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사과
기무라 아키노리, 이시카와 다쿠지 지음, 이영미 옮김, NHK '프로페셔널-프로의 방식' / 김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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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적으로 농사를 짓지 않은 사람이라도 아는 사실이 있다. 바로 해충이 농작물을 해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농작물에 농약을 쓰는 것은 당연시 되어 왔다. 농약은 생산량과도 직결 되어 있다. 즉, 농약을 쓰지 않음으로써 농작물의 생산량이 줄어들면 직접 농사를 짓는 농부들의 생계가 곤란하게 됨은 물론 소비자들은 농작물의 공급부족으로 가격폭등을 걱정해야 한다. 하지만 요즈음 들어 농약에 대한 폐해가 점점 알려지면서 친환경, 유기농 농작물들이 각광 받고 있다. 가격은 보통 농작물의 몇 배가 되는 것도 있지만 친환경, 유기농 농작물 시장의 규모는 나날이 커지고 있다.

친환경, 유기농 농작물이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건 불과 몇 년 전이지만 여기, 농작물에 농약을 뿌리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던 30여 년 전부터 무농약을 고집해온 한 사람이 있다. <기적의 사과>의 기무라 아키노리는 모두가 미쳤다고 그를 손가락질 할 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실패의 좌절 속에서 
 

기무라가 처음부터 무농약을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대대로 내려온 농가의 차남이었다. 사과밭에서 나온 돈으로 생활의 곤란함도 없었다. 그리고 사과에 농약을 뿌리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라온 사람이었다. 그의 생각이 바뀌게 된 건 결혼을 하게 되면서 부터였다. 아내가 농약에 특히 약한 체질이라 농약을 뿌리면 다음 날 바로 앓아누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농약을 뿌리지 않아도 되는 옥수수로 생업을 바꿔봤지만 신통치 않았다. 그리고 휴식기간에 우연히 발견한 책 <자연농법>이라는 책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하지만 사과 무농약 재배는 쉽지 않은 길이었다. 농약을 안치고 비료를 안주니 사과나무는 점점 엉망이 되어 갔고 생활은 궁핍해져만 갔다. 온종일 해충을 잡고 사과나무에 매달려도 상황은 점점 나빠지기만 했다. 그의 부모님은 사돈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에 아들 기무라와 의절하고 그의 밭은 주위 농가들로 부터 고립되기도 하고 생업이 안 되니 기무라는 카바레에 나가 돈을 벌어야 했다. 그렇게 되면서 까지 그를 붙든 것은 무농약 사과를 재배하겠다는 그의 열정이었다. 오로지 그에겐 그 생각밖에는 없는 듯 했다.

자연 그대로의 생태계로 돌아가라.

끝없는 절망 속에서 기무라는 절대 포기 하지 않았다. 한 번의 큰 고비가 있었지만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사과나무에 꽃이 만발했다. 드디어 나무가 사과열매를 맺을 채비를 한 것이다. 정말 많은 시행착오 끝에 이뤄낸 성과였다. 그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정말 감동하면 말도 표정도 잃어버리는 모양이다. 두 사람은 말 한마디 못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었다. 봄이라 해도 이와키 산기슭에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 차가웠다. 그 찬바람 때문이었을까, 남편의 눈에도 아내의 눈에도 어렴풋이 눈물이 어려 있었다.              p.200 

그리고 그의 사과는 판매 개시 3분 만에 매진되는 사과, 그 사과로 만든 스프를 먹으려면 1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신화를 이룩했다. 그만큼 자연그대로의 그의 사과는 맛이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 맛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기무라는 그의 사과는 인간의 손이 아닌 자연이 키웠다고 말한다. 농약과 비료가 있기 전 상태의 흙과 미생물, 벌레나 새 등 생태계의 고리가 완전해 지면서 그것이 나무를 튼튼하게 하고 맛있는 사과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많은 생물들의 줄다리기가 더 많은 개체의 생물들을 만들어 내면서 밭의 생태계는 그의 땅을 더 탄력 있고 안정감 있게 만들었다.

물론, 이 책을 보고 무농약 재배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다. 넓지 않은 텃밭의 고추나 콩, 깨에도 벌레 때문에 약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진정한 유기농 재배라니 얼마나 귀 솔깃해지는 제안인가. 하지만 쉽지 않은 길이 될 것이다. 기무라는 무농약 재배를 위해 끊임없는 관찰과 연구, 실험을 거듭해 왔다. 사과재배에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정말 한 길만을 걸어온 사람인 것이다.

