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오디세이 1 지혜가 드는 창 44
진중권 지음 / 새길아카데미 / 2001년 5월
평점 :
절판


예술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 생각하고 살았다. 특별히 뛰어난 재능이 있거나 여유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나처럼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람과는 상관없는 세계라 여겼다. 역사 공부할 때는 예술사 때문에 짜증났다. 그 부분이 외울 건 무척 많은데 알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심 가지 않고, 어렵고, 부담스러운. 잘 나고 돈 많은 사람들이나 거들먹거리며 아는 척하는. 내게 ‘예술에 대한 지식’은 그런 영역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많을까? 생각해보면 편식이 너무 심했던 것 같기도 하다.




“유명한 미술사가 곰브리치에 따르면, 사물을 지각할 때 우린 오로지 눈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개념적 사유를 하는 인간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지(知)의 도식’을 적용하게 된다. 말하지만, 시지각(視知覺) 자체가 벌써 개념적 사유라는 색안경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p26.



우리가 어떻게 보는가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같다.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어떻게 보는가가 정해진다. 보는 것은 곧 생각하는 것이다.


무엇이 아름다운지를 판단하는 일은 무엇이 가치 있는가를 판단하는 일과 같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아름답다 여기면 그것을 좋아하게 되고, 반대로 추하다 여기면 싫어하게 된다. 사실 대개 사람들은 옳고 그름보다는 좋고 싫음을 가지고 판단한다. 이렇게 보면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틀이 곧 세상이 어때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틀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수많은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산다. 하지만 어떤 것을 왜 아름답다 여기게 되는지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 내가 어떤 것을 왜 도덕적으로 옳고 그르다고 생각하는지는 진지하게 돌아보면서도, 내가 걸그룹의 늘씬한 몸과 예쁘장한 얼굴 앞에서 왜 침을 흘리고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 취향의 이유를 나도 모른다. 어쩌면 진짜 내 취향이 무엇인지마저 생각해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미학은 아름다움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이는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예술학’이라 부르기도 한다더라. 역사나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는 시대의 지배적 사고와 가치관에 갇히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예술을 나름대로 시각으로 바라보는 힘을 가진 사람은 자기 시대의 일반적 미적 취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자기를 객관화할 수 있는 만큼 남들이 말하는 대로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역사나 철학을 아는 것만큼 예술을 아는 것도 필요하다. 달리 생각해보니 예술을 ‘잘’ 보는 것이야 말로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예술 작품을 잘 알고, 예술가를 줄줄 꿰는 건 의미 없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어떻게 바라봤는가를 아는 것. 어느 시대에 어떤 의도로 예술품을 만들었는지를 아는 것. 시대마다 예술의 기준과 미의 기준이 달랐으며, 그 기준들이 그 시대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었는지를 아는 것. 이 시대는 어떤 기준으로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게 우리 사는 모습을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아는 것. 그래서 누구나 미학을 어느 정도 알아두는 게 참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학은 선뜻 다가가기 어렵다.


“미학 오디세이” 1권은 사람들이 예전부터 예술을 어떻게 생각했고, 아름다움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다룬다.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미학사를 알 수 있다. 한 시대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가 예술로 드러난다. 그렇다보니 주술 신앙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 근대 헤겔까지, 우리가 철학자라 생각한 사람들이 예술과 미학을 이야기하며 책에 나온다.


철학도 다루다보니 책 난이도가 만만치는 않다. 하지만 글쓴이, 진중권은 참 어려울 수도 있는 이야기를 쉽게 설명하려 애썼다. 읽어보면 알게 된다. 설명이 얼마나 친절하게 잘 되었는지를. 알레고리, 파토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아나그노리시스 … 뭐 이런 신기한 말들을 참 재미있고 쉽게 만날 수 있다. 2권은 조금 더 어렵다고 하는데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다. 아무튼 1권은 예술을 전혀 모르는 나도 천천히 따라갈 만했다. 어렵지 않게, 그렇지만 가볍지 않은 수준으로 미학을 맛보기에 이만한 책이 또 있을까?




“우리가 아는 한, 감상을 위한 예술의 전통은 겨우 몇 백 년 밖에 안 된다. 르네상스 때조차 예술은 뚜렷한 실용적 목적을 갖고 있었다.” p30.


“우린 예술을 정서나 감수성 따위와 관련짓지만, 그리스인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들에게 예술은 테크네, 곧 합리적 규칙에 따른 활동이었다. 따라서 당시엔 회화나 조각뿐만 아니라 합리적 제작 규칙을 가진 모든 활동, 즉 의자나 침대를 만드는 수공 활동과 학문까지도 예술(테크네)로 간주했다.” p90.


아무도 학교 미술 시간에 알려주지 않은 이야기. 사람들은 아주 오랫동안 감상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예술을 다뤘다. 그 목적은 바로, 예술로 ‘진리’에 다가서는 것이었다.


“예술과 진리를 연결하는 것 – 이게 바로 고대에서 현대까지 수많은 미학적 변주곡의 중심 테마다.” p52.


예술은 가상을 만든다. 가상으로 현실을 보여주고 때로는 현실 이상의 그 무언가를 보여주려 한다. 옛 사람들은 ‘그 무언가’가 ‘진리’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가상과 진리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대략 두 가지 노선이 있었다. 플라톤은 예술이 가상을 포기해야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가상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두 가지 상반되는 관점은 그 뒤에도 여러 가지로 변형되고 뒤섞이면서, 미학사 속에서 자꾸 되풀이된다.” p53.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 둘은 예술로 진리에 다가서는 방법에서 생각이 달랐다. 이후 많은 예술가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를 오갔다.



“사물이 아름다우려면 엄격한 비례 속에 약간의 빗나감을 표현하고 있어야 한다.” p69.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이다. 고대 그리스 조각은 완벽한 비례에 맞게 만들었다고 알았다. 그런데 그리스 조각의 ‘전형’이라는 작품들은 그런 게 아니었다. 처음에 완벽하게만 만드니까 뭔가 딱딱하고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고 하다. 그래서 아주 살짝 어긋나게, 완벽함에서 빗나가게 표현하자 더 아름다워졌다고 한다.


