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활의 천재들
정혜윤 지음 / 봄아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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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만나고 싶은 작가 중 한명인 정혜윤 작가의 오래된 책. 그녀와 비슷한 결을 가진 좋은 사람들을 만나 귀기울여 듣고 쓴 이야기들.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내가 좋아하는 글이 나온 거구나 싶었던..

나의 일과 기술, 그것은 살아가는 일이다. 몽테뉴

■ ‘20세기 들어와 우리 머릿속에 주입된 것은 자신에 대해 무지하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진리가 바로 존재하는 것의 조건이라는 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서도 아무런 문제 없이 성립하는 사회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무의미해요.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는가라는 기예art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누구인가를 정해줍니다.(...) 자신의 존재를 예술 작품(기예의 대상)으로삼는 것,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일입니다.
프랑스어에는 ‘처세술‘, ‘생활의 기술‘을 의미하는 art devivre라는 표현이 있는데, 슈뢰더와 푸코에게 이 표현은 ‘살아가는 일이라는 기예‘, ‘기예를 가지고 살아가는 일‘을 가리킬 것이다. -히로세 준,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 두 눈을 뜨고 보게. 내가 그리던 고향 마을아 (...) 두 팔을벌려 또한 그대의 아들 돈끼호떼를 맞이하게나. 남의 팔뚝에 져서 패배하긴 했지만 자기 자신을 이기고 돌아온 아들일세. 그분 말에 따르면 자신을 이기는 게 인간에게 바랄 수있는 가장 큰 승리라는 걸세. •세르반떼스, 돈끼호떼』.

누구한테 물어볼 수 있지. 내가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하려고 왔는지? -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

인간은 수많은 사람으로 태어나 한 사람으로 죽는다는 말이 있지. 우리 안에는 우리가 쓰지 못한 힘, 탐험하지 못한 모습, 발견하지 못한 보물, 미처 능력을 드러내지 못한 자아들이넘쳐나고 있어. 우리는 그중 최악의 것이 아니라 최선의 것을끄집어낼 수 있게 서로 도와야 해. 우리 자신이 자신에게 남은단 한 가지 모습을 혐오스럽게 보지 않도록 서로 도와야 해.

인간에게 어떤 미래가 있다면 그건 우리가 다시 시작하길포기하지 않아서야. 우리는 현실과 이상이 다르다고 괴로워하지. 하지만 다른 것은 현실과 이상뿐이 아니야. 현실과 인생도달라. 인생에는 현실 속에선 드러나지 않았던 수많은 중요한가치들이 포함되어 있어.
그리고 또 다른 생각도 해볼 수 있어. 카프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인생, 그것은 우리의 일상이야. 우린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사랑을 나누고 슬픔을 달래고 용기를 내고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하고 갈등을 풀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할 줄 알아야 하고 어느 선에선가 타협을 하고 돈을 벌고 일을 하러 가야 하고 가족들을 먹여야 해,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거지. 단 희망을 이 사이에 깨문 현실주의자.

우리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해 말을 한다. 그러나 가지 않은길을 가는 법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지 않은 길을 걷는 것에 대해, 그 출발점의 모습에 대해 황홀하게 이야기하는것이 다시 시작하는 것의 시작이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매분 매초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뿐인 자신의 무기가 뭔지 알고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무한히활용한다. 자기 자신의 삶을 제대로 한번 살아보기 위해서. 그들은 먼 미래에 자신에게 주어질 최대 행복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여기의 생활 속에서 충만해지는 최소 행복을 생각한다.

‘ 사람은 비슷한 자리에 비슷한 환경에 놓여있어야만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끝없이 다른 입장에 자기를 놓을 줄 알아야지만 겨우 조금씩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우리는인생에서 이룬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인생 전체가 중요하다는 것, 매일매일 불행하다가 어느 한 순간 찬란하게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 나는 뼈 한 조각을 보면서보람이란 것을 어떤 핵심적인 것, 본질적인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겐 꽃 이름을 아는 것보다 어디선가 꽃이 피고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걸 느껴야 합니다. 낙엽 하나가 떨어져도 낙엽이 떨어지는 걸 느낄 줄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릴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경쟁이 너무 치열합니다. 우린 그럼 어쩔 수 없지,
하면서 그 안에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잊습니다. 내가 원래 뭘하고 싶어 했던가, 이것을 잊습니다. 나는 선택을 해야 할 때마다 오솔길과 변두리의 철학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슴 뼈를 떠올립니다.