그의 길에 사과가 있었듯이 내 길 위에도 온 힘을 다해 매달릴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바보가 되면 좋아” 라는 기무라의 말은 어떤 길에도 통 할 수 있는 명언이다.  

다 읽고 나니 저절로 입에 침이 고인다. 농약이 묻었을 까봐 사과 껍질을 기피하고 깊게 깎아 버렸던 나지만 오늘 만은 껍질 채 달콤한 사과를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싶다. 내가 들고 있는 사과도 자연이 만들어낸 선물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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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2 - 이기원 장편소설
이기원 지음 / 삼성출판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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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얀거탑>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 그 드라마를 보지 못하였다. 시간이 없었던 건 아닌데 다음에, 다음에 하다가 결국 지금까지 이른 것이다. 이번에 <하얀거탑>의 대본작가가 제중원을 소재로 한 소설을 낸다는 소식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의학 드라마를 손대다 보니 그의 관심이 더 확장 되었구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곧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영된다니, 그의 책을 손에 들면서 <제중원>이 유명해지기 전에 원작을 먼저 본다는 괜한 자부심으로 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이 <하얀거탑>을 얘기할 때 합죽이가 되었던 날 회상하면서)

백정[白丁]이라는 신분은 조선시대 때 고기를 도살하거나 버드나무 가지로 바구니를 만드는 등 천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 하여 멸시받았다. 대표적인 인물로 임꺽정이 있는데 어렸을 때 본 드라마에서 임꺽정의 울분을 생각하니 아직도 가슴이 아파 온다. 조선시대 때 백정은 머리도 옷도 보통 사람처럼 입을 수 없었고 예절 풍습도 남달라 그 신분을 드러내게 했다고 하니 사람으로서 참 치욕적인 삶을 살았다고 하겠다. 
 

<제중원>의 주인공인 황정도 백정 출신이다. 황정의 모델은 실제인물인 박서양이라 하여 날 놀라게 했는데 엄격한 조선의 신분제도에서 어떻게 백정이 학교에 입학해 의사가 되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박서양이 태어난 시기는 조선말 격변기였다. 양학이 들어오고 서양문물이 밀어 닥치면서 굳건했던 조선의 관습들이 흔들리고 있던 시기였다. 신분보다 능력이 점점 중요시 되던 시기, 이론보다 실용을 우선하여 나아가던 때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대대로 백정일 을 해온 소근개(후에, 황정이 됨)가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의술에 관심을 갖고 죽음의 위기를 넘어 여러 가지 일들을 해결하면서 훌륭한 의사로 거듭난다는 것이 이야기의 큰 틀이다. 그 속엔 10여 년을 대립할 수밖에 없던 백도양과 황정이 흠모하는 유석란, 격동기의 조선의 정치상황까지 맞물리면서 독자들에게 많은 재미를 선사한다. 그리고 고종, 명성황후, 김옥균이나, 민영익, 선교사였던 알렌, 애비슨 등 우리나라 역사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인물들도 함께 만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제중원>은 국사를 좋아하는 내게 다시 한 번 조선말의 흐름과 역사상황에 대해 짚어주어 흥미롭게 읽기도 했다.   
 

하지만 빠른 전개와 영웅스토리의 이야기가 큰 재미없이 전개된다는 것에 조금 실망을 했는데 요즘 사극에서 영웅스토리가 너무 전형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뺐다는 것에 점수를 더 주지만 황정이 걸어온 길이나 위기상황들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을 주었다. 지금은 단면적으로 보아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인물들이 입체적이 되면 내 느낌이 달라질지도.

<허준>, <대장금>, <이제마>의 성공으로 사극에서도 의학이 많이 다뤄지고 있다. <제중원>도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전문적인 내용을 다룬 만큼 큰 성공을 이루리라 생각한다. 책을 다 덮은 지금 어서 빨리 드라마로 만들어진 <제중원>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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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1 - 이기원 장편소설
이기원 지음 / 삼성출판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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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거탑>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 그 드라마를 보지 못하였다. 시간이 없었던 건 아닌데 다음에, 다음에 하다가 결국 지금까지 이른 것이다. 이번에 <하얀거탑>의 대본작가가 제중원을 소재로 한 소설을 낸다는 소식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의학 드라마를 손대다 보니 그의 관심이 더 확장 되었구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곧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영된다니, 그의 책을 손에 들면서 <제중원>이 유명해지기 전에 원작을 먼저 본다는 괜한 자부심으로 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이 <하얀거탑>을 얘기할 때 합죽이가 되었던 날 회상하면서)

