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오래된 여러 관습에서 해방되어 왔습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전근대적인 마을 공동체의 속박, 종교의 계율등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를 손에 넣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유에는 대가가 있습니다. 자립해야 합니다.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부모와 연장자의의견, 집단이 주는 규율에 복종하는 게 아니라, 나 개인이결정해야 합니다. 문제는 내 결정이 옳은 것인지,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자유는 동시에 ‘독립‘을 대가로 합니다. 집단에 소속되어 복종할 때 얻는 여러 이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유로워 보이는 도시인들이 고립, 고독, 공포 같은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 건 이 때문입니다.

프롬은 여기에 ‘근대인의 자유의 양면성‘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초래한 고독감, 거대한 사회 구조에 자신이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감정들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이 감정을 일상에서 다양한 오락 활동을 통해 감춥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근원적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단숨에 쏟아져 나옵니다.
이런 고립감, 무력감이 심해지면 우리는 공포에 가까운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특정한 권위, 의지할 수 있다고생각하는 대상에 집중합니다. 모처럼 손에 넣은 자유를 견디지 못하고 구원을 찾아 스스로 자유를 바치게 됩니다. 이것이 히틀러의 파시즘이 성공했던 이유입니다.

자유는 인간 행복의 필수 조건이지만 고독과 책임을 각오하지 않고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없고 행복해지기도 어렵습니다.
어느새 고독과 책임을 견디지 못하고 자유에서 도피하게되는 메커니즘, 사실 이 또한 인간의 마음이 가지고 있는요소입니다. 문제는 이 자유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개인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것입니다. 집단적 상승효과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비단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과 같은 상황이 아니어도, 우리는이와 유사한 사례를 숱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프롬은 이런 말을 합니다. "죄를 지었다고 괴로워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인간은 선한 일을 할 수 있고, 그를 위해 결정하고 선택하는 행위를 통해 ‘균형‘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인간은 모순된 존재이지만, 그렇기에 해결을 생각하고실행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선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지만, 선한 일을 실행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개인의자유를 막는 집단의 요구에 맞서는 일이 곧 ‘선한 일‘이라는 논리는 여기에서 등장합니다.
진정한 개인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퇴행적 해결이 아닌전진적 해결을 향해 나아감을 뜻합니다. 때문에 진정한 개인주의란 나를 잃어버리는 일인 ‘악‘으로부터 벗어나 개인의 자유, 긍지, 존엄 등을 선택하는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나의 자유, 긍지, 존엄을 선택하는 일이 곧 인간이 ‘동물‘이 아니라 ‘인간답게‘ 존재하는 사회와 일치되는일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인주의자가 ‘세상과의 일치감을 느끼는 방법입니다.

인간의 신체는 유한하고 나약합니다. 그 한계를 안다면그릇된 방향에 이상한 힘을 쏟아가며 사는 것은 큰 낭비입니다. 남들의 요구에 부응하느라 허덕이는 것은 쓸데없는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어디에 힘을 쏟아야 하는 것일까요. 내 마음을 스승으로 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장자는이렇게 말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심지어 스승으로 삼는다면, 스승이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변화의 이치를 분별하여 스스로 깨닫는자에게만 스승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자에게도 스승이 있다. 있는 그대로의 마음에 따르지 않고 옳고 그름을 논하는 상황은 까마득히 먼 월(越)나라로 오늘 여행을 떠나 어제 도착한 상황이나 마찬가지다.
장자의 말대로라면 내 안에는 나를 이끌 스승도, 나를 무너뜨릴 한심한 적도 함께 있습니다. 깊은 곳에 있는 내 마음과 솔직하게 마주할 때 내 마음은 나에게 가장 좋은 스승이 되어줄 것입니다.

16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사상가 미셸 드 몽테뉴는 이런을 남겼습니다.
나는 검소하고 광채 없는 생활을 드러내 보이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인생에 관한 철학이란 풍요로운 실질이따라오는 삶에도, 또 평범한 한 인간의 삶에도 해당하므로,
그것으로 족하다. 인간은 저마다 인간 존재의 온전한 형태를갖추고 있다."

