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처럼 평범한 대부분의 독자에게 독서란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르게 사유할 뿐만 아니라 다르게 느낄 수 있다.
한나 아렌트의 구분법대로라면, 타자를 전제하는 활동인 대화는 ‘행위 action‘에 속한다. 인간과 사물 사이의 관계인 작업과 달리, 행위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드러내는활동이다. 그런데 행위에는 불안이 따른다. 나와 다른 욕구와 관심을 가진 타인들이 내 의도대로 반응하지 않아서 행위의 결과를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불안이란 대부분 이런 것이다. 그래서 예측 가능한 통제 과정에 속해서 불안을 제거하려는 욕구가 생겨난다. ‘행위‘하는 대신 ‘기능‘하려는 욕구 말이다. 한나 아렌트는 요아힘 페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기능하기 functioning‘는 행위하기를 멈추는 것임을 강조한다.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남들과 함께 행동하기, 즉 함께 상황을 논의하기, 어떤 의사 결정에 도달하기, 책임을 받아들이기,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사유하기 등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이기능하기에서는 제거된다. 선택하고 결정하는 사람은 (부모든, CEO든, 총통이든) 한 명이면 족하고 나머지는 그 계획에
따라 기능하면서 예상한 결과를 얻으면 된다. 대화는 불필•요하다. 매뉴얼을 숙지하고 실행하라. 만일 최고 결정권자가 머릿속에서 지옥을 그리면 지옥의 질서가 그대로 실현된다. 이것이 기능적 안전성의 아이러니이다. 우리는 안전하게 지옥에 도착했다! 그녀는 나치 전범 아이히만에게서 안전성에의 터무니없이 멍청한 열정을 발견했다. 그리고 기능하기는 복종의 쾌감을 주는 변태적 행위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행위하기가 기능하기로 대체될 때 대화와 설득의 공간인 공적영역은 사라진다. 상명하복의 원칙을 신봉하고, 공무원과 국민은 자기 결정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만하면 된다고 여기는 최고 결정권자가 있다고 하자. 자신은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중이라 확신할 테지만, 아렌트는 망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국민을 위한다는 그의 마음이설령 진심일지라도 정치는 실종되고 만다. 그가 유일한 진리의 담지자를 자처하며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소통하지 않고그들에게서 대화하고 행위할 가능성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현대사회에서는 행위가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작업에서 중요한 ‘유용성의 원리‘도 무너졌다고 진단한다. 매일매일 유용한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그렇게말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은 세계 5위의 헌 옷 수출국이다. 이 옷들이 유용성에 따라 만들어졌다면 개발도상국들로 보내져 쓰레기 산을 이룰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일주일마다 신
상품을 쏟아내는 울트라 패스트 의류산업은 우리 삶의 궁극 척도가 사물의 유용성이 아님을 보여준다. "(유용성의 원리는 이제 대상의 사용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과관계 맺게 된다. 이제 생산성을 자극하고 고통과 수고를 덜어주는 것이 유용한 것이다." 과잉 생산되고 과잉 소비되는사물은 인간에게 유용하지 않다. 생산성에만 유용할 뿐. 더많은 소비를 외치는 열망은 더 많은 노동을 외치는 열망의다른 얼굴이다. 이 열망은 다른 동료 인간들에게서 행위와사유의 가능성을 빼앗고, 그들을 더 많은 노동, 더 위험한 노동으로 내몬다. 『인간의 조건』 마지막 장에서 아렌트는 탄식하는 어조로 이를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라고 표현했다.
