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발명 - 당신은 어떤 이야기의 일부가 되겠습니까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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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반복하고 있지만 그 반복 속에서도 나를 조금더 앞으로 가보게 해주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 덕분에마음이 흔들릴 때도 많았지만 마음이 향하는 방향은 있었다. 어두운 날도 저 밑바닥까지 어둡지는 않았다. 내가지금부터 들려주려고 하는 이야기들은 편의상 제목을 달긴 했지만 앎, 우정, 사랑, 연결, 회복, 경이로움, 아름다움,
자부심, 기쁨과 슬픔, 희망같이 우리에게 대체 불가능한가치를 갖는 단어들이 이렇게 저렇게 섞여 있는 이야기들이다. 내가 돌려주는 이야기들이 기쁘게 이 세상의 일부가 되기를 희망하는, 더 나은 존재 방식을 원하고 만들고 싶어 하는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고 힘이 된다면 행복할 것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의 일부가되어 이야기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내가 원하는 삶이다.

사실 내 친구처럼 뭔가를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서 알게 되는 것은 한 인간이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자 힘이다. 그런 일이일어난다면 우리 삶은 방향을 바꾸게 된다. 가만히 있는것보단 사랑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가만히 있는 것보단사랑할 것을 찾아 길을 떠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길을 떠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길을 만들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나는 그들은 사랑하는 가족은 구하지 못했지만 그 사랑하는 가족이 살았을 수도 있는 세상의 많은 생명을 이미 구했고 또 구하려고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우리는 자신이 누구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누가 우리를 더 살아 있게 하려고 하는지 모른다. 충분히 존중받지도, 충분히 위로받지도 못한 사람들이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
지금은 인간 정신을 극도로 왜소하게 만드는 목소리들이힘을 얻는 시대다. 적응의 동물인 우리는 이런 분위기에도 익숙해져 살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살다 보면 우리가영영 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행복과불행, 슬픔과 상실,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인 희망과 사랑에대해서 말하는 법 자체를 잊어버리게 된다. 최악의 상황에 적응하느니 최선의 것에서 위안과 기쁨을 얻을 힘이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이런 정도의 정신적 붕괴를 감당할 수 없다. 유족들을 조롱하는 사람들 자신도 사랑과 이해를 원한다. 그것도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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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동안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은?
자신의 이야기를 찾고 만나고 만드는 것!
이 책을 읽고 작가의 발자취를 보니
이 작가가 쓴 책은 꼭 읽어보고 싶다
어쩐지 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좋은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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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시작 부분을 살펴볼까요? 제1권은 이른바 ‘좋음agathon‘에 관련된 질문입니다. ‘좋다‘는 게 뭘까요? 자주 쓰는 단어이면서도 정작 그 의미에 대해서는 곰곰이 생각하지 않은 채 습관처럼 사용하는 단어인데요, 아리스토텔레스는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삶에서 그냥 지나쳤던 ‘좋음‘을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시작하는 핵심질문으로 삼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좋음‘을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그 사람 참

좋아"라든가 "이 의자는 좋습니다"처럼요. 이 일상 속의 진술을확대해나가보죠. 그 사람이 좋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잘생겼다는 뜻일까요? 돈이 많다는 뜻일까요? 권력이 있다는 뜻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답합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에대해 ‘좋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겐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그 무엇"이 있다고 판단내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좋음‘은 그것을 ‘마땅히‘ 그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음‘은 사람에게도 책상에게도 가능합니다.
좋은 책상이란 뭘까요? 책상 구실을 하는 책상이죠. 그게 좋은 책상입니다. 그것을 그것으로 만들어주고 있으니까요. 만약의자가 있는데, 의자 구실을 못 합니다. 사람이 앉았더니 무너져요. 의자는 마땅히 의자다워야 하는데, 당연히 의자로서 갖추어야 할 것을 겸비하지 못했으니 좋은 의자가 아니죠.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요? 인간다운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이래야 하며 인간이라면 이래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타인에 대한 연민을 갖고있는 사람을 우리는 사람다운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으로서의 덕목을 지키지 않고 심지어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면 "사람같지 않다"라고 평가내리지요.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은 사람으로 갖추어야 할,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요소를 갖고 있지못하기에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좋음‘을 이렇게 정의하면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