왠지 삶에 적용해도 될 것 같은 이야기다. 뭐든지 너무 완벽하면 안 된다. 살짝 빗나가는 정도가 괜찮다.



“먼저 불완전한 시각 조건에 따른 변화들은 빼야할 거다. 진정한 미는 감각에 좌우되는 게 아니니까. … 원근법을 무시해야 한다는 얘기다. 또 형태를 마음대로 변형해도 안 된다. … 정신은 빛이고, 물질은 덩어리이자 어둠이다. 따라서 물질은 넘어서 정신에 도달하려면, 깊이와 그림자를 피하고 사물의 빛나는 표면만을 묘사해야 한다.” p118-119.


중세 사람들은 예술로 천상의 진리를 나타내고 싶어 했다. 영원한 진리는 이 세계가 아니라 피안의 ‘이데아’에 있다고 믿은 플라톤의 생각과 같았던 셈이다. 그러려면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을 흉내 내기보다는 영원히 바뀌지 않는 모습으로 사물을 표현해야 했다. 원근도 없고 명암도 없어서 모든 게 허공에 붕 뜬 것처럼 보이는 어설픈 그림들. 그런데 그 그림들이 못났다고 생각하는 건 편견이었다.


“중세 예술은 예술사의 퇴보가 아니라 그 자체가 훌륭한 가치를 지닌 예술이다. 사실 묘사에서 물질세계를 희생했지만 인간의 영혼 깊숙이 파고드는 힘에선 중세 예술을 따라갈 수 있는 건 없다.” p129.


하지만 지금 세계를 보지 않고 죽음 너머 다른 세상만 바라보는 사고방식은 시대 자체를 무겁게 짓눌렀다. 눈앞의 세상은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생각. 지금 삶의 모든 것이 죽음 뒤의 무언가를 준비하기 위함이라는 생각. 죽어서 천국가기 위해서는 지금 오로지 신의 말씀만 따르며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 과연 이렇게 살면서 누가 마음껏 웃을 수 있었을까?


“중세는 웃음이 없는 시대였다. 물론 이 숨 막히는 시대에도 통풍구는 있었다. 그건 카니발이라는 축제인데, 여기서만큼은 음탕한 행위와 우스꽝스러운 언동이 허락되었다. 하지만 이 며칠을 제외하면 사회는 늘 엄숙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교회는 종말론을 유포하여, 사람들을 늘 종교적 흥분 상태 속에 붙잡아 놓으려 했다. 종말이 온다는데 웃을 기분이 나겠는가?” p174.



그 뒤로 시대가 바뀌면서 사람들은 진리가 천상이 아니라 땅에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저 멀리 천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진리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이었다. 그래서 예술도 변했다. 이제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을 긍정하고 똑바로 보기 시작한다. 진리는 바로 눈앞에 있다. 그래서 눈앞의 세계를 정확히 흉내 내는 데 몰두한다. 기하학을 응용한 원근법 같은 엄밀한 과학 법칙이 예술 영역에 들어왔다.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다 빈치에게 회화와 과학 사이엔 아무런 중요한 차이도 없었다. 그의 활동 자체가 그랬다. 그는 회화는 몇 점 남기지 않고 대신에 수많은 드로잉을 남겼는데, 어느 게 예술적 동기에서, 그리고 어느 게 과학적 동기에서 그린 건지 구분하기란 매우 힘들다. … 실제로 그는 모든 자연과학적 지식을 동원해 그림을 그렸다. 실제로 그의 그림 속엔 원근법은 물론이고 해부학, 생리학, 광학론, 색채론 등 온갖 자연과학이 다 들어있다.” p181.


예술가는 현실을 엄격한 법칙에 따라 묘사하면서 세계를 진실하게 드러낸다. 그렇게 진리에 가까이 간다. 예술은 르네상스 시대에 과학의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예술을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다 빈치는 예술의 목적을 외부 세계의 과학적 인식에 두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아름답다고 항상 좋은 것은 아니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에게서 예술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미의 창조’에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미와 예술을 밀접히 결합시켰다.” p188.


이어서 17세기가 되면,


“루벤스의 그림이 보여주듯이, 바로크 예술은 르네상스나 고전주의와 매우 다르다. 윤곽은 뚜렷하지 않고, 묘사는 격정적이며, 구도는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p204.


예술의 목적이 점점 ‘진리 추구’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옮겨가고 있었다. 세계를 정밀하게 모사하기보다 윤곽선을 흐릿하게 만들고, 멈춘 모양새를 정확히 그리기보다 격동적인 움직임을 거침없이 묘사한다. 사람들이 찾기 시작한 건 어쩌면 사람 자체가 아니었을까?



18세기에 계몽주의와 합리적 사고방식이 발달하면서 예술 인식도 드디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 잡는다. 이 때 미학이 탄생했다.


“이 시대 미학은 두 갈래로 나뉘어 발전한다. 하나는 대륙의 합리론적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의 경험론적 흐름이다. 어쨌든 18세기에도 고전주의적 관념이 여전히 우세했으나, 전 세기와는 달리 차차 예술은 ‘감성’의 문제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p214.


드디어 예술을 감성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 예술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듯이.


“바움가르텐은 감성을 인식으로 간주함으로써 감성을 복권시켰다. … 예술을 ‘진리’의 전달 매체로 보는 근대 ‘진리 미학’의 전통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어 헤겔에게서 완성된다. … 또 하나의 노선이 나온다. 이 노선은 영국의 취미론에서 시작되어 칸트에서 완성된다. 이들에 따르면, 미는 ‘인식’이 아니라 ‘쾌감’이며, 예술의 본질은 ‘진리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있다. 예술은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상상력의 유희’며, 예술가는 고정된 법칙에 따르지 않고 ‘영감’에 따라 자유로이 창작을 한다.” p225-226.


예술을 ‘진리’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보는 관점에 이어 예술을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으로 생각하는 관점이 나타났다. 헤겔과 칸트가 각각의 입장을 대표했다.



