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그르누이는 아무 냄새도 없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런 행운이 자신에게 닥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의혹으로 인해 그것을 깨닫는 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 P175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꼭 해야 할 일이 끝나면 그는 서둘러 자신의 동굴로 돌아가기 바빴다. 동굴안에 있을 때에만 정말로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낮에는 스무 시간 이상을 칠흑 같은 어둠과 완벽한침묵 속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돌로 된 바닥 위에 담요를깔고 벽에다 등을 기댄 채 어깨를 바위틈에 꼭 끼운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런 상태에 그는 만족하고 있었다. - P179


그는 단지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 은둔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더 이상 그 어느것에 의해서도 바뀔 수 없는 자기 자신만의 실존 세계에 빠져있었다. 바위틈에 누워 있는 그는 마치 시체가 되어 버린 듯 거의 숨도 쉬지 않았다. 심장도 거의 뛰지 않았다. 그러나 바람세상의 살아 있는 그 어떤 인간보다도 더 강력하고 기이한 채험을 한껏 누리고 있었다. - P180

그르누이의 마음속 우주에서는 사물은 없고 단지사물의 냄새만 존재했다(그렇기 때문에 이 우주를 적절하고그럴듯한 하나의 풍경으로 묘사하는 것은 공허한 말장난에불과하다. 우리의 언어는 냄새로 맡을 수 있는 세계를 묘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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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위대한 정신적 활동 뒤에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고 인간에게 행복뿐만 아니라 불행과 비참함도 함께 있듯이, 프란지파니의 그 위대한 발명도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 즉사람들이 꽃과 식물, 나무나 송진, 동물의 분비물 등의 냄새를•추출해 병에다 채우는 방법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향수를 만드는 일이 소수의 보편적이고 수공업적인 능력을 가진 자들의손에서 벗어나 스컹크 같은 펠리시에처럼 코가 예민한 엉터리사기꾼들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P84

인간의 불행은 자신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곳, 즉 자신의 영역에 더 이상 머무르지 않으려고 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파스칼이 그렇게 말했었지. 파스칼은 정신세계의 프란지파니라고할 수 있었다. 위대한 장인이었다. 오늘날은 더 이상 그런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P85

그랬기 때문에 그가 보게 된 것은 그에게는 진짜 기적에 다름 아니었다. 처음에는 조롱하듯이 멀찍이 거리를 두고 보던그는 점차 머리가 혼란스러워졌고, 결국에는 그것이 절망스러운 감탄으로 변했다. 그 광경은 그의 기억 속에 아주 깊이 각인되었기 때문에 그는 죽는 날까지 그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 P117

그르누이는 이 과정에 매혹되었다. 그가 인생에서 뭔가 감동이라는 것을 물론 그 감동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감추・맛본 적이 있다면 바로 불과 물어진 채 차갑게 타올랐다-과 수증기, 그리고 골똘히 고안해 낸 어떤 도구를 이용해 물질로부터 향기의 영혼을 빼앗는 이 과정에서였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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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떤 냄새를 다시 맡는 경우 전에 그 냄새를 맡았던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꾸로 어떤 냄새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정말로 그 냄새를 맡을 수가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심지어 그는 상상 속에서 냄새들을 서로 섞을수도 있었기 때문에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냄새들을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  - P43

 아마도 그의 재능은 청각을 통해 멜로디와 하모니, 그리고절대음을 알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완벽하게 새로운멜로디나 하모니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음악의 신동에 비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물론 냄새의 자모(母)는 음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고 다양할 뿐만 아니라, 그르누이라는 신동의 창조 활동은 오로지 그의 내면세계에서만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자신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다는 차이점은 있었다. - P43

그가 이긴 셈이었다. 그는 살아남았고, 더욱이 계속살아가는 데 충분할 정도의 자유까지 획득했기 때문이다. 겨우살이의 시간은 지나갔다. 진드기 그르누이는 다시 움직이기시작했다. 그는 아침 공기를 들이마셨다. 돌아다니고픈 충동이 그를 사로잡았다. 세상에서 가장 넓은 냄새의 영역이 그의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파리였다. - P52

 그는 그 모든 냄새를 먹어 치웠고 빨아들였다. 그러고는 끊임없이 상상 속에 마련된 냄새의 부엌에서 새로운 냄새를 혼합해 만들어 냈다. 물론 아직까지는 어떤 미학적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무 조각 쌓기 놀이를 하는 어린아이처럼 만들었다가는 금방 없애 버리는 그 냄새들은 아주 기한 것들로서,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 창조 원리는 없지만 아주독창적이면서도 파괴적이었다. - P58