흔히 ‘수상록』이라고 하는 몽테뉴 저서의 원래 제목은
‘에센(Essais)‘입니다. 문학 장르에서 개인의 생각과 경험을

자유롭게 써내려가는 글을 ‘에세이‘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
‘에세‘에서 온 말입니다. 몽테뉴가 자신의 저서에 이 제목을붙였을 때 ‘에세‘는 글쓰기의 한 장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시험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다고 합니다.
몽테뉴는 이전의 사상가들이 쓰던 글쓰기로부터 벗어나논문도 소설도 아닌, 떠오르는 대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실험적 글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당시의 문필가들이라틴어로 글을 쓴 것에 반해 몽테뉴는 일반 시민들이 쓰는프랑스어로 이 책을 썼습니다. 몽테뉴는 자신의 글쓰기 ‘에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작가들은 자기 존재를 무언가 특별하고 색다른 특징으로 세상에 알리려 한다. 하지만 나는 문법가도, 시인도, 법률가도아닌, 그야말로 인간 미셸 드 몽테뉴로서, 나라는 보편적 존재에 의해 자신을 드러내는 최초의 인간이다. 다른 사람이 내가 너무 나에 대해 말을 많이 한다고 불평한다면, 나는 반대로 ‘그들이야말로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는 주제에‘라고 말해주겠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행복해지는 길은 불행한 일을 겪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일을 겪든 자신을 존중하는태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존중하는 방법을 아는 데에서 오는 깊은 만족감. 이를 아는 사람의 인생은 결국 행복해질 수밖에 없다고 몽테뉴는 말하고 있습니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자유롭게 결정했다고 생각할 때조차, 사실은 결정을 제약하는 요소들이 굉장히 많다고 말합니다. 어떤 결정에 관련된 요소들 중에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적습니다. 나머지요소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유롭게 선택했다고 하는 많은 일들은 사실 ‘알수 없는 일입니다. ‘운명적‘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도리어 운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운명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살아가면서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을 추구하면 됩니다. 자기다운 선택을 끊임없이 반복해나가면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야어쩔 수 없는 운명 또한 자유롭게 살아간 증거로 받아들일 수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인생에서 나쁜 일이 있을 때에도 우리는 자신의 모자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의 노력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이든 마음을 크게 둘 일이 아니라고 몽테뉴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수상록』에서 인용한 이탈리아의 시인 마닐리우스는 운명에 대해 이런 설명을 더합니다. "훌륭한 이성을 가진 사람, 행운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운명이 미소 짓는 게 아니다. 운명은 구별 없이내키는 대로 우리 사이를 돌아다닌다. 이는 받아들여야 할진실입니다. 운명에게 이런 힘이 없다면, 운명을 운명이라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막강한 운명의 힘에 굴복하라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운명을 대수롭지 않게 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피하려 해도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 있습니다. 악한 이가 행운을 차지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운명의 것‘이라고 넘겨둡시다. 대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합시다.
몽테뉴는 평범한 개인도 위대한 정신을 소유할 수 있고,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정신을 둔하게, 무디게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해야만 한다라는 온갖 상념에 시달릴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가진 위대한 능력은 바로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입니다. 앞에서 불행과 행운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균형 있는 인식을 하려면 ‘내 생각을 내가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져야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주의자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생각할 여유‘를 뺏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몽테뉴는
세상은 영원한 그네나 다름없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끊임없이 흔들린다.고 했습니다.

