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와 술 말들의 흐름 6
김괜저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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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콤플렉스. 새로운 술을 마셔보고 새로운 연애를 할수록 없어지는 게아니라 오히려 강해지는 콤플렉스. 항상 더 특별한 것,
더 제대로 된 것, 더 용기를 내야 하는 것들이 내 평범한삶의 영역 경계 바로 밖에 보였고 그건 나를 늘 조마조마하게 했다. 다들 하는 것들을 왜 하지 않느냐고, 세상모두가 나에게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냐며 신경질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신경질 속에서 나의 속도와 나의 기준, 나의즐거움들을 지키며 살기란 뗏목에 화로를 싣고 해협을건너는 것처럼 위태로운 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오로지 나다운 내가 되어야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통상적인 것들에 대한 파업을 하는 양 힘주어 살아보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승모근이 딱딱하게 굳는 날이 오고, 그제야 주변을 돌아보니 나 말고도 그 술자리를 뜨려고 눈치 게임을 하고 있었던 다른 얼굴들이 보인다. 다들 똑같았구나. 나는 유별났지만, 나만 유별나지도 않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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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빛과 그림자가 그곳에 있었고
정멜멜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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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작된 스튜디오가 어째서 지금은 주로 사진을 찍고 있는지, 부업으로 작은 빈티지 가게는 왜 하고 있는지,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지만, 중요한 건 틀어진 계획으로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다. 크고 작은 실수들 뒤엔 늘 예상치 못한 배움이 있었다. 말 못할 고충도 뼈저린 교훈도 있었지만 이렇게 시작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환희도 있었다. 멋이라고는 없는 시작이었지만 뒤를 돌아보면 그래도 틀리지 않은 방향으로 걸어오고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지금도 엉망진창일 때가 많다. 처음 해보는 일이 수두룩하고, 해봤지만 여전히 어려운 일들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내가,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번듯한 성공담에서 얻을 수 있는 용기가 있듯 우스운 실패담만이 주는 안도가있다고 믿는 내가 하는 이야기. 어쨌든 우리들은 생선을 굽거나 맥주를 따르는 대신 조리개를 조이거나 렌즈를 닦으며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

내가 스튜디오와 중고 잡화점을 병행하게 된 건 그 후로도 꽤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사실 매일매일 열렬히 꿈꾸던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오래전의 경험들이 언제나 내 주변 어딘가에 서성이고 있었다. 말하자면 언젠가부터 내 안에 작은 종자를 심어두고 있었던 셈이다. 그 후의 모든 체험들은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이 작은 근원을 싹트고 성장하게 했다. 정말 무얼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검증할 수 있었고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계기들을 예기치못했던 길목에서 만났다. 그렇게 의지와 상상을 메마르게 두지 않으면 그 씨앗은 어느새 성큼 현실이 되어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이 삶에 강렬하고 대단한 의지가 있는 편도 아니고 ‘주어졌으니 그럭저럭 열심히 산다‘ 정도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었지만 조심성 없게 나를 써온 대가가 생각보다 컸다. 지금의내게 건강은 정말 중요하다. 여러 가지로 필요하다. 무엇보다 하루하루가 무량하지도 않을뿐더러 필연적으로 마침표가 있는 생이니까 그 과정을 좀 더 즐겁게, 가능하면 괴롭지 않게 지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내가 아주 소중하고 고귀한 어떤 존재여서가 아니라주어진 나날들에 알맞게 살아가고 싶어서. 나를 아끼고 아껴가며

언제나 나는 그런 부자연스럽고 비현실적인 순간들에 강하게 매료되었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남기고 싶었다. 일상에서 아주 잠깐씩 찾아오는 장면들. 평범한 하루하루보다는 조금 특별하고 사라지면 정말 있었던가 싶지만 또다시는 만날수 없을 정도로 기적까지는 아닌, 내 기준에서는 찬란한 어떤 찰나들. 막연한 마음으로 조금씩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렸지만 여전히 나처럼 특색 없고 희미한 표현들을 만들어내고 말뿐이어서 언제나 괴로웠다. 아주 운이 좋게 잘 맞는 카메라라는 도구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때로는 어떤 방식이나 공식들을 무시한다.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가능한 선에서 종종 균형에서 멀어지고 싶다. 때로 가공이필요하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고르지 않아도 주저 없이 기록하고싶다. 그래서 사진이 내게 꼭 필요해졌음을 잊지 않는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마음이 때로는 나를 바로잡아준다고 믿는다.