1814. 『존재와 시간을 요약하면 이렇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부른다. 현존재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거나 그 자신이 아닌 것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실존적 존재이다. 이 존재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 속에서 세인의 통치에 놓이게 되고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을 상실하게된다. 현존재는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을 왜 그토록 쉽게 내려놓을까? 남들과 같은 삶의 매뉴얼을 따르면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세인은 개개인을 "존재부담 면제"의 상태로 만들어준
다. 그러나 불현듯 현존재는 자신을 잠식하는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 불안의 기분은 그가 그동안 견지해온삶의 확실성을 붕괴시키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회피하려고한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그 기분을 받아들이는 순간 현존재에게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고 말한다. 낯설고 섬뜩한 기분의 한가운데서 현존재는 자신이 죽을수밖에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고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탈리아 철학자 비르노에 따르면 하이데거의 이 구분법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대상 없는 불안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두려움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세계가 불확실하고 미결정적인 것으로 남아 있을 때 사람들은 불안을느낀다. 우리는 이 기분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특정 대상을위험한 것으로 지정해서 모호한 고통을 확실한 고통으로 바꿔버린다. 명확한 경계의 대상이 생기는 순간 그것만 제거하면 세계는 다시 확실하고 안전한 곳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들이 범죄를 저지를까 두려워. 저 동양인은 걸어 다니는 바이러스야. 이처럼 두려움의 대상을 고안하고 이들만 사라지면 사회가 안전하고 건강해질 거라는 감정적 방어책을 만들어내면서 타인에 대한 잔혹한 반응을 정당화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죽음을 향해 홀로 달려가는존재‘일 때만 본래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는 의문의 여지가있다. 인간은 자기 죽음과 제대로 만날 수조차 없다. 의사에게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죽음 자체는 체험되지 않는다. 죽음이 덮쳐와 그를 ‘다른 누군가‘로 만들 뿐이다. 블랑쇼는 이것을 ‘비인칭의죽음‘이라고 부른다. 나(1인칭)와 너(2인칭)도 아니고 그/그녀(3인칭)도 아닌 누군가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존재했었으나지금은 없는‘ 아무도 아닌 누군가는 비인칭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은 항상 나의 바깥 경험이다. 나를 한없이 무력하게 만드는 이 사건이 체험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기억해줄 사람이 없는 죽음은 우리를 비통에 빠뜨린다.
우리는 자기의 죽음을 상상하면서도 죽음 자체가 아니라 타자들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더 고통스러워한다. 때로 어떤 이들은 다른 이를 구하려고 죽음을 불사하기도 한다. 물론 그들이 살린 사람이 영원히 살지는 못한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인간은타자를 위해서‘, 즉 ‘대신해서 죽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력함을 넘어서, 인간은 타자를 향해서‘ 죽어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나의 죽음이 내가 아닌 것이 되는 비인칭의 죽음이라면 타자의 죽음은 내게 가장 격렬하게 닥쳐오는 비인칭의경험이다. 타자의 죽음과 마주한 순간 우리는 근원적 전복에처하게 된다. 고통을 통과하며 지금까지의 나와 달라지고, 다른 존재로 바뀐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이 이런 비인칭성의 경험들로 붐비는 곳이라고 여겼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누군가 내게 편지로 물었다. 이것은 내가 바로 그 사람에게 묻고 싶었던질문이었다. 20세기의 마지막 문턱에서」에서쉽고 명칭하지만 마음을 울리는 시구다. 21세기를 시작하는 문턱에서 우리는 이메일이나 디엠DM으로 똑같은 질문을 하고, 100년이나 200년 뒤에는 어쩌면 목성에 있는 한도시에서 역시 이 물음을 던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를 읽지 않았다면 우린 묻도록 허용된 숱한 실용적인 질문대신 이런 막연한 질문이나 반복하고 있는 자신을 부끄러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다시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앞에서 언급했듯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질문들보다 더 절박한 질문들은 없다"로 끝나는 시의 마지막 연을 읽고 나면, 이 질문이 어리숙한 나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라는사실에 위로를 받게 된다. 스무 살의 한 친구가 편지에 적어보낸 이 질문을 받고 우물쭈물했던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우리가 계속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은 "자두 속에 씨가 박혀 있듯 내 안에는 당연히 영혼이 깃들어"(풍경) 있기때문이다. 시인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일상의 태만하고물렁한 과육 속에 콕 박혀 있는 각자의 영혼을 깨운다면 새로운 일들이 일어날 거야. 너는 평범한 삶을 이루는 수많은 기적을 발견할 수 있어.