몽테뉴는 이 세상을 흔들리는 그네에 비유했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흔들리는‘ 그네 위에서 살아가려면 깊이 몰두하는 ‘침잠(沈潛)‘,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내성(內省)‘의 힘이 필요합니다. 변화무쌍한 현대 사회에서순발력으로 승부를 보는 것은 더 이상 시대의 덕목이 아닙니다. 혼자 시간을 보낼 줄 알며, 남들보다 늦더라도 더 큰시야를 가질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오늘 겪은 불행을 내일의 행운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크 세주: 나는 무엇을 아는가 라는 정신
"나는 모든 일에 대한 끔찍한 무지 속에 있다"라는 말을남긴 사상가가 있습니다. 프랑스의 과학자이자 철학자, 종교학자인 블레즈 파스칼입니다. 파스칼은 몽테뉴 다음 시대에 활약한 지성입니다. 세대가 달랐기에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지만 파스칼의 저서에는 몽테뉴를 상대로 퍼부은공격적인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파스칼은 몽테뉴의사상을 마냥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영향도 많이 받았습니다.
몽테뉴가 인간 존재를 긍정했다면 파스칼은 인간이 가진상반된 면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몽테뉴가 인간은 결함이 많은 존재이지만 자신에 대한 탐구를 통해 더 나은 삶을살아갈 수 있다고 믿은 반면, 파스칼은 인간의 삶 자체가가진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절대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파스칼의 사상은 저서 『팡세』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은 파스칼이 생전에 남긴 원고들을 사후에 편집해서출간한 것으로, 인간학부터 신학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파스칼은 인간의 본질적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정말 신랄한 평가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고유의 존재 안에 지니고 있는삶에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타인의 관념 속에서 하나의 상징적 삶을 살기를 바라고 이것을 위해 그럴듯하게 보이려고노력한다. (중략) 우리는 용감하다는 명성을 얻기 위해서라면기꺼이 겁쟁이라도 될 것이다.
파스칼에게 인간은 저속하기도 하고 위대하기도 합니다.
자기 안에 선함을 이룰 수 있는 본성이 있다는 점을 사랑해야 하지만, 자기 안에 있는 저속한 점은 경멸해야 한다고말합니다.
그는 인간의 생각하는 정신에는 ‘기하학적 정신‘과 ‘섬세
‘한 정신‘ 두 가지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니시다 기타로와 친구 사이이자 서구에 영향을 많이 미쳤던 선불교 철학자, 스즈키 다이세쓰는 인간 성질의 모순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세계라고 말해도 좋고, 인간의 성질이라 말해도 뭐라말해도 괜찮지만, 아무래도 모순이 있습니다. 충돌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와 같은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충돌이라고 할까, 모순이라고 할까, 이것이 곧 인생이다.
인생이라든가 인간성이 모순되었다기보다는 모순 그 자체가인간성이다. 인간 세계이다. (중략) 모순 그 자체가 이 세상의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 편한 일은 존재하지 않게나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
인간의 모순성을 말하는 선불교의 철학이 현대인들에게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애초에 ‘이 세계의 모습‘, 그리고
‘‘나‘가 정해진 게 없는 모순덩어리그 자체라고 생각하면화낼 일도 슬퍼할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선불교의 마음 수행법은 ‘나‘라는 모순된 존재, 모순된 세계를 받아들여 참된 나, 완전한 나, 오롯힌 나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고 평정심을 가지는 일입니다.

딱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인데 정확한 목적을 찾을수 없다는 제행무상의 세계관을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제행무상의 세계관에서 보면 ‘순간순간‘에 존재하고 있는 나라는 개인의 자세가 가장 소중합니다. 결국행복의 총합을 가장 크게 만드는 방법은 ‘순간의 나‘를 소중히 여기고, 내가 끝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느끼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현재 하고 있는 허름한 일에서 위대한 일을향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는떤 삶을 살든 ‘살아 있다‘는 감각을 유지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책을 읽는 것은 그런 정원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고생각합니다. 자기 마음과 생각을 들여다보는 책 읽기가 되지 않는다면, 그런 기회를 주는 책이 아니라면 좋은 책이되기 어렵겠지요. 이 책이 그런 정원에 들렀다 가는 기분을느끼게 해주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이 책에서는 여러 고전을 다루었습니다. 고전을 읽는 것이야말로 정말 좋은 정원에서 자신의 생각을 다듬어가는시간을 갖는 일입니다. 고전이 담고 있는 ‘정보‘는 옛것입니다. 오늘날의 정보에 비하면 턱없이 낡았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책 중에 ‘고전‘으로 살아남은 책은 ‘정보‘가 중요한 게아니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대화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기에 사랑받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소개한철학자들의 저서가 바로 그러합니다.