칸트는 예술을 다른 무언가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은 이처럼 미를 선(善)이나 진(眞)에, 예술을 도덕이나 종교 또는 철학에 종속시켰다. 하지만 우린 다르다. 우린 그저 즐거움 때문에 예술을 감상한다. …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순수 예술’, 즉 진리나 도덕적 교훈을 주지 않는 예술은 타락한 것으로 여겼다. 이런 이상한 생각에서 예술을 해방시킨 사람이 칸트다. 예술이 오늘날처럼 자기 고유의 ‘자율성’을 갖게 된 건 순전히 칸트 덕분인데, 우리가 예술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대부분 그에게서 물려받은 거다. 가령 예술이 ‘형식’이며 ‘상상력’의 소산이며 ‘천재’의 산물이며…….” p229.


“예술을 천재의 소산으로 봄으로써 그는 고전주의 미학과 대립되는 새로운 미학에 길을 열어준다. 바로 ‘낭만주의 미학’이다. 예술가는 더 이상 규칙을 습득하여 자연을 모방하는 ‘장인’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내는 ‘천재’다.” p238-239.


이렇게 예술을, 지금 우리가 흔히 보는 것처럼 다들 보기 시작했다. 데이트하러 미술관에 갔다가 뭔지 모를 그림을 보고 감동을 느끼고, 그림인지 뭔지를 그리며 즐거워하기도 하고.


진리를 찾는 치열한 싸움이었던 예술을 좀 더 소박한 모습으로 바꿔놓은 사람이 칸트였다. 경건함을 대신해 사람 감정이 들어찬다. 객관만 중요하게 생각하다가 이제는 주관 또한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세계 전체만 보던 눈을 돌려 개인도 바라보기 시작한다.


“테오도르 립스(1851-1914)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감정이입설’이라는 걸로 유명한데, 이는 현대의 주관주의적 미 이론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아름다움이란 ‘객관화한 자기 향수’다.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 감정을 자연 속에 집어넣은 게 바로 아름다움이라는 거다. 자연의 아름다운 사물은 실은 우리가 그 속에 집어넣은 우리 감정이다.” p280-281.



반대로 여전히 예술은 진리를 향한다고 변함없이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헤겔이었다. 칸트는 예술을 도구에서 해방시켰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계속 진리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헤겔은 자연 세계가 처음에 어떤 절대자의 정신(이념)이 밖으로 표출되어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거울을 보고 나를 발견하는 것처럼, 절대자의 이념은 자기를 찾으려 자연 세계에 스스로를 쏟아냈다. 자연 세계는 곧 절대자의 모습이다.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정신을 가진 존재는 인간이다. 인간은 절대자가 만들어놓은 자연 속에서 정신을 발전시켜가며 진리를 찾아간다. 세계를 만든 건 절대자이지만, 세계를 완성하는 건 인간의 정신이다. 인간이 진리를 찾으려 가장 먼저 사용하는 도구가 감각을 다루는 예술이다. 예술은 표상을 다루는 종교로, 다시 개념을 다루는 철학으로 역할을 넘긴다. 인간은 처음 감각 세계와 만나며 진리를 찾다가, 마지막에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절대자의 진리와 만나게 된다.


헤겔이 보기에 예술로 진리를 찾던 시대는 고대 그리스 때 정점을 찍고 저물었다. 인간 정신이 발달하여 감각을 직접 다루던 수준을 뛰어 넘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종교의 시대를 지나 철학의 시대가 다가왔으며, 세계가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보았다. 그럼 이제 예술은 진리를 찾는 도구에서 해방된 것일까?


“예술의 미래는 ‘종교’에 있다. … 이제 이념은 ‘감각’이 아니라 ‘표상’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 … 하지만 종교는 다시 철학이라는 개념적 사유에 자리를 내줘야 한다. 이때쯤 세계의 역사는 저녁 무렵으로 접어든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부엉이(철학)는 해질녘이 돼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고 한다. 부엉이가 날개를 펴고 힘차게 밤하늘을 날아오르면서, 세계의 역사는 완성에 도달한다.” p265-266.



예술은 처음에 주술이었다가, 천상의 영광과 진리를 드러내는 수단이었다가, 시간이 흐르며 인간이 사는 세상의 진리를 찾는 도구로 땅에 내려왔다. 이제는 진리를 찾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람에게 즐거움과 쾌감을 주는 중요한 무언가가 되었다. 이와 함께 세상의 주인도 바뀌었다. 처음에는 정체 모를 주술이었다가, 천상 세계에 사는 위대한 조물주였다가, 살아 숨 쉬고 희로애락을 느끼는 인간이 되었다.




이 책은 대학생 때 겉멋 들어 사놓았다가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책장으로 들어갔던 비운의 주인공이다. 그때는 이런 걸 알아서 무슨 소용이냐는 마음이 컸다. 지금 와서 다시 읽어보니 이런 건 꼭 알아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을 보고 느낀다는 건 세상을 보고 느낀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예술도 결국은 사람 사는 이야기였다.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이야기는 사람 사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진중권은 뛰어난 이야기꾼이다.


2권도 책장에 있다. 거기서는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잠깐 훑어보니 현대 미술과 함께 진리는 무엇이고, 주관과 객관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다루는 것 같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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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 (반양장) 데일 카네기 시리즈 (코너스톤) 1
데일 카네기 지음, 바른번역 옮김 / 코너스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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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생각해야할 문제가 있지 않다면, 우리는 시간의 95퍼센트 가량을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데 사용한다. 당장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다른 사람들의 장점에 대해 생각해보자.” p64.


“경청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중 하나다.” p125.


“누가 찾아오기로 한 전날 밤이면 루스벨트는 상대방이 특별히 관심 있어 할 거라고 생각되는 주제에 관해 밤새 책을 읽었다. 왜냐하면 모든 지도자들처럼 루스벨트 역시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p136.





‘자기계발서’ 읽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하러 일부러 빤한 이야기를 돈 주고 사서 보나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대부분 고만고만한 그런 책들. 알량한 책 한 권에 대단한 ‘인생비급’이라도 담은 것 마냥 팔아대기 바쁜.