마가렛 버크화이트의 초상을 한동안 홈페이지 메인에 걸어둔 적이 있다. 한눈에 보아도 1930년대의 여성 복식과는 다른 차림의 마가렛 버크화이트가 커다란 대형 뷰 카메라를 들고 씩씩하게 서 있는 사진으로 나의 모종의 바람이 담겨 있는 사진이었다. 늘많이 찍고 오래 찍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만 많이 찍는 것보다는오래 찍는 사람에게 점점 더 무게를 싣게 된다. 왜냐면 오래 찍으려면 여러 가지를 섬세하게 조절하는 방법을 배워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재능도, 근력도, 기개도, 운도. 그래서 무리하는 습관을 조정하고 조금씩 더 쉬고, 덜 찍으며 가려고 한다. 철저하게 계획해서 오래오래 찍고 싶기 때문에. 반세기 전의 기세 좋은 사진가처럼, 때로는 욕망을 숨기지 않으며, 흑백 사진 속에서 마가렛 버크화이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인생과 경력은 우연이 아니었다. 철저히 숙고했다." (Mylife and my career was not an accident. It was thoroughly thoughtout.)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아날로그 사진작가숀 오코넬(Sean O‘Connell)로 나오는 숀 펜은 아프가니스탄의 히말라야 산맥에 올라 눈앞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눈표범을 보고도 지켜만 본다. 그리고 왜 찍지 않느냐는 월터의 질문에 대답한다.
"어떤 때는 안 찍어. 아름다운 순간을 보면 난 개인적으론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저 그 순간 속에 머물고싶지." (Sometimes I don‘t. If I like a moment, for me, personally, Idon‘t like to have the distraction of the camera. I just want to stayin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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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 라디오 - 오래 걸을 때 나누고 싶은 이야기
정혜윤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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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말했어. 인생은 자신의 ‘질문‘을 찾는 과정이라고. 자신이 풀어야 할 질문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어. 프로이트는 여자들은 무엇을좋아하는지를 궁금해했고 밀란 쿤데라는 한 번뿐인 인생은 참을만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궁금해했어. 나에게도 늘 반복되는 하나의 질문이 있었지. "뭐가 문제지?"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지?

이야기들이 좋았어. 이야기들이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야. 당신은무엇 때문에 고생하고 살지요? 당신은 어떤 말에 귀 기울이지요?
당신은 어떤 소원을 가지고 있지요? 당신은 무엇에 고통받지요?
당신은 무엇을 잊지 않고 살지요? 당신은 무엇을 기다리지요? 당신이 엄청나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무엇이지요? 이 질문들은늘 나에게 그대로 돌아오곤 했어.
물론 질문만이 좋았던 것은 아니야. 이 이야기들이 좋았던 데는한 가지 이유가 더 있어. 이야기 속 사람들이 질문에 따라 살고 있었기 때문이야. 릴케는 어느 날 젊은 시인들에게 이런 당부를 했었어. 간곡히 부탁하건대 대답에 따라 살지 말고 질문에 따라 사시길. 왜냐하면 우리는 대답을 따라 살 수가 없으니까.