오늘은 누구한테 무슨 이야기를 듣지? 누구의 영향을 받아보지? 그때는 그것이 제 자신을 만들어가는 길이란 것은 몰랐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던 것도 있습니다. 그 시절 이래로 지금까지 저는 영원한 학생이기에 배움을 ‘추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삶의 동력인지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시절의 제가 바빴다기보다는 부지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절에 저는 어떤 학자에 관한 천진난만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인간은 이백살은 살아야 한다고. 그 이유? 적어도 백 년은 배워야 하기 때문에.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백 년은 열렬히 들어야지 나머지 백 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금 알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우린 사실 나 자신을 아는 문제조차도, 괜찮은 인간으로 사는 것조차도 남의 손을 빌려야만 합니다. 남의 힘을 빌려야만합니다. 저는 그런 의존성이 부끄럽기는커녕 천만다행이라고생각합니다.
타인은 아주 커다랗습니다. 더 컸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힘이 세다거나 우월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나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훨씬 더 의지가 강했으면 좋겠습니다.) 고독 속에서 아주 커다란 타인과 아주 커다란 대화를 나눕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대화를 나눌 것입니다.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결국은 나자신을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런데 놀랄 일은 또 있었습니다. 원자를 이루는 핵과 덮개의 시스템이란 게 전혀 안정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고전 물리학자들은 당황했습니다. 아니, 이 입자들은 전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하는 것 아니야? 그래서 심사숙고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원자는 더 이상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물질이 물질에서 나온 게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서 나왔단겁니까?
대답은 이렇습니다. ‘물질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는다!" 이것은 몹시 혼란스러운 생각이었습니다. 물질이 물질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란 말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현대 물리학자들은 물질과 형식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결속‘이란 말입니다.
현대 물리학자들은 우리의 혼돈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 언어에 그렇게 아주기초적인 결속성을 표현할 단어들이 많지 않습니다. 아마도사랑이나생명 정도겠지요. 과학자들은 결국 명사가 아니라동사만이 그런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살아간다. 사랑한다. 느낀다.‘ 결국 움직임, 행동이 중요하다는 말일까요?
과학자들은 현실은 물질적인 현실이 아니라고, 현실은 순수한 결속성이거나 잠재성, 오직 그럴 수 있음의 가능성,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물질과 에너지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할 수 있는 순간이있다면, 우리가 어떤 필연성을 우리 삶에 부여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우리가 어떤 행동인가를 할 때뿐일 겁니다. 우린 대체로 과거에 필연성을 부여합니다.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요. 그러나 일어난 과거의 일은 필연성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당시 우리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대체로 원인과 결과를 착각합니다. 내가 원래 그래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이렇게 행동을 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는데 행동 때문에 신념이 만들어진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만약 우리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참아내기만 한다면 우린 우리 삶의 진정한) 원인은 아닐 것"이라고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관하는 대신 어떤 행동을 할 때만은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그런 후에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갖는 감정이 아무리 복잡해도 진실에 가까울 겁니다. 우리는 그런 후에야 자기 자신에게갖는 슬픔과 기쁨을 정직하게 감당할 수 있고 타인과 세상을향해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행동을 하려•면 누구를 만나야 하지요. 누구를 만나서 말이라도 해봐야지요. 그래서 다시 한번 만남이 중요해집니다.