하지만 나도 그런 책 종류를 찾기 시작했다. 빤하다 여겼던, 누구나 당연히 알 것이라 생각했던 내용을 나만 잘 지키지 못하고 지낸다는 위기감이 들어서였을까. 나이 들수록 내가 잘 살고 있나 스스로 묻게 된다. 내가 괜찮은 사람일거라는 확신이 사라져간다. 게다가 슬프게도 한 살 두 살 먹어갈수록 내 고집과 아집을 나무라거나 말려주는 이가 드물어진다. 어릴 때처럼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충고해주는 어른을 만나기 어렵다. 내가 그런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연애를 책으로 배울 수 없듯이 삶도 활자로 공부할 수는 없다. 그래도 세월을 헛먹은 것 같다는, 이대로는 곤란하다는 불안하고 황망한 기분을 달래줄 뭔가를 찾아 지갑을 연다. 아. 그래서 항상 서점 한 켠 베스트셀러 코너, 스테디셀러 코너에 여러 자기계발서가 한 자리 꿰차고 있는 게구나.


어차피 살 거라면 보편적으로 많이 읽는 책을 한 권만 사서 보자라고 생각했다.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 1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썼다는데 아직도 많이 팔린다는. 100년 동안 많이들 사서 봤으니 너무 낡았다. 이제는 책에 그리 새로울 내용이 하나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읽어보니 역시나 그랬다.


특별한 내용은 없다. 그냥, 지당한 말들.


남을 함부로 비난하지 마라. 관심 받으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라. 상대가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하라. 항상 진심으로 웃으며 사람을 만나라. 경청하라. 이름을 기억하라. 상대가 중요한 사람이라 느끼게 해주고 대우하라. 이기려들지 말고 겸손하게 굴어라. 내 이야기 떠들지 말고 많이 질문하고 상대가 이룬 것들을 집중해서 들어라. 잘못을 변명하지 말고 빨리 진심으로 인정하라. 사람들에게 공감하라. 칭찬하라.


싸우지 않고 사랑받으며 사는 여러 방법들.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던 이야기들. 하지만 가볍게 넘기며 지키지 않았던 것들.


글쓴이가 강조하는 것은 자잘한 기술이 아니라 ‘태도’다. 내가 아닌 타인을 만나는, 눈앞의 사람을 그저 대상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인격체로 겸허하게 대하는 자세. 인간 대 인간의 예의. 나는 이토록 지당한 이야기를 어쩌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듯하다. 불평하고, 비난하고, 타인에 무심하고, 내 위주로 생각하고, 칭찬에 인색하고. 그렇게 스스로를 가볍게 여겨질 만한 존재로 만들고 있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만한 책은 아니다. 학문적 깊이가 있지도 않다. 그러나 스스로 돌아보는 거울로 삼을 수는 있겠다. 무척 당연한 말만 적혀 있는데 그토록 당연한 것도 못 지키는 내 모습을 보고 놀라게 되는 것이다.


다만 철저히 자본가와 중산층 입장에서 쓴 책이라서 마음에 안 드는 구석도 있다. 갈등을 대충 봉합하는. 매사 불평불만하지 말고 뾰족하게 굴지 말라는.


불평할 건 불평하고, 온당치 않은 일이 있다면 벼락같이 들고 일어나 비난하고 공격해야 한다. 나는 그래서 이 책의 충고들을 지극히 좁은 차원에서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게만 둥글둥글한 동반자가 되는 걸로. 나쁜 놈들과 부당한 일에는 계속 뾰족한 마음을 갖는 걸로.


100년 전 일화들이 요즘 우리 사는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점에 또 놀란다. 그래서 마치 내 이야기처럼 잘 와 닿는다. 인간관계를 다루는 자기계발서 여러 권이 결국 이 책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시 놀란다. 이것저것 읽을 것 없이 이거 하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감탄하며 읽을 책은 아니다. 하지만 여러 번 읽어볼만하다.



재미있는 구절을 몇 개 적어본다.






독일 군대는 불만스런 일이 생기더라도 병사들이 곧바로 불평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우선 하룻밤 자면서 열을 식혀야 한다. 즉각적으로 불만을 제기하는 병사는 처벌 받는다. 군대가 아닌 일상에서도 비슷한 규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사건건 나무라는 부모, 끊임없이 불평하는 아내, 잔소리하는 고용주 등 남의 결점을 들춰내는 데 몰두하는 사람 모두에게 적용하면 좋을 것이다. p35.


젊은 시절 요령이 없었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훗날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배우고 사람들을 능숙히 다루게 되면서 … 그 성공의 비밀은 무엇일까? 프랭클린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누군가의 나쁜 점은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내가 아는 좋은 점은 전부 다 말합니다.”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너무도 갈망한 나머지 정신이상이 되는 사람이 있을 정도라면, 사람들을 솔직하게 칭찬하면 어떤 기적을 이룰 수 있을지 생각해보라. p55.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이다. 인간이 겪는 모든 실패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로부터 발생한다. p90.


문밖에 나설 때마다 턱을 당기고, 고개를 들고, 숨을 크게 들이마셔라. 햇살을 만끽하고, 미소로 친구들을 환대하고, 매번 진심을 담아 악수하라. 오해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적에 대해 생각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항상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생각하라. p109.


이름을 부름으로써 미묘하지만 매우 효과적으로 상대방을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p114.


사람들이 당신을 피하고 뒤에서 비웃고 심지어 경멸하게 만들고 싶다면, 여기 방법이 있다. 오랫동안 누구의 말도 듣지 마라. 쉼 없이 자기 얘기만 하라. 다른 사람이 얘기하는 동안 뭔가 떠오르면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중간에 끼어들어라. p134.


대화를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먼저 집중해 듣는 사람이 되어라. … 흥미로운 사람이 되려면 먼저 상대방에게 흥미를 보여라. 다른 사람이 대답하고 싶어할만한 질문을 하라. 그들이 자기 자신과 자신이 이룬 성취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격려하라. p135.