니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좋은 사람도있고 좋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좋음‘과 ‘좋지 않음은 무엇에 의해서 결정되는지 당연히 궁금해집니다. 왜 어떤 사람은좋고 왜 어떤 사람은 좋지 않은지,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인지, 왜어떤 국가는 좋고 어떤 국가는 좋지 않은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싶어집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면 그의 천성이 그를 좋은사람으로 만들어주었을까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에 따르면좋은 사람은 천성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좋음‘과 ‘좋지 않음을 갈라놓는 과정은 ‘탁월성‘ 혹은 ‘미덕‘이라고 번역되는 아레테are의 유무입니다. 탁월성은 일상생활에서 잘 안 쓰는 용어인데요. 좋음을 유지할 수 있는 품성 내지는 마음가짐 혹은 태도로바꾸어볼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우리가 좋다고 이야기하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을만족시켜야 되는데, 첫번째 전제조건은 ‘궁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이다. 역시 일상에서 잘 안 쓰는 단어인데,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이를 "그 자체 때문에 추구할 가치가 있는것"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사랑에 비추어 이해해보죠. 사랑하니까 사랑한다고 말할 수있는 사랑이 궁극적 사랑입니다. 누구를 사랑하는데 그 사람이돈이 많아서도 아니고 잘생겨서도 아니고 권력자이기 때문도 아나고 오로지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가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서라고만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궁극적인 사랑인 것입

니다.
‘궁극적‘ 공부도 가능합니다. 공부를 하는 이유가 출세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면 궁극적인 공부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궁극적인 공부란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며 하고 있는 공부와 같은 것이죠. 지금 출세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공부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우리는 공부를 하고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궁극적‘인 공부를 하고 있는 셈이에요.
어떤 것이 좋은 것이 되려고 하면 요구되는 두번째 조건은‘자족성’입니다. ‘자족성‘도 한자라서 조금 더 어렵게 느껴질 수있지만 우리 일상용어로 표현해보자면 "그것으로 충분하다"에해당될 것입니다. "당신은 왜 철학 책을 읽습니까? 철학 책을 읽어서 출세를 합니까, 돈을 법니까?"라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이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철학의 속성이 ‘궁극적‘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셈인데요. 더 나아가 이런 의문을 품는 사람은 ‘자족성‘
에 대한 개념도 없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철학 책을 읽으면서 내가 몰랐던 걸 깨닫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나 이거깨달았으니 승진시켜주세요, 로또에 당첨시켜주세요, 돈 주세요"
가 아니라 내가 깨달았다면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겁니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자족성‘입니다. 어떤 것이 궁극적‘
인 데다가 ‘자족성‘까지 겸하면 ‘완전성‘에 도달합니다.
자족성, 궁극성 그리고 완전성을 사랑을 통해 이해해볼까요?
누구나 꿈꾸는 ‘완전한‘ 사랑은 무엇일까요? ‘완전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랑이 무엇보다 ‘궁극적‘이고 ‘자족적‘이어야만 합니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유일한 이유가 그 사람이어서라면그것은 궁극적인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그 사랑은 분명 자족적 사랑입니다. 궁극과 자족이 합쳐진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궁극적이고 자족적이니 ‘좋은‘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요.
행복eudaimonia 이라는 건 과연 뭘까요? 행복은 손에 쥘 수 있는 어떤 물질이 아니라 ‘좋음‘이 실현돼 있는 상태입니다. 행복은주관적 감정이 아니에요. 사람이 행복해지려고 하면 여러 가지조건이 필요합니다. 몸의 좋음도 필요하고, 혼의 좋음도 필요합니다. 몸의 좋음은 요즘 우리가 흔히 "몸 좋다"라는 의미와 다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로는 건강입니다. 이것이 내적 좋음이라면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외적 좋음도 필요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의 외적 좋음은 현대적 용어로 바꾸면 사회환경의 좋음에 가깝습니다. 한 사람이 외적 좋음으로 구성되어있는 사회 속에 있다면 그 사람은 좋음의 상태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높겠죠. 역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외적인 좋음이없다면 그 사회 속 개인이 행복해지기 어렵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사회학자의 면모를 지녔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한테는 항상 이 맥락이 등장해요. 한 개인이 좋음에도달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가 철학적 질문이라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좋음을 실현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전형적인 사회과학적 질문이지요.