어느 날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는 김수환 교수가 저에게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주 아감벤이 말한 게니우스에 대해 알려줬습니다. ‘게니우스는 어떤 사람이 태어난 순간 그의 수호자가되는 신(수호천사)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아감벤의 말에 따르면 게니우스는 우리의 기원인데,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게니우스랑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즉 인간은 자아이자 자아가 아닌 것과 늘 함께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비인격적인 것이 게니우스이고 우리는 이 낯선 존재와 떨어지지 못하고 가장 은밀한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가끔 이 게니우스를 느낍니다. 바로 감동할 때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왜 감동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때 ‘게니우스를 불안이나 기쁨, 안심이나 동요로 경험합니다. 감동하는순간에 우리는 자신의 특성을 내려놓고, 상황과 처지도 내려놓고 감동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어린아이(순수함)야말로 끈질기게 우리를 타자에게 향하도록 만드는데, 우리 자신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는 바로 그런 감정을우리는 타자 속에서 찾는다. 마치 어떤 기적처럼 타자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 자신이 명확하게 비춰지고 해명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바로 이 부분에 거울이 나옵니다.
우리는 게니우스, 즉 ‘우리의 비밀스러운 환희와 자랑스럽고 고결한 고뇌‘를 타자 속에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 아래서라면 타인과의 관계는 우리에게 너무 중요해집니다. 타인의 얼굴에서 내가 보는 것이 나의 게니우스라니. 타인이 나의 거울이라니.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감응하는 타인의 맨얼굴은 너무도 중요해집니다.


우리는 나의 게니우스, 나의 수호천사를 타인의 얼굴에서보고 그것을 나의 거울로 삼을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의 의견을 따른다면 우릴 규정하는 것은 우리가 타인과 맺는 관계들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 머릿속에 한나 아렌트의어떤 말이 떠오릅니다.
최종적으로는 옳고 그름에 대한 우리의 결정들은 우리가함께 살기를 원하는 동반자들에 대한 우리의 선택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러한 동반자는 (...) 살아 있는 또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그리고 과거나 현재의 사건들 속에서 사유를 통해 선택되어진다. (...) 자신의 동반자를 선택하지 않으려 하거나 그렇게 할 수없는 무능력 때문에, 그리고 판단을 통해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하지 않거나 맺을 수 없는 무능력 때문에 진짜 스캔들과 진짜 장애물이 생겨나게 된다.
- 칸트 정치철학 강의』, 한나 아렌트•만남은 존재를 빚어내는 조각가입니다. 혼자일 때 우리는잘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뭘 잘 보지 못하게 됩니다. 헤르만헤세가 말한 흑마법입니다. 만남은 나를 빚고 세계를 빚습니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이 거울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서 우리는 최고의 나를 봅니다.

마이크로 하비타트, 이것을 원래의 의미대로 장소에 대한이야기로 한정한다면 우리도 각자 뭔가 떠올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굴드는 샌프란시스코에 여행을갔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엔 두 가지 명물이 있습니다. 하나는케이블카, 다른 하나는 18개의 팬케이크를 구워 내오는 시어스 식당. 스티븐 굴드는 시어스 식당에 갔습니다. 그러고는 카운터에 앉았습니다.
한 손님이 들어와 "안녕, 자기." 하고 종업원에게 인사합니다. 그럼 종업원은 "오늘은 꽤 일찍 나왔네."라고 대답합니다.
손님은 다시 "먹고살려니."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얼마 뒤여종업원은 팬케이크와 스크램블드에그가 담긴 접시를 가지고 옵니다. 그런데 손님에게 주기 전 달걀을 접시에서 털어 냅

킨에 얹고는 버터를 빨아냅니다. 스티븐 굴드에겐 "저분한테는 안 좋거든요."라고 눈을 찡긋하며 설명했겠죠. 스티븐 굴드는 이걸 보고 ‘사소하지만 영원한 의미를 지닌 방식으로 서로신경 써주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소하지만 영원한 의미를 지닌 방식으로 서로 신경 써주는 사람들‘이 이 도시의 서식지, 마이크로 하비타트입니다.

욕망은 (...) 내가 욕망하는 것이 내게로 다가오기를 원하게 된다. 이때 나는 중력의 한가운데에 서서 그 대상들이 내게로 빨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반대로 사랑에 있어 모든 것은 움직임 자체이다. 사랑을 하면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내게 오기를 기다리지않고 내가 그 대상에게 가서 그 안에 존재하려 한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타인을 향한 여정을 떠나야한다. 그 대상이 나를 중심으로 내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대상이 만든 궤도를 탄다.
ㅡ사랑에 관한 연구. 오르테가 이 가세트