당신이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분명 어떤 점에서 자신이 당신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당신이 그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느끼게 하고, 또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p147.


논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이 세상에서 단 한가지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바로 논쟁을 피하는 것이다. p163.


체스터필드경은 아들에게 이렇게 훈계했다.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보다 현명한 사람이 되어라. 그러나 내가 더 현명하다고 말하지는 마라.” p171.


“내가 틀릴 수도 있다. 자주 틀린다. 사실을 살펴보자.” 이런 말에는 놀라운 마력이 있다. p172.


상대가 생각하거나, 말하고 싶거나, 말하려 하는 나의 비판할만한 사실을 모두 스스로 말해보자. 그것도 그 사람이 말할 기회가 되기 전에 말이다. p188.


상대방이 처음부터 ‘네. 맞아요.’라고 말하도록 유도하라. 가급적 상대방으로부터 ‘아니요’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게 하라. … 말을 잘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네’라는 대답을 여러 차례 얻어낸다. 그렇게 해서 듣는 사람의 심리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놓는다. p208-209.


프랑스의 철학자 라 로슈푸코도 이렇게 말했다. “적을 만들고 싶다면 당신의 친구를 능가하라. 하지만 친구를 얻으려면 친구가 당신을 능가하게 두어라.” p222.


사람은 본디 이상주의적인 경향이 있어서 좋게 포장된 동기로 둘러대고 싶어 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싶다면 보다 고상한 동기에 호소하면 된다. p250.


당신이 만나는 사람 가운데 네 명 중 세 명은 공감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공감해준다면 그들은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p241.


누구든 좋은 점을 먼저 칭찬받고 나면 불쾌한 말은 좀 더 쉽게 받아들인다. 이발사는 손님을 면도해주기 전에 비누 거품부터 칠한다. p269-270.


야단치는 사람이 자신도 전혀 완벽하지 않다며 겸손하게 먼저 인정하면, 실수를 지적받는 사람이 받아들이기 훨씬 수월해진다. p281.


상대에게 그가 갖고 싶을만한 괜찮은 평판을 주어라. 그러면 그는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노력하게 될 것이다.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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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리의 교사론 - 기꺼이 가르치려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파울로 프레이리 지음, 교육문화연구회 옮김 / 아침이슬 / 2000년 9월
평점 :
절판


“자신이 가르치기만 하는 전문가 교사-이런 교사는 사실 없습니다-일 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교사이기에 정치적인 투사들입니다. 우리의 일은 수학이나 지리, 구문, 역사를 가르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교과를 진지하고 유능하게 가르치는 일도, 사회의 불공평함에 뛰어들어서 헌신하는 일도 우리의 직무입니다.” p152-153.




파울로 프레이리는 교육학자, 교육사상가다. 인간해방을 위한 교육을 외치며 평생 열심히 싸운 사람. 박해, 투옥, 추방이 이어졌지만 굽히지 않고 우직하게 신념을 지켰다. 그에게 교육은 삶이자, 희망이자, 투쟁이었다. 실천이 곧 이론이었던 사람. 이론이 곧 실천이었던 사람. 뜨겁게 투쟁한 사람. 누구보다도 뜨겁게 사람을 사랑한 사람.


‘기꺼이 가르치려는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부제가 붙었다. 교사는 어때야 하는가. 교육자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그런 이야기가 한 장 한 장 묵직하게 담겼다.


프레이리가 말하는 좋은 선생은 그저 잘 가르치고 일 잘 하는 교사가 아니다. 함부로 가르치지 않는 사람. 학생 앞에 서서 지식을 전달하기보다 옆에 서서 함께 비판적으로 교실을 읽고, 세상을 읽고, 텍스트를 읽는 사람. 잘 가르치면서도 잘 싸우는 사람. 옳게 생각하면서 기꺼이 옳게 행동하는 사람. 민주적 사회를 위해 싸우며 민주적 학교와 교실을 쟁취하려 기꺼이 몸을 던지는 사람. 말과 실천이 따로 놀지 않는 사람. 무엇보다도, 학습자를, 그리고 가르치는 과정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


선생하기 참 만만치 않다. 나는 어떤 선생으로 살아왔나. 오래 전 선물 받은 이 책을 뒤늦게 펴들고 생각에 빠진다. 뭔가 중요한 걸 잊었던 건 아닐까? 잘 살고 있나? 잘 가르치고 있나? 원래 이렇게 하려던 게 맞나? 질문이 많아진다.




“교육자들은 아이들이 활동하는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꿈꾸는 세계에 대해, 그들 세계의 공격성으로부터 자신을 기술적으로 방어하는 아이들의 언어에 대해 알아야 하며, 학교에서 배우지는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p183.


나는 어디를 보고 있었나? 아이들 얼굴보다 모니터와 서류더미를 더 많이 쳐다보지는 않았던가? 당연한 이야기인데 당연하게 지키지는 못하고 있다. 무슨 생각으로 교무실에 앉아있었나 싶다. 분명히 내가 원해서 이러고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간절히 원했다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 책임이다.




“현명하고 유능한 교사라면 누구나 직시해야 하는 기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 교육자와 학습자의 관계야말로 교육자가 장단기적으로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라는 점입니다. 다른 점에서도 그렇지만 이 점에서, 우리 교육자들은 학습자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p151.


“학교에서 학습자들에게 그리고 학습자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학습자들의 나이에 관계없이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민주적 교사들은 학습자들이 교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도록 만듭니다. … 민주적 교사는 학습자들에게 귀 기울이고 그들과 더불어 이야기하는 것을 배움으로써 학습자들이 교사에게도 귀 기울이도록 가르칩니다.” p167.