좋은 고전을 읽을때 자신과의대화가 잘되는 이유는, 그런 고전이야말로 글쓴이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고전들을 살펴보십시오. 그 하나하나마다글쓴이의 ‘개인‘이 강력하게 담겨 있습니다. ‘자기‘를 만들지 못한 이들 중에 위대한 철학자가 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당대에 ‘스스로 설’ 용기를 냈던 이들입니다. 스스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그렇게 발견한 자신을 믿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 성장하고 나이 들수록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깨달아가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허탈함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니 더욱 ‘자기만의 인생을 느끼는 법‘을 몸에 익혀야 합니다. 인생에 남은 시간이 얼마없다고 느껴질 때가 반드시 찾아옵니다. 중년이나 노년에게만 그런 느낌이 오는 게 아닙니다. 정신을 차려보면 십대 시절이, 청춘의 이십 대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시작과똑같은 기분으로 인생을 끝내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내 인생의 출발점이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직관적으로 ‘시작한다‘는 기분이 무엇인지는알고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주어진 잣대가 아니라 나의 양심, 자유, 각을 중심에 두고 세계를 해석할 줄 아는 사람은 매일 ‘시작하는‘ 기분을 느낄 것입니다.
이 책을 덮는 순간에 그런 ‘시작‘의 기분이 들면 정말 좋겠습니다. 저는 이제 여러분과의 대화를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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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화를 내지 않고는 표현할 수 없는 사연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걸핏하면 화를 내는 사람은 그 안에 거대한 슬픔을 품고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화를 자주 낸다. 그런 의미에서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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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심윤경 지음 / 사계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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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가 사춘기가 되었을때 마음을 다잡고 싶을 때 다시 읽어야 할 책!

이후로 우리는 아빠가 주신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지지, 격려, 이해, 어느 한 단어로딱 떨어지게 표현할 수는 없는 어떤 것이었다. 오랜 고민과 의논 끝에 우리는 그것이 ‘편안함‘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좋은 부모가 아이에게 주는 것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가장 차원 높고 아름다운 것은 바로 ‘편안함‘이라고 생각한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여러 가지 두려움을 떨치게 해주는 것. 부담 없는 편안함.
부모가 아이에게 무언가 좋은 것, 훌륭하고 귀한 것을 해주는 것이 물질적 응원이라면 부담 없는 편안함은아이가 받은 것들을 가지고 마음껏 제 기량을 발휘할수 있도록 해주는 내면적 지원이다. 친구는 대학원 진학이라는 부담스러운 과업을 눈앞에 두었을 때 아버지에게서 "거 뭐 될 필요 없다"라는 말씀을 듣고 마음이편안해지고 용기를 얻었다. 많은 부모가 물질적 지원을아끼지 않으며 아이의 성공과 성취를 빌겠지만, 아이의 마음이 편안해져서 제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신의 한 수를 둘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진짜 좋은 부모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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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는 부쩍 ‘어떤 상대와 결혼해야 하냐‘는 질문을 많이받는다. 최적화된 상대란 없다. 15년간의 결혼 생활을 통해이 세상엔 내 남자, 내여자란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고 체념했다. 사람을 소유할 수도 없고, 상대를 내 입맛대로 바꿀 수도 없고, 끊임없이 같은 깊이로 사랑할 수도 없다.
결혼이 인생에서 하나의 큰 획을 그어주면서 기분 전환

이나 새로운 도전이 될 수는 있어도 행복을 보장해주진 않는다. 결혼은 동화책처럼 "그들은 그 후 영원히 행복하게살았다"도 아니고 결혼 전 일상처럼 좋았다가 좋지 않았다가를 반복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삶이다. 결혼을 해도 둘다 여전히 불완전한 인간임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그래도나는 서로를 좋아하는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완전에가까운 애정 표현은 결혼이라 생각하고, 결혼을 하면서 다른 인간에 대해 깊이 이해하거나 내가 이해받으려고 노력한다는 면에서는 결혼이 꽤 의미 있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 빛과 그림자가 있듯이 결혼에도 행복과 고통이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한다. 결혼을 하면 보이지 않던여러 갈등 요소가 생기며 어두운 그림자의 부분을 끌어안을 인내심과 이해심이 중요해진다. 결혼하면 "너를 행복하게 해줄게"라는 말은 그 순간에는 진심이겠지만 배우자 포함 그 어떤 가까운 인간관계도 나의 인생을, 나의 행복을,
내가 외롭지 않음을 보장해줄 수는 없다. 고독은 스스로떠안고 처리해야만 할 것 같다.