옛날에 중세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을 믿었다고 해. 그러다가 연옥이란 것을 알게 되었어. 그러자 마음이 급해졌다고 해. 이제부터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천국으로 갈 수도 있고 지옥으로 갈 수도 있는 거잖아. 나는 우리 마음의 실망도 연옥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실망을 감상적으로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어. 실망의 유일한 문제는 실망 때문에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으려 하는 것이겠지. 실망하지 않으려 애쓰지 마. 아니 실망했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않으려 애쓰지 마. 그 실망이 나에게서 왔든 바깥에서 왔든. 내가이 말을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겠지. 나 스스로 뭔가를 기억하려는 거야. 내가 그렇게 전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연기할 수는 있겠지. 아주 기가 막히게 말이야. 그러나 어떤 역할을 기가 막히게 연기해낸다고해서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지. 우리들은 사람들을 틀에 맞추고분류하고 싶어서 안달하잖아. 그것이 다 자신을 위해서야. 편하게이해하려고, 누구는 좋은 사람, 누구는 나쁜 놈.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 여러 면이 섞여 있을 뿐이야. 남도 마찬가지고 나도마찬가지고, 타인의 삶은 다 비밀이야."

그녀는 ‘귀가 배지근해진다‘라고 말했어.
"할머니, 귀가 배지근해지는 게 무슨 뜻이에요?"
귀가 배지근하다라는 말은 제주도 사투리였어.
"어떤 말이 아주 귀에 쏙쏘옥 들어온다는 말이야."
"할머니, 어떤 말을 들으면 귀가 배지근해져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가장 큰 선물은 시간을 나눠 갖는 것 아닐까?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었을 시간에 낚시꾼은 버려진 나무를 모으고 깎고 칠하고 무게를 쟀지. 찌가 선물이 아닐 수도 있을 거야.
이 지상에서 선물은 말이야, 자기 자신조차도 완전히 맘대로 할수 없는 시간일 수도 있을 거야. 그 시간 속에서 고민과 이야기와비밀과 눈물과 웃음을 나누다가 공동의 기억과 경험을 만들다가그러다가 함께 변해가는 거지. 우리 할머니의 만 원도 만 원짜리지폐에 불과한 게 아니잖아. (그러고 보니 우리 삶 전체가 시간이 준선물이란 시각도 있어. 그 관점 아래서 우리 삶은 무언가를 획득하기 위한 기나긴 과정이 아니야. 선물을 준비하느라, 아니 선물이 되기 위해 관심을 기울이고 노력하는 과정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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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보다 나은 사람 - 나를 지키며 더 나은 일과 삶을 향해 나아가는 법
최갑수 지음 / 얼론북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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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나는 여행이나 사진에세이집을 주로 읽었다. 내가 자주 읽었던 여행에세이의 작가 최갑수가 쓴 여행이 아닌 작가로서 살아남는 이야기이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프리랜서 작가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온 그의 노하우들이 담겨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책상으로 가는 습관을 들이고, 오타와맞춤법을 확인하고 마감을 지키는 일, 우리가 실천하는 이런작고 기본적인 일이 좋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게 해줍니다. 벽돌 한 장 한 장이 모여 거대한 피라미드가 되고 만리장성이되는 것이죠.
디테일이 모여 스펙터클이 완성됩니다. 우리의 지루하고,
고단하고, 고독한 하루하루가 모여 우아한 일생을 만듭니다.