역사 가르치며 목에 핏대 가득 세우고 민주주의를 말한다. 그런데 내 수업은? 매년 첫 수업시간에 분위기 잡는다면서 “너희가 나에게 예의를 지켜준다면 나도 예의를 지키겠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용서치 않을 거야”라며 엄포를 놓지 않았던가? 실제로 수업을 아예 거부하거나 겉도는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말과 행동을 보였던가? 좋게 타일러지지 않는 학생을 어떻게 다루었던가? 그들과 대화라는 걸 하긴 했던가?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하기 보다는 잘 다듬어진 기술적 방법으로 윽박질렀다가 풀어줬다가 하면서 행동을 내 뜻대로 조종하려고 하지는 않았나?


질문을 하다 보니 참 우습다.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하면서 얼마나 많은 권위주의를 스스로 허용했던가. 찝찝해하면서도 금방 흘려버린 것들이 무척 많았다.


교실에서 모든 것을 허락할 수는 없다. 자유와 무절제는 다르니까. 프레이리가 말하는 ‘자유와 규율 사이 긴장’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경력은 쌓였는데 이토록 중요한 질문에 아직 답을 명쾌하게 내놓지 못하겠다. 다만 아래 글귀를 마음에 새긴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내가 들어가는 교실을 조금씩이라도 바꿔보자고 마음 먹어본다.


“가르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교육 실천은 하나의 재앙입니다. 행정당국이 자신의 가르치는 자유를 제한하면 저항하면서, 스스로는 불명예스럽게도 배우는 사람의 자유를 제한한다면, 그 교사에게서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p145-146.


“우리가 민주주의를 헛된 꿈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우리는 발달 중인 아이들과 학생들의 상태 그대로를 존중해줘야 합니다.” p115.


“나는 교사들이 완벽한 성자가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장점도 있고 실수도 하는 인간이기에, 교사들은 절제를 위한 투쟁, 자유를 위한 투쟁, 공부하는데 꼭 필요한 규율을 세우기 위한 투쟁을 증언해야(스스로 증명해보여야) 합니다.” p155.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


“사랑이 없다면 교사들의 활동은 의미를 잃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학생들을 향한 것일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과정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p125.




이 책은 읽기 어렵다. 원래 어려운 책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런데 말투가 어색하거나 딱딱하다. 번역서의 한계다. 하지만 내용이 너무 좋다. 감수할만하다.


다만, 좀 더 친절하게 편집해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중요하지만 알기 어려운 주요 개념어를 각주나 미주로 자세히 해설할 수 있었을 텐데. 프레이리가 쓴 다른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전혀 뜻이 와 닿지 않는 단어들이 나오는데 그냥 ‘이러이러한 책을 참고할 것’이라고만 되어 있다. “코드화”, “탈코드화”는 무슨 말일까? “페다고지”를 다시 읽어보면 알 수 있을까?


“규율”이라는 개념도 여러 번 나오는데 해설하는 미주를 책 끄트머리에서야 찾아볼 수 있다. 물론 대충대충 이해하며 넘어갈 수 있는 단어이기는 하다. 하지만 미주를 읽어보니 프레이리는 그 단어를 일상적 의미와 다르게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읽을 만한 책이다. 교사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교사가 되고서 처음의 마음을 잃은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친구가 되어줄 책이다. 첫 페이지부터 잘 읽히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새 등에 땀이 흥건한 채 빠져들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자로서 우리는 정치가입니다. 우리는 교육할 때 정치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민주주의를 꿈꾼다면, 학습자에게 말을 걸 수 있고 그들과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우리에게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밤낮으로 싸웁시다.” p173.


한국 학교는 여전히 관료적이다. 교무실은 말할 것도 없고 교실은 더 하다. 이 피라미드 쌓기 게임은 언제쯤 끝날까. 지금도 어디선가 헛된 피라미드를 허물고 민주주의를 새로 쌓아올리기 위해 밤낮으로 싸우고 있을, 교실과 교무실을 바꿔가고 있을 선생님들을 존경한다. 때때로 교문 밖으로 나서서 거리를 밝히는 등불이 되어 행진하는 선생님들도 존경한다. 나도 그 옆에서 하염없이 걷고 싶다. 그런 교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아직 꿈은 끝나지 않았다.


책 한 줄 한 줄이 무척 좋아 정신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이 구절은 스스로 응원하기에 참 좋을 것 같다.


“우리는 일상에서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관료화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방법을 꼭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시도를 그만두는 것이 차라리 물질적으로 이득이 될지라도, 이 도전을 계속 해야만 합니다.”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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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김규항 지음 / 야간비행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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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쯤이었다. 본가에서 오래된 책 더미를 정리하다 반가운 책을 만났다. 2004년 생일날 대학 친구가 선물한 책이 나왔다. 안표지에는 손수 쓴 편지가 한 글자 한 글자 새겨져있다. 


“이 책은 ‘공부’하기 위한 책은 아니다만, 삶과 이념에 대해서는 고민하게 해줄 것 같다.”

“살고 있는지, 살아지고 있는지, 반성하자. 그리고 공부하자.”


왠지 그리운 기분이 들어 자취방으로 들고 왔다. 책을 펼쳐들고 한 장 한 장 넘긴다. 잔디밭에서 마시던 막걸리 냄새가 책장 사이에서 나는 것 같다. 학업 때문에 미국에 건너간 친구 얼굴이 떠오른다.



“사람은 누구나 좌파로 살거나 우파로 살 자유가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런 선택을 일생에 걸쳐 일상 속에서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한정하는 일인 것 같다. 좌파로 사는 일은 우파로 사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어려우며, 어느 시대나 좌파로 살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은 아주 적다.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3쪽)


대학생 때 좌파가 되고 싶었다. 나도 해방, 너도 해방, 우리 모두 해방. 무엇보다 자기 해방. 해방이라는 말이 그렇게 좋았다. 그리고 저 구절이 참 멋스러웠다. 하지만 저게 마냥 멋지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은 한참 뒤에야 알았다.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낸다고? 그저 내 양심 하나 건사하는 일도 쉽지 않은 게 어른의 삶이었다.