모든 것이 전과는 달라 보이게 보는 것. 갑자기 모든 것이자리를 잡고 명백하게 드러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게 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세상이 되었는지를 보는 것. 이것이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먹었던 것, 산 물건들, 거쳐간 명소들을 끝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존재우리의 외모가 아니라를 보여주는 것을 잊었습니다. 멘토나상담가에게 말고는 우리의 고통을 기쁨을 슬픔을 보여주는것을 잊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를 보여줄 수 없다면 누가 우리를 볼 수있겠습니까?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고통이나 슬픔을 보는 것도 잊어갑니다. 차라리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냥 보는 게 아니라 믿는 대로 봅니다. 우리는 본다고 하지만 우리가 무엇인가를 보길 선택한 셈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난 무엇을 보았다‘고 하지만 보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우리의 믿음, 세계 속우리의 위치 자리에 따라서 봅니다.

엄기호는 인간은 존엄한 것이 아니라 존엄해지려고 하기 때문에 존엄하다고 말했습니다. 삶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의미로 가득 차있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의미를 찾으려 하는 한에서만 의미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하려고 발버둥 치는 한에서만그럴 것입니다. 우린 이 모든 것을 말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말이 중요해집니다. 이야기가 중요해집니다. 모든 이야기는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내가 계속 말하고 있는 이런 절망의 형태에는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이나 정치학 용어 중에서는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는어떤 특별한 성격이 있다. ‘사람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라는근본주의적 물음을 무력화시켜 버리는 어떤 동참의 방식이 바로그것이다. (...) 사람들은 여러 순간들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어떤 시간을 함께 나누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 시간이란 ‘되어 있음‘ 이전에 존재하는 ‘되어 감‘의 시간이다. 그런 ‘되어감‘의 시간은 우리로 하여금 패배를 모르는 절망에 거듭 맞서야만하는 위험을 무릅쓰게 한다.
ㅡ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존 버거

그는 몇 년 전에 파로호 근처에 사는 노인이 한 이 말이 얼마나 명언인지도 알게 되었어요.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얇아도 절대 깨지지 않는데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두꺼워도 금세깨진다." "여기서 얼음이란 말은 사랑으로도 바꿀 수 있고 신뢰로도 우정으로도 바꿀 수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어요.

이 우주엔 도저히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것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다 볼 수 없지만, 보려고 노력하고 애쓰며 사는 것 그 자체로 숭고한 것이다. 우리가 할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하는 것은 숭고한 것이다. 그럴 때 그에게별은 친구이자 교사, 고향이자 미래, 아니면 그 자신일 겁니다. 그 자신의 가슴속 말을 별이 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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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
정지돈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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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작가가 되는 데 가장 필요한 재능은 착각이다. 문장력이 좋거나 머리가 좋거나 인내심이 있거나 책을좋아하거나 기타 등등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수 있다. 라는 착각이다. 이건 굉장히 슬픈 지점이다. 만약 작가를 만드는 요인이 남다른 언어 감각 같은 실질적인 재능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착각과 자신감이라면, 많은 작가들이 왜 그렇게 덜되어먹은 건지 알 수 있기때문이다. 동시에, 뭔가를 해내는 인간들의 성취 중 많은경우가 단지 자기 확신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은 세상이왜 이렇게 엉망인지 알려주는 것 같다.

"내가 해(가)봐서 아는데~" 천만에!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엄밀하게 말하면 해본 만큼만 알고, 더 엄밀하게 말하면 해본(살아본) 만큼 안다고 믿는 것뿐이다. 다른 말로 이를 ‘꼰대‘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일까. 고르기아스의 전언처럼 (경험)해도 모르고, 안다 한들 전달하지 못하는 상태가 인간의 한계일까.
그렇지만 우리는 안다는 가정하에 대화를 나눈다. 그러지 않고야 소통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암묵적 약속이다. 아무것도 진정으로 알 수 없지만 대충은 안다고 (가정)하고 대략적인 합의에 이를 수 있다는 사회적 약속. 쉽게 말해 우리 삶의 근본 전제는 ‘대충‘이다. 이걸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파고들면 결과는 대부분 정신병동행이다. 운좋으면 대철학자나 예술가, 과학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운을 바라진 말자. 언제나 그렇듯 운은 우리편이 아니다.