그는 이렇게 멋진 일이 살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잊지는 않았지만 깊이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마레 거리의 그소녀의 모습, 그녀의 얼굴과 육체를 그는 더 이상 떠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가장 좋은 것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것은 바로 향기의 법칙이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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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열린책들 창립 30주년 기념 대표 작가 12인 세트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그것을 막을 수도, 그걸 피해 숨을 수도 없었다…………. 그 자신은아무 냄새도 없는 아이가 뻔뻔스럽게도 남의 냄새를 맡고 있다니! 냄새로 남의 존재를 알아차리다니! 테리에는 갑자기 자신의 몸에서 땀 냄새, 시큼한 체취, 절인 양배추 냄새, 그리고빨지 않은 옷 냄새 등의 악취가 퍼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자기 쪽에서는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는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추한 모습이 발가벗겨진 것이다. 이 아기는 자신의 피부 속까지 뚫고 들어와 뱃속 가장 깊은 곳의 냄새까지 맡고 있었다.  - P29

어린 그르누이에게 가이아르 부인의 집은 축복이라고 할 수있었다. 아마 다른 곳이었다면 그르누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 영혼이라곤 없는 여자의 집에서그는 잘 자라났다. 그는 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쓰레기더미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아이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는 며칠 동안 계속 물같이 희멀건 스프만 먹고도 견딜 수가 있었고, 멀건 젖을 먹고도 그럭저럭 버텨 냈으며,
썩어 문드러진 야채와 상한 고기도 먹을 수 있었다.  - P34

어머니를 단두대로 보내게 된, 자신의 존재를 알아 달라고 생선 좌판 밑에서 질러 댄 그 울음소리는 동정이나 사랑을 갈구하는 본능적 울부짖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충분한 생각과 심사숙고 끝에 나온 비명이었다. 그렇게 소리를 질러 댐으로써 그는 오히려 사랑을 거부하고> 생명을 <선택한> 셈이었다.  - P35

그르누이는 바로 그 진드기 같은 아이였다. 그는 자기 자신속에 틀어박힌 채 더 좋은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살았다. 그가세상에 내놓은 것이라고는 배설물밖에 없었다. 웃거나 비명을질러 대지도, 또 눈을 반짝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결코 자신의 냄새를 풍기지도 않았다. 다른 여자들 같았으면 누구라도 이 괴물 같은 아이를 내쫓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이아르부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 P36

등을 창고 벽에 기댄 채 장작더미 위에 다리를 쭉 뻗고 앉은그는 눈을 감은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는 보지도 듣지도만지지도 않았다. 단지 아래로부터 퍼져 올라오다가 뚜껑에덮인 것처럼 지붕 밑에 갇혀서 그를 감싸고 있는 나무 냄새를•들이마실 뿐이었다. 냄새를 들이마시고 그 냄새에 빠져 자신의가장 내밀한 땀구멍 깊숙한 곳까지 전부 나무 냄새로 가득 채 - P40

운 그는 그 스스로가 나무가 되어 버렸다. 그러고는 나무 인형,
즉 피노키오가 된 것처럼 그 장작더미 위에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한참 뒤, 거의 30분쯤 지나서야 비로소 <나무>라는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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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잇고 2024-04-22 2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책 읽고 싶은데 모나리자님께서 읽으셨네요!! 읽을만 한가요?? 모나리자님?

모나리자 2024-04-23 22:03   좋아요 1 | URL
네, 이 책을 몇 년이나 갖고 있다가 이제야 읽고 있네요. 밑줄긋기인데 이제 보니
리뷰로 등록되었군요.ㅎ 몰입도가 높은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렛잇고 님.^^
 
향수 열린책들 창립 30주년 기념 대표 작가 12인 세트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다른 기이한 천재들의 이름과는 달리 장바티스트그르누이라는 그의 이름은 오늘날 잊혀져 버렸다. 물론 그것은 오만, 인간에 대한 혐오, 비도덕성 등 한마디로 사악함의 정도에 있어 그르누이가 그 악명 높은 인물들에 뒤떨어지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그의 천재성과 명예욕이 발휘된 분야가 역사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냄새라는 덧없는 영역이었기때문이다. - P9


물론 악취가 가장 심한 곳은 파리였다. 프랑스에서 가장 큰도시였기 때문이다. 파리 안에서도 특히 악취가 지옥의 냄새처럼 배어 있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페르 거리와 페론리 거리사이에 위치한 이노상 묘지였다. 8백 년 동안 시립병원과 주변의 교구에서 죽은 시체들이 이곳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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