지금 힘들다면,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남보다 뒤처지고 있는 것 같다면, ‘지금은 때가 아니야. 운이 안 좋을 뿐이야‘
라고 생각하며 잠시 쉬어갑시다. 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고,
자신의 힘으로 수평선 너머 보이는 섬까지 헤엄쳐 가겠다는신념만 있다면, 우리는 누구나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될 수있을 것입니다.
먼저 도착한 누군가가 해변에서 손을 흔들며 "어이, 거의다 왔어, 끝까지 힘내" 하고 소리치며 우리를 힘차게 응원해줄 것입니다. 질투할 시간에 실력과 체력을 키우는 게 훨씬 이득 아닐까요. 하나둘, 하나둘 열심히 팔을 젓다 보면 따뜻한해변에 등을 대고 누워 흰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기분 좋게올려다볼 날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얼마 전, 모니터용 새 안경을 맞췄습니다. 눈이 많이 나빠져서 모니터가 흐릿하게 보였거든요. 노안이 왔나 보다 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가까운 것들이 흐릿하게 잘 안 보이더군요. 새로 맞춘 안경을 쓰니 거짓말처럼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이제는 가까이 있는 것들, 옆에 있는 것들을 잘 챙겨야 하는나이가 됐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멀리 봐야 하는 나이가 아닌거죠.
지금까지 가질 수 없는 것들은 어쩌면 영원히 가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가진다면 운이 좋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것들을 손에 더 꽉 쥐고, 더 잘 들여다보고, 더 꼭꼭챙기고 살아야겠습니다. 다시 스케줄러를 봅니다. 마감과 강연, 방송 일정 사이에 챙겨야 할 생일들이 반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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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완전히 다 이해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드문 드문 이해되는 부분이 있었다고만 말할 수 있겠다.
평생에 걸쳐 ‘나‘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온 학자가 내놓은 지금까지의 결론은 :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일반적인 답은 없다는 것이다. 특히나 자기에게만 있는 고유한 것은 없다는 것. 다만 자기에게 중요한 타인에게서 간신히 자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이 학자의 결론이다. 난 이 결론이 철학적 논증이 이해 되고 아니고를 떠나 마음에 든다.

내 몸이라고 쉽게 말할 수는 있지만 이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신의 몸에 대해 아주 조금밖에모른다. 등이나 항문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아니, 타인이 나를 나로 인정하고 기억해주는 그 얼굴을, 공교롭게도 당사자인 나는 평생 볼 수가 없다. 거울이나 사진으로 시간차를 두고 확인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타인을 마주하고 있는 순간의 바로 그 얼굴(나 자체)을 나는 볼 수가 없다. 하물며 나를형성하고 있는 이 신체의 내부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 아무래도 병이 난 것 같아도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게 정말 ‘내‘ 몸인지 묻고 싶을정도로 몸은 나로부터 멀리 격리되어 있다. "나에게 가장 먼존재는 나 자신이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인용한 이 독일 격언이 몸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실감 나는 표현인 것 같다.

‘나‘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창가에 기대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마침 내가 그곳을 지나가고 있다면, 그는 나를 보기 위해 거기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천만에. 왜냐하면 그가특별히 나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런데아름답다는 이유로 어떤 여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정말 그 여인을 사랑하는 것일까? 천만에. 왜냐하면 천연두가 그녀를 죽이지 않고 그녀의 아름다움만 앗아간다면 그 사람은 그녀를사랑하지 않게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만약 사람들이 나를 나의 판단력이나 기억력 때문에 사랑한다면, 과연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천만에.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을 잃지 않아도 이런 장점만 잃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육체 속에도 영혼 속에도 없다면,
‘나‘는 도대체 어디 있을까? 또 이런 성질들은 소멸할 수 있으므로 나의 본질을 형성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성질이 없다면어찌 육체나 영혼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인간은 어떤 이의 영혼의 실체를, 그 안에 어떤 성질이 있든 상관없이, 추상적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뿐더러 또 옳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은 결코 인물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성질만을 사랑하는 셈일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무나 직책 때문에 존경받는 사람들을 경멸해선 안된다. 인간은 어떤 인물이든 바로 그 빌려온 성질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므로.
ㅡ블레즈 파스칼, 《팡세》, 단장 323

우리는 보통 성장한다는 것은 다양한 속성을 익혀가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는다양한 가능성을 잃어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여러 가지를 잃고 있다. 잃으면서 살아간다. 지금 내게 가능한 것 가운데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이 삶이라면, 산다는 것은 그 밖의 몇몇 가능성은 버린다는 뜻이다. 우리가 잃은 것. 그렇게 될 수도 있었던 자신,
하지만 이제 그렇게는 될 수 없는 자신 철학자 구키 슈조는 이를 가리켜 "멀고 먼 곳, 내가 태어난 곳보다 훨씬 더먼 곳, 그곳은 아직 가능이 가능인 채로 존재했던 곳" 《때마침》)이라 했다.