현대 학문 언어는 알레고리 언어가 아니거든요. 학문의 언어는 보편성을 지향하고 개별성을 지양합니다. 개념이 보편적이어야만 많은 걸 설명할 수 있다고 간주하는 게 학문 언어의 전제입니다. 보편적일수록 단어는 추상적이 되지요. 단어가 지나치게 추상적이면 설명할 수 있는 범위는 넓어지는데 설명의 설득력이 약해지는 약점이 있어요. 하지만 설득력에 한계가 생기는 것을 피하려고 구체적 사례로 하강하여 사례에만 머무르면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의 폭이 좁아집니다. 학문의 언어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줄어드는 위험성을 피하려고, 구체성을 상실하더라도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추상적 개념을 주로 사용하죠. 추상의 힘이 커지면 상상력은 불가피하게 축소됩니다.
알레고리는 추상으로 상승하여 메타의 영역에 머무르면서 상상력이 축소된 학문의 언어와 달리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적 비유를 적극적으로 수용합니다. 알레고리에서는 보편성을 추구하면서도 그 보편성이 지나쳐 구체성을 상실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보편을 위해 상승하는 힘과 구체를 위해 하강하는 힘이 교차합니다.
학자의 학문 언어와 달리 시적 언어는 알레고리를 능숙하게 사용합니다. 시적 주체의 언어에서 "바람이 휘파람 분다" "땅이 목마르다" "곡식이 살찐다" "물푸레나무가 눈물 흘린다"와 같은 비유 이외에도 "감각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관념을 사용하는"(새로운 학문, 292-293) ‘추한 가난‘ ‘슬픈 노년’ ‘창백한 죽음’과 같은 표현이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죠.

한 그 일에 대해 형이상학적 죄가 있다는 거예요. 나치가 범죄를저지르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나치를 막는 행위를 하지 않아 나치가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다면, 그 행위 하지 않은 사람은 형이상학적인 죄를 범한 것입니다.
우리가 시장경제 체제를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시장경제 체제에 죄를 묻는다면 우리는 직접적인 죄를 저질렀다고 할수 없겠지요. 그렇다고 우리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것일까요?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물건을 무조건 싸게 살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소비자로서 물건을 싸게 살 수 있었던 이유가 노동의 대가를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저임금 노동자의 희생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야스퍼스의 말을 들어보시지요. "내가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할 수 있는 바를 행하지 않았다면, 나도 그 범죄에 대해 공동의책임을 진다. 내가 타인의 살해를 막기 위해 생명을 바치지 않고수수방관하였다면, 나는 법적·정치적·도덕적 죄 개념으로는 적절하게 파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유죄임을 느낀다."(《죄의 문제》,
87쪽) 최종 소비자로서 우리는 직접적인 죄가 없으니 떳떳하다고주장한다면, 인간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시장경제 체제는 그 속에 살고 있는 시장형 인간을 점점 더 윤리적으로 무감각해지게 만듭니다. 야스퍼스는 형이상학적인 죄에서벗어나기 위해서는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에겐 또 다른 두번째 ‘거대한 전환‘이 필요합니다. 첫번째거대한 전환이 우리를 탈윤리적인 시장경제체제로 이끌었다면,

시장경제 체제가 빚어낸 야만적 파국 앞에서 우리는 윤리적인
‘대전환‘을 상상해야겠지요. 폴라니는 비시장적 관계를 확장하는것, 그래서 고대적 의미의 살림살이를 확장해나갈 수 있는 것 그리고 공동책임 감각을 회복한 공동체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단박에 두번째 ‘거대한 전환‘이 이뤄지지는 않겠지요. 그럼에도불구하고 우리가 두번째 ‘거대한 전환‘을 기대하는 선택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고 그 선택이 누적된다면 언젠가는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폴라니는 그 선택을 우리에게 숙제로 남겨주었네요.