기적을 발견할 수 있어. "많은 기적들 중 하나:/ 공기처럼 가볍고 조그만 구름 하나가 저 무겁고 거대한 달을 가릴 수있다는 사실."(「기적을 파는 시장) 그다음엔 모두 잠든 밤에도, 모두 쉬는 일요일에도 책임을 다하는 심장에게 감사할 수있지. "내 심장아, 정말 고맙다./ 보채지도, 소란을 피우지도않아서 타고난 성실성과 부지런함에 대해 그 어떤 보상도, 아첨도 요구하지 않아서."(「일요일에 심장에게)또 이 모든 기적과 감사에도 불구하고 너를 자주 엄습하는 우울에 대해서 조금 너그러워지게 될 거야. "심장에박힌 감상적인 돌멩이 때문에 한 번, 또 한 번 자꾸만 밑바닥으로 추락하지 않았더라면"(「안경원숭이 더 좋았을 테지만 매번 그러고야 마는 존재, 바로 그게 너다. 심장에•박힌 건 돌멩이가 아니라 씨앗이었거든. 네 영혼의!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갖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재당도 초시도 문장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돈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수도 땜장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동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모닥불」 전문첫 연은 모닥불 속에서 타는 것들의 목록이다. 쌀쌀한밤에 새끼줄, 헌신짝, 소똥, 가죽신 바닥에 댄 창, 개 이빨, 널빤지, 지푸라기, 닭 깃털, 개털이 불꽃을 태운다. 둘째 연은모닥불 주위로 모여든 이들의 목록이다. 향촌의 높은 어른.
초시에 급제한 양반, 더부살이 아이가 높낮이 없이 둘러앉는다. 새로 내 식구가 된 사위와 아직 어려운 새 사돈, 주인과객이 구분 없이 오손도손. 그 틈새로 큰 개도 슬그머니 들어오고 강아지가 낑낑거리며 끼어든다. 존재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시가 된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 그러나 소설가 조르주 페렉은 목록 작성은 실제로 해보면 복잡한 일이라고 말한다. 언제나 빼먹는 항목이 생기고작성을 곧 포기하고 싶어지거나 대충 끝내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몇 단어 열거하다 보면 금세 기타 등등‘이라고 써버리게 된다. "하지만 ‘기타 등등‘이라고 쓰지 않는 것이 목록 작성의 핵심이다." 오랜 무명 생활 끝에 상을 타는 배우가 수상 소감을 말하면서 긴 감사의 목록을 읊는 상황을 떠올려보라. 그는 단 한 사람의 이름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만일 누군가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을 잊는다면 그거야말로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돕고 지켜온 그 사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극도로 무례한 증거라도 된다는 듯이 말이다. 나열할 목록이 아무리 길어도 소중한 존재들의 이름은기타 등등으로 생략되지 않는다. 「모닥불」처럼 단순한 시가 사랑받는 이유가 여기에있다. 하나도 잊지 않고 모든 것을 호명하는 사랑의 단순함, 그 성실한 단순함. 이 시가 새끼줄과 헌신짝 기타 등등을 태우고 재당과 어른과 초시 양반 기타 등등이 둘러앉은 모닥불에 대한 노래가 아니라는 것. 하찮게 취급되는 것들까지
•전부 호명하는 다정함 덕분에 세 번째 연이 나올 수 있게 된다. 우리 할아버지는 부모를 잃은 데다 추위로 동상에 걸려발가락이 다 없어진 몽동발이의 고아였는데도 살아남았다. 갈 데 없는 고아를 위해 불 옆에 잠시 한기를 녹일 자리를마련해주지 않았다면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살아남지 못했다면 슬프건 그렇지 않건 간에 역사로 전해질 이야기조차없을 테니 모닥불 덕분에 슬픈 역사도 있는 것이다.
관념이 아닌 사물로 미국 시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영화<패터슨>의 주인공.