공쿠르 형제의 일기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파리와 프랑스 예술에 대한 책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자료다. 그리고내가 좋아하는 문학 역시 이러한 종류의 것들이다.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없고 종합할 수 없이 들쑥날쑥하는 일련의 경험과 생각들이 오가는 것. 이론화하거나 미학적으로 다듬을 가치가 있는 아이디어의 배아가 보이지만 모든 것이 시간이나 생각의 흐름에 휩쓸려 지나가버리고 결국에는 감당할 수 없는 산더미 같은 짐, 일종의 텍스트 더미만 남는 것. 그러나 여기에 일관성이 아주 없진 않다. 전기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은 전기 작가들이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의미 부여할 수 있는 서사나 패턴을 찾아내서가 아니라, 그것을 묶을 수 있는 환경으로서 한 사람의 신체가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무위는 실현되어야 할 어떤 본질이 주어져 있지 않은 상태, 특정한 본성이나 소명이 부과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무능이나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일종의 잠재성으로 1)할 수 있는 가능성과 2)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 모두를포함하는 가능성이고 이는 아감벤의 정치철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삶-의- 형태 Form-of-Life와 연결된다. 쉽게 말해(쉽지 않을지도・・・・・・ 존재를 규정하지 않고 임의적으로열어두는 것이며 종교적이고 목적론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순전한 인간의 삶"이 시작될 수 있는 잠재성이다.

울프와 발저의 산책이 좋은 이유는 그들이 걷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않았고 우울해하지도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들의 산책은 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것이었지만 멜랑콜리해지거나 심각해지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걸을 때만진정으로 쾌활해진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산책과 글쓰기가 가진 유일한 공통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거나 결말을 맺어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상실한 어느 지점에서, 주제와 의도, 인과와 의무를 망각한 지점에서만 진정한 글쓰기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뒤라스와 에드가르 모랭은 공산주의를 선택했다. 미래와 양심은 스탈린주의에 있다고그들은 한때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곧 박살났고 파리의 공산주의 진영은 분열됐다. 많은 사람들이 소련을 비판하길 거부했다. 에드가르 모랭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에서두 번 저항하기란 어렵다." 한번 나치와 부르주아에 대항해싸운 사람들은 공산주의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았다. 그런데 자신을 받아준, 자신의 고향 같은 곳과 싸워야 하는것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시오니즘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외면했고 이 때문에 장주네는 사르트르를 포기했다. 저항은 특정한 대상이나 시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매 순간 우리의 본성에 저항해야 한다. 가장 가까운 대상이나 친구들에게 저항해야 할지도 모르고 믿어왔던 것에 저항해야 할지도 모른다. 차별과 혐오는 예외적인 행위가 아닌 일상적인 상태에 가깝다.
그러므로 저항 역시 그래야 한다. 저항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져야 할 상태다.

여기서 말하는 아우라는 정확히 뭘 뜻할까. 흔히 ‘후광‘
으로 번역되는 아우라는 작품이 가지고 있는 비견될 수 없는 가치, 완성도, 그로 인한 카리스마, 분위기 또는 가격(?)등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발터 벤야민은 아우라가 작품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아우라는 "공간과시간으로 짜인 특이한 직물로 작품 자체가 아닌 작품과 맞닥뜨리는 장소이며, 바로 ‘지금, 여기‘를 뜻한다. 과거 예술에서는 우리가 그곳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아우라가 발생했다면 현대 예술에서는 "사물을 자신에게 더 가까이 끌어오려고" 하기 때문에 아우라가 상실된다. 그러므로 아우라의 핵심은 ‘의식ritual‘과 ‘거리 distance‘다.

파울 첼란의 시 「하얗고 가벼운 것」의 일부다.
하얀 것,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
무게도 없는,
우리가 주고받는 것,
하얗고 가벼운 것.
그것을 떠다니게 하라.


1968년 2월 29일, 네 명의 학생 영화감독과 진행한 공개토론에서 장뤼크 고다르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삶에서 차이를 추구하려 하는 반면 사실 우리는 유사성을추구해야 한다." 2014년 6월 2일 온라인 라이브 방송에서로이 바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여러분은 모든 이가 자유로워지기를 원해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 모든 이가 공동현존하기 때문입니다."