‘태도 attitude‘란 ‘어떻게 how‘라는 살아가는 방식과 가치관의 문제로, 그 사람을 가장 그 사람답게 만드는 고유자산이다. 나는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삶의 태도들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그 태도들의 틀 안에서 개별적인 문제들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알기어려운 것이 나다. 이제부터 집중해 생각하자고 해서 바로생각을 길어 올릴 수도 없다. 그 생각은 자칫 당시 분위기에 휘둘린 감상일 수도 있다. 현실에서는 오히려 ‘생각‘하고 ‘행동‘하기보다 ‘행동‘을 하면서 ‘생각‘이 따라서 정리되었다. 그때의 청승맞은 여행도 그저 생각을 비우는 역할을했을 뿐이었고, 깊은 생각은 돌아온 후 새로운 일의 가능성을 손수 알아보려고 움직이면서 비로소 자극받아 꿈틀대기 시작했다. 나의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나의 밖을

둘러봐야 했던 것이다.
일단, 어쨌든, 움직여보는 것의 중요함을 통감했다. 게다가 생각하는 것에만 너무 중점을 두다 보면 자칫 행동하지 않을, 움직이지 않을 부정적인 이유를 만드는 데 생각이 더 쓰인다. 나한테는 무리니까, 난 이것밖에 못하니까,
라며 스스로에 대한 선입견을 만든다. 자신에 대해 모르는것보다 더 나쁜 것은 나를 ‘이렇다‘라고 단정 짓는 것이다.
나에겐 뭐가 있지? 내가 뭘 할 수 있지? 이렇게 생각이뻗어나가면 또 하나의 내가 나를 바라보며 비웃고 있다.
넌 아무것도 못하잖아. 그냥 현실에 만족하고 살아. 그게무난해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보기도 전에 ‘아냐, 됐어. 나따위가 뭘‘이라며 부푼 마음을 누르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쓴다.
자신의 수준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나한테는 이것이 최선이야. 라고 현실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큰 용기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행동을 일으킨 다음 자신에게 맞

는 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얻는 깨달음이지, 아무것도 하지않으면서 머릿속에서 선만 긋는 것과는 다르다. 확고한 생각이나 단단한 가치관이 되어주는 것들은 내가 자발적으로 경험한 것들을 통해서 체득된다. 생각이 행동을 유발하지만 사실상 행동이 생각을 예민하게 가다듬고 정리해준다.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을 때는 일단 그 상황에 나를집어넣어보는 것이 좋다. 가장 확실한 리트머스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용기는 그래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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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의 대화

감당해야 할 그 모든 짐을 감수하고서라도, 아무리 생각해봐도 ‘솔직함’은 살아가는 데 장기적으로 ‘옳은 방법’인 것 같아. 솔직함을 포기하면 당장의 불편함이나 위기는 모면해도 가면 갈수록 근본적인 만족을 못 느끼고 ‘얕은 위안’으로 ‘겨우 연명’하거든.

다‘는 건 ‘그럼 이것만 하겠다‘와 전혀 다른 말이니까. 오히려 거꾸로 ‘난 이걸 할 거야‘라고 너무 강하게 집착하면 그게 더 무리해서 가능성을 좁히는 일이 돼버릴 수도있어. ‘이런 유형의 사람과는 관계를 맺지 않는다‘ ‘저런장소에는 가지 않겠다‘ 등, 아무튼 내가 하고 싶지 않은것들, 안 할 것들을 사소하게라도 조금씩 테두리를 정리해가다보면, 의외로 좋은 것들이 결과적으로 내곁에 남게 되고, 나만의 기준이 만들어지고, 저절로 나 시에대해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 같아.
가끔 경우에 따라서는 ‘이건 하겠다‘나 ‘이건 안 하겠다‘를 넘어, ‘지금은 아무 선택도 하지 않겠다‘라는 선택지도 있어. 선택을 하지 않겠다는 선택. 지금은 이대로가만히 있겠다는 다짐도 어떤 상황에서는 대단한 의지와 중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더라. 특히 회사 같은 조직에 있다보면 비유를 하자면, 가끔 지진같은 상황이 벌어져서 사람들이 허둥지둥 난리가 나. 주변 눈치를 보는 이들, 아무개의 라인에서는 이들, 도망가는 이들 등등. 개중에는 그 소란에 초연해서, 담담히 그 상황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애들이 실은 알짜란다. 이런 게 또 은근 내공이 있어야 가능하거든.

