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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 알타이 ㅣ 걸어본다 6
배수아 지음 / 난다 / 2015년 9월
평점 :
2007년 즈음 일이다. <오만과 편견>에 빠져살던 동생은 늘 책을 가지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려고 들어갔다가 그만 책을 두고 나와버렸고, 서둘러 찾으러 갔을 때는 이미 책이 사라져버린 후였다. 이후 동생은 책에 대한 추억들을 푸념처럼 늘어놓으며 시름시름 앓아갔다. 나는 동생의 그 지겨운 푸념들을 눈물 어린 표정으로 들어주곤 했는데 정말 황당한 일은 <오만과 편견>은 내 책이었다는 것이다.
물건을 잃어버린다는건 정말 슬픈 일이다. 단순히 잃어버린 물건에 대한 슬픔 보다도, 손으로 길들이며 함께 했던 시간들을 몽땅 잃어버린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상에서 책을 잃어버려도 슬프고 속상한데 만약 머나먼 나라에서 좋아했던 책을 잃어버린다면 얼마나 큰 충격과 혼란을 겪게 될까?
' 나는 한국에서 두 권의 책을 가지고 왔다. 한 권은 한국어 책인 토마스 베른 하르트의 <소멸>이고 다른 한 권은 독일어로 된 네이폴의 <마법의 씨앗>이다. 나는 두 권을 기분에 따라 병행하여 읽는 중이었는데, 특히 <마법의 씨앗>은 중반을 넘어서면서 매우 흥미진진하게 진행되었으며 한창 몰입하여 빠져 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검은 호수 아일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나는 내가 그 두 권의 책을 모두 욀기에서부터 타고 온 버스 선반 위에 두고 내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버스는 욀기에로 돌아간 다음이었다. 한창 재미있게 읽던 <마법의 씨앗>을 생각하면 너무 속이 상했다. 그 책은 한국에서는 사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몇 년 전 사서 당장 다 읽지는 않았지만 항상 가지고 다니며 시간이 날때마다 한두 페이지씩 넘기던 손때 묻는 책이라 더욱 가슴이 아팠다. 산지 얼마 안되어 프랑크푸르트 호텔에서 이미 한 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책이며, 그래서 그 책 속표지에 이름까지 써 놓은 것이다. 다시 같은 책을 독일에서 살 수 있다고 해도 회복될 것 같지 않은 아픔이었다'p91
우리나라 여성으로써는 처음으로 몽골이라는 나라에가서 좋아하는 책을 잃어버린 그녀의 사연을 읽자 이불동굴속에서 울상을 짓고 앉아있던 동생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마치 돈을 찾기위해 책을 헌납해버린 동생마냥 그녀가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이렇게 처음 만나본 배수아 저자는 참 털털함이 매력이며, 어떤 '운명적인 이끌림'을 믿는 강렬한 여인이기도 했다.
' 나는 2009년 7, 도저히 저항하지 못할 운명의 힘에 이끌려 몽골로 떠나 약 한 달간 서북부 국경지대인 알타이와 수도인 울란바토르에서 머물렀다.' - 작가의 말
도대체 '도저히 저항하지 못할 운명의 힘'이란 어떤 기분을 말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했는데, 하지 않으면 미칠것 같고 꼭 해야만 할것 같은, 머리속이 온통 그 생각들로 가득 차올라서 털어내지 않으면 살 수 없을것 같은 기분, 아니면 주위를 감싸고 있는 모든 환경이 마치 몽골로 안내하고 있는 것같은 기분을 말하는 것일까를 생각해보곤 했다. 어쩌면 나는 평생 느껴볼 수 없을것 같은, 그 '운명의 힘'에 이끌려 떠나게된 그녀의 이야기가 처음부터 좋았음을 고백한다. <귀향>이라는 책을 읽고 오직 '갈잔 치낙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몽골로 떠날 수 있던 그녀의 용기와 의지도 . 더욱이 흔히 접할 수 있는 여행기가 아니라서 좋았고 끝없이 펼쳐지는 스텝과 보기 힘든 식물들과 광활한 하늘과 대륙성 기후가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꼭지를 틀면 콸콸 쏟아져 나오는 수도꼭지와 언제든지 조리해 먹을 수 있는 부엌과 포근하고 따스한 잠자리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책장이 놓인 공간에서 물이 귀해 3주 동안 제대로 씻지 못한 환경과, 잘 마른 야크똥을 주워야만 화덕을 피울 수 있는 유르테와 보온, 보냉 시설이 없어 음식은 상하고 매일같이 딱딱한 빵과 양고기의 비릿한 냄새를 참아가며 지내야했던 그녀의 여행담은 내 일상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며 머릿속에 그려지곤 했다. 그러다 문득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환경은 '편리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편리함 속에서 길들여진 삶이라고.
' 문득 고개를 들어 유르테 밖을 내다보면, 내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런 태양 빛이 천지를 차갑게 달구고 있기 때문이다. 시냇물이 흘러가는 소리, 바람소리, 양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 마리의 야크가 유르테 앞을 지나간다'p92
' 알타이의 매혹적인 점은 거칠고 투박한, 때로는 위험한 자연이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지각이 토해놓은 그 상태 그대로의 암석들, 그것은 편리한 시설로 잘 단정한, 도로와 지프와 여행자 캠프가 눈에 띄는 유명 관광지와는 분명히 구별 되는 점이다. 나는 이렇게 크고 웅장하며 아름다운 호수가 그 어떠한 상업적 목적으로 활용되지 않은 채 이렇게 - 마치 우리의 세계와 평행하는 다른 행성에 있는 것 처럼 - 고독하게 놓여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으나 알타이를 더 많이 알게 되면서 그것을 더이상 이상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p99
그래서 생각해봤다. 내가 잃어버린 '불편함' 속에는 무엇이 있었는가를.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과 졸졸 흐르는 냇물과 바람결에 속삭이는 풀잎소리와 자장가처럼 들려오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동물들의 울음소리와 광활하게 펼쳐진 초원과 돌의 어머니와 쇠의 아버지 그리고 정령을 믿는 순수한 마음의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얻고 있는 '편림함' 속에는 수많은 '불편함'들이 소리없이 소멸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언젠가 읽었던 타샤튜더의 책에보면, 넓은 대지의 정원을 손수 가꾸며 옷을 직접 지어입고, 손주들을 위해 인형을 만들고, 염소를 키우며 젖을 짜 직접 치즈를 만들며 행복해하던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삶에서 편리함을 조금만 거둬내면, 손수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있음이 떠올랐다. 버스라는 편리함을 버리고 두발로 땅을 딛고 거닐면 색색으로 물든 단풍 나무와 길가에 피어난 이름 모를 꽃들을 감상할 수 있고, 꽃을 즐기기보다 씨앗을 사다가 화분에 심으며 식물이 자라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며 또 야채를 잘라 햇빛에 구득 구득 말려 겨우내 먹을 수 있는 반찬을 만들 수 있음을 생각했다. 비록 배수아 저자처럼 훌쩍 몽골로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없지만, 이 책을 통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삶 속에 있는 편리함을 조금만 거둬내보자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