크라카우어가 말한 대의 없는 사유/생활 방식은 내가 예전부터 생각해온 것이다. 소설을 쓰고 예술의 가능성을 고민할 때, 혁명과 혁명 이후의 세계를 탐색할 때 필연적으로발생하는 적대나 충돌, 실패나 백래시, 전 세대 혹은 현세대와의 갈등, 주의와 대의의 필요성과 한계에 대해 고민할수밖에 없었다. 소모적이고 반복적으로 보이는 과정을 극복하거나 다르게 사유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헤겔은 진정한 비극은 옳음과 그름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옳음과 옳음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둘 모두 옳다면 갈등은 왜 발생하는가. 이게 정말 필연적인 과정일까.
크라카우어처럼 내가 매력을 느끼는 것은 언제나 특정 대의가 아니라 대의에 공감할 때조차 대의들 사이의 틈새였다. 대의를 실천하면서도 대의로부터 (거의) 자유롭게생활하고 사유하기, 상충하는 대의를 함께 유지하기, 대의들 사이에 공유되는 공간에 머물기, 믿음 없이 살기, 하지만 어떠한 믿음 속에서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이러한

삶의 표본으로 에라스뮈스를 떠올린다. "시대의 논객들 틈에서 논객으로 살지 않은 인물로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대부분의 것을 대단히 놀라운 방식으로 보여주는" 사람으로서. 종교개혁 시기의 가톨릭 인문주의자였던 에라스뮈스

에라스뮈스는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종교인이었지만 애매모호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는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공격받았다. 보수적인 사람들이 봤을 땐 위험한 개혁가이자 비판자였고 진보적인 사람들이봤을 땐 혁명에 진지하지 않은 쾌락주의자였다. 타락한 구교를 혁신하고 제도를 바꾸기를 원했지만 자기 마음속의깊은 열망들이 제도화된다면 이 세상에 의해 타락하리라고 생각했으며 "참여하지 않으면 결국 패배하리라는 것을알면서도, 자신의 대의가 대의로 전락하는 것을 차단했고

"자기 생각들을 유동적인 상태를 유지하게 했다. 개혁자로서 초기에 동지였던 루터는 나중에는 에라스뮈스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음험한 사내"라고 비난했다. 그럴싸한 말은많이 하지만 도움되는 말은 하나도 안 하는 놈이라나, 실제로 에라스무스는 가톨릭을 격렬히 비판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슬쩍 발을 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분쟁이 일어난다면 나는 평화를 깨기보다는 진실의 일부를 포기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결국 에라스뮈스가 가장싫어하고 피하고 싶었던 것은 교조적인 태도, 엄숙주의, 억압적인 권위, 폭력이었지 특정 사상이나 종교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그가 원했던 것은 평화나 기쁨이었지 다른 사상이나 종교-이를테면 신교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어정쩡한 태도는 역사의 흐름에 밀려나기 마련이고 새로운 세력에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요한 하위징이는 에라스뮈스 평전에 "그가 중간노선을 취하는 바람에 많은 친구들과 마음에 맞는 영혼들이 그의 곁을 떠나갔다"라고 썼다.
사람들은 "에라스무스의 저 온유한 미소를 견디지 못했다.
(・・・・・・) 그가 주변 환경을 무시하고 자신의 길만 용감하게걸어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 것인가."
그럼 에라스무스와 같은 태도는 무의미한 걸까. "에라스뮈스의 사상은 지금까지 역사를 형성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유럽의 운명을 형성하는 데 뚜렷한 영향을 끼친 적도

없었다."20세기 들어 많은 이들이 에라스뮈스를 위대한 인문주의자로 다시 호명한다. 혼돈의 시기에 중도와 관용, 평화를 지킨 사람으로 말이다. 그러나 크라카우어의 관점은조금 다르다. 크라카우어는 에라스뮈스의 위치를 중도라고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타협자가 아니었다. 언제나약자의 편이었고 쉬지 않는 비판자였다. "그가 옹호하는 대의는 바로 역사적 대의들을 끝장내는 것이었다." 단지 그가원했던 대의가 극지를 표류하는 빙산처럼 고정될 수 없는일시적인 장소였을 뿐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에라스뮈스의 이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이상만이 영원한 회귀성을 갖는다."
더 중요한 건 에라스뮈스와 같은 이들이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믿음이다. 크라카우어는 이를 "에라스뮈스-분위기"라고 부른다. "그의 메시지가 낳은 것은운동이 아니라 분위기, 한밤중의 순간적 불빛같이 막연하고 요정의 약속같이 막연한 분위기였다." 에라스뮈스-분위기는 특정한 목적이나 주장, 대의에서 자유로워도 된다는 아이디어다. 어느 쪽 편을 들지 않아도 괜찮다는 태도이며 단지 지식의 즐거움과 삶의 기쁨에 헌신해도 된다는 해방감이다. 누군가는 이를 방관이나 비겁함이라고 말할지도모르겠다. 그렇게 해서는 세상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에라스뮈스는 부당한 권력 앞에