아무튼 요조야, 나는 가끔 네가 조금 덜 퍼주고, 더 못돼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의 그런개방성이나 차별하지 않는 평등주의적 태도가 너만의어떤 부드러운 결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해.
생각해보렴. 만약 요조가 자신이 가진 자원을얄짤없이 관리하는 데 능한 사람이었다면, 너의 목소리는 결코지금의 그 나른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아니었을 거야. 남들보다 조금 더 마음이 헤퍼서 조금 더 손해보고 상처입는다 해도, 그래도 역시 ‘줄 수 있는‘ 사람, ‘주는 법을아는‘ 사람은 더없이 근사한 거 아닐까.

셋째, 강연 내용을 외울 때는 ‘시각적으로‘ 외워야 한다는 것. 강연에서 할 말을 보고 읽을 게 아니라면 어느 정도 머릿속에 외워둬야 하잖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방법은 이래. 강연록을 A4용지로 출력해서 반으로 잘라. 그런 다음, 강연할 때 들고 볼 수 있는 A5사이즈 인덱스 카드에 붙여 그 인덱스 카드를 돌려보면서 외우는데, 이때 중요한 건 거기 쓰인 문장을 하나하나 달달 암기하는 게 아니라, 각 인덱스 카드를 ‘시각적‘으로 ‘통으로‘ 기억해야 한다는 거야. 내용보다 ‘전체 구성‘ 혹은 뼈대를 순서대로 눈에 익혀버린다고나 할까. 그다음 단계로 각 인덱스 카드의 소제목, 핵심 단어, 핵심 문장을 머릿속에 익혀.

얼마 전에 어딘가에서 읽은 개념인데요. ‘점화효과‘라는게 있대요. 시간적으로 먼저 제시된 자극이 나중에 제시된 자극의 처리에 영향을 주는 촉진현상을 나타내는 인지심리학 용어라고 하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에게노출된 메시지들이 은연중에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거예요.

뭐 이런 이야기인데요. ‘아니, 고작 단어 몇 개로 인간이 이렇게 홱홱 변한단 말이야? 인간이 그렇게 바보냐!‘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지만, 실은 인간은 바보잖아요.
정말 바보가 맞아요. 그래서 단어 하나에도 인간은 영향을 받죠.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는 방송, 우리가 듣는음악, 우리가 만나는 친구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영향을받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 점화효과라는 것은 지속력이 길지는 않아서 일정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자기 모습대로 돌아온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노출된다면 은연중에 우리 태도의 일부가 되겠죠.

사람들은 왜 타인의 생각이 나와 같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할까. 상대의 ‘다름‘을 어째서 섣불리 ‘틀림‘으로 낙인찍는 걸까. 한데 요즘 같은 온라인 환경에선 우리는 너무나 많은 타인들을 너무나 가까이서 접하면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더욱 감당하기 버거워하는 것 같아. ‘톨레랑스‘ 즉 관용의 문제랄까. 나와타인 간에 생각의 차이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태도들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

는구나, 아, 그렇구나‘ 하고 차이를 인정하고 그대로 두는 태도.
2. 나와 다른 부분이 조금 불편해서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
3. ‘왜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좀더 자세히알려줄래?‘라고 의견을 주고받거나 토론하는 것. 어느한쪽이 설득될 수도 있지만, 결론을 내린다거나 누가 이기는 것을 목표로 하는 건 아냐. 다만 서로의 관점을 좀더 깊이 이해하고 자신의 논리에서 부족한 부분을 자각하게 되는 효과는 있겠지.
한편 나와 타인의 생각에 차이가 있을 때 결코 보여서는안 되는 태도는 이런 거야.
‘너의 생각은 틀렸어. 그러니까………’뒤에 이어지는 말은 이래.
‘너의 생각은 틀렸어. 그러니까 입다물어.‘
‘너의 생각은 틀렸어. 그러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말해.‘
이건 분명히 폭력인데, 그 폭력성을 숨기기 위해 ‘정의‘나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명분을 빌려와서 휘두르는 부분이 가장 슬픈 것 같아