알아보는 것입니다. 허영심이 강한 사람은 경쟁자의 욕망을 궁금해합니다. 경쟁자의 욕망을 모방해야만 직성이 풀리기 때문이죠.
반면 열정이 있는 사람은 타인에게 무관심합니다. 자신이 무엇을하고 싶은지가 중요하지 타인의 욕망은 참조 대상이 아니죠. 열정 있는 사람은 욕망을 암시받지 않습니다. 열정 있는 사람은 인상을 받습니다. 암시를 받는 사람은 타인의 눈이 어디를 향하는지 살피지만, 인상을 받는 사람은 타인의 눈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눈이 어디로 가는지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인상은 "자신이 스스로 가지게 된 느낌인 반면 암시는 타인이 자기에게 해주는 것"이기에 인상은 "자연발생적이고 암시는 "주어지는 것입니다.(<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78쪽) 암시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이 허영심을 품는다면, 인상에 의해서 움직인 사람은 열정을향합니다.
유행은 서로가 서로의 욕망을 모방하는 것이 꼬리에 꼬리를물고 이어질 때 생깁니다.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유행을 추종하는 사람을 유행의 노예라고 비꼰다고허영심이 세상에서 사라질까요? 유행을 따르는 사람을 속물이라고 냉소적으로 비난하지 않으면서도 상호 모방의 악무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를 고양시켜줘 허영심과 속물적 근성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계기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지라르는 ‘낭만적 거짓으로부터의 탈출 기회를
‘소설적 진실‘의 시간에서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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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로 ‘거만한 바보‘였다. 나는 물질세계에 대해 거의 전적으로 무지했다. 우주·은하·별·행성·물질·생명·진화 같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문과니까.
하지만 ‘인간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도 몰랐다. 내가 옳다고 믿는 이론이 옳다는 증거가 있는지 여부를따져보지 않았다. 그러면서 인간과 사회에 대해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이 진리인양 큰소리를 쳤다. 내가 바보라는 생각을 하니 심사가 뒤틀렸다. 민망함. 창피함·분함・원망스러움을 한데 버무린 것 같은 감정이 찾아들었다.
‘거만한 바보‘를 그만두기는 쉬웠다. ‘난 아는 게 별로없어.‘ 그렇게 인정하고,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점검하는 습관을 익히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크게 나아진 건 없었다.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서 과학 공부를 시작했다.

누구나 그렇듯 훌륭하고 일관성 있는 사람을 좋아했다. 남을 위해 자신을희생하거나 뛰어난 창의성을 발휘해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을 존경했다. 그런데 그랬던 사람이 달라지면 원래부터 권력과 돈을 탐하며 남을 짓밟고 반칙을 저지르던 사람보다 더 미워했다. 훌륭하다가 나빠진 사람이 원래 나쁜 사람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했다. ‘자유의지‘로 선택한 변화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달리 생각한다. 그런 사람을 특별히 미워하지 않는다. 원래부터 나빴던 사람보다는 낫다고본다.
어떤 사람이 가치관과 살아가는 방식을 크게 바꾸는 것을 ‘전향‘이라고 하자. 전향 그 자체는 좋다고도 나쁘다고도할 수 없다. 어디에서 어디로 노선을 바꾸었는지에 따라, 보는 사람이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의 전향을 좋게 또는 나쁘게 평가할 뿐이다. 나는 전향 그 자체를 비난하는 데는 공감하지 않는다. 우리는 절대 진리를 알지 못한다.
옳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생각을 바꾸기로 마음먹을 때가 있다. 게다가 ‘자유의지‘라는 것이 정말 있는지 의심한다. 그런 것을 들어 누구에겐가 감정적 호오好惡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 현명해진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보통은 어리석어진다. 하드웨어·소프트웨어·데이터라는 세 요소를 종합하면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몸의 하드웨어는20대에 정점을 찍고 서서히 내리막을 걷는다. 뼈·근육·관절·시력·청력이 다 그렇다. 뇌세포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뇌의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와 달리 더 더 늦게까지 스스로를개선한다. 학습과 경험을 통해 뇌가 획득하는 데이터는 노년기까지 계속 증가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의 성능 개선과 데이터 증가 효과가 하드웨어 퇴화로 인한 기능 저하를 상쇄하는 동안은 더 지혜로워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화로 인해 하드웨어가 심하게 나빠지면 소프트웨어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한다. 기존 데이터를 상실하는 속도는 빨라지고 신규 데이터 유입은 줄어든다. 나이를 먹으면 젊었을 때보다 덜 똑똑해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예전보다 훨씬 덜 똑똑하다. 그렇지만 앞으로 더 어리석어질 것임을 알 정도로는 똑똑하다.
뇌과학자들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뉴런은 서로 연결함으로써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내고, 사람의 생각과행동은 거꾸로 뉴런의 연결 패턴에 영향을 준다.‘ 자아가 뇌에 그저 깃들어 있는 게 아니라 뇌를 형성하고 바꾼다는 말이다. 물질이 아닌 자아가 물질인 뇌를 바꾼다니, 신기하지않은가? 내 뇌는 매순간 퇴화하고 있다. 내 자아는 날마다어리석어지는 중이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덜 어리석어지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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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 - 소노 아야코 에세이
소노 아야코 지음, 김욱 옮김 / 책읽는고양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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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우주에 관한 해명의 한도가 터무니없게 확대되어가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좋고 나쁨을 떠나서 인간 심리의 한계도 그 어느 때보다 광대하고 깊은 한계를 나타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그다지 복잡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최근에는 인간의 의지가 어떻게 인간의 행동으로 전달되는지 그 세부적인 방법까지 해명되어온 것 같다. 하지만 그 내용자체는 예로부터 그다지 획기적으로 변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별로 변하지는 않았다‘ 는 것은 아마도인간에게는 구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 사람