여기서 ‘나‘라는 것의 존재 방식 중 하나가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있는 존재‘라기보다 ‘이야기되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향해서 말이다.
아이덴티티 identity라는 단어가 있다. ‘내가 나인 근거‘라든가 ‘자기동일성‘, 또는 ‘독자성‘이라고도 번역되는 단어다. 앞에서도 등장한 정신과 의사 랭은 아이덴티티를 다음과 같이정의하고 있다.
‘아이덴티티‘란, 이로 인해 지금 이곳에서도 과거에서도 미래에서도 자신이 동일 인물이라고 느끼는 성질의 것이다. 이것은 이것으로 인해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성질의것이다.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들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동일한 지속적 인물이라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사람들은 이런 ‘아이덴티티‘가 공상일수록 한층 더 애지중지한다.
(로널드 랭, <자기와 타자 Self and Others》)

랭에 의하면
나의 아이덴티티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내 자신에게 들려주는 스토리

예를 들면 사람은 누군가의 자녀로 태어나, 유치원생이 되고, 학생이 되고, 회사원이 되고, 아버지가 된다..... 이런 역할이나 속성 자체를 제거하면 그 사람을 만들고 있는 것들중에 어느 것 하나 그 사람 고유의 것은 없다. 이들은 내가 타자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타자가 나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의 재료이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총계가 ‘나‘인 것은 아니다.
내가 ‘내‘가 되는 것은 오히려 이들의 역할이나 속성의 단편을 이어 붙여, 나라는 것의 이미지를 조립하는 과정에서다. 랭은 이를 "일관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라고도 표현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나의 아이덴티티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내 자신에게 들려주는 스토리"라고

하지만 스토리를 자아내려면 자신을 다양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인생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자와 타가 서로 의미를 무효화하는 부조화 속에서 ‘내 자신에게 들려주는 스토리‘가 몇 번이고 파탄을 겪는 과정이고, 또그것을 끊임없이 다른 방법으로 고쳐 말하기 위해 시도하는과정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야기가 하나밖에 없다면, 그것이 무너졌을 때 자신도 회복이 불가능해진다.

인생이라 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선을 떠올리는데 이런 습관을 고쳐야 한다. 인생의 어느 시기지는 순진무구하고, 어느 시기부터는 때가 타기 시작한다는것은 거짓이다. 어느 시기까지는 행복하고 어느 시기부터는불행해진다는 것도 거짓이다. 무엇보다 하루하루가 마냥 행복하고, 마냥 불행하다면 분명 지루해서 견디기 힘들 것이다.

까? 하나의 시나리오 안에 있어야만 하는 걸까? 동일한 존재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우리를 종종 극심한 불안으로 몰아넣는다.
불안. 그것은 늘 미래를 그리는 상상력과 떼어놓기 어려운형태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젊은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에대해 생각할 때, 불안해하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업신여기는느낌이 있다. 자기보다 겨우 몇 살 많은 사람을 늙은이 취급하기도 하는데, 이는 곧 다가올 자신의 미래에 절망하고 있다는 증거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 공격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그의 어두운 현재를 보여준다. 이래서야 뭔가가되고 싶다는 이미지가 결여된 채 지금의 자신으로부터 탈출하고싶고, 다른 내가 되기를 희망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풍족한 노년을 보내고 있으면 현재가 밝다는 뜻일까? 앞에서 봤듯, 만족스러운 노년이란 대부분의 경우 과거의 영광에 대한 기억에 의지하고 있다. 그때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살 수 있다....... ‘행복한 노년‘이란 지금까지의 자신의 업적에 만족하는 상태인 것이다. 즉, 과거의기억과 거기서 형성된 재산에 기대어 산다. 그런데 이는 다른형태의 삶을 애초에 차단한 삶이다. 이미 확정된 과거의 연장선 위에서 현재가 성립되는 것이며, 따라서 이 만족스러운 노년은 점점 한계가 있는 좁은 세계로 들어간다. 자신이 변화하거나 존재가 잊히는 것을 스스로 금하는 삶의 태도이다.