저는 지극히 경계하는 두 타입의 부류가 있어요하나는 극단적인 사람들이에요. 언니가 말한 ‘다름‘을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렇게 극단적인사람들 같다는 생각을 해요. 아무리 옳은 대의를 가지고있다고 해도, 아무리 정의로운 이론을 믿는 것이라 해도그것이 극단적이 될 때는 아주 위험해지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극단적 태도가 세상을 아주 단순하게 선과 악으로만 보게 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맞고 나랑 의견이다르면 너넨 다 적이야, 악이야, 이렇게 몰아가기 쉽고요.

저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을 참 좋아해요. 그리고그 말이 정말 어려운 말이라는 것도 알아가는 와중이에요. 늘 깨어서 세상을 바로 보고 옳은 편에 서야 하지만,
옳은 편에 서 있으면서도 깨어 있어야 해요. 옳은 편에 섰다고 안심하면서 내가 뭘 잘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옳은 편이라는 명분에 취해서옳지 않은 편에선 사람들보다 더 깜깜한 혐오 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계속 나자신을 의심하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지적받으면 괴로울 수는 있어. 하지만 그에 너무 상처받아서 자학하거나 공격하거나 징징대면 그건 프로의 자세가 아닌 것 같아. 적어도상대가 일리 있는 말을 하고 정확하게 문제를 짚어냈다면, 그것을 수용하고 문제를 바로잡고, 어서 털고 일어나 다시 또 걸어나가야지. 남탓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오로지 일이 잘되게끔 하는 일에만 집중하는 거지. 언제기회가 닿으면 일본드라마 <중쇄를찍자!>를 한번 봐봐.

인생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정돈해야겠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무엇이 나를 진심으로 행복하게 해주는지, 어떤 사람들을 가까이에 둘지, 대충 이맘때면 정리가 되어야 한다고 봐. 인생살이의 기본 방향성에 대한 방황은 더이상 질질 끌지 말고 아무리 늦어도30대에선 끝내야 하지 않겠니?
하지만 이렇게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심플하게 추린다고 해도 자신의 생각과 취향을 지나치게 고집하느라시야가 좁아지는 건 조심해야할 것 같아. 예를 들자면
"아, 난 이런 타입과 안 맞아"라며 바로 사람을 판단하고배제해버리거나, 나한테 어울린다고 믿는 옷스타일이나헤어스타일만 고수한다거나(이 대목에서 왜 나 찔리지?).
40대가 되어 자신의 핵심 가치를 추리면 그것을 단단한베이스로 두고 새로운 가능성과 변화를 모색해볼 수도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돼. 사소하게는 평소 안 가본장소에도 가보고, 안 입어본 색깔의 옷도 입어보고・・・・・

저는 정말 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잘 모르겠거든요. 매 순간 저는 주변의 환경에 휘둘리기만 해요. 세상은 무의미하다는 소설을 읽으면 저도덩달아 삶은 무의미하다고 믿다가도, 감동적인 영화를보고 나면 삶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의미를 감각하게돼요. 어제는 좋았던 사람이 오늘은 갑자기 미워지기도하고요, 어제는 결코 동의할 수 없을 것 같던 의견을 오늘은 갑자기 이해할 수 있게 돼요. 이렇게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다보면 어떤 순간, 사람들이 저에게 ‘요조답다‘
‘신수진답다‘라고 말해요. 그럼 저는 언제나 기가 차서반문해요 나다운 게 대체 뭐냐고 나답다라고 말할 수있을 만한 어떤 태도가 나로부터 반복되고 있는 거냐고오늘날까지도 제 고민의 모이가 제가 마시는 맥주의

안주가 ‘나다운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지만, 여전히오리무중이에요. 다만 제가 겨우 아는 것은 나는 나를 모른다는 것, 그저 나도 어쩔 수 없는 나의 선택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나의 누적된 선택들이 나를 더욱 나로서 만들어준다는 것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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