백정[白丁]이라는 신분은 조선시대 때 고기를 도살하거나 버드나무 가지로 바구니를 만드는 등 천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 하여 멸시받았다. 대표적인 인물로 임꺽정이 있는데 어렸을 때 본 드라마에서 임꺽정의 울분을 생각하니 아직도 가슴이 아파 온다. 조선시대 때 백정은 머리도 옷도 보통 사람처럼 입을 수 없었고 예절 풍습도 남달라 그 신분을 드러내게 했다고 하니 사람으로서 참 치욕적인 삶을 살았다고 하겠다.

<제중원>의 주인공인 황정도 백정 출신이다. 황정의 모델은 실제인물인 박서양이라 하여 날 놀라게 했는데 엄격한 조선의 신분제도에서 어떻게 백정이 학교에 입학해 의사가 되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박서양이 태어난 시기는 조선말 격변기였다. 양학이 들어오고 서양문물이 밀어 닥치면서 굳건했던 조선의 관습들이 흔들리고 있던 시기였다. 신분보다 능력이 점점 중요시 되던 시기, 이론보다 실용을 우선하여 나아가던 때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대대로 백정일 을 해온 소근개(후에, 황정이 됨)가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의술에 관심을 갖고 죽음의 위기를 넘어 여러 가지 일들을 해결하면서 훌륭한 의사로 거듭난다는 것이 이야기의 큰 틀이다. 그 속엔 10여 년을 대립할 수밖에 없던 백도양과 황정이 흠모하는 유석란, 격동기의 조선의 정치상황까지 맞물리면서 독자들에게 많은 재미를 선사한다. 그리고 고종, 명성황후, 김옥균이나, 민영익, 선교사였던 알렌, 애비슨 등 우리나라 역사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인물들도 함께 만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제중원>은 국사를 좋아하는 내게 다시 한 번 조선말의 흐름과 역사상황에 대해 짚어주어 흥미롭게 읽기도 했다.  

하지만 빠른 전개와 영웅스토리의 이야기가 큰 재미없이 전개된다는 것에 조금 실망을 했는데 요즘 사극에서 영웅스토리가 너무 전형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뺐다는 것에 점수를 더 주지만 황정이 걸어온 길이나 위기상황들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을 주었다. 지금은 단면적으로 보아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인물들이 입체적이 되면 내 느낌이 달라질지도.

<허준>, <대장금>, <이제마>의 성공으로 사극에서도 의학이 많이 다뤄지고 있다. <제중원>도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전문적인 내용을 다룬 만큼 큰 성공을 이루리라 생각한다. 책을 다 덮은 지금 어서 빨리 드라마로 만들어진 <제중원>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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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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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형제들로 인해 언제나 한 걸음 물러나야 했던 아이 오빠 공부시키고 나면 너도 꼭 고등학교 보내주마 하며 미안해하시던 어머니의 표정 지킬 수 없는 약속 줄줄이 태어나 입을 벌리던 동생들 어린 나이에 타지로 가 돈을 벌 수 밖에 없던 운명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다.

10분의 휴식시간에서만 쏘일 수 있던 한낮의 햇살 줄지어 공장으로 돌아가는 발걸음들 끊임없이 돌아가던 미싱 분주한 손길 앳된 얼굴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다.

손바닥만한 방에 끼어 자던 여섯 명의 사람들 더운 여름날엔 땀으로 목욕하고 추운 겨울날엔 연탄 값이 아까워 서로의 팔을 붙잡고 온기를 나눴던 그들 적은 월급에서 입을 것 먹을 것 아껴 시골집으로 보내던 돈 딸을 잘 부탁한다는 숙모의 편지 한 통 늘어나는 식구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난 그런 시절을 겪지 않고 살아왔다. 작가의 나이는 나보다 어머니와 가깝다. 그녀가 열여섯 서울 가는 기차에 올라 직업훈련원에 들어갔을 무렵 어머니는 이미 결혼을 해 언니를 낳았다. 내 주위에 그녀와 같은 연령으로 그녀와 비슷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자문해 본다. 너는 어떻게 할래? 서른일곱 개의 방 서른일곱 개의 인생들 꿈들 그 속에서 너는 어떻게 할래? 고된 일터 나사를 박느라 분주해진 손 적은 월급 피로에 찌든 얼굴들 그들을 사람이 아닌 기계 취급하는 회사의 높으신 분들 그 안에서 넌 어떻게 할래? 라고.