회진 돌면서 혹은 가정방문 진찰을 하면서 정말 많이 배워. ... 거긴 더 깊은 무언가가 분명 흐르고 있어. 모든 만남이 주는 힘 같은 것 말이지.
그는 살고 사랑하는 일은 아름답고 가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의 살을 찢고 피 흘리게 만들지만 삶을 사랑하는 이는 가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인생에 박힌 가장 고통스러운 가시를 용감하게 만지며 자신만의 새 이야기를 써나간다.
라이너 쿤체
은엉겅퀴
뒤로 물러서 있기 땅에 몸을 대고
남에게 그림자 드리우지 않기
남들의 그림자 속에서 빛나기
시지프의 신화는 결국 죽을 운명인데도 힘을 내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삶 자체가 부조리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부조리하다고 해서다 비극적인 것은 아니다. 시지프는 아무 생각 없이 반복되는 일을 해나갈 수도 있다. 자기 상황을 제대로 자각하지 않으면 비극이랄 게 없다. 비극은 오로지 그의 의식이 깨어 있을 때 시작된다. 다시 저 아래의 바위를 향해 정상에서 내려오는 동안 시지프는 자신의 비참함과 무력함을 깨닫고 반항적인 태도로 그 고통을 응시함으로써 비극적인 존재가 된다. 그런데 카뮈에 따르면, 비극은 피해야 할 게 아니라 자각하고 응수해야 할 운명이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무겁지만 한결같은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카뮈는 무언가 시도할 때 ‘성공할 거라는 희망의 환상을 제거하라고 말한다. 바위가 다시 굴러떨어질 것이 확실한 순간에도 돌을 밀어 올려라. 인간의 행위가 사회·역사적조건에 의해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경험한 이들에게이런 주장은 무모해 보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최악의 상황에놓여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실패해도 계속 시도하라는 식의 철학은 얼마나 가혹한가? 그러나 실존주의는 "미래에 대해 기대를 걸 것이 없는" 부조리의 세계 (옮긴이의 「작품 해설」속에서 희망 없는 자들 옆을 지키려면 미래를 계산하는 영리함 대신 실패를 감수하는 사랑이 필요함을 강조하는 철학이다.
우리가 무엇을 꿈꾸며 싸우든 그 꿈을 이루는 일은어렵다. 조금 전진한 기분이었는데 도로 제자리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인간은 실패하려고 태어난 ‘훼손된 피조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뮈 덕분에, 우리는 어려운 싸움을 계속이어가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말하는 대신 위대한 용기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진정 사랑하는 이들은 승리하는 이들이 아니라 진실과 인간적 품위를 지키기위해 어쩌면 패배할지도 모를 싸움을 시작하는 이들이라는것도 알게 되었다.
「신을 기다리며』에 실린 한 에세이에서 베유는 불행한 사람들에게는 "자기에게 주의를 기울여줄 사람들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라고 말한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게주의를 기울이며 지금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즉 "당신의고통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묻는 일일 뿐이다. 우리는 그물음을 통해 나와 전혀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이 끔찍한 불행과 만나 천형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거기 존재하고 있다는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불행한 사람을 집합체의 단위로서나 ‘불행한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인 사회 계급의 하나로 보지않고 말이다." 자신도 언제든 불행한 자가 될 수 있다는 보편적 수난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기에, 사람들은 고통을 경험한 이를 비난하거나 사물처럼 무시하게 된다. 현실에서 수난은 평범한 이들 모두에게 닥친다는 정확한 인식만이 약자에 대한 경멸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사물들, 사건들을 새롭게 만나는 일에 모든 이가 몽상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터윌리스 역시 새로운 시선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인문학 교육이 가져다주는 이해와 인식을 통해서 획득할 수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인문학 교육을 받음으로써 "그저 편안하고 순조롭게, 그럴싸한 모습으로 죽은 사람같이 살지 않는 방법, (...) 태생적 디폴트세팅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삶을살아나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는 태도를 컴퓨터의 디폴트세팅, 즉 기본설정처럼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는 늘 자기의욕구와 감정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모드가 작동한다. 윌리스는 이런 예를 든다. 나는 일과를 마치고 집에빨리 돌아가고 싶다. 교통체증으로 꼼짝도 않던 차량들이 움