좌파를 선망했지만 책을 게을리 읽었던. 좌파를 닮기에는 품성이 덜 자랐던. 건전하기에는 자기 성찰이 부족했던. 친구가 선물해준 이 책도 그 때는 그냥 띄엄띄엄 읽었다. 그러다 졸업하고, 군대 가고, 취직하다보니 정신없이 뭔가에 휩쓸려왔다. 띄엄띄엄 살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진보적으로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었다.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반성이 없는, 공부가 없는. 이제와 다시 이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참 아깝다. 그 때 이 책을 공들여 읽었다면 조금은 다르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방향이라도 잘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B급 좌파”는 김규항이 98년부터 2001년 사이에 쓴 칼럼을 모은 책이다. 시대가 좀 지났지만 지금도 읽을 만한 책이다.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고, 글쓴이는 시대를 앞서 사회를 분석했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대학 울타리를 살짝만 벗어나도 “빨갱이”라는 말을 누구나 의심하지 않고 즐겨 썼다. 전체주의, 집단주의가 일상을 여전히 강력히 지배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은 여전히 힘이 있다.


“‘한국인들은 들쥐와 같다. 들쥐의 습성은 한 마리가 맨 앞에서 뛰면 덮어놓고 뒤따라가는 것이다.’ 위컴은 ‘망언’을 사과했지만 ‘들쥐들’은 18년 동안 덮어놓고 맨 앞에서 뛰는 놈만 따라다녀 왔다. 파시즘은 우리 안에 남아 있다.” (40쪽)


지금은 누구나 다 이렇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여전히 들쥐 같은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지금도 썰렁해진 광장에서 중국산 태극기를 흔들며 과거의 망령을 애처롭게 붙잡고 있다.



“어쭙잖은 말이지만 지식인이란 ‘내가 지향하는바’와 ‘실제의 나’ 사이에 숙명적인 거리를 갖고 사는 ‘삶의 코미디언’이다. 지식인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삶이란 그 숙명적인 거리를 어떻게든 줄이려 발악하는 것일 뿐.” (11쪽)


내가 지식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지식 다루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보니 어영부영 한심하게 보내는 삶을 경계하는 위기감은 항상 갖고 있다. 배움을 줄만한 사람이 아니면서 누군가를 가르칠 수는 없는 일이다.


잘 살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이렇게 작고, 좁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잔뜩 겁만 많아져서 일단 나부터 먼저 ‘채우기’ 바쁘다. 나 하나 건사하기에도 숨 가쁜 인간이 되었다. 글쓴이는 스스로 ‘B급 좌파’라고 부른다. 나는 좌파마저도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양심을 잘 건사하는 건전한 우파가 되는 데 성공한 것 같지도 않다. 그냥 어중간하게 둥둥 떠다닐 뿐.



“세상의 절반이나 되는 여성들이 단지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감수해야 하는 갖은 불공정함을 놓아둔 채 어떤 진보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성적 차별은 ‘사나이’로부터 나온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사내다운 사나이가 존재’하기 위해선 언제나 ‘여자다운 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나이’라는 말은 온갖 범죄, 온갖 악행, 온갖 불평등, 온갖 권위주의, 온갖 파시즘의 면죄부이기도 했다.” (83쪽)


대학생 때 자칭 ‘진보’라면서 우스꽝스러운 짓은 다 하고 다녔다. 사내다움을 내세우고, 사내다워지고 싶어 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듯 포장하려 했으나 실제로는 목소리만 크고 허세 가득했던.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다. 민망한 짓인 줄 알면서도 남자 아이들 가득한 교실을 휘어잡으려고 스스로 사내다운 교사로 포장한다.


성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은 갖고 있다. 하지만 아직 인식은 정밀하지 않다. 나는 여전히 “여성혐오”라는 단어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의 성차별 인식 시계는 아마도 10년 전 대학생 시절 그 언저리에 멈춰있는 것 같다. 제대로 찾아 공부한다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 그런데 무엇보다 실천이 안 된다. 스스로 좌파, 진보로 살아갈 자신을 잃어버린 결정적인 이유는 페미니즘을 보는 내 태도다.


학생 때 페미니즘을 접하긴 했지만 무척 불편해했다. 지금도 역시 불편하다. 아니, 차라리 겁내고 있다고 해야 정직할 것 같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페미니즘 글들을 보면 종종 지나치게 적대심을 강조하고 과격한 주장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곤 한다. ‘아니, 차라리 남자로 태어난 게 그냥 범죄라고 하지?’ 사실 이건 참 웃긴 태도다. 노동 문제, 현대사 문제로 토론할 때 ‘네 주장은 너무 과격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고 얼마나 답답해했던가!


페미니즘은 내게 숙제다. 여기서 그냥 뒤돌아선다면 나는 그냥저냥 반성 없이 살아가는 사람으로 남을 테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적어도 대충 살지는 않고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도 있겠지. 김규항 같은 이들은 이미 20년 전에 한국 평균 남성을 훌쩍 뛰어 넘어 시대를 앞서갔다. 좌파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싸움은 절대선인 사람들과 절대악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자기 성찰이 가능한 사람들과 자기 성찰이 부족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160쪽)


문제는 자기 성찰이다. 어떤 인연이 닿아 지금이라도 이 책을 다시 들여다봐서 참 다행이다. 지식을 주는 책은 아니지만 고민하게 한다. 콧잔등에 옛날 잔디 냄새가 잠시 스친다. 그 때의 나를 다시 불러낼 수 있을까?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바꾸고 싶다는 꿈을 꾸었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지금 와서 그런 거창한 꿈을 바로 가질 수는 없으니, 일단 나부터 좀 더 좋은 사람으로 바꾸는 일부터 시작하자. 이 책은 참 날카롭다. 20대의 나는 그 칼날에서 자유로웠다. 그러나 30대의 나는 이리저리 찔려서 많이 아프다. 날카로운 만큼 나와, 우리와, 이 사회를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요즘 쓴 글을 따로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이 시절 김규항은 글을 참 잘 썼다.