외딴방을 구입한 건 몇 해 전이지만 지금껏 펼쳐 보지 못한 이유는 사실 내가 그녀의 작품을 피했기 때문이다. 자전적 소설이라니 그건 마치 타인의 방에 허락 없이 들어가 예상치 못한 것을 보리라는 예감과도 같았다. 책상 한켠에 놓여 있던 외딴방은 고개를 돌릴 때마다 내 시선을 한동안 붙들어 놓았다. 이젠 읽을 때가 되었을까. 난 언니가 먼저 읽고 갖다 놓은 외딴방을 들고, 언니의 표정을 확인하고 나서야 책을 읽을 결심을 했다. 이번 책은 후유증이 심하지 않나보다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면서.

어서 이 무료한 고장을 떠나 도시의 큰 오빠에게 가는 상상을 하는 열여섯의 소녀. 아직은 어리고 부모님 품안에서, 그래도 굶지 않고 자라온 한 소녀가 있었다. 꿈에 그리던 상경을 했지만 조직의 생산부 라인에 들어가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적은 월급을 가지고 서른일곱개 중에 하나의 외딴방에서 큰오빠와 외사촌과 살림을 꾸려 나가게 된 소녀. 책은 열여섯에서 열아홉까지의 그녀의 성장과정과 어른이 된 현재 서른둘의 그녀 이야기가 함께 진행 된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전 세대 이야기라 하기엔 너무나 생생한 느낌. 크나큰 아픔. 아마도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이 세상이 그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또 누가 이 이야기들을 남의 이야기라고 외면할 수 있을까. 이것은 나의 어머니 이야기이며 나의 언니 이야기이며 나의 친구이야기이기도 하고 나의 이야기와도 같았다.

벗어나지 못한 아픔을 향해 빙빙 돌아가는 동안 깊은 물에 잠겨 있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책을 읽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런 기분을 느꼈는데 십육 년 동안 그 일들을 마음에만 담아 놓았던 작가는 어땠을까. 언제라도 툭 터질 듯, 어설프게 봉합해버린 그녀의 상처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 까지 참 긴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나이 열아홉에 멈춰버린 어린 그녀가 있었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그녀에게 어른이 되기를 요구했고 어른이 된 그녀는 외딴방의 4년이라는 시간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 계기는 희재 언니의 죽음. 그로 인한 관계 맺기의 두려움. 책임감. 죄책감들이 그녀 내부에서 회오리 졌지만 그 모든 감정을 묻어둔 채 잊으려고 노력한 채 그녀는 서른을 넘겨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말해버렸다. 그리고 글은 완성 됐다. 가슴 속에 살아온 희재 언니를 보내고 자신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때가 왔다고 말하고 있다. 
작가는 이제 알았을까? 그녀에게 글쓰기가 무엇인지를.

이제 내 가슴을 떠나 그녀가 어디로 가는 지.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소용돌이나 퇴적물이나 정적 속은 아닐 것이다. 내 가슴에 소망스런 다른 이야기들이 이렇게 솟아나고 있으니. (p.405)                                          

읊조리는 듯 때로는 절절하게 외치는 듯 흐르는 그녀의 랩소디를 들으며 나는 생각한다.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나서 며칠 잠을 설치던 날들 그런 날이 반복되는 건 아닌가 하고. 그리고 작가로서 신경숙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그 이유는 그녀의 소설을 읽고 이리도 자신의 아픔처럼 앓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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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증후군 - 상 증후군 시리즈 3
누쿠이 도쿠로 지음, 노재명 옮김 / 다산책방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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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TV뉴스나 인터넷 뉴스를 보다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살인. 살인. 살인이라는 글자들. 대중매체에 드러나지 않은 살인사건도 합친다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연쇄 살인이나 끔찍한 살인수법으로 일어난 살인사건들은 대대적으로 언론에 노출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만 짤막한 기사로 쓰인 살인사건은 클릭 한번으로 덤덤하게 넘길 때가 있어 나조차 흠칫 놀라곤 한다. 또 어느새 이런 살인사건에 익숙해져 버린 건 아닌지 두려운 마음도 든다. 