나다움 같은 것을 찾아 자기 내부를 샅샅이 뒤지지만, 사실우리 내부에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만약 그런 게 잠재되어 있다면 애초에 그런 질문에 얽매일 일도 없을 것이다. 그보다자기가 여기에 있다는 감각을 느끼기 위해서는 오히려 시선을 밖으로 돌리고, 나는 누구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인지를 생각하는 편이 더 낫다.
‘나‘라는 것은 타자의 타자로서 비로소 확인되는 것이라는 말을 다시 떠올려보자. 타자는 타인과는 다르다. 엄마도나는 아닌, 타자다. 그런 타자에게 나는 의미 있는 타자인지의 여부가 우리가 나 자신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산 사람은 불행해진다. 이 이야기가 언젠가 파탄 나거나 완료됐을 때 남는 것은 공백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인생을 일에 걸고 살아온 사람은 자신의 아이덴티티(이야기)를모두 일에 바쳐버렸기 때문에 그 안에 있을 때는 좋지만, 정년을 맞아 그 이야기가 무효가 되었을 때 다른 이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 그래서 배우자에게 매달리는 것이다.
하지만 ‘나‘란 내가 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생각은우리를 구원해주기도 한다. 같은 인생이라도 이야기 방법에 따라. 해석 방법에 따라, 다른 모습을 나타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바꿈으로써 한계점에서도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전하고자 했던 것은 단 하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은 없다는 것이다. 이 질문을 자신의 내부로던지고, 거기서 뭔가 자기에게만 고유한 것을 찾는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그런 건 어디에도 없다. 자신이 소유한 자신의 속성가운데서가 아니라 누군가 어떤 타자에 대한 타자 중 한 명일수 있다는, 그런 양식 속에서, 사람은 간신히 자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문제는 항상 구체적인 누군가로서의 타자,

즉 나의 타자에 관한 것이며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는 일반적인 해답이 없는 것이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길에서특정한 타자를 만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게 있다. 그것은 타자의 타자라는 것이 타인에게 나를 바치는 것, 즉 자기 포기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타인에게 자신을 바친다는 것은, 타인안에서 자신의 장소를 확인한다기보다 오히려 자신을 바치는그 타인을 이미지로서 자기 안에 갖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이미지화한 타인, 즉 자기 안의 타인에게 자신을 바친다면 그건결국 자기애에 지나지 않는다. 랭도 말했듯 타자의 타자가 된다는 것은 타인 안에 자신이 의미 있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느냐아니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이를 타자의 입장에서 말하면 타자와 긍정적으로 관계를 맺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은 그가 먼저 나와 관계를 맺어주기 때문인 것이다. 나도 타자를 이처럼 대해야 할 것이다. 타자에게 그 존재를 부여하기 위해. 타자에게 나를 바치는 것과 타자에게 그 존재(존재의 계기)를 선사하는 것은 전혀 별개다. 타자의 타자라는 것은 타자에게기대고, 타자를 기다리는 게 아니다. 그것은 때로는 (랭이 예로든 엄마와 아들의 만남 유형 중 세 번째 경우처럼) 서로 타자에게 상

처를 입을 때까지 관계를 맺는 것이고, 때로는 (같은 예의 두 번째경우처럼) ‘~해주기 바란다‘는 부정적인 수동이 아니라 ‘긍정적인수동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은 헌신이라는 이름의 밀착과는 거리가 먼 행위다. 우리는 서로 존재를 부여함으로써 살아갈 수도 있는 것 같다. 여담인데 독일어에서는 ‘있다‘
를 ‘그것이 준다es gibr‘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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