“사람들은 이제 오월 광주를 서서히 지워간다. 자상, 열상, 타박상, 골절, 총상, 그리고 자책감, 그리움 같은 광주의 ‘구체적 실감’이 사라진 사람들의 가슴 속엔 민주, 열사, 항쟁, 성지, 기념식 같은 ‘역사적 추상’만 남았다. … 이제 자상, 열상, 타박상, 골절, 총상, 그리고 자책감, 그리움 같은 오월의 ‘구체적 실감’은 휴일 오후의 종합병원 응급실에서나 어렴풋이 떠올려질 뿐이다. 이제 오월의 정신은 여전히 그 도살의 기억을 떨치지 못하는, 여전히 세상을 응급실로 파악하는 몇몇 어리석은 사람들의 썩어진 가슴 속에만 살아있다. 더러운 조선의 역사는 오늘도 장강처럼 흐르고, 사람들은 풍선 하나씩 손에 든 채 놀이동산과 패스트푸드점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아기자기한 목소리로 어린이날과 스승의 날을 읊조리며 그들의 오월을 사뿐히 통과한다.” (112쪽)


기억난다. 이 구절을 읽으며 눈시울이, 그리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마 그 다음 해였던가. 망월동 묘지 갔다가 왠지 너무 슬퍼져서 눈물 콧물 흩뿌리며 흐느꼈다. 기억 자체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나는 현대사 수업시간에 지금까지 5.18을 얼마나 ‘알량하게’ 다뤄왔던가. 80년 5월 광주는 눈물 없이, 심장을 짜내는 고통 없이 그냥 흘려 넘겨서는 안 된다. 내가 학생 때 이 구절을 보고 배운 것. 그것을 앞으로 나의 학생들에게 물려주고 싶다. 학생들을 망월동에 모두 데려갈 수는 없는 일이니, 어떻게 해야 그 날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줄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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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20 1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과 세상에 대한 공부를 안 하면 삼성동에 모여 죽치고 서있는 사람들처럼 됩니다.

돌아온탕아 2017-03-22 13:32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나이 먹는다고 공부를 멈추면 나이를 거꾸로 먹게되지요.
 
1만권 독서법 - 인생은 책을 얼마나 읽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인나미 아쓰시, 장은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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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독서가 참 힘들었다. ‘무겁게’ 읽는 습관이 들어서 그런가. 시간을 오래 들여 꼼꼼히 보고 노트에 요약하고.


예전에 책을 덮고 나서 남는 게 없었다. 그래서 뭐라도 남기려면 내용을 기억하려고 애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묵직하게 한 글자 한 글자 정독하고는 기억하기 위해 요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잃었다. 책읽기가 즐겁지 않다. 가벼운 책을 펴도 마음이 가볍지 않다. 언제부턴가 책을 집어 들기 전에 덜컥 부담부터 느낀다.


글쓴이는 책을 즐기듯, 가볍게 읽으라고 한다. 책 내용을 100% 기억하려 애쓰지 말고 가장 중요한 1%라도 남기는 독서를 하라고 한다. 책에 나오는 문자들을 소유하려는 집착을 버리고 음악을 듣듯 자연스럽게 즐기며 흘려보내라 한다. 책 한 권에서 많은 것을 얻으려 하지 않는 게 좋다. 그보다는 많은 책을 읽고 조금씩 얻은 바를 모아 큰 그림을 그리라 한다. 정독보다 다독이 좋다. 책 한 권을 너무 오래 붙잡고 공들여 읽어봤자 남는 게 없다. 그래서는 책의 전체상을 알 수 없다. 차라리 빠르게 한 권을 하루 만에 읽어내는 편이 낫다. 흘려버린 것들을 아쉬워말고 그럼에도 내게 남은 내용이 가장 소중한 요소임을 깨달으라고 한다.


책을 읽으며 인상 깊은 구절을 한두 줄씩 손으로 노트에 쓴다. 책 내용을 암기하려 하지 말고 그렇게 ‘인용’ 목록을 쌓아둔다. 목록 가운데 가장 핵심이라 생각하는, ‘최고의 문장’을 하나 골라 따로 다른 노트에 적는다. 그 밑에 30~40자 정도로 책 내용을 리뷰 한다. 이렇게 책 한 권을 압축한다. 책을 떠올릴 수 있는 열쇠가 된다.


빨리 읽을 수 있는 책과 그럴 필요 없는 책을 구분한다. 자기계발서나 경제경영서 같은 ‘설명글’은 빨리 넘기며 볼 수 있지만 스토리가 있는 소설은 그러기 어렵다. 빨리 읽을 수 있는 책은 일주일에 6권정도 끝내는 것을 목표로 속도감 있게 읽는다. 머리글과 차례를 정독해 책의 전체 구조를 먼저 파악하고서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소제목 중심으로 이리저리 넘겨보며 거시적 내용을 그려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한다. 핵심은 보통 맨 앞과 맨 뒤 5줄에 나온다. 그 부분만 자세히 읽고 나머지는 그냥 넘겨보는 것도 시간단축에 도움이 된다. 매번 단조로운 속도로 읽으면 갈수록 느리게 읽게 된다. 다양한 리듬감으로 즐기듯 읽는다.


나는 이런 쪽 책을 별로 안 좋아한다. 공부법, 독서법을 알려준다면서 자기 자랑만 가득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책은 처음에 서점에서 제목만 보고 피했다. 쓸모없는 속독법 책인 줄 알았다. 막상 읽어보니 참 솔깃하다. 방법론을 다루었다기보다 독서 ‘관점’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글쓴이의 관점에 100% 동의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합리적인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전공책이나 고전, 문학책에는 적용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하지만 자기계발서 같이 ‘가벼운’ 책을 읽을 때는 괜찮은 방법일 것이라 생각한다. 책을 사자마자 2시간 만에 다 읽었다. 글쓴이가 말한 대로 바로 서평을 써본다.


앞으로 다양한 책을 많이 접해보고 싶다. 그럴 때 부담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핵심을 흔적으로 남길 수 있는 독서를 하고 싶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이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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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20 15: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쓰는 것도 좋습니다. ^^

돌아온탕아 2017-03-22 13:3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너무 무겁게 접근하지 않으려고요^^ 책 읽기가 그나마 취미인데 그것마저 부담되면 안 될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