직이기 시작하고 내 자동차가 나아갈 차례가 되었을 때 얌체 같은 차량 한 대가 끼어든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으며장을 보기 위해 들른 대형슈퍼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여러 줄로 계산대 앞에 늘어선 사람들. 유난히 내가 선 줄은거북이처럼 느리게 줄어들고 내 앞에 선 여자는 자기 아이에게 마구 소리를 지르고 있다. 나의 분노 게이지는 상승하고 짜증으로 폭발할 지경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의 길을 막고 있는 기분이 들고 나를 방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는 방법‘을 선택할수도 있다. 방금 내 앞에 끼어든 자동차는 심하게 다친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중일지도 모른다. 나보다 훨씬 급하고 위중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또 슈퍼마켓에서 모든 사람의 짜증을 돋우며 아이에게 악을 쓰던, 멍한 눈에 짙은 화장을 한 여자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녀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남편이 누워 있는 병실에서 사흘 밤을 지새우다 아이에게 먹일 간편음식을 사러 나왔는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처음 생각했던 대로 끼어든 자동차의주인은 얌체족이고 대형 슈퍼의 그 여자는 배려심 없이 제기분대로 행동하는 무례한 사람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나의 욕구가 가장 우선적으로 배려받아야 한다는 본능에 나의 사고가 굴복한 것일 수도 있다. "교통마비와 붐비는 상점통로, 계산대 앞의 기나긴 줄 (…) 나의 태생적인 디폴트세팅
은 이런 상황 속에서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기 때문이지요. 내가 배고프다는 사실, 내가 고단하다는 사실, 내가 무엇보다도 간절하게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 다른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저내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일 뿐이며, 내 길을 가로막고 있는 이 빌어먹을 인간들은 도대체 뭐하는 놈들이냐, 라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양한 세계관들, 삶의 차이들을 배우는 인문학 교육을 통해 상황을 이해하고 다르게 사고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윌리스는 우리의 자기중심적 불안과 불만족을 지성적으로 안정화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다르게 생각함으로써 "연민, 사랑, 온갖 만물의 내면에존재하는 융합을 체험하고자 하는 선택을 할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지성적 안정법 이외에도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또 다른 안정법이 있다. 몽상가의 방식이다. 우리는 다르게사유할 뿐만 아니라 다르게 느낄 수 있다. 사물들에 대한 몽상을 통해 우리는 다른 이미지 속에서 살아간다. 바슐라르는이것을 "이미지의 안정법"이라고 표현한다. 의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일들이 존재한다. 그럴 때
우리를 돕는 것은 ‘다르게 느끼는 일‘이다. 네덜란드의 현상학자 판덴베르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성찰로써는 해결의 희망이 없는 문제들의 해결을 계속해 살고 있는것이다." 소소한 골칫거리로부터 인생의 중대한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고통을 맛보게 되고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깨달음에 다가가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깨닫기 전에도 그 순간들을 살아야만 한다. 또 고통의 참된인과관계를 파악했다고 믿지만 여전히 고통을 느낄 때가 있다. 어떤 문제들 앞에서는 고통의 원인을 따지기보다는 다르게 느껴보려고 하는 게 더 낫다.
손더스가 강조하듯 니키타 곁에 돌아온 뒤에도 브레후노프는 대체로 그대로이다. 브레후노프는 여전히 강박적으로 자기만족에 집착하고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며 오만한인간에 가깝다. 그렇지만 그의 체온으로 몸이 녹은 니키타가작게 코까지 골며 자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각별한 기쁨을 맛본다. 그리고 처음 만난 기쁨속에서 달라지는 자신을 느낀다. 다른 존재들을 구하거나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창하게 새로운 인간이 될필요는 없다. 늘 하던 대로, 그러나 에너지의 방향을 조금 바꿔서, 매일매일 움직이면 될 뿐. 우리의 사랑이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듯 구원도 혁명도 그럴 것이다.