한 번도 방관자였던 적이 없으며 종교개혁의 큰 공헌자 중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가 믿었던 대의가 삶이었던 것뿐이다. "그는 할말을 다 했으면 무대를 떠나도 좋다고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무대보다 더 중요한 건 무대 아래의삶이다. 혁명보다 혁명 이후의 정치, 사건 이후 post-event의 생활이 그에겐 더 중요했다. 에라스뮈스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조건이 시원한 나무 그늘이 있는 집과 선량한 친구들과의 산책, 정원에서의 식사라고 생각했다. 물론 모순의왕답게 평생 생계를 걱정하며 일정한 주거지 없이 떠돌아다녔고 틈만 나면 친구들을 의심하고 싸웠지만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에라스뮈스 - 분위기에서 용기를 얻고 힘을냈다. 강요와 요구, 대의들 사이에 엿보이는 삶의 지대, 잠깐 존재했다 사라지는 유토피아, 참고로 『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는 에라스뮈스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토머스 모어는 에라스뮈스가 죽기 일 년 전 왕에 의해 참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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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장면
고수리 외 지음 / 유유히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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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동안 마중 나가는 다정이 자연스레 몸에 밴다면 좋겠다. 버스나 기차가 멀어질 때까지 손 흔들고 배웅하는 사람이 되는 것도 좋지만,
멀리서 누가 온다고 했을 때 먼저 나가 맞이하는 사람이고 싶다. 혼자에서 이르게 벗어날 수 있도록. 기대치 못한 곳에서 반가울 수 있도록. 같이 걸어 ‘집‘으로 돌아올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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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공들여 써 낸 문장 하나하나가 책 속으로 나를 흡입력있게 빨아들인다. 섬세하지만 함축적인 문장이 인상적인 책!
킨셀라 아주머니가 주인공의 실수에
˝매트리스가 낡아서 말이야. 이렇게 습기가 차니 뭐니. 항상 이런다니까. 널 여기다가 재우다니,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이었을까?˝ 라는 말을 건넸던 것처럼
아이의 실수에 사려깊은 태도를 가진 어른이 되고 싶다.

욕조 물이 차오르자 흰 욕실이 어딘가 변해서 눈앞을 가린다. 전부 다 보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계속 걸어가고, 양동이의 가장자리를 타넘는 바람이 가끔 속삭인다.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애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올린다.

아저씨는 자기가 한 말의 파도에 갇혀서 거기 그대로 서 있다.

마당을 비추는 커다란 달이 진입로를 지나 저 멀리 거리까지 우리가 갈 길을 분필처럼 표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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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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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한 번 실패했던 책. 문유석 작가의 책에서 추천한 책이라 다시 읽게된 책.
4월의 빗소리를 자세히 들어보아야지. 4월의 빗소리는 미, 칠월의 빗소리는 솔을 감각하는 감수성이라니..!

내가 쓰는 소설에 어떤 진실이있다면, 그건 그날 저녁, 여행에 지친 우리가 조금의 의심도 없이야즈드의 불빛이라 생각했던, 지평선을 가득 메운 그 반짝임 같은것이라고 믿었으니까. 중요한 건 우리가 함께 머나먼 지평선의 반짝임을 바라보며 천천히 나아가는 시간들이라고. 그게 야즈드의불빛이라서, 혹은 야즈드의 불빛이 아니라고 해도.
작가의 말 중에서

어쩌다 이런 구석까지 찾아왔대도 그게 둘이서 걸어온 길이라면 절대로 헛된 시간일 수 없는 것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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