1997년에서 2007년까지의 우리나라 흉악 범죄 건수는 그 이전 10년에 비해 2배가량 늘었다고 한다. 검거율도 96%에서 90%까지 떨어졌다고 하는데 기소율은 더욱 떨어진 30%정도라고 한다. 범죄의 증가와 검거율의 하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90년대 까지 흉악범죄가 일어나면 거의 원한 관계였다는 게 기억난다. 물론 화성연쇄살인이나 해결되지 않은 다른 사건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은 사건들이 참 많다. 피해자와 일면 안식도 없고 이유도 없는 살인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유도 다양하다. 길을 가다 짜증나서, 돈을 뺏기 위해서, 아니면 그저 죽이고 싶어서.

길을 걷고 있었을 뿐인데, 그 일이 일상이었을 뿐인데 갑자기 살해당한 피해자는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피해자의 남은 가족들은 왜 가슴 찢기는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단 말인가. 남의 일이라고 치부할 수 없어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더 공감 할 수밖에 없다. 상상만 할뿐 이지만 그 고통도 만약 가해자가 경찰에 붙잡혀 죗값을 치른다면 조금은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해자가 전혀 죗값을 치르지 않는다면 어떨까?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심신상실 같은 이유로 감옥에 가지 않고 잠깐의 수용기간으로 세상에 풀려난다면. 또 그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손 쓸 수 없는 상황이라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상처는 어떻게 치유하고 그들의 울분은 무엇으로 풀어줄 수 있을까?

<살인증후군>은 이런 의문에서 시작한다. 책엔 다양한 살인이 등장하지만 내용은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살인엔 예고가 없다. 흉흉한 뉴스가 하루에도 몇 개씩 쏟아져 나오는 요즈음 우리는 살인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던 가지와라의 인생이 한 순간에 바뀌어 버린 이유는 아들의 죽음이었다. 정의로운 성격을 가지고 있던 아들은 불량동급생들에게 소위 찍혀 버렸고 집단구타를 당해 살해당한 것이다. 가해자들은 중학생이라 소년법에 의해 보호 받았다. 그들은 ‘보호’라는 명목아래 소년원에 1년 정도 있다가 퇴원했다. 그 동안 가지와라와 가해자 부모와의 힘겨운 소송이 있었다. 오랜 싸움에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그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왜 세상은 가해자를 보호하는가? 그리고 그들은 과연 죄를 뉘우치고 갱생했을까? 하는 의문들이다.
간호사인 가즈코가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는 아들 츠구하루를 위해서이다. 심장이 좋지 않은 츠구하루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아들을 살리려면 뇌사환자들의 건강한 심장이 필요하다. 아들을 위한 모정은 왜곡된다. 가즈코는 사람을 생명을 보호하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뇌사환자를 직접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시체기증을 약속한 건강한 남자를 살해한다. 교통사고를 위장해서.
참혹한 과거를 지니고 있는 교코는 ‘소년범죄를 생각하는 모임’에 자원봉사를 나가고 있다. 모임의 운영을 돕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피해자 가족들을 위한 ‘진정한 일’을 하고 있다. 아직 그 일은 들키지 않고 진행됐으며, 그것이 피해자 가족들의 마음 풀어줬으리라는 걸 교코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살인증후군>은 이렇듯 다양한 각도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사랑하는 가족이 살해당한 사람, 아들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어머니, 청부살인까지 책엔 온통 살인이야기이다. 자극적인 소재지만 피해자의 입장에 더 몰입하기 때문에 뼈가 아플 만큼 공감됐다. 또 사건에 경찰과 비밀리에 사건을 조사하는 집단이 교묘하게 얽혀 있어 긴장감으로 조마조마했다.

아직 <상>권만 읽어 결말은 모르는 상태다. 여기가지 읽고 느낀 점은 살인은 분명 용서 받지 못할 죄라는 것,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고 자신의 울분을 풀고 싶어 하는 피해자 가족들이 있다는 것, 끔찍한 상상이지만 나라도 그런 마음을 품을지 모른다는 생각들이다. 책엔 안타까운 사람들이 잔뜩 나온다. 그리고 가해자들은 용서받지 못할 악인으로 묘사된다. <하>권에서 이런 구도를 유지할 것인가? 그리고 작가는 이 이야기들을 어떻게 한 곳으로 몰아넣고 완성 지을지 궁금해진다. 역시 <하>권을 읽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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