들 대부분이 나에 못잖게 게으르다. 우리는 획기적인 것을 바라지 않는다. 생각하는 것도 귀찮다. 사고의 비약을 평범한 우리 생활은 따라가지 못한다. 그럭저럭 하루하루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아마도 30대였을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명상록》을 읽고 정말 놀랐던 기억이 난다. 거기에써 있는 것은 대부분 내가 느끼고 있는 것과 똑같았다.
"맞서야 하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것은 쫓지도 피하지도 않고 끝내겠다는 것이다."
라고 아우렐리우스는 쓰고 있다.
"그럴러면 인생에서 몇 가지만 확보하고 나머지는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아울러 다음 사항을 명심하라.
사람은 모두 현재의, 이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삶만을 사는 것임을. 그 외에는 이미 살아버린 것,

혹은 살게 될지 확신할 수 없는 불확실뿐이다. 그렇다, 누구나 인생은 짧으며, 그가 사는 곳 또한 이 대지 중 한 구석에 불과한 아주 작은 점일 뿐이다. 사후의 명성이라고 해서 비록 비할 데 없는 명맥을 유지한다고 해도, 필경 짧은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의 생애는 금방 잊힌다. 고마운 일이다. 사람은 죽는 날부터 착실하게 잊힌다는확고한 목적을 향해 걸어가는 여행을 떠난다. 세계과학자들이 우주 공간을 쏘아올린 위성의 파편 천지로 만들고도 전혀 청소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과는 다르다(가장 최근에는 청소를 하자는 계획도 나오는 것 같은데). 우리의 존재는 죽으면 자연스럽게상쾌한 청정과 무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체념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유효한 인간관계라고 믿게 되었다. 모든 인간관계는, 그게 잘 안 됐을 때는 포기하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의무일지도 모른다. 혹은 명백하게 잘못된 사실로 상대방에게 명예를 훼손당했다면, 신속하게 고소하고재판에 회부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방법이 효과적으로 작용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잘못된 생각이다.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해 반성하게 하는 것, 내 행

!
동의 참뜻을 이해시키는 것, 내가 상대방을 얼마나고려해주고 있는지를 알게 하는 것 등은 처음부터포기하고 넘어가야 한다. 체념이다. 그래야만 나의인간성이 유지되고 평온한 마음으로 살 수 있다는것을 발견했다. 친구에게 오해받는 것도, 가족 중 누군가와 말이 안 통하는 것도 처음부터 포기해버리면 아무 일도 아니다. 그 결과 "나 자신의 영혼 속만큼 더없이 평화롭고 한적한 은신처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한 아우렐리우스 정도는 아니더라도, 나는다른 사람과의 항쟁에서 도망침으로써 큰 바다의거센 파도에 휩쓸려 가기 전에 바닷가를 떠날 수 있었다.
아우렐리우스는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는 본질적인 8개 조항을 마련했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다음과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 모든 것은 우주의 이치에 따라 일어난다.
O잘못은 타인이 저지른 것이다.
0 일어나는 모든 일은 언제든지 그렇게 일어났고, 미래에도 일어날 것이며 현재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0 모든 것은 주관일 뿐이다.
0 각자사는 것은 현재이며, 잃는 것도 현재뿐이다.

방의 비그녀는 선의에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자전거를 받게 될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오랫동안 소중히사용하겠습니다."라고 인사할 것을 예상하고 미리그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말을 잘못 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녀처럼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의마음을 결정해버린다. 고마워하겠지, 미안해하겠지, 좋아하겠지, 라고 미리 상대의 반응을 정의해버린다. 나의 마음조차 시시때때로 변하는데, 타인의마음이야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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