니체
그러나 세상의 아이들아, 정해진 궤도에서 이탈하는 삶은 불행할 거라는 협박에 굴하지 말고, 혼돈을 기꺼이 맛보며 천천히 네 자신이 되어라. 남이나 스스로에게 자신의 성과를 증명하려고 서두르지 마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만 나 자신을 기다리는 것을 배웠을 뿐이다."
우리가 경험한 일들은 평범해 보이지만 그거을 오래 음미한다면 상상도 못 할 깊이를 드러낸다. 세계는 바다보다 더 깊다.
당신을 위로하려고 애쓰는 자가 때때로 당신을 기쁘게 하는 단순하고 조용한 말 그늘에서 아무런 고생도 없이 살고 있다고는 생각지 마시기를. 그의 삶도 많은 고생과 슬픔에 차 있고,당신보다 훨씬 뒤져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그러한 말을 찾아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멘토‘는 프랑스 작가 페늘롱의 "텔레마코스의 모험"이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유행한 말이라고 한다.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는 전장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 모험을 떠난다. 이때 여행길에 텔레마코스와 함께하며조언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멘토르이다. 멘토는 이 이름에서유래했다. 그런데 멘토르는 아테나 여신이 이 젊은이를 돕기위해 아버지뻘의 남성으로 변신한 존재였다. 고대 그리스인의 통념에 맞춰 여신이 남성으로 변장하고서 등장한 것이다. 신화는 남성은 가르치고 여자와 아이들은 배워야 한다는 통념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것이 속임수임을 알려준다. 그렇지만 아테나는 왜 굳이 함께 여행하는 멘토르로변장했을까? 성별 고정관념에 부합하려는 것이었다면 텔레마코스가 위기에 빠졌을 때 흰 수염을 기른 남성 신의 모습으로 반짝 출현해도 될 텐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멘토르가텔레마코스와 함께 여행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멘토는 집에 앉아 모험을 떠나는 젊은이에게 경험담을 늘어놓는 존재가 아니다. 혹은 젊은이가 모험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을 때 그 모험은 이래서 저래서 잘못되었노라고 훈계하는존재도 아니다. 멘토는 함께 여행하고 함께 모험한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절실한 지혜를 담고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릴케 역시 젊은 시인이라는 점과무관하지 않다. 그는 시의 길을 완주한 뒤 얻은 지혜의 액기스를 전하는 게 아니다. 릴케는 카푸스처럼 시의 모험을 나선 중이다. 그래서 그가 시인에게는 늘 고독이 필요하며 이고독을 아주 평범하고 값싼 결합과 교환하고 싶은 때가 있을지라도 견뎌야 한다고 썼을 때, 이 문장들은 카푸스를 향할 뿐만 아니라 릴케 자신을 향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멘토는 멀리서 거룩한 지혜의 오라를 뿜어내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멀지 않은 거리에서 같은 곳을 탐험하는 동료 대원이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멘토는 멀리서 거룩한 지혜의오라를 뿜어내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멀지 않은 거리에서같은 곳을 탐험하는 동료 대원이다. 그러니 젊은 시인의 가장 좋은 멘토는 젊은 시인이 아니겠는가. "젊은이들에게 해주실 조언이 있다면?" 노작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에세이집타오르는 질문들에서 이 질문을 싫어한다고 말한다. "집사가 고양이에게 하는 충고가 아무리 유용해도(저 아랫집 덩치큰 수고양이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고양이는 듣지 않는다. 고양이는 자기 마음만을 따른다. 왜냐하면 고양이는 원래 그러니까.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젊은이들이 구체적으로뭔가 듣기를 원할 때는 예외라고 덧붙인다. 그렇지 않을 땐아무리 유용한 조언을 해도 참견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그것을 위세와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 지혜로운노인은 뭘 하지? 충고나 조언이 아니라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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